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95화 (395/1,007)
  • 제 517화

    실제로 ID 인베스트먼트의 보고서에 따라 무작정 돈을 풀었던 은행이나 종합 금융 회사들이 잠깐 주춤했고, 투자자들도 기업들의 자산 현황을 보다 엄격히 따지면서 살짝 브레이크가 걸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고서 상에 언급된 데이터는 모두 진짜였고, 기업들의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상상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96년도 경제 성장률은 원래 7%를 넘길 예정이었는데, ID 인베스트먼트의 보고서 때문에 6% 후반이 되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대통령님께서 이번에도 저희 보고서가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ID 인베스트먼트가 기침을 한 번 하면 한국은 경제는 독감이 걸릴 정도인데요.”

    김광일 비서실장의 말투에서 제발 좀 좋게 써달라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물론 유재원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습니다.”

    유재원은 그러면서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김광일 비서실장에게 넘겨줬다. 물건을 받은 김 비서실장은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이다. 나이가 많은 양반답게 요즘 대학생들이나 직장인에게 인기인 아이템을 몰라보는 모양이다.

    “USB메모리에요. 컴퓨터에 꽂으면 안에 리포트 파일이 보일 거예요. 발표용 원본은 아니고, 핵심안 추출한 요약본이니 보시면 됩니다.”

    USB메모리의 용량은 8메가바이트였고, 가격은 4만원으로 비교적 저렴했다. 작년 말, 미래 전자에서 64MBit 플래시 메모리칩의 양산에 성공했고, 덕분에 USB메모리 스틱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양산할 수 있게 되면서 나온 물건이다.

    USB메모리칩은 문서파일이나 그림 파일 등을 자주 옮겨야 하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충격에도 약하고, 용량도 작은 디스켓을 밀어내고 매우 빠른 속도로 대중화 중이었다.

    김광일 비서실장에게 준 USB메모리 안에는 2메가바이트짜리 ID 오피스 파일이 있다. 97년도 한국의 경제를 냉정하게 전망한 ID 인베스트먼트의 보고서 요약본이다.

    당연히 내용은 외환 위기가 올 것임을 천기누설 수준으로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이 보고서로 김 대통령이나 정부의 경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고위 관료들 그리고 민간의 기업인들의 생각이 바뀔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USB메모리를 쥔 김광일 비서실장의 떨떠름한 표정이 이를 증명한다. 본래 김광일 비서실장의 의도는 ID 인베스트먼트의 97년도 경제 전망 보고서를 먼저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의 내용에 긍정적이 내용이 담기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와대로 돌아가 USB 메모리에 담긴 문서를 보고 불과 같이 화를 내면 냈지, 좋아할 건 아니었다.

    당연히 이럴 거라고 예상한 유재원도 그렇게 생각 없이 문서를 넘긴 건 아니었다.

    아직도 떨떠름한 표정인 김광일 비서실장의 손에 들린 USB는 외환 위기라는 거대한 파국이 왔을 때, 청와대와 경제 관료들, 그리고 누군가 불러주는 대로 거짓 뉴스만 퍼트리는 언론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로 거듭날 것이다.

    자기들끼리 돌려보든, 혹은 실수인 것처럼 언론에 유출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자세한 내용은 내년 1월 초에 공개될 것이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유재원은 김 대통령을 비롯한 경제 관료들, 기업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달라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95년부터 나온 ID 인베스트먼트의 경제 리포트에 매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저기…….”

    김광일 비서실장은 USB메모리를 받고도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이봐, 김 비서실장.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언제까지 유 회장을 독점할 건가? 줄 길게 늘어선 거 안 보이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전명헌이 결국 한마디 했다.

    역대 총리 중에서 최장수 임기를 자랑하는 전명헌이었고, 심지어 대선이 1년 조금 남은 지금도 그 입지는 탄탄했다. 오히려 통일 국민당의 의석이 전보다 확대되면서 전명헌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총리님, 유 회장님, 그러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김광일 비서실장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쯔쯧! 정치하는 놈들은 말이다. 한 번 양보를 해줬으면 그걸 빌미로 끝까지 골수를 빼먹으려 한단다.”

    유재원과의 용무는 끝났으니 바로 청와대로 돌아가는 김광일 비서실장의 뒷모습을 보며 전명헌이 일침을 가했다.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닌지라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본인도 정치인인데, 그렇게 싸잡아 비난해도 되나 싶기도 했다.

    순식간에 방해자를 해치운 전명헌은 유재원과 나란히 섰다.

    한동안 말은 없었다. 나란히 서서 서울의 야경을 굽어보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분 지났을까. 전명헌이 먼저 운을 뗐다.

    “장하구나. 나는 네 나이에 쌀가게나 하고 있었는데, 너는 벌써 서울 한복판에 이 거대한 빌딩을 지어 올렸어. 전 세계를 뒤져도 나이 20에 제 손으로 이런 빌딩을 올린 사람은 네가 최초일 거다.”

    전명헌의 칭찬에 유재원은 몸 둘 바를 몰랐다. 100% 본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회귀자의 특권으로 이룬 성과가 아직은 더 크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이와 함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좋은 감정이 살짝 일어났다. 인간적인 호감은 그다지 없지만, 딱 하나 고마운 것이 바로 전명헌과 이어지게 해준 것이다.

    “그나저나 네 보고서 말이다. 진짜냐?”

    “그럼요. 무슨 의도를 노리고 억지로 그런 보고서를 낸 게 아니라, 모니터링된 데이터들이 말해주고 있는 걸 종합한 거뿐이죠. 사심은 1도 없어요.”

    “1도 없다니?”

    “아, 1%도 섞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김광일 비서실장에게 주어진 USB메모리에 담긴 문서는 당연히 전명헌에게도 보내졌다. 그 문서를 전명헌이 혼자서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를 수행하는 입 무겁고 믿을 수 있는 두뇌들이 있었다.

    안전 점검단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을 한 번 찍힌 다음, 수행원들에 대해 훨씬 더 깐깐하고 심도 깊은 검증을 통해 정비한 덕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재배치되었다. 덕분에 나잇대가 좀 올라가긴 했지만,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를 해석할 능력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너희 ID 그룹의 96년도 법인세 축소를 위한 움직임도 그 리포트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겠구나.”

    역시 전명헌이다. 아직 공표하지 않은 것도 먼저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답이다. 법인세는 보통 달러를 한국의 은행에 입금하고 원화로 바꾼 다음 법인세를 내왔다. 그런데 이제는 외환 위기가 코앞이다. 귀한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서 법인세를 내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건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이 확정한 방식은 법인세 납부의 최소화였다.

    법인세는 당기 순이익의 금액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보너스 지급을 통해 인건비 항목을 늘려 당기 순이익을 축소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투자를 시작하거나, 부채를 갚아도 당기 순이익이 줄어든다.

    “청와대는 네가 법인세 많이 내기 싫어서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로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올해 네 회사가 역대 최대의 성적을 올리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만큼 법인세도 많이 들어올 줄 알고 김칫국물을 마신 거지. 웃기는 놈들이지?”

    “세상에.”

    한국 기업 중에 ID 그룹처럼 세금을 깔끔하게 내는 회사는 없다고 자부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ID 그룹은 한국 국영기업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미국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법인세는 한국에 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소리를 하는 작자들은 매우 보수적인 정치인들로 정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은 숫자도 적은 극소수였다. 미국 정계와 ID 그룹의 관계는 더는 좋을 수 없을 만큼 끈끈했다. 넥스트컴캐스트가 방송국 인수전을 선언할 때에도 유재원의 국적 문제가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유재원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외환 위기가 오는 게 뻔히 보이니까 조치를 취한 것인데, 절세를 하려고 일부러 이런 리포트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다니.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로 착각한 거군요?”

    “오! 그거 괜찮은 설명이구나.”

    말을 하면서도 유재원은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전명헌이 어째서 골수 빼먹는다는 소리를 했는지도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었다.

    “그나저나, 총리직은 언제쯤 내려오실 거예요?”

    “왜? 너도 총리하고 싶으냐?”

    총리라니. 장난기가 여전한 전명헌이었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반응은 전명헌의 얼굴을 빤히 보는 것이었다. 농담 따먹기도 나쁘지 않지만, 전명헌 말고도 면담이 예정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1월 초쯤이 되지 않을까 한다. 후임 지명은 제대로 하고 내려와야지.”

    전명헌이 총리에서 내려오는 건 당연히 97년도 대선을 위해서였다.

    유재원에게 대선이라고 하면 장미대선이란 별명이 먼저 떠오르지만, 97대선은 아직 한겨울에 치러지는 대선이었다.

    역시 전명헌은 97년도 대선에도 참전할 생각인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92년 대선에서 기세 좋게 지지율을 끌어 올렸다가, 지역 논리에 밀려 2등이 예상되었다. 2등이 되어 모든 걸 잃느니 차라리 킹메이커가 되기로 하고, 김영삼을 밀어준 덕에 총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떠냐? 이번엔 다르겠지?”

    전명헌의 은근한 질문에 유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총리가 된 다음에 보여준 전명헌의 능력은 솔직히 유재원도 기대 이상이었다. 소떼 방북을 시작으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남북정상회담까지 일사천리였다. 그게 모두 전명헌의 공은 아닐 테지만, 매우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고 국민에게도 깊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안전점검단을 운용해서 큰 성화를 내었다.

    안전점검단의 경우에는 유재원의 어시스트였다. 완전히 떠먹여주는 수준이었지만, 그렇게 먹여주는 것도 못 받아먹는 양반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전명헌은 훨씬 나았다.

    수성대교 붕괴 직전에 통행을 차단해서 휩쓸리지 않도록 했고, 이후에도 인터넷 신문고를 적극 활용해서 안전점검단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물론 건물주나 기업에서는 안전점검단의 활동을 매우 껄끄럽게 생각했다. 전명헌 총리는 수성대교 붕괴 사고에서 전면 차단에 대한 임팩트가 상당했던 모양인지 한 달에 한 번은 시설 점검을 한다고 전면 통제를 실시했으니 말이다.

    대신 국민들의 안전점검단에 대한 호감도는 아주 좋았다. 좀 불편하긴 해도 영문도 모를 사고에 휘말려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말이다.

    “기대해볼만 하죠. 게다가 월드컵도 유치했잖아요.”

    여기에서 2002 월드컵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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