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1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는 해도 수억, 어쩌면 수십억 달러가 오고갈 초대형 비즈니스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빈센트 사장님, 많이 기다리셨죠? 그럼 계속해주세요.”
-예, 그러면 이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스크린 속의 빈센트 사장이 다시 발언을 시작했다.
테드 터너의 뜬금없는 전화가 오기 직전까지 빈센트 사장은 ID 인베스트먼트가 94년도에 이뤄낸 성과를 하나하나 펼쳐 보이면서 기세를 올리던 중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미국 IT 섹터의 주식 총액이 200억 달러를 돌파했으니,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인텔, AMD, 시스코, 퀄컴, 마이크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IBM 등등의 주요 종목은 유재원이 찍어주긴 했지만, 빈센트 사장이나 투자 매니저들이 선정해서 놀라운 수익을 올린 종목도 많았다.
-IT섹터의 전망은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매우 밝습니다. 94년도 월스트리트의 성장을 IT 섹터가 주도했다지만, 그 성장의 모멘텀은 전혀 꺾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셀룰러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떠오르고 있으니, 성장의 폭은 훨씬 확대될 것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아시아입니다. 특히 동남아시아,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외자 유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들이 차입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엔케리트레이드의 규모도 상상 이상의 속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동아시아쪽으로 확산되고 있고, 파생상품과도 결합하면서 위험성도 높아지는 걸 감지했습니다. 너무 큰 비약이긴 한데, 만약 연결 고리 한 곳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동아시아 전체에 외환 위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와, 벌써 전체적인 그림이 나온 거예요?”
-회장님께서 힌트를 많이 주셔서 쉽게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내년도 전망 보고서에 담아서 늦어도 12월 말에는 배포할 예정입니다.
“알겠어요. 기대할게요.”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가 나오면 사람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신일본투자은행도 16%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였습니다.
미국 IT섹터 투자가 워낙 대박이다 보니 16%라고 하면 너무 적어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2.3%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볼리비아 리튬 광산도 전 세계의 2차 전지 수요 증가와 LCD 산업의 성장으로 전년도에 비해 괄목할만한 매출을 보였습니다.
빈센트 사장은 도표도 보여주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수량은 1만 4천 톤인데, 이중 ID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볼리비아 광산에서에서 산출된 것은 5천 톤이 넘는다. 국제 광물 거래 시장에서는 킬로그램 당 12달러이니 단순 계산으로 6천만 달러 정도의 매출이 나온 것이다.
현지 광산 업체, 볼리비아 정부 등등과 수익을 분배하고 난 실제 수익금은 대략 2,500만 달러 정도였다.
억 단위를 자랑하는 수익 사업이 즐비한 ID 그룹이니 2,500만 달러짜리 광산 산업은 한 마디 하고 지나가는 정도의 존재감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리튬의 수요가 폭증하고, 중국이 희토류를 자원무기 삼아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 가격은 지금의 10배는 쉽게 넘겨버린다. 생산량도 날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니, 광산 투자로 들어오는 수익의 규모가 안드로이드 사를 능가할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바로, 어제 칠레 정부에서 아타카마 지역 희토류 광산 개발에 우리의 투자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건 국가 간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칠레와 볼리비아는 영토 전쟁을 벌였을 만큼 사이가 매우 나쁜 국가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볼리비아가 리튬 개발로 대박을 터트렸으니 자연스럽게 질투나 날 수 밖에 없다.
리튬을 비롯해 여러 가지 희귀 광물이 나오는 지역을 칠레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개발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적극적인 투자 유치는 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볼리비아가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로 잘 나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던 모양이다.
“당연히 응해야죠. 서류가 온 게 있으면 바로 검토하게 보내주세요.”
볼리비아에 특별히 호의가 있어서 유우니 광산에 집중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새로운 투자처가 있으면 얼마든 중복 투자가 가능한 유재원이었다.
더욱이 볼리비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국가였다. 당장 95년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아무것도 없는 볼리비아에서 그나마 건강한 돈줄인 유우니 광산을 쿠데타 세력이 멋대로 손대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 말고도 주요 자원의 공급처는 다변화를 해놓는 건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아직 정식 제안서가 온 건 아니고, 슬쩍 떠보는 정도였습니다. 회장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달해주면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 ID 인베스트먼트가 진행 중인 사업들에 대한 보고를 모두 마친 빈센트 사장은 곧, 회계 자료 보고로 넘어갔다.
여러 가지 항목의 숫자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항목 하나하나가 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유재원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것은 순수익이었다.
인건비를 비롯한 각종 영업비용과 법인세를 빼고 남은 순 수익 말이다. 빈센트 사장도 유재원의 의중을 이미 읽었는지, 곧바로 해당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영업 이익은 25억 9,841만 달러이고, 각종 비용과 법인세 등의 세금을 제외한 순 수익은 12억 5760만 달러입니다.
“그렇게나 많아요?”
아직 투자를 청산 하지도 않았는데, 영업 이익이 25억 달러나 나왔다는 건 유재원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따져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상품에 투자한 이들의 환급이나 재가입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투자 상품을 가입할 때는 수수료가 발생하고, 중간에 청산할 때에는 운영비와 성과보수의 명목으로 수익금의 30% 정도의 수수료로 발생한다.
30%가 좀 많은 것 같지만, 다른 회사들에 비하면 천사다.
1년 동안 예치한다고 했다가 중간에 취소하면 전체 수익금 중에 70%는 떼가는게 일반적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ID 인베스트먼트는 중간에 정산하면 30%, 만기에 정산하면 20%라는 엄청나게 저렴한 수수료를 자랑한다.
94년에 IT섹터의 수익률이 수십 퍼센트 단위이니 그 정도에 만족한 사람이 많았는지, 상당한 액수를 환급해간 모양이다.
특히 HTS의 지원으로 집에서 수익률을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중간 정산을 원하는 고객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빈센트 사장의 설명이다.
하긴, 예전 종이 통장 시절엔 일일이 전화로 문의해야 했다면 지금은 집에서 간편하게 실시간으로 수익률을 확인할 수 있다. 모니터에 찍힌 수익률을 보고 마음이 달라진 사람이 많았다.
반대로 그렇게 높은 수익률을 확인하고서 ID 인베스트먼트에 돈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아서, 회사가 챙길 수 있는 영업 이익이 크게 발생한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별 말씀을요.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재원은 수고 많으셨다는 말로 ID 인베스트먼트의 보고를 만족스럽게 받았다.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총알이 잔뜩 장전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덕에 너무도 든든했다.
이제 남은 연말 정산은 ID 그룹의 대들보와 같은 ID 테크놀로지와 무서운 신예 ID 엔터테인먼트, 단 둘이다.
#370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6)
“울티마 온라인의 현재 유료 가입자는 월 평균 95만 명이고, 일간 동시 접속자 평균치는 76,351.5명입니다. 저녁 골든타임의 경우엔 12만이 넘습니다.”
오리진 시스템즈의 리처드 개리엇이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 연말 정산의 핵심 데이터를 말했다. 그와 함께 스크린에는 회계 자료도 함께 떠올랐다.
ID 엔터테인먼트의 연말정산인데, 스테판 바버 사장 대신 오리진 시스템즈의 리처드 개리엇이 먼저 발표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직책에서 알 수 있듯 조직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ID 엔터테인먼트는 경영권이 보장된 게임 개발사를 여럿 거느리고 있기에, 해당 스튜디오에서 먼저 발표를 하고 마지막에 스테판 바버 사장이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얼리 액세스라는 이전엔 없던 모델로 운영을 시작했던 울티마 온라인은 아직도 얼리 액세스 단계였다. 피드백을 계속 받으면서 게임을 만들고 있다 보니 리처드 개리엇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점점 늘어났다. 이것저것 추가하느라 정식 발매일은 몇 달 미뤄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리 액세스 정책 덕분에 신규 가입자는 꾸준히 늘어서 거의 1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상당한 성적이었다.
얼리 액세스라지만 12달러라는 접속료가 있다. 패키지 형태로도 팔고, 온라인에서도 살짝 저렴하게 판매 중인데, 누적으로 370만개를 팔았고, 이를 통해 4,56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처음 한달만 해보고 취향이 아니라며 그만 둔 사람이 상당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구독권을 사주는 사람이 95만 명은 된다는 이야기다.
유료 가입자가 95만 명이라는 건 상당한 수치였다. 94년 12월이라는 현재 시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의미가 있었다.
북미 시장이 세계에서 제일 큰 시장이긴 해도 본격적인 대규모 온라인 RPG 게임은 처음 나온 것인데,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정식 발매는 예정대로 될 것 같습니까?”
“예! 3월 초 발매 예정 스케줄에 따라 착실히 개발 중입니다.”
이미 한 차례 미뤄진 탓에 리처드 개리엇의 대답엔 진땀이 섞여 있었다.
“혹시 밤새도록 개발하고 그런 건 아니고요?”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발매일이 가까워지면 퇴근이라는 단어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원래 8시간 근무가 정상인데, 12시간 혹은 아예 퇴근하지 않고 회사에서 자고 일어나며 발매 예정일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알겠어요. 만약 개발 일정을 스케줄대로 맞추기 어렵다 싶으면 노동 시간 늘리지 말고 신규로 직원을 늘리세요.”
ID 그룹처럼 TO 쉽게 늘려주는 회사는 없다.
당연히 유재원의 특별한 철학이 담긴 결정이었다. 전생에 두 사람, 심지어 세 사람이 할 일을 혼자 하다 보니 죽을 것 같다는 경험을 확실하게 했다. 오너 놈들은 몇 푼 안 되는 인건비 좀 아끼겠다고 벌인 짓이었는데, 휩쓸린 유재원은 퇴사를 심각하게 고려할 만큼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렸다.
보통의 직원보다 높은 효율과 업무 처리 능력을 보여주면 그만큼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일감만 잔뜩 몰아주는게 한국의 일반적인 직장의 모습이다.
특히 IT분야에서는 더더욱 심했다. 실제로 막 포텐을 터트렸던 유재원은 처음엔 열심히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능력자에 대한 케어도 없이 일감만 몰아주던 그 회사는 유재원이 나가자 망했다. 그걸 보고 본인 혼자서 회사 하나를 먹여 살리고 있었구나 하며 뭔가 깨달은 유재원은 직접 사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ID 그룹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원인부터 확실히 제거하고자 하는 유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