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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391화 (391/1,007)

제 513화

그렇지만 본래 영화 투자는 10개 투자해서 하나만 터져도 잘한 것이라 할 만큼 위험도가 높은 분야였다. 더욱이 게임 산업이 조만간 영화 산업을 추월하는건 기정사실이고, 유재원도 영화 보다는 게임이었으니, 그들이 우려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ID 엔터테인먼트의 연말정산을 마친 유재원은, 이제 마지막 남은 테크놀로지를 시작했다.

ID 테크놀로지의 연말정산은 좀 달랐다.

레밍턴 사장을 불러다가 보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유재원이 직접 해당 부서를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ID 테크놀로지만큼은 매일 같이 경영 현황에 대해보고 받았던 만큼, 따로 연말 정산을 할 필요가 없었다.

ID 테크놀로지에서 보려는 것은 그간 묵묵히 진행 중이었던 프로젝트 팀들의 성과를 확인하려는 일이었다.

프로젝트팀의 연구실이나 사무실은 모두 실리콘밸리에 있었기에, 남은 하루에 다 돌아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유재원이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은 바로 리사 수 박사를 팀장으로 한 프로세서 개발팀이었다.

#371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7)

카이로 TF팀.

리사 수 박사와 열 명도 안 되는 연구원들이 모여 저전력 프로세서를 설계하기 위해 결성된 테스크포스 팀의 이름이었다.

카이로라는 단어는 리사 수가 제안한 이름이다.

4대 문명 중에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 문명의 수도가 카이로였다. 리사 수는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는 이 프로세서가 이집트 문명처럼 오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카이로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카이로 팀이 처음으로 설계하고 있는 저전력 프로세서의 코드명도 카이로라고 명명했다.

유재원도 어감부터 의미까지 매우 마음에 들었기에, 리사 수의 제안에 곧장 수락해서 정식으로 채택했다.

카이로 팀의 연구실은 실리콘밸리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10분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처음에는 ID 테크놀로지 사무실이 있는 빌딩에 카이로 팀의 연구실이 있었다. 설계가 끝난 프로세서의 시험 생산에 불산과 같은 여러 가지 유독한 물질을 사용하다 보니 혹시나 유출되었을 때의 피해가 너무 크고, 공간이 협소해서 불편한 점도 많다고 해서 카이로 팀의 연구소를 옮겼다.

“회장님!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사 수 박사는 오늘도 씩씩했다.

유재원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에 연구소 입구까지 나와 있다가, 차에서 내린 유재원을 반갑게 맞이하는데, 박력이 넘쳤다.

“오랜만이죠?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어제도 채팅해놓고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리사 수 박사의 감성은 독특했다.

ID톡을 틈틈이 하고도 한 번 직접 만나느니만 못하다고 하는 레밍턴과는 완전히 반대로, ID톡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리사 수였다.

“자, 들어가시죠. 회장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리사 수 박사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유재원 일행을 이끌었다. 유재원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그녀의 카리스마에 빠져서 곧바로 군말 없이 따라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연구소의 투어는 10분 이내로 짧게 끝났다. 보통의 반도체 공장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곳은 반도체를 설계하는 데에 포커스가 맞춰진 시설이었다. 시범적으로 웨이퍼 한두 장에 찍어 보는 정도의 설비만 좀 특별했고, 나머지는 안드로이드 사의 알파팀 사무실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모든 장비들이 새것이라는 특징이 있어서, 새로운 룸에 들어갈 때마다 새것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이게 다 환경 호르몬이라서 리사 수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 건강이 염려될 정도다.

“신제품 냄새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울 지경이네요. 환기를 자주 해야겠어요.”

“아, 회장님은 여기에 처음이시라 바로 느끼시는군요! 저희는 이제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서 아직도 심한지는 몰랐습니다.”

리사 수의 대답을 들어보니 그것까지 신경 쓰고 살았던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한 곳에 꽂히면 무조건 달려가고 마는 성격인데, 지금은 프로세서 개발에 완전 몰입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생산 설비가 있는 특수 시설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거기에 들어가려면 보안절차도 있고, 번거롭게 착용해야 할 것도 많아서 권해드리진 않습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면 클린룸 상태도 깨지겠죠. 밖에서도 잘 보이니 이대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회장님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ASML의 최신 장비를 이 조그만 연구소에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리사 수 박사는 생산 설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워낙 전문장비이고, 한 기업이 독점하다시피해서 가격을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싸지만, 유재원은 요청이 들어오자마자 구매해줬다.

한 가지 특이사항이라면 설치된 장비는 미래전자에 들어갔던 모델과 같은 제품이라는 것이다.

하루에 웨이퍼 10여장 정도 찍어보는 이곳에 쓰기엔 너무도 아까운 장비지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유재원에겐 문제는 아니었다.

“생산 설비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치고 실물을 보여드리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리사 수 박사는 유재원 일행을 이끌고 당찬 걸음으로 카이로 팀에서 제일 큰 회의실로 이동했다.

잠시 후.

“이것이 코드네임 카이로의 웨이퍼와 패키징이 완료된 칩입니다.”

리사 수 박사는 지름 15cm짜리의 웨이퍼를 투명한 케이스에 담아 유재원 앞으로 가져왔다. 인터넷 기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많이 봤던 웨이퍼의 이미지와는 크기가 좀 작은 것 빼고는 모두 똑같았다.

빛나는 조명 아래에 웨이퍼를 이리저리 돌려 보면 찬란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것도 똑같았다.

패키징이 끝난 프로세서도 인텔이나 AMD의 제품과 비슷했다. 다만 크기가 살짝 작았다.

“칩 하나당 면적이 어느 정도죠?”

“6mm*12mm입니다. 면적으로 치면 72㎟이죠. 생산 공정은 300mm이고요.”

리사 수의 딱 부러지는 대답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생산 공정부터가 전생에서 쓰던 반도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던 탓이다. 물론 인텔이나 AMD의 최신상 제품도 유재원의 눈에는 똑같긴 했는데, 카이로 팀이 만드는 프로세서는 저전력에 집중했으니, 생산 공정이나 다이 크기를 봐도 성능을 예측하기가 애매했다.

“슬라이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의 요청에 리사 수가 대기 중이던 다른 연구원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회의실의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프로젝터로 스크린이 비춰졌다. 여러 가지 전문적인 항목으로 스펙을 비교해 놓은 도표였다.

“코드명 카이로와 인텔의 최신 모델인 펜티엄 2700MHz 모델과 비교한 도표입니다.”

표에 등장하는 건 인텔에서 나오는 제일 비싼 펜티엄 2700MHz모델이었다.

일명 용광로라는 별명을 가진 프로세서인데, 어마어마한 발열량에 혀를 내두르는 네티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기본 쿨러로는 감당하지 못하고, 전문 쿨링 업체가 만든 고급형 공랭 쿨러를 장착해야 하는 괴물과 같은 녀석이다.

i웍스에도 해당 모델이 탑재되었는데, 발열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수냉 쿨러를 장착해야 했을 정도다. 오히려 과감하게 수냉 쿨러를 탑재하고서, 녹색 LED까지 장착해 비주얼을 폭발시킨 덕에 i웍스의 판매량이 기대 이상이긴 했는데, 그만큼 펜티엄 2 700을 구동하는 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대신 성능 하나는 확실하다.

AMD의 최상급 모델 보다 30%는 더 빠른 탓에, 오로지 성능만 추구한다면 무조건 인텔을 권하는 게 상식이 되어버렸을 정도다.

코드네임 카이로는 인텔의 공정보다 반 박자 앞서 있었다. 인텔의 것은 350nm인데, 카이로는 300nm로 한층 세밀해졌다. 다이 사이즈는 카이로가 펜티엄 2보다 40㎟정도 작은 크기였다. 칩의 구동에 필요한 전원도 펜티엄 2는 2.8V였고 카이로는 1.5V로 한층 다이어트를 했다.

“회장님께서 가장 궁금한 건 연산 성능이겠지요?”

“그럼요! 너무 궁금하네요.”

카이로의 스펙을 보니 점점 기대감이 커졌다. 그런 유재원의 모습을 보며 리사 수는 다음 슬라이더로 넘겼다.

두 프로세서에 동일한 벤치마크를 돌려 성능을 측정한 표가 떴다.

“으흠?”

딱 보니 카이로는 펜티엄 2 700MHz의 성능의 1/5 정도였다. 그냥 보면 성능 차이가 너무도 심하게 벌어졌다. 만약 카이로가 x86호환 프로세서로 시장에서 경쟁했다면 이젠 뒤로 밀려난 사이릭스와의 경쟁에서도 이기지 못했을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카이로는 x86호환 프로세서가 아니다.

“카이로는 x86 아키텍처에서 탈피해 무의 상태에서 완전히 새롭게 설계된 RISC방식의 저전력 프로세서입니다. 저전력에 포커스를 맞춘 만큼, 공정한 비교를 위해서는 전력당 성능비를 봐야 합니다.”

펜티엄 2와 카이로는 프로세서를 구성하는 아키텍처 자체가 달랐다.

덕분에 펜티엄 2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로 간단히 구동한 상태로 측정된 수치였고, 카이로는 임시로 만든 테스트용 보드에, 운영체제도 티파니폰에 들어가던 모바일 운영체제를 카이로의 RISC 방식의 아키텍처에 맞게 포팅해서 구동시킨 상태였다.

리사 수 박사가 말한 전력당 성능이라는 것은 프로세서의 성능을 소모된 전력으로 나눈 값이었다.

그러면 1와트당 성능이 딱 나온다.

플러그를 통해 무제한적으로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에선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배터리의 용량이 한정된 모바일 기기에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수치였다.

“전력당 성능비에서 카이로는 펜티엄 2를 10% 이상 앞질렀습니다.”

리사 수의 말과 함께 슬라이드 화면에서 빈 공간이었던 항목의 값이 임팩트 있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떡하니 나타났다.

1와트당 펜티엄 2의 벤치마크 점수는 81점이었고, 카이로는 90점이었다. 그러니 매우 제한된 전력 공급 상황에서 카이로는 펜티엄 2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리사 수 박사님이네요!”

유재원은 당연히 크게 박수를 쳤고, 수행을 위해 따라 나선 김대석이나 ID 테크놀로지의 임원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이 성과는 저 뿐만이 아니라, 함께 해준 연구원들과 회장님의 무한한 지원 덕분입니다.”

리사 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박수를 즐기면서도 그 공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물론 다른 연구원과 함께 이룩한 성과이고, 유재원도 자금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원을 지원했다곤 해도, 리사 수 본인의 역할이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건 변함이 없다.

“회장님이 내준 과제에 성공한 것은 참 기쁩니다만,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제품을 쓸 만한 기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리사 수의 발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전력 프로세서인 카이로의 완성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부터 생겨난 의문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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