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6화
화려한 불꽃놀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재원을 비롯한 지인들과 초청된 VIP들은 101빌딩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손님들을 위한 축하연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101빌딩의 최상층에 있는 펜트하우스는 당연히 유재원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당장은 미국에서 거주 중이지만, 앞으론 한국에서 지내는 나날도 많아질 것이기에 대비한 것이다. 덕진리 집은 마음이 편안한 공간이긴 했지만, 비즈니스를 하기엔 부적합했다.
현실판 심 빌리지를 하시는 큰 아버지 덕에 덕진리도 많이 달라지고 있긴 했지만, 아늑한 마음의 고향은 끝까지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손님들 다 올라오려면 한참 걸리는 거 아니야? 승강기도 두 대뿐이잖아. 그중에 한 대는 자동차 전용이고.”
유재원과 함께 일찍 펜트하우스로 올라온 티파니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펜트하우스까지 초대된 손님들의 숫자가 100명이 넘었던 탓이다.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재홍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이곳으로 올 손님이 100명은 넘지만 다섯 대의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통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다만 101층으로 바로 올라올 수 있는 고속 승강기는 한 대뿐이지만, 나머지 네 대의 승강기는 바로 아래층의 시티라인 전망대로 연결된다.
거기서 계단을 타고 펜트하우스로 올라올 수 있다. 당연히 출입문을 넘는 데에는 신분증이 필요하다. 101빌딩의 또 다른 별명이 완벽한 인텔리전트 빌딩이었다. 하층인 상업 시설의 경우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중간부터 시작되는 비즈니스 파트와 상층부의 주거용 파트에는 출입증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딱 정해진다.
오늘 101빌딩을 찾은 손님들에게는 손님용 임시 출입증이 발급되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펜트하우스라고 하면 개인이 살기엔 매우 사치스럽고 넓은 집이라고 생각되지만, 100명이 한 번에 들어가면 무리라는 게 상식이었다.
101빌딩의 펜트하우스는 그러한 상식을 간단히 파괴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1빌딩은 위로 1층이나 101층이나 면적은 거의 비슷했다. 더구나 101층은 천장의 높이가 일반 층의 2배나 되는지라 100명이 다 들어가도 널찍한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도 한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공간이 바로 이곳이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한국 ID 그룹과 미래 건설은 펜트하우스에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101빌딩의 공사비 1조 5천억 원 중에 이곳 펜트하우스에 들인 공사비는 800억 원이 넘었다.
평당 2억 원 가까이 쓰인 것이다. 미래 건설에서는 처음엔 이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해보니 가능했다.
바닥에 이탈리아산 우윳빛 대리석을 까는 걸 시작으로 인테리어 소재는 모두 최상급을 골랐다. 각종 전자 제품이나 공간을 장식하는 그림이나 조각품 역시도 초일류만을 골랐기에 800억 원이란 예산은 깔끔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자동차 전용 고속 엘리베이터였다. 펜트하우스 한쪽에는 슈퍼카가 다섯 대 정도 있는데, 지하 1층의 주차장과 바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통해 차를 탄 상태로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펜트하우스 중심에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유리 방음실이 있었다. 5면이 단단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 피아노를 세게 쳐도 방음도 확실했고, 위험할 때는 대피소로도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도 하나 같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림을 돈으로 평가하는 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긴 한데, 자동차 방에 있는 슈퍼카들보다 싼 그림은 없었다.
덕분에 부족함이 없이 자란 티파니였지만, 어제 처음 이곳 펜트하우스에 들어와서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역시 황 사장님이시네요. 알프레드 집사님처럼 든든해요.”
황재홍의 보고에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트하우스가 지어질 때부터 공사장을 가장 많이 찾아왔던 사람이 황재홍이었다. 공사가 끝나고 인테리어가 시작되었을 때도, 본인의 신혼집보다 펜트하우스 완성에 더 신경을 썼던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리 유재원을 만나서 팔자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너무 과한 것 같았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는 데 말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황재홍은 101빌딩과 펜트하우스에 대해선 제일 잘 아는 전문가였고, 이번 개장식과 축하연 준비도 그가 도맡아 했기에 모든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띵!
잠깐 기다리자 알람 소리가 났다.
“아, 손님들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곧이어 준비된 음악이 나왔고, 유재원은 계단으로 올라오는 손님들을 환한 미소로 맡으면서 본격적인 축하연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축하연은 매우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황재홍의 완벽한 준비 덕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게다가 손님들은 펜트하우스의 위용에 다들 입이 떡 벌어져서 절로 기가 죽었다. 다들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지만,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딜 가서도 이처럼 화려한 공간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유재원의 입장에서는 심심한 파티였다.
유재원이나 티파니의 취향이었다면 아이돌이나 힙합 가수들을 초청해 신나는 음악도 크게 틀고 부어라 마셔라 할 테지만, 손님들의 평균 나이가 50살은 넘었기에 무리였다. 덕분에 어렵게 모셔온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곡들도 모두 클래식이었다.
그나마 축하연의 형태는 고정된 자리가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정성껏 준비된 음식과 술을 먹는 미국식 스타일이었다.
한 자리에서 계속 앉아 있는 건 아니어서 지루함은 없었다.
다만 유재원은 호스트인 입장이었기에 음식이나 음악을 즐길 시간은 그다지 많진 않았다. 이곳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해준 VIP들과의 면담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다른 행사에는 쉽게 움직이지도 않던 양반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도 다 지금 시간을 위해서였다.
겨우 몇 분이지만 유재원과 1:1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쉽게 구하지 못할 기회였다. 그만큼 ID 그룹의 위상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ID 그룹이 걸쳐 있는 산업군의 성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부터 하드웨어의 성장률은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고, 기업이 필요한 전산 시스템이나 수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위한 시스템 시장에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여기에 시대의 아이콘이 된 티파니폰도 있다.
한국에서 처음 출시된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도 출시된 티파니폰은 압도적인 성능으로 프리미엄 휴대폰을 완벽히 장악했다. 올해 초 발매된 티파니폰 2는 반년 동안 4백만 대 이상을 팔아치웠다.
94년 출범했던 ID 엔터테인먼트도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영화와 게임에 일류 기업으로 확실히 자리했다. 워크래프트 2와 디아블로, 퀘이크 2와 같은 게임이 대성공을 이뤘고, 이러한 게임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ID 테크엔진 3도 3D 게임 개발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표준으로 선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더욱 무서운 점은 테크놀로지나 엔터테인먼트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성과를 낸 회사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ID 인베스트먼트였다.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의 기술주들이 집중적으로 상장된 곳이 바로 나스닥이었다. 나스닥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ID 인베스트먼트는 나스닥의 성장과 함께 투자의 성과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94년만 해도 200억 달러 초반이었던 투자금은 현재 800억 달러에 이른 상태였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주요 주주인 퀄컴의 경우 CDMA상용화 이후 주가가 대폭발했고, 인텔이나 AMD는 꾸준히 우상향을 그리며 성장 중이었다. 안드로이드 사의 주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36달러 정도였던 주가는 현재 10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넥스트컴캐스트 역시 체제 정비를 끝내고 공격적인 경영을 시작하면서 가입자 숫자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다. 미국의 인터넷에 연결된 PC들 중에 최소 반 이상은 넥스트컴캐스트의 고속 인터넷 서비스로 접속했고, 케이블TV 가입자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어 1천만 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넥스트컴은 미국 전자상거래와 인터넷 광고 시장 점유율도 30%를 넘겼다. 미국 인터넷 광고 중에 가장 비싼 단가를 자랑하는 건 넥스트컴의 메인 광고였고, 그 다음이 넥스트컴의 로그인 항목 바로 아래에 있는 손가락만한 광고였다.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넥스트컴캐스트는 올해 여름에 방송국 인수를 공식화했고, 이로 인해 미국 방송 업계는 뒤집어지는 중이다. 공격적 M&A를 피하기 위해 급히 경영권 강화에 돌입하는 회사도 있었고, 반대로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회사도 있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자본이 움직이는 비즈니스였고, 한국 역사상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덕분에 미국의 일부 여론은 유재원에게 중요한 기간산업들이 편중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난리였다. 이제껏 하도 유재원, 유재원해서 이제는 좀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했었는데, 오히려 고향인 한국에서 과소평가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그러던 차에 101빌딩의 개장식이란 이벤트가 있었고, 유재원 명의로 초대장이 날아오니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다들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회장님, 청와대 김광일 비서실장입니다.”
그렇게 초대된 사람 중에 제일 먼저 유재원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김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광일이었다.
김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조금 남긴 했지만, 엄연히 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리해서 참석한 것이기에 전명헌을 제치고 면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전명헌과 유재원은 원래 돈독한 사이인지라 평소 전화통화도 자주하면서 할 말 못할 말을 다했으니, 이 자리에서 따로 나눌 이야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들이 보는 눈이 있고, 거기서 온갖 말이 다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의전이라는 게 가끔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러니 김광일 다음은 무조건 전명헌으로 짜여 있었다.
“김 비서실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자리가 한층 빛나는 것 같습니다.”
“허허, 나라의 자랑인 유 회장이 손수 초대장을 보내주었는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통령님께서도 서울에도 드디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랜드마크가 생겼다고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매우 기본적인 덕담을 주고받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유재원과 김광일이었다. 그렇지만 기선제압이니, 눈치싸움이니 하는 것도 없었다. 김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몰라도, 매우 저자세였던 탓이다.
“저기, 유 회장님.”
“네, 말씀하세요.”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내년 전망이 나오겠지요?”
“물론이죠.”
저자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재원의 경제 전망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ID 인베스트먼트의 새해 전망 리포트의 내용이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ID 인베스트먼트는 유재원의 지시에 따라 95년도부터 연초에 경제 전망에 대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실에 기초하여 매우 보수적인 전망을 하라고 했고, 빈센트 그린힐 사장은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렇게 나온 리포트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다들 장밋빛 전망을 하는 가운데, ID 인베스트먼트의 보고만 유독 부정적이었으니 말이다. OECD 가입, 코스닥 시장 개장 등으로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음을 본인의 성과로 자랑하려던 김 대통령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