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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07화 (407/1,007)

제 529화

당연히 유재원도 태국 바트화 폭락 시나리오에 맞춰서 미리 발을 들어 놓았다.

상황이 어떤 쪽으로 흐를지 뻔히 아는데 가만히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한국의 외환위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헤지펀드가 하는 것처럼 투기적으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진 않았다.

본인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거대한 변수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태는 본인이 아는 것보다 다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예정보다 일찍 터질 수 있으니 일부만 사용했다.

띵!

빈센트 그린힐과의 통화가 끝나는 때에 맞춰 ID톡이 울렸다.

-유 회장님, 태국 소식 들었습니까?

조지 소로스의 메시지였다.

-이제부터 시작이군요. 이 사태의 종점이 어디에서 끝이 날지 궁금해지는군요.

이어진 쪽지에 유재원은 쓴 웃음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태국 바트화 폭락을 유도한 양반들이 조지 소로스를 중심으로 한 헤지펀드였는데, 정작 장본인은 마치 제3의 인물처럼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게요. 이제 시작이죠. 건투를 빕니다.”

덕분에 유재원은 건조하게 답했다.

외환위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에도 같이 배팅해준다면 고마운 마음이 좀 들겠지만, 전처럼 한국이 끝이라면 결국 경쟁을 해야 하는 사이로 끝나는 것 아니겠는가.

조지 소로스와의 ID톡도 마친 유재원은 바로 본래의 업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뭔가 좀 빠진 듯한 느낌이었던 탓이다.

“근데 한국은 뭐지?”

조지 소로스도 바로 연락이 올 정도였는데, 한국에선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물론 유재원이 말하는 것은 한국의 지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최강욱 부회장이 이끄는 ID 그룹의 한국 지사들은 이미 태국 위기에 대한 대비는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전명헌 할아버지부터 이용권 TG 그룹 회장, 심지어 박상권 부산그룹 회장님 같은 유재원과 긴밀한 사이의 지인들로부터는 별 연락이 없었다.

“잘 시간인가? 그것도 아닌데?”

시계도 안 보고 몰입해서 시간 감각이 둔해진 유재원은 완전히 어둠에 잠긴 창밖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유재원이 지금 취침에 들 시간이었고, 동아시아는 한창 해가 떠 있을 시간이었다.

“그만큼 태국 바트화 폭락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사실 막상 겪을 땐 몰랐고, 시간이 지난 후에 뒤를 돌아보고서야 감을 잡는 사건이 있다. 태국 바트화 폭락도 그와 같았다.

태국의 일이라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실상은 이게 바로 한국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유재원은 좀 더 기다려보다가 연락이 없으면 그냥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마음도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일에 복귀하는 것도 무리고, 그냥 한숨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 다행히 생각보다 연락이 좀 왔었네.”

자고 일어나 보니 휴대폰이나 ID톡, 이메일로 제법 많은 연락이 와 있었다. ID톡이나 이메일 같은 경우에는 회사에서 태국 바트화 폭락에 대해 보고하고, 분석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면 티파니 폰으로 온 연락은 개인적인 연락이었다.

일단 욕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린 후, 간편식으로 아침을 먹으며 유재원은 부재 중 연락으로 쌓인 목록을 살펴보았다.

어제는 약간 우려를 했는데, 다행히 유재원의 지인들은 태국 바트화 폭락에 대해 무감각하진 않았던 것이다.

유재원은 한국 현지 시간을 고려해서 전화를 걸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제일 먼저 리스트에 올린 이름은 전명헌이었다.

한국의 외환위기에서 유재원의 아바타로서 활동해줄 사람은 최강욱이겠지만, 정치권에서는 전명헌과 통일국민당이었다. 어쩌면 최강욱보다 더 활약을 해줄 수도 있는 존재였기에 유재원이 공을 들이는 건 매우 합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리스트를 만든 유재원은 다시 수저를 드는 게 아니라, 이번엔 문자 메시지를 만들어 보냈다.

티파니에게 보내는 아침 문자 메시지였다.

약혼을 통해 이제는 공식적인 사이가 되었다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꾸준히 연락하는 유재원이다. 잡은 물고기라고 방심하고서 소홀히 했다가 깨져버리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지는 책으로 철저히 배웠기에 오히려 약혼을 하고 나서는 연락하는 빈도수를 더 늘렸다.

인턴을 잘 마친 티파니는 셰브롱의 본사에 발령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곧장 실무에 투입되진 않았다고 한다. 정직원이 된 다음에도 여기저기 많이 다녀보고 있다는데, 최근에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슈퍼컴퓨터 센터에 출장이 잡혔다면서 한창 신이 나 있던 상태였다.

에너지부 산하의 슈퍼컴퓨터 센터라면 당연히 원자력에 대해 연하는 부서였다.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한 이후에도 수많은 핵실험을 했다. 소련이나 러시아보다 더 많은 핵실험을 하면서, 핵기술을 고도화했다. 방대한 데이터를 쌓았고 여기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제는 실제 핵실험 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으로 실험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 에너지부의 슈퍼컴퓨터 센터도 그게 가능한 조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무기로써의 활용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 같은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 연구를 명분으로 삼은 조직이었다.

그런데 여기를 셰브롱의 직원으로서 방문한다는 건 좀 모양이 이상한 그림이었다. 이에 대한 티파니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에너지부에서도 화석 연료에 대해 다루는 부서가 있었고, 여기에서 새로운 유전 탐사를 위해 지각 데이터 분석의 정확성을 높이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기에 셰브롱이 일익을 담당하면서 티파니에게도 할 일이 주어졌다는 이야기다.

티파니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국이란 나라의 저력이 상기되는 유재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유재원의 머릿속 기억의 궁전에는 21세기 중반까지 탐사가 완료되고, 채굴성이 확인된 유전 지도가 완벽히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회귀를 약속 받았다고 했을 때, 과거로 가져갈 값진 지식을 따져 보면 로또 번호라거나 주가 흐름, 획기적인 신약 정보와 함께 챙길 수밖에 없는 정보 아니겠는가.

미국 연방정부나 석유 업계의 7대 메이저 회사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탐사 데이터를 분석해서 만든 정보겠지만, 유재원은 매우 간편하게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날로 먹는다는 식의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회귀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확실했다. 심지어 그렇게 거래를 했음에도 회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한 마음을 졸이던 기간도 수십 년이었다.

하여튼 유재원은 티파니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는 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응! 올 때 기념품도 많이 사갈게♥

어째 직접 말로 듣는 것보다 문자로 보는 게 더 오글거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나 기분은 좋았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오래가진 못했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니 동아시아의 암울한 데이터들이 쏟아졌던 탓이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단순한 숫자의 표기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그 숫자가 폭락하는 건 사람들의 일상이 붕괴되었단 것이었고 그만큼 그들의 삶이 고달파진다는 이야기였으니 유재원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심지어 이 숫자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화가 날 정도였다.

“아이고, 답답해라. 핵심은 환율이라고요!”

말을 내뱉은 유재원은 살짝 당황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아졌던 탓이다. 게다가 통화 상대도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 전명헌 할아버지였던지라 걱정이 컸다.

-응? 환율? 그게 무슨 소리냐?

다행히도 전명헌은 유재원의 높아진 목소리에도 이상함을 못 느꼈던 모양인지, 다시 되물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태국의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전해지는 매커니즘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해야 했다.

“태국이 망한 건 자국의 바트화를 시장이 인정하는 실제 환율보다 더 높은 가치로 두기 위해 억지로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에요.”

-시장에 개입이라니?

천하의 전명헌이 이 말의 의미를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 유재원은 설명을 이어갔다.

“시장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풀고 바트화를 샀다는 걸 말하고요. 관건은 실제보다 가치가 낮은 바트화를 귀한 달러를 주고 비싸게 샀다는 거죠. 헤지펀드 입장에서는 싸구려 바트화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니 대량으로 내다 팔기 시작했고요. 그러다가 태국은 외환보유고가 바닥나자 항복 선언을 어제 한 거죠. 한국도 그래서 위험해요.”

어느 것이든 과하거나 결핍이 되면 좋지 않다.

환율도 마찬가지로, 실제 시장가치와 환율이 일치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환율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달라지면서 정부는 자연스럽게 인위적인 개입을 하고 싶어 한다.

보통은 정부의 조정에 큰 무리는 없다.

헤지펀드가 공격을 해봐야 국가 단위로 올라가면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국이나 태국처럼 약점이 포착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일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진다는 거지? 그 빌어먹을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한다고 말이야.

유재원의 친절한 설명에 전명헌도 바로 감을 잡았다.

“맞아요.”

김 대통령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97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김 대통령은 국민에게 어필하는 두 가지 핵심 성과가 있었다. 하나는 역사 바로 세우기였고, 다른 하나는 찬란한 경제 성과였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유재원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길 주저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군부 출신 전직 대통령까지 교도소에 쳐 넣었고, 두 군부 출신 대통령을 보좌하며 힘을 보탰던 군부 세력들의 거물도 싸그리 잡았다.

또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과거사 재조사에 들어가 제주도와 광주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결정적으로 경복궁 앞을 답답하게 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해체했고, 일본의 독도 망언이나 과거사 트집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문제는 찬란한 경제 성과라는 곳에서 일어난다.

선진국이라고 무슨 인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문민정부는 OECD 가입을 인증서처럼 삼았다. 그러면서 OECD 가입 기준에 맞춘다고 금융시장 개방의 폭도 확 늘려놨고, 고용 유연성도 확보한다고 노동법 개정안을 만지작거리면서 양대 노총과의 관계도 험악해졌다. 더구나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은 OECD 기준을 적극 따랐던 터라, 유재원이 주도해 만든 개정안보다 훨씬 과격했다.

여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의 핵심은 저환율이었다.

원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잡음으로써, 실질적인 소득이 그렇게 늘어난 게 아님에도 미국 달러화로 1만 달러라는 금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1만 달러의 금자탑을 절대 지키고 싶다는 김 대통령의 의지는 곧 외환시장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어졌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외화를 풀면서 원화를 사들여 억지로 환율을 유지한 것이다. “그 환율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한국의 좁쌀만한 외환보유고로 그게 가능할까요? 게다가 외국에서 들어오는 자금도 빠싹 마르고 있다면서요?”

몇 달 전만 해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외국돈이 씨가 말랐다. 일반 회사보다 더 신용도가 높은 은행도 마찬가지다. 아마 8, 9월이 되면 은행들이 돈을 빌리면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한 연장 승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키워지고 있었던 탓이다.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여러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부도가 났는데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심지어 대통령의 아들이 불법 대출을 알선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는 빠르게 추락 중이었다.

조만간 외국의 신용평가사에서 한국의 신용 등급을 하향할 거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불가능이지.

전명헌은 유재원의 질문에 어렵게 답을 내놓았다.

불가능하다. 그게 정답이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 남은 답은 두 개뿐이다. 러시아와 같은 모라토리엄, 아니면 IMF 구제 금융 신청이다.

-허어, 그러면 나는 이제 무슨 말을 하고 다녀야 하는 거냐?

이어진 전명헌의 물음에 유재원은 조금 씁쓸했다.

너무도 혹독할 IMF 이후의 상황보다는 당장의 눈앞에 있는 선거에 더 집중하는 모습에서 역시 할아버지도 이제 정치인이 다 되었다 싶었다.

선거라는 건 당연히 97년 12월에 있는 대선이다.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선거이지만, 한국의 각 정당들은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레이스를 시작했다. 통일국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추대 대신 경선을 통해 분위기를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것도 엄연히 현실이었다. 유재원에겐 전명헌 이상으로 좋은 카드는 없었고, 이를 활용하려면 차기는 무조건 전명헌이 되어야 했다.

고민에 빠졌던 유재원은 곧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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