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00화 (400/1,007)

제 522화

실사 작업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쏟아질 때도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들 겁을 내는 건 아니었다. 상장 심사에 준하는 실사라면, 실제로 상장으로도 이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ID 그룹에는 실리콘밸리의 기본인 스톡옵션이 없긴 했지만, 상장이 이뤄지면 그만큼 막대한 보너스가 책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똑같았다. 덕분에 사장단의 기대감도 그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번 합병을 계기로 조직구조 개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요.”

타임워너와 넥스트컴캐스트의 합병은 당연히 유재원 본인이 직접 챙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전적으로 혼자 감당하는 건 인력 낭비였다.

유재원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능력은 전설적인 프로그래밍 능력이었다.

안드로이드 95가 나온 지 2년이 지났다. 이제 슬슬 차기 버전인 98의 출시를 위한 준비를 끝마쳐야 할 때였다. 이 작업에 유재원이 빠질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니더라도 유재원의 프로그래밍 능력이 필요한 분야는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니 유재원을 대리해서 타임워너와 넥스트컴캐스트의 합병을 진두지휘할 만큼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사무엘 헨리 사장도 염두에 두어 보긴 했는데, 능력과 적성을 보았을 때 넥스트컴캐스트의 실무와 통신 기술 개발에 훨씬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만약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와의 합병이 최종 승인되어 공동 경영 체제가 탄생한다면 고도의 정치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레밍턴 사장이었다.

“그래서 그룹 부회장직을 신설할 생각입니다.”

유재원은 프로젝터와 연결된 i웍스를 조작해 슬라이드 하나를 띄웠다. 부회장직에 대한 설명을 도표로 보여주는 슬라이드였다.

ID 그룹의 계열사들은 유재원과 수직으로 연결된 아주 단순한 상태였다. 여기에 부회장 자리가 2개가 추가로 만들었고, 하나는 북아메리카를 다른 하나는 한국과 일본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담당 부회장자리는 당연히 최강욱의 몫이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승진하면서 공석이 된 비서실장에는 김대석 수행비서를 승진 임명하고, 레밍턴 사장이 승진하며 공석이 되는 ID 테크놀로지 사장에는 엘런 법무팀장을 승진 임명하겠습니다.”

폭탄 발표였지만, 다들 쉽게 수승했다.

ID 그룹 최고 경력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아니면 부회장을 할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전략기획실에서 그룹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한 조직 구조 개편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취임식을 진행할 테니, 다들 알고 계세요.”

-예, 회장님!

둘을 제외하고 연결된 사장들이 크게 대답했다.

레밍턴이나 최강욱은 얼떨떨한 얼굴이다. 사장이나 비서실장 위로는 없을 줄 알았는데, 부회장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생겨서 승진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팔자 좋게 놀 수 있는 자리는 절대 아니다.

레밍턴은 타임워너와의 합병을 전담해야 한다.

최강욱의 경우엔 당장은 하는 일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제 얼마 후면 레밍턴보다 더 중대한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그 임무에 대한 징조는 한국에서 찾아 왔다.

한국은 난리였다.

언제나 파격적인 소식으로 한국 사람들을 열광시킨 유재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 타진 소식은 그 어떤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합병이 진짜 이뤄진다면 1천억 달러가 넘는 초거대 미디어 그룹이 탄생하는 것이고, 거기에 유재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건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야말로 한국이 들끓어 오를 때, 찬물을 끼얹는 속보가 터졌다.

-한보 철강 부도!

한국 재계 순위 14위에 빛났던 한보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한보 철강이 부도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한보철강 부도.

그날이 1월 24일이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그런 날벼락도 없었다. 경제적, 문화적 성과를 바탕으로 정권 재창출의 의지를 다지며 새해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에 재계 서열 14위라는 한보철강의 부도는 다된 밥에 재 뿌리기 같았다.

청와대의 대응도 이러한 기조에 따른 통상적인 방식이었다.

-한국 경제, 아무런 문제없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일 뿐,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적다.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경영진의 문제로 한정했다. 언론들도 청화대의 논조에 맞춰서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들 대부분은 보수 정권의 연장을 바라마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전명현 총리, 한보철강 부도에 이해할 수 없는 정황 많다.

아직 청와대에 있었던 전명헌이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보철강은 한보그룹의 핵심 자회사였다. 한보그룹은 한국 재계 서열 14위를 자랑하던 대기업이었고, 한보건설이라는 건설 회사가 중심에 있던 그룹이었다. 그런 한보그룹은 작년까지만 해도 대규모 제철소를 짓겠다고 난리였고, 러시아 가스전 개발도 시작하겠다고 당당한 행보를 보였다.

알고 봤더니 이게 다 무리수였다.

포항제철 말고는 아직 소규모 제철소만 있던 한국이라서 제2의 포항제철을 꿈꾸며 초대형 제철소를 짓는 건 괜찮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급해도 너무 급했다. 제철소를 짓기 위해서 대규모 자본을 은행으로부터 조달했는데,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억 단위도 아니고 조 단위 자금이었다.

원칙대로라면 한보그룹의 자산으로는 절대 빌릴 수 없는 규묘의 자금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대출 승인이 난 것이다.

전명헌은 이를 집었다.

그러자 정치권, 특히 야당에서 청와대가 불법 대출에 관여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청와대는 당연히 아무 근거도 없는 비약이라고 방어했다. 또한, 여당 일각에서는 이제껏 따듯한 안방 자리를 차지하면서 좋은 것만 주워 먹었던 전명헌이 대통령 출마를 위해 청와대와 일부러 각을 세우려고 저러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언론에서는 정치인들의 말싸움만 부각시켰다. 한보철강의 부도가 일으킬 후폭풍을 차단해야 할 골든타임에 답이 없는 정쟁으로 빠진 것이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는 법이 없네.”

노트북으로 비서실서 정리해준 어제 뉴스를 보는 유재원이 혀를 찼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레밍턴 부회장이 바로 반응했다.

“아, 한국 이야기에요.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부도가 난 회사가 있는데, 여기에 청와대가 개입해 대규모 불법 대출을 해준 정황이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서 논란만 커지고 있죠.”

“청와대요?”

“미국으로 치면 백악관이죠.”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유재원의 설명에 레밍턴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건 부실 대출을 한 은행의 처리나 불량 어음을 받은 거래처 구제인데 말싸움만 하고 있네요.”

레밍턴은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어도 한국의 일인지라 따로 코멘트를 할 것이 없었던 탓이다.

유재원도 거기까지였다.

지금은 뉴욕으로 향하는 전세기 안이라서 이 사안에 대해 딱히 뭐라고 반응을 할 것도 없었다. 그저 김대석에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국 정보팀에 연락해, 전명헌에게 특별한 선물을 보내라고 전해달라는 정도였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유재원은 노트북의 페이지다운 키를 눌러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샥 하고 넘어가는 모션이나 새로운 페이지가 뜰 때의 빠른 속도는 기존의 쉘북보다 훨씬 빨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유재원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노트북은 가리비 모양의 쉘북이 아니라 i웍스 노트북이라는 전문가를 위한 노트북이었다.

물론 쉘북도 2가 나오면서 성능이나 디자인이 한 차원 더 높이 도약했다. LCD의 화질이나 반응 속도가 보다 개선되었고, CPU가 빨라졌고, 메모리의 용량도 보다 커졌다. 전체적으로 훨씬 나은 속도를 보여주지만, 전문가용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라인업인 i웍스 노트북만큼은 아니었다.

i웍스의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해 고급스러운 알루미늄 합금으로 이뤄진 케이스에 14인치에 달하는 대형 LCD화면, 강력한 CPU에 최신의 3D 가속 카드까지 탑재한 i웍스 노트북은 데스크톱에 비견될 만큼의 성능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배터리였지만, 유재원 일행이 탄 비행기에는 콘센트가 지원됐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i웍스 노트북의 용도도 언플러그 상태로 고성능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잦은 출장으로 책상을 옮겨가면서 작업을 해야 할 전문가를 위한 것이었다.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 반독점법 소지 있다.

-테드 터너 타임워너 부회장, 이번 합병이 성공할 경우 소비자는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미디어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을 것!

-ID 그룹, 아직 확정된 것 아무것도 없음.

새롭게 나타난 페이지에 정리된 것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에 대한 이야기였다. 부정적인 논조의 기사부터, 테트 터너의 인터뷰, ID 그룹의 무난한 대응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반응을 담아놓았다.

-타임워너 신고가 경진

-주가총액 669억 달러 돌파!

금융 부분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합병 소식은 주식 시장에는 대부분 호재였다. 특히 타임워너의 경우에는 IT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실제로도 맞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넥스트컴캐스트와 합병이 이뤄지면 곧장 북미 최대의 인터넷 회사로 거듭나는 것이니 주가는 당연히 폭등할 수밖에 없다.

유재원은 문득 넥스트컴캐스트도 상장한 상태였다면, 주가가 어땠을지 상상해 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넥스트컴캐스트에는 그다지 좋은 반응은 오지 않았을 것 같다. 기존의 미디어들을 인터넷과 접목하는 것에는 계속 실패 중이었던 탓이다.

신문사들만 봐도 본인들이 매일 같이 내는 기사들을 가지고 어떻게 인터넷으로 수익 모델을 만들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종이 신문은 유료로 파는데, 온라인 홈페이지는 무료로 공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찾지 않는 상태였다. 그나마 온라인 기사가 수익이 나는 곳은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에 올라가는 기사들인데,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가 잘 나갈수록 자사의 온라인 홈페이지의 방문객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태였다.

많은 신문사들의 고민은 넥스트컴에 기사 공급을 끊고 자사 뉴스 사이트를 키울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넥스트컴에 기사를 주고 정산을 받을 것인가 따져보는 일이었다.

일부 용감한 언론사들은 실제로 자사 뉴스 사이트를 열고 유료화 구독자를 모집했고, 넥스트컴에 보내는 기사를 줄이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많은 구독자들이 모이지 않아서 고민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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