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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08화 (408/1,007)

제 530화

“이 전명헌보다 문민정부라는 아마추어들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도 모르면서 경제를 말하고, 심지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신념을 철썩 같이 믿으며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단상에 선 전명헌의 목소리는 말이 길어질수록 높아졌다. 목소리는 청년보다 힘이 넘쳤다. 아무도 모르게 불로초를 찾아서 먹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문민정부의 아마추어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쥬라기 공원이란 영화입니다. 영화 한 편이 자동차 100만 대를 수출한 것보다 낫다고 하며, 한국에선 이런 영화가 왜 나오지 않나 한탄하고 다녔지요? 이것이야말로 산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방증입니다.”

전명헌은 목이 타는 듯 단상 한쪽에 놓인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김 대통령의 영화 사랑(?)은 너무도 유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은 전 세계적인 히트를 쳤고, 한국에서도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는지 영화 한 편이 자동차 100만 대를 수출한 것보다 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동차 100만 대 수출이라는 건 당연히 전명헌의 미래 자동차를 겨냥한 소리였다.

그야말로 원가에 가까운 저가의 물량 공세로 이룩한 성과이긴 해도 미국에 진출한 지 수십 년만에 드디어 의미 있는 수출액이 나왔으니 말이다.

전명헌의 입장에선 대통령의 입에서 영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자동차 산업이란 무엇입니까? 현대 산업의 복합체가 바로 자동차 산업입니다. 유리부터 고무, 전기전자, 철강 등등. 여러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게 자동차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고용 효과도 가장 높고, 성장의 과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반면 영화 산업은 어떻습니까? 고용도 단기적이고 그 성과도 소수의 투자자에게 집중된다 이 말입니다.”

전명헌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92년에 대통령 선거를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다분했다면, 수년간의 정치 경험이 쌓이면서 그의 언어 능력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

“영화와 자동차 산업을 등치시키는 건 그야말로 산업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영화에 대한 발언 이후에 영화 산업에 대해 문민정부가 투자한 게 있습니까?

여전히 검열이 살아 있고, 수많은 제약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진정 영화 산업을 중히 생각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놔두진 않았을 겁니다!”

전명헌의 원고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당원 동지 여러분, 이런 아마추어적인 정부가 지금 국민들을 담보로 잡고 위험한 도박을 진행 중이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국민 소득 1만 달러! 선진국 진입이라는 허울뿐인 타이틀을 위해 매일 같이 천문학적인 외환보유고를 낭비하며 환율 시장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난리가 나고 있는 마당입니다. 내일 또 무슨 기업에 쓰러질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적 하나로 그렇게 매일같이 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미친 짓을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태국의 일이 더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비수와 같은 발언이 쏟아졌다. 완전히 칼을 갈고 이 자리에 섰다는 걸 체육관에 모인 통일국민당 사람들이나, 카메라를 통해 이 장면을 간접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당원 동지 여러분! 경제는 전문가가 맡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전명헌이 그 적임자입니다.

저를 다시 한 번 통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주십시오! 이번엔 기필코 승리하겠습니다! 이겨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경제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를 누군가 독점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전명헌의 연설이 끝나자 체육관에 모인 통일국민당 당원들의 함성이 뜨겁게 차올랐다.

그 모습에 전명헌은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기 힘들었다.

조금 전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던 원고는 당연히 유재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어쩜 그리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담았는지 모르겠다. 아마추어적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김 대통령과 문민정부를 정리해버린 것도 완전 전명헌 스타일이었다. 아무리 전명헌에 배타적인 언론들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마력의 단어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발표가 끝난 원고를 정리하는 전명헌의 손길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후.

재계 순위 8위였던 기아자동차그룹의 부도 유예 협약이 체결되었다. 사실상 부도나 마찬가지였다.

10대 재벌도 결코 이 위기에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청와대에서는 긴급 확대 경제 장관 회의가 열렸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실시된 차기 대통령 여론 조사에서 전명헌은 단독으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을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을이라고 하면 풍요로운 계절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동아시아의 나라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풍요로움 대신 스산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기아자동차그룹 이후로도 쌍방울이니 태일정밀이니 하는 기업들이 연달아 부도가 났고, 그 여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던 탓이다.

태국에서 발생된 외환위기는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게 두루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위기도 위기인데, 이를 한층 가증시키는 헤지펀드들이 날뛰면서 그 여파는 더더욱 확대되었다.

유재원은 샌프란시스코에 있으면서 그런 상황을 면밀하게 모니터링 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본인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양상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열심히 체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재원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유재원의 핵심 역량인 프로그래밍과 ID 그룹의 경영이었다.

티파니 폰2의 차기 모델부터,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드는 일, 심지어 엔젤 투자까지 유재원이 살피는 일은 그 종류가 상당했다.

그나마 능력 좋은 임직원들이 유재원이 해야 할 일을 나눠서 해주고 있었기에, 하루 8시간 근무, 8시간의 개인 시간, 8시간의 잠이라는 황금 밸런스를 지킬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된 개인 시간으로 유재원이 요즘 열심히 하는 건 티파니 일가와의 교류였다.

물론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건 티파니였지만,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외할아버지 프레더릭 테일러 2세와도 만남이 잦아졌다.

어색함이라는 게 자주, 많이 만날수록 사라지는 법 아니겠는가.

더욱이 100% 사적인 마음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은 세계정세와 경제 상황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재원 본인의 비전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번 주말에도 티파니의 아버지이자 미래의 장인어른인 스티븐과의 낚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장인어른은 샌님처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여가를 잘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

전기 자전거를 누구보다 먼저 샀을 때부터 알아 봐야 했었는데, 그 폭도 매우 넓었다. 격한 라이딩부터 골프나 낚시도 동호인 수준은 넘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여유로운 주말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이번 주에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회장님, 기업들의 압박이 상당합니다.

지금 유재원이 받고 있는 보고는 최강욱 부회장의 한국 현황이었다.

“예상했던 그대로네요.”

무슨 말인고 하니, 외화 조달에 점점 어려움을 느낀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ID 그룹에 달러 좀 팔아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기업들이 상당한 숫자라는 보고였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ID 그룹은 은행이 아니다. 사기업이고 주 업종은 IT였다. ID 인베스트먼트라는 금융 부분이 있긴 한데, 여기도 대출이 주 업무가 아니라, 고객들의 돈을 맡아서 투자를 해 돈을 불려주는 게 주 업무였다.

그렇지만 ID 그룹은 한국의 기업 중에 가장 많은 외화를 가지고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사만 한국에 있었지, 주요 영업은 미국과 유럽에서 하고 있으니 기준 화폐 자체가 달러였다.

더욱이 ID 그룹의 성장률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단 한 번도 적자가 난 적이 없었고, PC 운영체제와 오피스 프로그램에서 독점의 지위를 획득하고 나서는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했다.

다른 기업인들이 보기엔 그 어려운 달러를 모으는 것이, ID 그룹에게는 완전히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독점적 지위를 통해서 완제품 PC에는 무조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탑재되었고, 컴퓨터로 사무를 보는 모든 기업들은 ID 오피스를 써야 했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이제 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선진국 시장에서 PC의 보급은 이제 거의 마무리 되었기에, PC 출하량도 점점 줄어들었다. 현재 출하 중인 펜티엄 3나 애슬론1G와 같은 최신형 CPU의 성능이 누구에게나 부족하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예전처럼 대대적인 업그레이드 열풍은 없을 것이다.

이게 단순히 예측만이 아니라는 건 메모리칩의 가격 하락과 출하량 감소가 증명했다. 생산량이 곧 매출액이었던 이전과 달리 대량의 메모리칩 주문도 많이 줄었고, 메모리칩의 가격도 하락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그 하락 속도도 제법 빨라서 일성전자가 매우 당황해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심지어 유재원으로부터 조금은 일찍 언질을 받았던 미래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타격은 일성그룹 쪽이 훨씬 컸다.

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는 일성그룹에서 달러를 벌어들였던 주요 캐시카우였다. 그런데 벌어들이는 금액이 크게 줄면서 그룹 운영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의 달러화 돈줄이 막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세계 시장에 데뷔한 중국의 부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많은 수출 기업들은 가성비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노동력을 자랑하는 중국산 제품들이 세계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자 자연스럽게 한국산 제품이 맥을 못 췄다.

그렇다고 고급화를 하기엔 일본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현상을 가지고 중국에 치이고, 일본에 눌린다고 해서 샌드위치 신세라고 많이들 말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점이 외환위기와 많이 겹치는 터라 그 타격이 몇 배로 심해졌던 것이다.

그나마 ID 그룹은 한국에서 달러의 수급이 자유로운 유일한 회사였다.

특히 ID 인베스트먼트가 미국 IT섹터에 투자해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미국 IT 붐과 맞물려서 해가 갈수록 투자 수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항간에는 ID 인베스트먼트의 IT섹터 투자 상품에 초기에 돈을 넣어 놓았으면 10배 이상의 수익을 보고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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