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4화
이야기를 제일 먼저 시작한 건 테드 터너였다.
그는 타임워너와 넥스트컴캐스트의 결합으로 만들어낼 장미빛 미래를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일단 유재원도 가만히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듣다 보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에 대한 당위성을 유재원에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제럴드 레빈이나 다른 타임워너 측 임원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탓이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음에도 유재원은 일단 잠자코 듣기를 선택했다.
이상한 게 보이면 곧장 먼저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는 게 유재원의 특기이긴 하지만, 지금은 일단 두고 보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테드 터너의 비전이라는 건 다른 사람도 다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선이어서, 뭔가 구체적인 내용이라는 건 없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테드 터너가 열성적으로 발표를 하는 중이지만 제럴드 레빈 회장은 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리처드 파슨스 COO(공동 최고책임자)는 매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호오.’
타임워너가 여러 회사들을 계속 합병하면서 성장한 회사였고, 수뇌부에는 그렇게 합병된 사람들의 최고 책임자들이 모여서 있는 형태였다. 이러니 수뇌부에서는 당연히 소리가 제각각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분명 타임워너 안에서 이번 합병 건이 진행된 흐름을 보면 테드 터너가 제일 먼저 주장을 했고, 그 다음 리처드 파슨스가 동의를 하면서 이뤄진 게 분명했다.
반면 제럴드 레빈은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유재원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렇게 테드 터너가 열성적인 분위기를 잡아 놓은 상태에서 제럴드 레빈 회장이 입을 열자 분위기가 싸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면 저희가 생각한 합병 방안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타임워너에는 넥스트컴캐스트의 경영권을 단번에 살만한 막대한 자금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새로운 합병 방식을 제안 드리고자 합니다.”
매우 겸손한 말투로 입을 연 제럴드 레빈 회장이지만 그가 제시한 방법에는 겸손이라는 게 없었다.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 타임워너와 넥스트컴캐스트의 자산을 합쳐 새로운 합병 회사를 만들자는 건 완벽히 일치.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합병 회사의 경영권을 분배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예상을 빗나갔다.
“합병 그룹의 지분 분배비율을 6:4로 제안 드립니다. 대신 서로가 가진 고유의 조직에 대해서는 경영권을 보장하는 걸로 합시다.”
당연히 6이라는 건 타임워너 쪽이고, 유재원의 몫은 4였다. 그러니까 합병 그룹의 전체 경영권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넥스트컴캐스트 파트는 선심을 쓰는 척 유재원에게 주겠다고 한다.
유재원은 그냥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욕구가 확 들었다.
이 정도면 제럴드 레빈 회장은 합병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게 확실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북미 대륙을 횡단하면서 날아온 수고를 생각하면 얌전히 물러나주는 건 너무도 아쉬운 일이었다.
“6:4? 이 수치가 도출된 근거는 뭔가요?”
마음을 가라앉힌 유재원은 속마음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당연히 현재 시점의 자산 가치입니다. 우리 타임워너의 시가총액은 어제 종가 기준으로 690억 달러입니다.”
반면 넥스트컴캐스트는 상장 폐지인지라 정확한 시가 총액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레럴드 레빈 회장이 근거로 내세운 것은 월스트리트의 넥스트컴캐스트 분석 보고서였다.
거기에서 넥스트컴캐스트의 시장 가치를 500억 달러로 보았다.
“정확한 비율로 따진다면야 6.5:3.5겠지만, 우리는 유 회장님의 능력과 비전을 높게 사고 있기에 4로 높여드린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네이밍에서도 넥스트컴에게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드립니다.”
“호의라니요?”
“합병 기업의 이름을 정할 때 넥스트컴캐스트를 앞에 놓아드린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마치 선심을 쓰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듣는 유재원은 어이가 자꾸 없어졌다.
제럴드 레빈 회장의 주장에서 제일 어이가 없는 부분은 타임워너의 가치를 어제의 종가를 기준으로 잡은 시가총액으로 놓고, 넥스트컴캐스트는 단순한 월스트리트의 리포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어이가 없네.”
얼마나 황당했으면 순간적으로 유재원의 입에서 한국말이 나와 버렸다.
있어선 안 되는 실수였지만 유재원처럼 높은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십중팔구 욕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황당한 주장이었다.
게다가 한국말이라서 제럴드 회장은 알아 듣지 못했다. 물론 말투에서 전해지는 느낌이라는 게 있어 살짝 표정이 진해지긴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제럴드 회장님의 계산법에 납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도 그럴 것이 타임워너의 현재 주가는 넥스트컴캐스트와의 합병 소식으로 인해 크게 거품이 끼기 시작한 가격이었다.
유재원이 요즘 미국의 주가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IT붐이었다. 텍, 컴, 테크, 네크워크 등등의 단어가 붙어있는 회사들의 주가가 무조건 오르는 현상은 한국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먼저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만큼 IT섹터는 마치 황금빛 21세기를 약속해주는 유일한 정답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소외되었던 타임워너였는데, 이번 합병 소식으로 드디어 IT섹터에 살짝 발을 담갔던 것이고, 이에 따라 기록적인 폭등을 보이며 690억 달러라는 시가총액을 찍은 것이다.
그야말로 거품이 바글바글한 가격이다.
반면 넥스트컴캐스트의 가치는 평가 절하했다.
모든 자산의 가치는 너무도 보수적으로 책정해서 거품이라는 건 전혀 없는 가격이었다.
이대로 시장에 내놓으면 사겠다는 사람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면 유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제럴드 레빈 회장은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불편한 심기와 경계심을 잔뜩 드러내는 게 뻔히 보이는 제스처였다.
“저도 일단 합병 기업을 세우고, 지분을 나누는 것에는 동의해요. 이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합쳐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겠죠.”
유재원도 제럴드 레빈 회장처럼 고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만 기업 가치에 대한 평가 방식도 같아야 된다고 봅니다.”
기업 간 합병에서 기업의 평가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었다.
실사를 하든, 시가총액으로 계산하든 두 기업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총액으로 기준을 삼을 거라면, 저희도 시가총액으로 계산해야죠.”
“그렇지만 넥스트컴캐스트는 비상장기업이지 않소?”
“그거야 다시 상장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유재원은 얼마든 재상장을 추진할 수 있다는 투였다.
그러자 제럴드 레빈 회장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워너 측이 파악한 바로는 유재원은 본인이 거느린 회사들의 상장을 지극히 꺼린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 사 상장 이후로 수많은 투자 회사들이 상장을 권유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 증거였다.
그렇기에 이를 바탕으로 합병 전략을 수립한 것이었는데, 유재원이 예상과 다르게 나오니 살짝 눈빛이 흔들렸던 것이다.
“이제부터 상장을 준비한다고 하시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요?”
유재원의 말에 제럴드 회장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넥스트컴캐스트가 다시 상장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오를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뉴욕 증권거래소나 나스닥에 상장되면 주가의 폭등은 불 보듯 뻔했다.
넥스트컴에 2등이나 3등으로 밀려난 포털 사이트도 수백억 달러를 찍고 있는데, 압도적인 1등인 넥스트컴이면 월스트리트의 리포트가 계산한 500억 달러는 훌쩍 넘어설 것이 당연했다.
“제럴드 회장님은 이번 합병 건이 좀 급하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2년쯤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는데요.”
“음.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좀 곤란합니다.”
“흠, 저는 아닌데요. 아무래도 지금은 의견의 차이가 심해서 더 이야기해봐야 진척이 없겠네요. 생각이 달라지시면 연락주세요.”
말을 마친 유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리처드 파슨스 COO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유재원은 그저 꾸뻑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평소와 다르게 초반에만 존재감을 보였다가 조용히 있었던 테드 터너도 제럴드 레빈을 살짝 흘겨보고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유재원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바로 다음 날.
-타임워너 넥스트컴캐스트 합병 난항.
-상당한 이견 차이로 유재원 ID 그룹 회장, 빈손으로 돌아가다.
-타임워너 주가 급락, -16%로 마감
-제럴드 레빈 회장, 협상 아직 진행 중.
경제 전문 미디어는 물론 텔레비전 뉴스까지 유재원과 제럴드 레빈 회장의 협상에 대해 떠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타임워너 센터를 찾았던 유재원이 1시간도 앉아 있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고,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는 건 많은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론에 대고 말하기 좋아하는 테드 터너는 협상장에서 있었던 일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다녔기에, 합병이 어려워졌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가장 빨리 반응한 곳은 당연하게도 주식 시장이었다.
합병설이 터지고 나서 땅을 박차고 올랐던 타임워너의 주가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날 하루에만 110억 달러에 이르는 시가총액이 증발해버렸다.
며칠이 더 지나도 하락세는 그칠 줄 몰랐다.
덕분에 타임워너의 주가는 합병설 이전보다 더더욱 추락한 상태였다.
-주주들 말이야. 독이 바싹 올랐어. 이사회의 불만도 장난이 아니지. 만에 하나 협상이 진짜 파토나게 된다면 제럴드는 이제 끝장이야.
타임워너의 속사정도 테드 터너가 적극적으로 전해주었다.
제럴드 레빈 회장과 테드 터너가 앙숙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궁지에 몰린 제럴드 회장의 처지가 고소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일 먼저 떠올린 장본인이 테드 터너였고, 타임워너 이사회에서도 승인을 받아낸 만큼 누구보다 의욕적이기도 했다.
-3일 내로 제럴드가 먼저 연락할 거라는 데 내 전 재산을 걸지!
덕분에 무서운 소리를 잘도 했다.
다행히 유재원은 테드 터너를 먹여 살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테드 터너의 연락이 있은 지, 딱 3일 만에 타임워너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진지하게 협상에 임해보자는 제럴드 레빈 회장의 전화였다.
-의견의 차이가 컸다는 걸 인정하오. 하지만 협상이라는 게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접점을 찾아가는 거 아니겠소.
전화기 너머의 제럴드 레빈 타임워너의 회장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테드 터너의 말대로 타임워너의 주가 폭락 이후 딱 3일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흠, 그런 거예요?”
-그렇소. 서로의 주장에 차이가 좀 있다고, 그렇게 훌쩍 자리를 떠나면 어떻게 협상이라는 게 존재하겠소. 설마 합병을 철회하는 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