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87화 (387/1,007)

제 509화

“할 수만 있다면 투자를 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우리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거절합니다.”

“알겠습니다!”

유재원은 단박에 거절했다. 괜히 투자를 받으면 이것저것 참견하면서 배가 산으로 갈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관심은 아직 식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현황 보고를 마친 카스퍼스키는 곧이어 현재 개발 중인 MK4 모델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MK4모델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할 과제는 디지털 카메라와 비행보조센서 그리고 데이터 통신입니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미래의 기술 동향을 읽은 것처럼 드론 개발팀은 가장 중요한 핵심 기능을 잘 캐치했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드론과 제일 궁합이 잘 맞는 것이 디지털 카메라였다. 항공 촬영은 지금도 돈이 많이 드는 기법이었다. 최소한 헬기를 동원해야 찍을 수 있는 구도였으니 말이다. 드론에 디지털 카메라를 결합하면 아무나 할 수 없던 항공촬영도 누구나 저렴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이목을 이보다 강렬하게 잡아끄는 대목은 비행보조센서라는 단어였다.

“드론이 기동하는 장소가 뚫린 평원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숲이나 건물이 밀집한 장소라면 문제가 커집니다. 컨트롤러를 잡은 파일럿의 역량에 따라 비행 능력이 천차만별입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누구나 쉽게 사용한다는 전제가 깨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암논 샤슈아 박사의 논문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핵심이 나왔다.

암논 샤슈아 박사는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라서 기억의 궁전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모빌아이라는 기업의 창업자인데, 자동차에 탑재되는 다양한 센서와 이를 활용하는 제어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였다.

처음에는 일반 자동차에 들어가는 초음파 센서를 내놓았고, 나중에는 자율주행자동차에 들어가는 광학센서를 만들었다.

모빌아이가 없었으면 자율주행 자동차의 상용화는 30년은 늦춰질 거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대대적인 혁신을 이뤄낸 기업이었고, 이 가치를 알아본 인텔이 거금을 들여 인수해 자회사를 만들었을 정도다.

암논 샤슈아 박사의 생각은 간단했다.

초음파 센서를 자동차의 사각 지대에 장착해서 운전자가 미쳐 챙기지 못한 위험을 대비하게 해주는 것이다. 처음엔 사각지대에 뭔가 잡힐 경우 소리만 났지만, 나중에는 자동차의 구동계에 직접 개입해 운전자가 대응하기 전, 자동차 자체적으로 대비하도록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이미지 센서를 통해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이를 주행에 반영해 완전한 인공지능자율주행의 초석을 다졌다.

드론팀의 의도도 이와 비슷했다.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빠른 드론이었고, 비행 거리가 늘어날수록 파일럿이 직접 보고 대응할 시간은 매우 짧아진다. 그러니 파일럿이 수동으로 조작하기 전에, 미리 드론에서 위험을 파악해 비켜간다거나, 미리 정지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회피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게 암논 샤슈아 박사의 초음파 센서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암논 박사와는 학회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사이인지라 논문 검색으로 이름이 나오자마자 바로 연락을 해봤습니다.”

“그래서요?”

“다행히 그 친구도 우리의 제안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고, 협업에도 긍정적이었습니다.”

안톤 박사는 행동력도 좋았다. 벌써 암논 샤슈아 박사와 만나서 이야기도 했고, 여러 가지 선택지를 만들어서 유재원 앞에 가져온 것이다.

ID 하이테크에 입사하는 건 어렵지만, 라이센스나 투자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본인의 기술을 제공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하이테크 연구소로 모셔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지금쯤이면 본인이 직접 사업체를 꾸릴 계획은 다 해놨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렇게 창업한 회사의 잠재력을 알아본 러시아 사업가가 수백만 달러의 거금을 투자했을 정도로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스터플랜을 짤 때, 유재원도 모빌아이에 대해 조금은 고려를 했는데 초창기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나중에 상장한 다음 인텔에 팔리기 전에 먼저 가로챈다는 계획을 세웠을 정도다.

그런데 마당발인 안톤 박사 덕에 훨씬 일이 쉽게 풀렸다.

“당연히 투자하겠습니다.”

암논 박사의 센서 기술을 활용할 방법은 다양했다. 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그걸 다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투자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는 계속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소형 디지털 카메라 기술의 자체 개발이나, 디지털 카메라가 생성한 고화질 사진이나 동영상 데이터를 무선으로 PC에 전달 받는 통신 방식을 개발하는 것도 승인 되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연구 과제들이 승인되었고, 이러한 개발 과제 수행을 위한 예산도 확실히 집행해주었다.

유재원의 기대도 컸다.

드론 연구 하나만으로도 파생되는 기술이 어마어마했다. 성공적으로 끝나기만 한다면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혁명이 일어날 일이었기에, 유재원은 그 날이 빨리 오길 바랐다.

ID 하이테크 연구소가 성공적으로 시작한 연말정산은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유재원은 예상치 못한 민망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어흠흠, ID 파운데이션 이사장 유봉만입니다.

오늘은 ID 파운데이션 차례였다. 그런데 프로젝터 화면 속에서 서두를 시작하고 있는 건 본인의 아버지인 유봉만이었다.

덕진사학재단, 핸드볼협회장 등등의 다양한 직책을 가진 유봉만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는 역시 ID 파운데이션 이사장이었다. ID 파운데이션이 한 해에 지출하는 예산만 수천 억 원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거대한 재단에 비리가 끼면 큰일이었기에, 유재원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아버지를 선택했다. 물론 실무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시다는 건 잘 알고 있기에 ID 그룹의 인재들을 여럿 파견했다.

그렇기에 연말정산도 실무진에서 보고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떡 하니 등장하셨다.

예상 밖이었기에 유재원은 뭐라 반응을 하지 못했다. 대신 유재원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레밍턴 사장을 비롯한 그룹 임직원들이 뜨거운 박수로 아버지 유봉만을 맞이 해주었다.

“어, 음! 이사장님이 직접 발표하실 건가요?”

-예!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 아니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상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ID 파운데이션 역시 돈을 벌자고 만든 조직은 아닌터라, 연말정산에서도 수익의 유무를 따지진 않는다.

세는 돈이 있는 지 살펴보는 건 감사실이나 외부 회계법인의 감사, 내부 고발자들의 제보를 통해 매일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자리에서는 올해 했던 각종 나눔 행사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계획 정도를 들어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유재원도 가볍게 생각하고 나왔는데, 아버지가 떡 하니 등장하니 동공에 지진이 살짝 왔을 뿐이다.

-그러면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94년에 집행된 예산의 규모는 대략 2,400억 원으로 전 세계의 그 어떤 자선단체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자평했다. 90%는 ID 그룹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이었고 나머지 10%는 ID 파운데이션의 나눔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낸 후원금이다.

단일 항목으로 가장 지출이 컸던 사업은 난치병에 걸린 어린이들을 돕는 것으로 미화 1억 달러, 한화로 800억 원을 썼다. 조작 제보나 조작 추천으로 인해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사업이었다.

덕분에 사회에서의 반응도 너무나 뜨겁다고 한다. 내년에도 난치병 어린이 지원 사업을 진행하는 지 문의도 끊이지 않았고, 올해 들어온 민간 후원금도 난치병 어린이 지원 항목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다.

“이사장님의 의견에 따라 난치병 어린이 지원 사업은 앞으로도 꾸준히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ID 파운데이션의 규모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일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기부금의 규모는 ID 그룹의 규모와 비례하고 있는데, ID 그룹의 규모가 줄어들 일은 없으니 말이다.

조작에 대한 대비는 이제는 철저히 만들어졌으니, 아예 난치병 어린이 지원을 정규 항목으로 편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음은 장학 사업입니다.

아버지가 슬라이드를 넘겼다.

화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698억 원이라는 금액이었다. 바로 94년도에 장학금을 쓴 총액이었다.

난치병 어린이의 치료비 지원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진 사업이지만, 장학사업의 경우엔 미국과 한국 한정으로 이뤄졌다.

이는 ID 그룹의 주요 활동 무대가 미국과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장학사업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해,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을 욕심이 있으니 당연히 두 나라에 집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장학금을 무조건 성적만 따져서 주는 건 아니었다.

성적 장학금의 경우 대학교에서도 많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ID 파운데이션의 장학금은 성적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은 편이다. 점수에 대한 가중치가 없고, 평균보다 살짝 좋은 성적만 받으면 OK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난치병 어린이 지원자로 선정된 사람보다 장학생으로 선발된 숫자가 훨씬 많았다.

당연히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좋았다. 게다가 ID 장학생이 되면 ID 그룹 입사 때 가산점을 받을 거라는 헛소문까지 돌면서 인기가 폭발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지원하고 보는 게 요즘 대학생들의 기본 빌드라고 한다.

-올해는 미국 덕진재단도 정식으로 싱크탱크 활동을 시작한 한 해이기도 합니다.

덕진재단은 말이 싱크탱크이지, 실제 활동은 미국에 친한파 정친을 양성하기 위한 후원 조직이었다. 일본의 그 유명한 사사카와 재단의 활동을 레퍼런스 삼아서 기획한 것인데 로비스트를 대거 고용해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유력한 정치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존재감이 커질 정치 꿈나무들에 대한 지원도 했다.

아직은 사사카와 재단과는 체급 차이가 좀 나는 거 사실이다. 대신 앞으로 꾸준히 지원해 그 규모를 한 껏 키울 예정이다.

물론 미국의 친일 행적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 인터라 하루아침에 능가하진 못할 테지만,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이전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덕진재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미국에선 살짝 해프닝이 있었다는 점이다.

덕진은 그냥 마을 이름이었다. 그런데 로고를 만들 때 D와 J를 강조하다 보니 미국 사람들 보기엔 DJ재단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국 정치인이 김대중 전 의원이었는데, 그의 약자가 DJ였으니 동교동계가 만든 후원단체로 오해를 한 것이다. 로고를 재빨리 수정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냥 뒀으면 무슨 후폭풍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유봉만은 ID 파운데이션의 여러 활동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20분 정도 더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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