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0화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유재원의 대답에 테드 터너가 펄쩍 뛰었다. 눈앞에 테드 터너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국제통화에서도 HD보이스를 지원하는 티파니폰 2 덕분에 음질이 한층 좋아져 펄쩍 뛰는 듯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지금 전화 받은 사람이 유재원 회장 맞는가? 내가 알던 유재원은 이렇지 않았다고!
“응? 나다운 게 뭔데요?”
무심코 물어봤다가 순간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재원이다.
주고받은 대화를 되짚어 보니, 청춘 만화의 주인공과 라이벌이 나눌 법한 대화이지 않은가.
-모험, 혁신, 과감함! 이런 게 바로 자네가 잘하던 거였지 않나? 이번에 우리가 던진 제안이 이에 딱 부합한다고 보네만.
다행히 테더 터너는 그런 오글거리는 장면이 있는 만화나 드라마는 접해보지 않았던 모양인지, 어처구니없는 반문에도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즈니스로 기록될 것일세!
그렇다.
테드 터너를 통해 타임워너가 유재원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를 합치자는 이야기였다.
넥스트컴캐스트가 방송국을 만들거나 합병할 거라는 소식에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이 테드 터너였다. 유재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었다. 그러고 나서 몇 주 후에 정식 합병 의사를 전해왔다.
처음 그 제안을 들었을 때, 유재원은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은 지상 최대의 규모라면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두 회사가 합병해 탄생한 AOL 타임워너라는 회사는 시가총액 1,600억 달러가 넘는 초거대 미디어 통신 기업이 등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의 AOL이 없다. 아예 망해버렸으니 말이다.
AOL의 기반 기술은 모뎀 접속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뎀 이용자들을 볼 수 없다. 모뎀보다 몇 천배 빠른 초고속 인터넷으로 인터넷 접속 방식이 통일되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북미에 초고속 인터넷 시장을 통일한 곳은 넥스트컴캐스트였다.
몇 년 전 제주도에 넥스트컴캐스트의 임원들을 불러다가 빠른 확장을 하면서도 고객 대응의 속도를 한국처럼 빠르게 끌어 올려달라는 주문을 했었다. 이에 넥스트컴캐스트는 과감한 조직 개편과 함께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고객들과 직접 대면하는 케이블가이를 대거 고용했고, 재교육도 철저히 시켰다. 케이블을 보다 빠르게 설치할 수 있도록 돕는 장비도 개발하고 대규모로 보급했다. 또한 지역 케이블과의 합병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저렴한 요금의 서비스도 새롭게 런칭했다.
이러한 변화 덕분에 넥스트컴캐스트는 케이블과 인터넷 공급에서 오늘과 같은 빛나는 성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반면 AOL은 브로드밴드 인터넷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지금은 완전히 망해버렸다.
과거 AOL의 자리에 넥스트컴캐스트가 군림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요, 그건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미국 정부가 승인을 해줄까요? 기껏 합병했다가 독점에 걸리면 큰일이잖아요.”
미국의 반독점법은 매우 강력했다.
한국처럼 대충 솜방망이로 무마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록펠러의 스텐더드 오일도 분할되었고, AT&T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과거에는 마이크로소프트도 분할을 할지말지 고심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유재원이 안드로이드 사에 ID 오피스를 통합하지 않았던 것도 반독점법을 의식해서였다. 오죽하면 안드로이드 95에는 타사의 웹브라우저도 기본적으로 탑재되어서 처음 실행할 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타임워너와 넥스트컴캐스트의 합병은 반독점법에 걸릴 위험이 더욱 높다.
넥스트컴캐스트는 과거 AOL보다 훨씬 대단한 기업이니 말이다. 포털 사이트인 넥스트컴은 물론 북미 최대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2CH닷컴, 온라인 소프트웨어 판매 사이트인 ESD닷컴도 넥스트컴캐스트였다.
돈이 되는 유료 회원도 그 어떤 사이트보다 많았고, 온라인 쇼핑몰 점유율도 훌륭했다. 인터넷 광고 시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1천만 돌파를 가시권에 둔 케이블TV 가입자도 있었다.
타임워너도 영화, 음악, 방송국까지 거대한 영토를 가진 미디어 제국이었다. 당연히 유선 케이블 회사도 있었다.
-그건 걱정 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대신 합병만 하면 자네에게나 우리에게나 이익이라는 건 동의하지?
“그건 그렇죠.”
합병만 하면 유재원은 타임워너가 보유한 방송국은 물론, 방대한 분량의 시네마 라이브러리도 활용할 수 있고, 타임워너 뮤직이 가지고 있는 음원도 매력적이었다.
타임워너는 인터넷이라는 신대륙에 본인들이 보유한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인터넷은 그야말로 시대의 화두였고, 이에 적응하지 못해 쓰러진 기업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90년대 초부터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한 IT붐은 지금은 나스닥을 삼키는 광풍이 된 상태였을 정도다.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어휴, 듣던 것보다 훨씬 신중하군.
“알아요. 저도 계산이 거의 끝나가니까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테드 터너가 열심히 약을 팔았지만, 즉흥적으로 절대 넘어가지 않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야심만만하게 추진했던 타임워너와 AOL의 결합은 결국엔 둘 다에게 파국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도 그렇게 끝나지 마라는 법은 없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유재원 본인이 잘 통제를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합병 기업에 그만큼의 입김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워너의 CEO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미국 최대의 가문인 록펠러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넥스트컴캐스트를 헌납하지 않으려면 보다 신중히 계산기를 두드려볼 수밖에 없었다. 합병의 방식부터 합병 후의 운영 전략까지 고민할 게 너무 많았다.
-흠, 어쩔 수 없구먼. 알겠네. 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
“고마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알겠네. 그럼 며칠 더 기다리지. 부디 좋은 결론을 내기 바라네.
테드 터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통화는 끝났지만 여러 모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통화였다.
“무슨 전화야?”
그때, 유재원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부드러운 감각이 등 뒤에서 몰려왔다. 어느새 잠에서 깬 티파니가 뒤에서 껴안은 것이다.
“터너 아저씨.”
“터너? 타임워너의 테드 터너? 그 아저씨가 왜?”
티파니가 깜짝 놀라서 포옹을 풀었다.
유재원만큼 유명한 테드 터너였다. 맨손으로 방송국을 일군 것도 대단했지만, 거침없는 입담 덕에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테드 아저씨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를 합치자고 제안을 했거든.”
“우와! 진짜?”
티파니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가, 폴짝폴짝 뛰었다. 타임워너라는 회사는 넥스트컴캐스트보다 더 미국인에 친숙한 미디어 회사였다. 영화를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 타임워너는 무조건 접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런 친숙한 타임워너가 넥스트컴캐스트에 합병을 제의했다는 건 결과의 유무와 상관없이 유재원의 위상이 한 단계 더 올랐다는 것과 같았다. 티파니는 유재원의 기쁨을 공유하고도 남을 사이였기에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원의 시선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티파니는 잠옷 대신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는데, 출렁이는 가슴이 있는 그대로 보였으니 말이다.
아침부터 확 달아올랐지만, 참을 이유도 없었다. 타임워너니 합병이니 하는 것들은 일단 뒤로 놓고 본능에 충실해진 유재원과 티파니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출국을 하루 앞둔 유재원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을 시작했다.
-ID 엔터테인먼트배! 워크래프트 2! 판타지리그 결승전을 시작~~~~ 합니다!
이번 대회의 메인 캐스터를 전형준의 대회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성악을 해도 좋을 것 같은 성량에, 경기장 자체의 사운드 시스템도 좋아서 콘서트에 온 것처럼 짜릿했다.
캐스터의 외침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함성이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추운 겨울임에도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득 들어선 관객들의 소리도 전형준 캐스터 이상이다.
그만큼 뜨거운 열기가 경기장에 가득했다.
워크래프트 2 판타지리그 결승전!
-두 선수를 만나 보시겠습니다.
캐스터의 말과 함께 전면의 커다란 스크린에 수많은 난관을 모두 돌파하고 영광스런 결승전에 진출한 두 선수의 얼굴이 비춰졌다.
유재원은 둘 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한국의 e스포츠가 진짜인 것처럼 이들의 게임 실력도 진짜다.
FPS를 중심에 놓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미국의 e스포츠는 반짝 하고 끝이 났다. 퀘이크의 첫 번째 대회에서 상품으로 나온 페라리가 크게 화제가 되긴 했는데, 게이머들 사이에 대회가 자리 잡는 건 실패했던 탓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게임을 하는 재미가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큰 장르였고, 중계 기술도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시청률 저조로 인해서 정규 편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 워크래프트라는 RTS를 중심에 놓고 시작한 한국의 e스포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정착되었다. 특히 전국에 쫙 깔린 PC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유스 시스템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신인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ID 엔터테인먼트의 철저한 시스템이 뒷받침을 해주면서 큰 힘을 받았다.
PC방 대회라는 검증을 받은 게이머들은 다시금 챔피언스리그를 통해 자웅을 가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갖춘 사람들을 판타지 리그라는 연말 결산 대회로 올라와 단기의 토너먼트를 치르는 시스템이 갖춰진 것이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상금도 커져서, 판타지리그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상금은 무려 5천만 원이다. 2등이나 3등에게도 적당한 상금이 있음은 물론, 판타지리그에 올라오기만 하면 기본수당으로 500만 원은 주어지니 선수들은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켰다.
당연히 이러한 대회는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송출까지 된다.
다만 이전과 달리 대회 운영부터 중계까지 모두 ID 엔터테인먼트에서 하고, 방송국은 영상만 받아서 송출하는 식이었다.
피파(FIFA)의 대회 중계 방식과 똑같다. 월드컵의 중계 방식도 영상을 피파에서 직접 만들고 방송국은 해설과 캐스터만 고용해서 방송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e스포츠로 저작권이니 중계권이니 하는 사태가 터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면서, 고품질의 중계를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이다.
다만 지금은 중계권을 살만한 곳도 없고, 시청자 숫자도 적어서 죄다 손실이지만, 그 액수는 ID 엔터테인먼트에 부담될 정도는 아니다.
단적으로 지금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101빌딩 1층부터 15층까지 자리한 쇼핑몰 공간에 있는 공연장이기 때문이다. 1,000명이 너끈히 들어와서 각종 공연이나 대회를 관람할 수 있었다. 방송 장비도 다 갖춰진 상태였으니, 저렴하게 e스포츠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경기는 곧장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을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지막 GG가 터질 때엔 경기장 전체가 흔들거릴 만큼 큰 함성이 터지기도 했다. 그 뜨거운 기세를 마음에 담고 비장한 각오를 세운 유재원은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날 저녁, 미국의 방송들은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 타진이라는 속보를 동시다발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