제 531화
완전히 헛소리였다.
지금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상품은 입금과 출금이 자유로운 형태였다. 예전에 진행했던 투자 상품은 헤지펀드처럼 청산이 되기 전까지는 출금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덕분에 개인마다 수익률도 제각각인데, 시중에 도는 소문처럼 막 투자를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원금을 계속 유지 중인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수익률도 10배는 완전 허구였다. ID 인베스트먼트에서 찍은 최대 수익률은 634%였으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그 인물은 바로 유재원이다.
안드로이드 사를 상장하고 받은 지분 매각대금으로 트럼프 타워를 매입했고,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에 새로운 빌딩도 올렸다. ID 엔터테인먼트의 창업 자금으로도 쓰고 전 직원에게 보너스도 주었는데도 돈이 남았다.
이를 전부 ID 인베스트먼트에 넣었고,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있었다. 덕분에 유재원이 지금 당장 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금은 대략 330억 달러 정도가 됐다. 여기에 ID 그룹의 여러 계열사을 운영하면서 매년 배당을 받았던 금액이나 한국에서 일성그룹 지분을 매각하고 받은 돈은 또 따로 있었는데, 이를 다 합하면 400억 달러가 좀 넘었다.
대단한 액수다.
세계적으로도 유재원만큼 많은 현금을 가진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보도되면 세계는 충격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유재원은 포브스지가 매년 정리하는 세계 부자 순위에서 거의 말석에 위치해 있었던 탓이다.
포브스는 공식으로 드러난 재산만 평가하는데, 지금 ID 그룹에서 상장된 회사는 안드로이드 사 하나뿐이었다.
조만간 넥스트컴캐스트가 재상장되고 타임워너와의 합병이 끝나면 그 순위가 부쩍 오르긴 할 텐데, 지금은 그다지 변화는 없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젊은이 타이틀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현금만 4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면 단박에 전체 부자 순위에도 큰 변동이 올 것이다. 포브스에서도 유재원이 거느린 ID 그룹 계열사들이 모두 상장을 하면 큰 폭의 순위 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은 했는데, 현금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도 한국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건 어려웠다.
개인으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지만, 국가 단위로 올라가면 그다지 많은 돈도 아니었다.
“흐음, 환율 정책이 바뀔 기미는 없지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혹시나 환율 정책이 달라지면 모르겠지만, 한국이 지금처럼 실질적인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같이 쓰는 돈을 생각하면 400억 달러를 가지고도 반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환율 정책의 변화와 함께 한국 기업들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는 것밖에는 없다.
-그런데 참 우려스러운 건, 제가 아무리 말해도 쉽게 납득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특히 청와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최강욱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민정부라고 군부 출신 사람들은 이제 모두 물갈이 되었지만, 김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온 사람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군부 정권을 축출했다는 자신감에 빛나는 경제 성과를 이뤄냈다는 자부심까지 똘똘 뭉쳐 있었기에 이들의 어깨에 잔뜩 들어 들어간 힘은 빠질 줄을 몰랐다.
“이제 전명헌 할아버지도 청와대에 없어서 그 정도가 심할 테죠?”
결정적으로 청와대에서 전명헌이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유재원을 지켜주던 가장 강력한 방패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조만간 회장님께 청와대에서 직접 접촉해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최강욱의 커다란 우려였다.
우려는 우려로 끝나는 게 제일 좋았지만,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유재원의 휴대폰에 청와대로부터 직통 전화가 꽂힌 것이다.
“회장님, 청와대로부터 전화입니다.”
김대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재원이 한창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프로그래밍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김대석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감정도 가득했다. 웬만하면 유재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려 청와대에서 걸려온 직통 전화라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재원도 본인의 전화기를 맡기면서 청와대에서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고도 했다.
“청와대요?”
한창 프로그래밍에 집중 하던 유재원은 기지개를 켜며 김대석 앞으로 왔다. 며칠 전 최강욱으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청와대의 누구예요? 설마 대통령은 아닐 거고.”
김 대통령으로부터의 전화였다면 김대석이 이렇게 한가한 얼굴은 절대 아닐 것이기에 유재원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네, 청와대의 김인호 경제수석입니다.”
“김인호?”
유재원에겐 좀 낯설게 들리는 기억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오랜만에 기억의 궁전에서 김인호의 이름을 검색했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김대석에게 고개를 저었다.
“이분 전화는 제가 안 받아도 될 거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김대석은 유재원의 말에 순간 흠칫했다. 유재원이 오는 전화를 가려 받는 사람은 아니었던 탓이다. 아예 전화 자체를 받지 않겠다고 한 건 엄청나게 이례적인 경우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저장해놓겠습니다.”
김대석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목례를 하고는 유재원의 서재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유재원은 김인호 경제수석에 대한 기억의 궁전 자료를 다시 꺼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기사는 바로 경제 위기의 주범 3인방이라는 집중 분석 기사였다. 경제수석으로서 해야 할 본분은 대통령에게 나라의 경제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김인호라는 사람은 그 점에 대해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 바로 한국의 외환보유고 상황을 김 대통령에게 숨겼다. 본인도 몰랐다면 무능하다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김인호는 나라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위로는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 더더욱 문제가 된다. 의도를 가지고 대통령을 속인 것이니 말이다.
이번에 유재원에게 연락을 했던 건, 분명 한국 외환보유고가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달러를 구해볼 생각인 게 확실하다.
당연히 유재원은 들어줄 필요가 없는 요구였다.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달러 가치가 확 오를 게 뻔한 상황에서 몇 배의 손실을 감수하고 달러를 뭐 하러 한국에 팔아주겠는가. 더욱이 그렇게 해 줘봐야 김인호 본인이 치적으로 삼을 게 분명했다.
또한, 최근부터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니, 달러를 부어 봤자 단기적인 처방에 불과하고, 금세 달러화 부족에 시달릴 거라는 이야기다.
“재경원이나 총리, 김 대통령과 같이 정책결정 라인에서 직접 오는 전화가 아니면 나한테 알려주지 마세요.”
유재원은 추가로 김대석에게 ID톡을 보냈다.
정책을 결정하는 라인이 아니면 이 시점에서 통화를 해봐야 괜히 구설수에만 오르고 득 될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커트라인을 높게 잡아버렸다.
단호한 조치 이후부터 유재원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온건 대통령선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1월 초였다.
전날 미국의 경제전문 미디어인 블룸버그에서 한국의 외화잔고가 20억 달러 미만이라는 긴급 속보가 나왔던 때였다.
그 소식이 전 세계에 빠르게 전해졌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와대가 아무리 구중궁궐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김 대통령도 그 소식을 못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야 현실 파악을 한 김 대통령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러면 김 대통령 본인이 직접 유재원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거 아닐까 예상을 했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유 회장, 오랜만에 전화를 하는데, 민망한 부탁을 하게 되어 참 난처하게 됐습니다.
김 대통령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예전에 김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통화를 했던 유재원은 그 차이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한국의 실정을 파악하게 된 모양인지, 예전처럼 힘찬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지금 한국에 제일 모자라는 게 바로 달러돈이라오. 은행마다 아우성이오. 게다가 기업들이 달러 빚, 엔화 빚 무서운지도 모르고 외화 빚을 너무도 많이 지고 있소.
“100억 달러 정도 환전해드리면 될까요?”
-100억 달러!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100억 달러라는 소리에 티파니폰 너머로 들려오는 김 대통령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생생한 원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티파니폰2의 고음질 통화라 그런지 한층 격해지는 숨소리도 고스란히 들렸다. 하지만 유재원의 말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에요. 100억 달러로도 충분치 않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100억 달러를 보내드려도 3달을 못 버틸 거라는 이야기죠. 2년 전부터 발행했던 ID 인베스트먼트의 한국 보고서를 보시면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는데, 아직도 그 보고서를 직접 보시진 않으셨죠?”
냉정한 유재원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김 대통령에겐 유재원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송곳처럼 들렸다. 중간에 크음 하며 듣기 싫다는 신호를 꾸준히 주었을 정도다. 하지만 유재원의 거침없는 말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곧 시작될 IMF체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당했던가. 유재원은 그분들의 심경을 김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해준다는 마음가짐으로 직언을 그대로 쏟아냈다.
-이보시오, 유 회장! 지원해줄 마음이 없으면 없다고 말 하시오!
김 대통령도 참다못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찔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덩이가 붓다 못해 이미 승화된 유재원에겐 그다지 큰 압력도 아니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당선 직후, 취임식 직전인 정권인수위원회가 활동할 때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취임하고부터는 그 힘이 점점 줄어든다.
12월 18일 대선까지 이제 한 달 하고도 며칠 남았을 뿐인 지금은 그야말로 이빨도 없는 종이호랑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취임 초에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정부 각료들에게도 대통령의 말이 먹히지 않고, 각료들은 각자의 자리보전을 위해 사방팔방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IMF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서 각자 다른 의견을 제시하느라 중요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에요. 저는 대통령님이 두 가지 약속만 확실히 들어주신다면 바로 조치를 할 생각입니다.”
-두 가지 약속?
“하나는 환율변동 자율화이고, 다른 하나는 사면철회예요.”
지금 한국의 가장 급한 불은 억지로 잡아 놓고 있는 환율이었다.
자율변동제로 바꾸게 되면 원화 가치는 폭락할 것이 분명하다. 하루아침에 원화 환율이 3, 40%씩 변동이 일어나 생필품 물가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에너지부터 각종 원자재를 해외에서 수입해 한국서 가공한 다음 완제품을 파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무역 형태였는데, 원화 환율 폭등으로 수입 물가가 폭등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IMF체제에서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충격이 덜하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계 경제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이 혼란은 2, 3년 내에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 잠깐의 폭락이 무서워서 해야 할 일을 뒤로 계속 미루면, 감당해야 할 부작용의 크기는 훨씬 커진다.
두 번째 조건인 사면 철회라는 건, 바로 518반민족 행위와 천문학적인 비자금 조성으로 인해 교도소에 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안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