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0화
세계적으로 보면 필요한데 수익성이 떨어져서 투자가 취약한 말라리아나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투자도 있었고, 예술에 대한 투자 항목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모두 유재원의 지시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고, 일석삼조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밑밥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에 대한 투자보다 더 리스크가 큰 것이 바로 의약분야였다.
수천억 원을 들인 신약 개발이 발매 직전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 때문에 엎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찍는 족족 터지는 10할 타자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이면 그것 그대로 문제였기에,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 지금과 같은 방식이었다. 덤으로 이러한 투자를 의약 분야에 언제든 진출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한 것이었다.
당장은 무모하게 보이겠지만, 이번에 뿌린 씨앗들로부터 파릇한 새싹이 터 오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정 법무법인이 있습니다.
김&정 법무법인의 94년도 업적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서의 승소 하나면 끝이다. 그렇지만 김&정 법무법인은 해당 소송을 메인에 놓고 진행하면서 동시에 수백 번의 재판을 치렀다.
김&정 법무법인을 만든 취지가 법률 서비스 취약 계층의 지원이었고, 이를 충실히 실행한 결과였다. 서민들 그리고 조그만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최우선적으로 찾는 곳이 김&정이 되었다.
현재 김&정에 속한 변호사들의 숫자는 20여 명인데, 내년에는 파트너 변호사들 숫자를 대폭 확대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ID 파운데이션의 연말정산은 합격점이었다.
아버지가 발표했다고 그런 게 아니라, 비영리 자선단체의 덕목이란 효율적인 지원과 함께 대상자 선정에 뒷말만 나오지 않도록 하고, 비리 척결만 확실하게 하면 되는데 ID 파운데이션은 이 덕목을 확실히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잘 들었습니다.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허허, 우리 회장님 하는 일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항상 장하게 보고 있습니다.
서로의 칭찬을 주고받은 부자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ID 파운데이션의 연말 정산을 마무리했다.
“자, 이제 퇴근할까요?”
자리가 정리되자 유재원은 곧장 퇴근을 외쳤다.
서울은 아직 오전 이지만, 샌프란시스코는 퇴근 시간에 가까워진 때였다.
내일부터는 안드로이드 사부터 ID 엔터테인먼트까지, 그룹의 핵심 사업체의 연말정산을 시작한다. 말랑말랑하게 진행한 비영리 조직들의 연말정산과 달리 현미경과 메스를 들이대며 낱낱이 파헤칠 작정이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오는 게 여러 모로 좋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369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5)
“흥미롭군.”
로버트 에드워드 터너 3세, 보통은 테드 터너라고 불리는 이는 뉴욕 59번가에 위치한 본인의 사무실에서 컬러풀한 인쇄로 만들어진 책자를 보면서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책자의 표지에는 안드로이드 로고가 크게 찍혀 있었고, 대주주 배포용 연말정산 보고서라는 제법 긴 제목도 작게 적혀 있었다.
테드 터너가 출근 했을 때부터, 책상에 올려가 있던 이 책자였다. 처음엔 땐 뭔가 싶었다.
CNN을 비롯한 다양한 케이블 방송사를 차리기도 했고, 몇몇 상장 기업에도 거금을 들여 지분 투자를 하기도 했는데, 한 해를 마감한다고 상세한 정산 보고서를 보내주는 곳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안드로이드 사는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이고, 본인도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 회계 장부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산의 변동 사항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렇다고 분식을 해서 좋은 것만 취사선택해서 담은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회계법인의 공증을 받아 만들어진 자료였기에, 분식회계는 생각도 할 수 없다.
물론 현재의 안드로이드 사는 그러한 분칠이 필요 없을 만큼 잘 나가는 중이었다.
당장 오늘의 주가만 봐도 35달러에 근접하고 있을 만큼 쭉쭉 성장 중이었다. 최근에 출시된 안드로이드 95의 반응이 너무도 좋은 덕이었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만 보고서를 내고 흐린 날에는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막 들기도 했는데, 책자의 첫 장에 그런 테드 터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매년 겨울에 정기적으로 발행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역시 특별해.”
유재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테드 터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아쉬움도 진득하게 몰려 왔다. 초창기 지분 투자를 할 수 있을 때, 좀 더 많이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최근에는 종종 드는 탓이다.
상장 초기만 해도 주당 23 달러였던 주가는 지금 35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니 60%가 넘는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테드 터너가 했던 여러 번의 투자 중이 이렇게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률을 발생한 건 처음이었다.
“완전 독점이구만.”
안드로이드 사에서 보내준 책자를 보면, 94년 한 해 동안 안드로이드 2.0 게이밍 에디션을 총 4천만 패키지 이상을 팔아 치웠다고 되어 있었다. 전 세계 완제품 컴퓨터 업체들이 출시하는 PC에 97% 이상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기본 탑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애드웨어 버전의 광고 슬롯 판매 수익과 기업용 버전 판매는 따로 잡혔다는 친절한 설명이 보고서에 있었다.
“56억 달러인가? 아니군. 5억 6천만 달러로군.”
흐뭇하게 보고서를 읽던 테드 터더는 영업이익 대목에 와서 물음표가 켜졌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점유율을 자랑했지만, 영업이익이 생각보다 많은 액수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유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예전 MS시대에는 DOS 패키지 하나가 120달러였다. 그런데 지금은 CD로 배포되는 대형 운영체제임에도 단돈 9.9달러라는 헐값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팔아봐야 기대 이상의 수익이 생기진 않는 것이다.
수익성을 따지면 하드웨어 파트가 더 좋았다. 라이브 포스 피드백이라는 게임기 컨트롤러에 진동을 부여하는 기술의 라이센스 수익만으로 1억 달러는 가뿐히 넘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란 일본산 게임기에는 라이브 포스 피드백이 기본이 되진 못했지만, 별도로 파는 조이스틱에는 다들 이 기술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별도 발매된 제품을 다들 너도나도 샀다. 진동의 유무에 따라 게임의 즐거움이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안드로이드 사가 만드는 여러 응용프로그램들의 소개와 함께 판매량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었다. 동영상 편집용 프로그램부터, 간단한 웨이브 파일 에디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이렇게 해서 안드로이드 사가 94년에 올린 총매출액은 7억 5,400만 달러이고, 각종 비용을 뺀 순수익은 4억 5,240만 달러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중에 2억 달러는 사내유보금으로 남기고, 2억 5240만 달러를 내년 초에 배당하겠다고 결정했다. 혹시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이사회에 의견을 보내달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지분을 10%가진 테드 터너였으니, 이대로 배당이 이뤄지면 2,524만 달러를 배당 수익을 올리는 것인데, 나스닥에 상장한 IT 기업 중에 이렇게나 많은 배당을 주는 곳은 안드로이드 사가 유일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조금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가격이 MS시절과 마찬가지로 120달러부터 시작했으면, 배당 수익도 억 단위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95시리즈는 12달러부터 시작한다던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 나온 안드로이드 95 시리즈는 12달러로 가격이 조금 올랐다는 점이다. 120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저렴한 금액이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20%가 넘는 상승이다.
“그 친구가 내년엔 방송국도 넘보고 있다지?”
테드 터너가 몸담고 있는 곳이 바로 방송계였다.
방송계에서 최근 들리는 소문은 바로 넥스트컴캐스트가 대규모 M&A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시중에 도는 소문은 다양했다. 지역 네트워크를 인수한다는 이야기부터, 아예 북미 전역에 송출되는 방송국도 차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심지어 이런 식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이유가 넥스트컴캐스트 고객 게시판을 본 유재원이 본인의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격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정황도 있었다.
하여튼 공중파로의 진출은 불가능할 테지만, 넥스트컴캐스트가 가진 유선망이라면 미국과 캐나다의 거실에 신규 채널을 꽂아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전문가가 바로 옆에 있는 데, 왜 전화 한 통 없는 거지?”
테드 터너는 안드로이드 사의 연말 정산 보고서를 내려놓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미국 방송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 맨 손에서 시작해 CNN, TBS 등의 미디어 제국을 일궈낸 존재 아니던가.
“설마 머독 놈에게 먼저 전화를 한 건 아니겠지?”
테드 터너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뉴스 코퍼레이션의 회장 루퍼트 머독이었다. CNN과 폭스 뉴스의 차이처럼 테드 터나와 루퍼트 머독은 성향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렇지만 루퍼트 머독도 방송 업계에선 알아주는 거물이었다.
유재원이 머독에게 먼저 문의를 해봤다는 상상만 해도 화가 절로 솟구치는 테드 터너였다.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면, 아직 뭔가 시작도 안한 상태이니 무슨 움직임을 보일 일도 없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도, 머독 생각에 생각의 폭이 좁아진 테드 터너다.
“흠, 안 되겠군.”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속이 좀 타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테드 터너는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바로 전화기를 든 테드 터너는 유재원의 전화번호를 바로 입력했다. 그러자 기분 좋은 전화벨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왜 친분하나 없는 머독 씨에게 연락을 하겠어요?”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유재원에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ID 인베스트먼트의 연말정산 보고를 막 시작하려던 참에, 유재원에게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던 탓이다.
보통의 전화라면 보고가 끝나고서 다시 연락 달라고 한다거나, 메모를 받고 전해주겠다고 할 텐데, 상대가 타임워너의 테드 터너 부회장이었으니 유재원은 보고를 잠시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방송국 인수요? 케이블을 가졌으니 당연히 자체 방송도 해야겠죠. 그런데 인수를 할지 아니면 아예 새로 만들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어요. 일단 조사 단계죠……. 당연히, 본격적으로 시장에 띄어 들면 터너 부회장님께 먼저 연락을 드려야죠. 이런 일에 누구보다 전문가라는 건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요. 게다가 우리 안드로이드 사의 대주주님이기도 하고요……. 네, 그럼 다음에는 제가 직접 연락을 드릴게요.”
통화는 3분 정도로 짧았다.
대신 통화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95년도에는 넥스트컴캐스트에 집중하겠다는 유재원의 의지 표명이 있긴 했는데, 구체적인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만에 하나 기존의 방송국을 인수하는 방식이라면 테드 터너가 속한 타임워너와 먼저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유재원이 직접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