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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05화 (405/1,007)

제 527화

놀랍게도 조지 소로스는 한국 내수용으로 발행한 리포트를 직접 가지고 나왔다.

유재원을 더욱 놀랍게 한 건 영문판도 있었는데, 한국에서 발행한 한국어 버전 리포트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어 버전과 영문판은 문자 차이뿐만이 아니라, 내용상의 차이도 있었다.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조를 감지했다는 정보를 굳이 외국의 투자 회사나 헤지펀드에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영문판에는 외환위기에 대한 내용은 상당 부분 잘려 나갔다.

이 차이점을 아는 사람들은 없을 줄 알았다.

한국은 자체적으로 올림픽도 치르고, 엑스포도 열었고, OECD가입도 하면서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고 자부했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에서 실제 존재감은 그리 크지 못했다.

외국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 같은 투자도 대부분 일본의 엔캐리 트레이드로 들어온 자본이었다. 이를 제외하고 진짜로 들어온 해외 투자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엄청나게 저평가된 한국의 자산 가치를 보고 들어온 투기 자본이 엄청난 시세 차익을 거두고 나가고 나서야, 한국에도 본격적인 외국 자본이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의 높으신 양반들이 보고 깨어나라고 보낸 리포트가 엉뚱한 조지 소로스에게 가 있는 걸 보고는 여러 생각이 드는 유재원이었지만, 굳이 그걸 내색하진 않았다.

“호오, 그 리포트에 관심을 주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더욱 영광이군요.

조지 소로스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은 외환위기의 연쇄 반응에 대한 대목이었습니다. 만약 이게 현실로 일어난다면 그 시발점은 어디로 보시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반백 살이 먹은 사람답지 않게 전해지는 목소리는 너무도 뜨거웠다.

하긴,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가 큰 명성을 얻게 된 건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 공격 때부터였다. 그때 커다란 부와 명성을 얻었고,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러니 환투기에 최적의 상황인 외환위기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유재원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전에 조지 소로스의 눈빛을 살폈다. 예전의 저화질 화상이라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4:3 화면 비율이긴 해도 HD 영상 급 해상도였기에 미세한 디테일도 잡아낼 수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조지 소로스는 이미 대충 견적을 다 내놓고 물어보는 게 확실했다.

유재원은 본인의 대답에 따라 조지 소로스의 반응도 분명 달라질 거라는 감이 왔다.

“보아하니 소로스 회장님도 답을 찾으신 거 같은데요? 차라리 미리 종이에 적어놓고 동시에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호오, 흥미롭군요. 좋습니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제갈량의 일화를 따라하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조지 소로스는 삼국지를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유재원의 제안에 동의했고, 빈센트 그린힐에게 쪽지를 얻어서 뭔가를 적었다.

글자를 적는데 사용한 필기구도 고풍스러운 만연필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쓰기 편한 네임펜으로 그림을 그리듯 큼직하게 적었다.

“그럼, 펴 볼까요? 하나둘, 셋!”

-Thailand.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타이왕국).

역시나 조지 소로스나 유재원이나 모두 태국을 지칭했다. 다만 유재원은 장난으로 태국 문자인 악쏜타이를 써서 조지 소로스를 살짝 당황시켰다.

-태국어에도 조예가 깊으신 모양입니다.

“문자만 겨우 끄적이는 수준이죠.”

유재원의 장난에 살짝 놀랐다가 한숨을 돌린 조지 소로스는 서로 같은 답을 썼다는 걸 인식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미소가 가득한 가운데 그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놀라운 성장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 비밀을 살짝 본 것 같군요.

유재원을 치켜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립 서비스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서양 사람들이지만, 이번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게다가 칭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역시나 조금 기다리니 본심이 나왔다.

-처음 이 보고서를 보았을 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도 궁금해졌습니다. 무조건 알려달라는 건 아닙니다만, 서로의 생각이 같다면 함께 움직여 이익의 극대화를 노려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퀀텀 펀드가 헤지펀드 세계에선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규모이긴 했지만, 뮤추얼 펀드나 다른 국부 펀드에 비해선 덩치가 많이 작았다.

2000년대 초로 잡는 최대 전성기 시절에 300억 달러 규모였다고 하니, 지금은 이보다 적은 규모인 게 확실하다. 많이 잡으면 150억 달러, 아니면 그보다 적을 수도 있다.

대신 이 금액을 조지 소로소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금액으로 보는 건 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레버리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사이니 일시적으로는 원금의 몇 배나 되는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태국에 함께 배팅을 하자는 말씀이시죠?”

하여튼 조지 소로소의 제안은, 위기는 둘이 함께 나누면 반이 되고, 공격을 함께하면 이익은 보다 극대화하니 이번 태국 공격에 손을 맞잡자는 이야기였다.

-바로 그겁니다.

유재원으로서는 함께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런데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음, 답을 드리기 전에 저도 하나 물어볼게요.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동아시아에 연쇄적인 금융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그 끝은 어디가 될 것 같으세요?”

-흐음? 어려운 질문이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지 소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턱 끝을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대처 방향은 다 정해진 상태였다.

여기에서 조지 소로스가 갑자기 끼어든 것인데, 그의 답변에 따라 함께할지, 아니면 원래의 계획대로 실행할지가 결정될 테니 말이다.

조지 소로스의 고민은 의외로 길었다.

유재원은 태국이 시발점인 걸 파악한 사람이라면 연쇄 반응의 마지막도 당연히 생각해 봤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확실히 의외였다.

-흐음, 잠깐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진짜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지 소로스는 시간을 오래 잡아끌었다.

“물론이죠.”

그러더니 휴대폰을 들고는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했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 소로스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휴대폰은 모토롤라나 노키아가 아닌 티파니폰 2였기 때문이다.

작년에 발매된 티파니폰 2는 한국에서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전 세계적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럽식 GSM 방식의 모델도 출시했기에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드디어 정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세계 평정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중에 나온 휴대폰 중에서 제일 고가를 자랑했던 탓이다.

큼직한 LCD 화면과 이를 120%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탑재했고, 대용량의 플래시 메모리까지 들어가서 생산원가 자체가 비쌌다.

노키아나 모토롤라의 보급형 모델은 30만 원 수준으로 구매가 가능했는데, 티파니폰 2는 플래시 메모리 용량이 제일 적은 보급형 모델이라도 60만 원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판매량 자체는 노키아나 모토롤라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소비자로의 브랜드 인식은 그 어떤 휴대폰 제조사보다 좋았다.

가장 선망하는 최고의 프리미엄 휴대폰을 꼽아 보라고 하면 누구나 티파니폰 2를 언급할 정도였다.

조지 소로스의 티파니폰은 발매된 모델 중에서도 제일 좋은 모델이었다.

보급형과의 차이 점이라면 일단 플래시 메모리 용량이 512MB로 고음질의 음원 파일을 200곡 가까이 저장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급 샴페인처럼 금빛의 컬러라는 특징이 있고, 가격은 한국 돈 99만 원을 자랑한다.

참고로 제일 저렴한 60만 원 모델에는 128MB의 플래시 메모리가 장착되어 있고, 기본 컬러로는 은색과 검정색을 지원한다. LCD 크기나 해상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모두 공통으로써, 티파니폰의 규격에 맞춰 앱을 제작하면 어떤 모델이든 실행시킬 수 있다.

티파니폰 1보다 더 넓어진 LCD가 장착된 덕에 인터넷도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고, 텍스트 파일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스마트폰이라고 해도 될 테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한 건 아니었다.

일단 입력 장치는 여전히 다이얼 패드였고, 터치는 미지원 상태였으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아직은 사람들 사이에 스마트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당장 티파니폰 2의 기본 기능인 음원 파일 재생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구매자의 1/2도 되지 않았다.

더욱이 티파니폰의 판매량이 노키아나 모토롤라에 밀리긴 해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나쁜 건 아니었다.

96년만 해도 238만 대가 팔렸고, 올해에는 적어도 400만 대를 넘길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스마트폰에 대한 요구가 일정 임계치에 다다를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는 유재원의 판단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분석팀과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서 잠깐 의견 조율을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드디어 통화를 마친 조지 소로스가 다급하게 사과부터 했다.

“아니에요. 간단한 질문에도 심사숙고를 하시는 모습이 더 감동적이었네요.”

유재원은 본인의 질문에 대해 조지 소로스가 정확한 답변을 하려고 분석팀과 통화를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질 때 상의를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조지 소로스는 그 점을 제대로 활용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참 유감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유감이라니요”

-제 답은 한국이거든요. 아무래도 동아시아에 진짜로 연쇄적인 금융 위기가 찾아온다면 그 최종 단계는 한국이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유 회장님의 생각은 다르신 모양이군요.

유재원이 조지 소로스의 눈빛을 생생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뉴욕 맨해튼에 있는 조지 소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답변을 듣고서 일어난 유재원의 미묘한 표정도 곧 확인할 수 있었으니, 바로 그 연유를 물었다.

“아, 그래요. 제 고향인 한국도 금융 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연쇄 위기의 마지막 종착역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이 아니라면?

“일본이죠.”

일본이라는 말에 조지 소로스는 약간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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