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5화
유재원은 싸가지가 없어 보일 만큼 짧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훨씬 장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처지가 확연히 달랐던 탓이다. 유재원은 임원들에게 장담했던 것처럼 협상이 2년 이상 길어져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타임워너의 방송국이나 시네마 라이브러리가 없어도 넥스트컴캐스트의 영업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반면 제럴드 레빈은 대주주들 그리고 이사회에서 받는 압박이 훨씬 컸다.
이사회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까지도 이번 합병에서 타임워너의 이득이 훨씬 크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럴드 레빈과 같은 반대파가 조금 있긴 했는데, 그 숫자를 아득히 넘겨버리는 게 찬성파 세력이었다.
뉴욕에서의 협상이 단 한 번 만남으로 깨질 때만 해도, 유재원이 젊어서 협상을 할 줄 모르나 싶었던 제럴드 레빈 회장이었다. 그런데 주가가 폭락하자 전에 없던 규모의 압박을 받았다. 이대로라면 본인의 자리까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올라온 최고 경영자 자리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에 염치불구하고 먼저 전화를 걸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제럴드의 사정을 유재원이 훤히 꿰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유재원 편인 테드 터너 부회장의 전언도 있었고, 뉴욕에 집중된 정보팀이 보내준 정보를 통해서 직접 본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저도 당연히 이야기는 계속 해보고 싶긴 해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러면 이번엔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면 어떻겠소?
“그래주시면 고맙죠. 그런데 중요한 건 협상 재계가 아니라 협상의 내용 아닐까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제시하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거니까요.”
-아아, 그건 걱정 마시오. 본인이 타임워너 이사회에 유 회장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다오. 덕분에 전보다 훨씬 전향된 방침을 받았으니 분명 유 회장도 만족할 것이오.
타임워너 같은 초대형 미디어 그룹을 이끄는 첫 번째 덕목이 허세인 것일까?
테드 터너와는 정반대 성격이라는 제럴드 레빈 회장도 허세는 역시나 진짜였다.
이사회에서 잔뜩 꾸지람만 들었다는 걸 훤히 알고 있는데도, 자기가 잘해서 보다 나은 조건을 가져왔다고 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언제가 좋겠소?
“음, 잠깐만요. 스케줄 좀 확인해 보고요.”
사실 유재원은 언제라도 만나는 건 상관없었다.
본인의 스케줄을 보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출장 일정이 거의 없었고, 집에서 프로그래밍에 집중하는 것으로 정해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다만 참여하는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는 상당히 많았다.
본업인 운영체제 제작은 물론이고, 인터넷 서비스 개발이나 나중에 요긴하게 사용할 각종 알고리즘도 먼저 만들어 놓을 계획이었다.
이것만 해도 일반 개발자들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일감인데, 여기에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 프로젝트도 여럿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잠깐 시간을 만들어서 제럴드 레빈 회장을 다시 만나는 것은 큰 부담은 아니었다.
다만 딱 하나 지키고 싶은 건 있었다.
“음, 이번 주 금요일 어때요?”
남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유재원이지만, 주말은 확실히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주말에는 쉬어야 평일에 힘을 쓸 수 있으니 말이다.
-괜찮군. 그러면 이번 금요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약속을 정한 유재원은 통화를 종료하고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제럴드 레빈 회장의 전화를 받기 전에 하던 작업을 곧장 다시 시작한 것이다.
유재원의 모니터에 가득 떠 있는 건 제법 현대적인 인터페이스를 갖춘 프로그래밍 개발 툴이었다.
안드로이드 프로그래밍 스튜디오라는 최근 발표된 통합 개발 툴이다. C++라는 언어를 베이스로 삼고 코딩과 컴파일은 물론 디버깅과 패키징까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용 응용 프로그램을 하나의 툴로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전문 개발 툴 업체의 소프트웨어를 써도 무방한데, 안드로이드 프로그래밍 스튜디오는 어시스트 기능을 강화해서 반복 작업을 최소화로 줄여주고, 자동 입력 기능도 있어서 익숙해지기만 하면 기존의 툴보다 생산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렇지만 익숙해진다는 게 문제인 터라, 꽤나 저렴하게 50달러로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업에서는 그다지 많이 쓰이는 것 같진 않았다.
대신 다른 소프트웨어처럼 학교에는 공짜로 공급하고 있었기에, 몇 년 후에는 유의미한 점유율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여튼 자체 개발 툴로 지금 유재원이 만들고 있는 것은 이미지 분석 알고리즘이었다.
PC 한대로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고, 대형 시스템에서도 돌아가고, CCTV처럼 실시간으로 촬영되는 영상과 연결해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범용성을 자랑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정확성을 올리는 게 관건인데, 유재원은 이번에도 다른 기업들이 따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릴 작정이었다. 당연히 머신러닝 기술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러니 PC로는 구동이 불가능하고 데이터센터 규모의 시스템에서 가동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검색 엔진과 결합하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니,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능이었기에 유재원은 알고리즘 실행을 위한 요구 스펙이 높은 것에 대해 그다지 걱정은 없었다.
“그나저나 한국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한창 코딩을 하다가 잠깐 딴 생각이 드는 유재원이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총리직에서 내려오고, 국정 조사를 두고 괜한 말이 많았던 한국인데 유재원은 일을 시작하면서 외부의 소식은 뚝 끊은 상태였다.
문뜩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졌던 유재원은 바로 웹브라우저를 실행했다.
하지만 정작 화면에 뜬 건 넥스트컴 페이지가 아니라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했다는 오류 페이지였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 선을 뽑아놓았던 게 지금 생각이 났다. 유재원도 사람인지라 작업에 집중하다가,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켜고 딴 짓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필요한 것만 보고 끊으면 다행인데, 잠깐 한눈을 팔면 엉뚱한 페이지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WWW의 구성 요소인 하이퍼링크라는 게 까딱 잘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기 딱 좋은 기능이었다.
인터넷이 세계가 막 구축되던 때엔 볼 게 없어서 금방 돌아왔는데, 이제는 엄청나게 거대한 세계가 된 덕에 잠깐 한눈을 팔면 한 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덕분에 요즘은 집중하려고 할 때에는 인터넷을 꺼놓는 게 보통이었다.
-제럴드 레빈 타임워너 회장, 이번엔 샌프란시스코로!
-협상 순탄치 않겠지만, 실망시키는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자신!
-넥스트컴캐스트, 타임워너 협상 재개.
-커다란 방향에 합의 성공.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모든 자산을 합쳐 새로운 합병 회사 설립!
-합병의 관권은 넥스트컴캐스트의 상장 그리고 변환 비율.
“음, 죄다 우리 이야기밖에 없네.”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부터 보는 유재원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뉴스 기사의 업데이트 시간이 제각각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1면의 기사들은 새롭게 갱신된다.
특히 동부의 주요 일간지들의 타이틀은 확실히 바뀌어 있었으니, 아침에 컴퓨터에 앉아 뉴스를 보는 건 유재원이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 되었다.
겨울이 다 지난 덕에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어도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3월이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은 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 미디어들의 최대 관심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이었다.
10일 전쯤 스코틀랜드 로슬린에서 생명공학자들이 다 자란 양을 성공적으로 복제하고 돌리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는 사실을 공개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이와 관련되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인간 복제 연구에 대한 연방 기금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큰 뉴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돌리의 복제에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 쓰였는데,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던 탓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 기술이 사람에게 쓰일 것에 대해 우려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조치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장에서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가 늦어져서 국가적으로 뒤쳐지면 안 된다는 위기감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대치되는 것이라서 당연히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워싱턴 DC에서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기술 확보를 위해 연구비 지원은 해주지만, 실제 인간 복제는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민주당서 발의할 것이라고 한다.
유재원은 잠깐 논란이 되었던 이 사안에 대해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미국은 기초 단계임에도 정부가 나서서 주도할 만큼 기민한 대응을 보여주는데, 한국의 경우에는 한 달 전에 터진 한보철강 부도 사태에 대한 처리도 지지부진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재원은 찬성파였다.
인간 복제 같은 건 당연히 반대지만, 생명공학 연구는 계속 진행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 많던 생명공학 기사들은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이처럼 2월 말을 잠깐 달궜던 생명공학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를 봐도 일부러 검색을 해봐야 생명공학 뉴스가 나왔는데, 내용도 부실했다.
대신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 소식은 다시금 전면을 차지했다.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는 아무래도 네티즌들에게 취향이 맞춰지게 된다.
게다가 언론사에 지급하는 정산금은 클릭 숫자에 비례했는데, 이 금액은 넥스트컴의 성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일부 규모가 작은 인터넷 신문사나 웹진의 경우엔 이 정산금만으로도 운영이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언론사에서는 클릭 숫자가 확보가 되는 기사를 중심으로 배포하는 게 요즘의 트렌드였다.
그러다 보니 각 언론사가 전면에 내세우는 기사가 하나의 이슈로 급속히 쏠렸고, 그게 요즘은 합병 이야기였던 것이다.
유재원은 관리자 아이디로 접속해서 기사별 조회 수를 보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 생명공학 관련 이슈보다 합병 이슈의 클릭 숫자가 몇 배는 많았다.
“사람들이 주식을 이렇게 많이 하나?”
일단 가장 높은 클릭 수를 자랑하는 기사들은 역시나 주가 관련 이야기였다.
이번에 합의된 합병 원칙 중 하나가 합병 기업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주식을 합치는 방식이라 설정했다.
이는 유재원이나 제럴드 레빈 회장이나 똑같이 본인들의 회사가 더 크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도출된 합의였다.
두 회사의 자산을 합치고, 이를 바탕으로 두 회사의 주식은 합병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될 텐데, 중요한 것은 변환 비율이었다. 당연히 자산이 큰 회사의 주식은 변환 비율이 높고, 작은 곳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큰 회사의 주인이 합병 회사의 경영권도 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