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93화 (393/1,007)

제 515화

바로 일성 자동차의 첫 번째 세단인 ISM-5라는 자동차였다.

일성 그룹의 최현희 회장이 엄청난 자동차 광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히 자동차 시장 진출도 최현희 회장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런데 군부 정권들은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내부 경쟁을 최소화한다고 자동차 산업 진출을 막고 내주지 않았었다.

겨우 문민정부가 들어서 과거 군부 정권들이 걸어놓았던 제약이 풀리면서 자동차에 진출할 수 있었고, 드디어 96년 늦봄부터 일성 마크가 달린 자동차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

“아하, 그런데 완전 신제품이라는 자동차 말이야. 어디에서 좀 본 느낌인데?”

유재원의 설명에 맞장구치던 티파니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해왔다.

솔직히 유재원은 좀 놀랐다. 여자들은 자동차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텐데, 티파니는 일본의 자동차를 어디서 보고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 닛산 자동차랑 기술제휴해서 만든 차라 그럴 거야.”

단순한 기술제휴가 아니라 부품까지 다 일본에서 가져오고 조립만 한국에서 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지만, 티파니에게 한국을 이런 식으로 알리긴 싫어서, 대충 설명하고 마는 유재원이었다.

더욱이 일성 자동차 이면에 담긴 이야기는 보다 복잡했다.

유재원은 몇 년 전 20억 달러나 들여 일성 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지분을 무차별적으로 매입했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투자였던지라 일성 그룹이 지분 방어를 못했고, 덕분에 유재원은 일성 그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일성 전자도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했다. 이밖에도 물산이나, 건설, 중공업과 같은 계열사들의 지분도 그 이상 얻었다.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주주로서의 권한도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횡령과 배임을 적극적으로 찾아 신고했다.

이런 식의 고소는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어쩌다가 일성 그룹 임직원들의 비리가 발각되더라도 법원에 가면 다 무마되어 솜방망이로 끝나는 게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번 것들은 좀 달랐다.

일성 그룹 사장단 중에 몇은 아직도 감옥에 있을 만큼, 철퇴가 떨어졌다.

일명 일성 장학생들이란 사람들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곳은 여의도였지만, 사법부 쪽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신성한 법원이라고 해도 최현희 회장의 입김이 닿는 곳이었기에, 커봐야 솜방망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유재원의 영향력도 이제는 최현희 회장 못지않았다. 특히 유재원은 판사들에게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

사상 초유의 판사 탄핵의 뒤에 유재원이 있었다는 건, 판사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정 법무법인은 판사들이 퇴임 후에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최고의 법무법인이었다.

일단 기본 연봉이 10억 원부터 시작한다. 이것 하나로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었다. 심지어 전관이라면 특별 계약이 또 따로 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업무의 강도도 다른 법무법인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다.

법률에 취약한 계층을 돕는 일이 가장 큰데, 이들이 걸릴 수 있는 법률적인 문제들은 사실 고만고만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돈도 많이 받는데, 일은 쉽다.

심지어 국민들의 존경과 명예도 한 몸에 받는다. 일제강점기 소송으로 국민의 지지를 한 번에 받았다. 주요 업무도 서민과 소규모 자영업자, 자그마한 소기업을 지원하는 일이니 국민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김&정 법무법인에서는 후배들 관리하라고 용돈도 넉넉히 챙겨 주었기에, 선배로서의 면을 확실히 세울 수도 있었다.

불법적인 일을 가리고, 무마하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다 하면서도,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팽 당하는 일성 장학생 때와는 너무도 다른 대접이었다.

이로 인해서 사법부, 특히 법원에서는 일성의 영향력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증거가 바로 일성 그룹 사장단의 구속이었다. 1심에서는 구속이 나오더라도 2심에선 집행유예, 3심에선 무죄가 뜨는 게 재벌에 대한 묵시적 양형 기준이었는데, 유재원이 고소한 이들은 최하 5년이 나왔고, 최대 12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유재원의 20억 달러가 부른 후폭풍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현희 회장은 회장 취임 때부터 남모르게 준비해왔던 최대의 현안이 있었으니, 바로 세습이었다. 자식이 아들 하나에 딸 셋이라 후계자 선정에 있어 미래 그룹만큼 골치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니 미리 옥좌를 준비해서 나중에 때가 되면 앉을 수 있게 해주면 끝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의 20억 달러 투자로 후계 준비 작업이 완전히 올 스톱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돌파구를 찾은 게 일성 자동차였다.

일성 자동차에는 ID 그룹의 자금을 철저히 배제하고,

원래는 삼성물산과 비상장 계열사인 자연농원을 이용해 후계 작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지금은 일성 자동차를 중심으로 다시 재편하는 중이었다.

본인의 숙원도 풀고, 후계 작업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더구나 한국의 경제 상황이 활황인 덕에 일성 자동차의 매출도 기대 이상이었다. 덕분에 요즘 최현희 회장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웃음꽃이 가득하다는 소문이다.

“와, 저게 101 빌딩이야?”

유재원의 상념은 옆에서 터진 티파니의 탄성에 멈췄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재원의 눈에도 드디어 101 빌딩의 모습이 들어왔다.

회색빛 도시 사에로 화려한 빛의 기둥이 웅장히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개장식을 위해 모든 층에 불을 켜놓았고, 빌딩 입구 앞에 조성된 작은 광장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놓았다. 옥상에는 특별히 허가를 받은 서치라이트를 하늘 높이 쏘아 올리고 있어서 하늘과 땅이 빛으로 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멋지네.”

이러한 모습을 연출하도록 주문을 했던 유재원 본인인데도, 직접 보니 말로 못할 감동이었다.

다음 날.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101 빌딩의 화려한 개장식이 시작되었다.

식의 시작은 당연하게도 테이프 커팅식이었다. 유재원과 티파니, 그리고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VIP 손님들과 함께 1층 로비 입구에 모여 커팅식을 치렀다.

손님들의 면면은 대단히 화려했다.

전명헌 총리,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 조순 서울 시장, 민자당 대표와 같은 여당 쪽 손님들부터 김원기 같은 야당 대표도 있었다. 재계 쪽에서도 미래 그룹이나 대호, 금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심지어 일성 그룹에서도 화환과 난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만큼 ID 그룹의 존재감이 한국에서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들이었다. 실제로 한국 경제에서 ID 그룹이 차지하는 바는 상당했다. 90년대 초부터 그랬지만, 국가 예산의 1/10 정도는 ID 그룹이 지탱하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법인세부터 소득세, 취득세 등등 여러 가지 항목으로 국가에 내는 세금의 규모를 따지면 수십조 원에 이를 정도였다.

문민정부가 고속철도 사업, 차세대 구축함 사업 등과 같이 거대한 자본이 드는 SOC사업을 별 고민 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ID 그룹의 착실한 세금 납부 덕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유재원의 영향력은 단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전명헌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민당은 96년 총선에서 다시 한 번 도약하면서 유재원의 정치적 존재감도 부쩍 높아졌다.

96년 총선은 여러 모로 기이한 총선이었다.

통일국민당 빼고, 여당부터 야당까지 만족해하는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 국회의 의석을 보면 된다.

신한국당 109석, 통일 국민당 71석, 민주당 80석, 자유민주연합 38석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일단 삼당 합당으로 만들어졌던 민주자유당이 없어졌고, 신한국당이 만들어졌다. 잘 나가던 여당이 갑자기 붕괴한 건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민자당의 한 축이었던 민주정의당 출신들이 한 방에 정리됨은 물론이고, 군부 출신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12.12 군사 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되었다. 본인이 했던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지킨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 김 대통령의 정치적 이익도 최대한 챙겼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한 것은 당연히 민자당 속 민정계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96 공천에서도 완전히 배제되며 축출된 것이다.

어마어마한 잡음도 생겼고 주요 지지 세력의 이탈도 벌어졌다. 인해서 신한국당은 96년 총선에서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발휘한 대통령의 지지가 있었음에도 99석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거두었다.

대신 신한국당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전명헌의 통일 국민당이었다.

전명헌의 막강한 카리스마로 인해서 가장 민감한 공천에서도 작은 잡음도 세어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불만이 있을지 몰라도, 밖으로는 탄탄했다. 게다가 유재원의 선거 지원도 여전했다.

ID 그룹 회장님으로서의 존재감이 있기에 예전처럼 유세를 직접 뛰진 못했지만, 광고나 영상 지지연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후보들도 전명헌과 유재원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두고 선거 운동을 뛰었고, 덕분에 92년보다 20석이나 추가된 71석을 얻었다.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예상치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긴 했다. 특히 자유민주연합의 선전은 마치 예전 통일 국민당이 처음 등장했던 것과 같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사실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지역 정당이었고,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크게 보면 여의도의 구도는 92년 총선과 변함이 없었다. 신학국당과 통일 국민당의 연정은 현재도 진행형이었으니 말이다. 둘이 합하여 180석이라는 의석을 자랑했으니 92년보다 더 강력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신한국당과 통일 국민당이 개헌도 추진할 수 있는 의석이었다. 여기에서 통일 국민당에 전명헌 다음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게 유재원이었다.

101 빌딩 개장식이 재계는 물론 정치 거물들의 총집합소가 된 이유가 여기에 이유가 있다.

-1분 후 ID 글로벌해드쿼터 빌딩 개장 축하를 위한 불꽃 축제가 시작됩니다.

곧이어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안내 음성이 나왔다.

1분이라는 시간이 금세 지나고, 101빌딩의 옥상 위로 거대한 크기의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며, 이제껏 없었던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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