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86화 (386/1,007)

제 508화

이후 며칠이 더 지났다.

다행히도 유재원의 무료함은 이제 다 끝났다.

12월 중순에 이르러 ID 그룹의 94년도 성과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연말정산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보스, 오랜만입니다.”

연말 정산을 위해 유재원은 실리콘밸리의 ID 테크놀로지의 사무실에 직접 출근했다. 그런 유재원을 레밍턴 사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에이, 어제도 ID톡으로 만났잖아요.”

“그렇습니다만, 실제로 보는 거랑 채팅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죠.”

“그건 그래요.”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레밍턴과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안드로이드 95를 발표하기도 이전이었다.

암만 채팅을 열심히 해봐야 직접 만나서 차 한 잔 마시는 게 유대감 형성에는 훨씬 도움이 될 거다. 물론 말주변이 없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라면 채팅이 더 낫겠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좋은 건 없다.

“엠마는 잘 크고 있죠?”

“후훗, 사진으로 보시죠.”

그러면서 레밍턴은 본인의 책상 위에 있던 태블릿 PC를 들어 사진을 띄웠다.

태블릿 PC는 예전에 대전 엑스포에서 쓰던 바로 그 모델인데, 처치 곤란이었다가 ID 테크놀로지 임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다들 알아서 잘 쓰고 있는데, 레밍턴은 디지털 액자로 활용하고 있던 모양이다.

“미운 4살이 되서 저나 섀넌이나 애를 먹고 있지요.”

태블릿에 뜬 엠마는 개구쟁이 그 자체였다.

얼굴 가득 장난기가 올라와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동시에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는 게 사진으로도 딱 보일 지경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도 기대하라고 전해주세요.”

“이번에도 오시는 겁니까?”

“그럼요. 혹시 제가 귀찮으신 건 아니죠?”

“절대요! 엠마와 섀넌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 때마다 레밍턴 사장네 집에 들려 점심 혹은 저녁을 얻어먹는 게 일종의 패턴이 되었다. 갈 때마다 엠마의 선물도 직접 준비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트렌드를 딱 읽고 있던 유재원이니 빗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엠마 이야기를 실컷 한 유재원은 레밍턴과 나란히 연말결산을 하는 사무실까지 걸었다.

“이 사무실에서 연말 결산하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겠네요.”

복도를 걸으며 레밍턴이 감회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내년에는 ID 테크놀로지 신관 건물이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지진이 종종 있는 지역이라서 층수를 높이 올리지 않은 대신, 옆으로 긴 형태로 설계했다. 덕분에 완공 속도도 매우 빨라서 내년 초여름쯤에는 입주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뭐, 여기로 출근하고 싶으시면 그러세요.”

그렇다고 실리콘밸리에 있는 이 건물이나 플래그쉽스토어가 철수한다는 건 아니었다. 신관 건물로 모두 옮긴 다음, 리모델링에 들어갈 것이고,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예정이기에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저도 새로운 게 좋습니다.”

레밍턴은 ID그룹이 조직의 체계를 갖추기 전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덕분에 유재원과 ID 그룹 성장을 함께했기에,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벤처기업이 생겼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실리콘밸리에서 이렇게까지 성장한 기업은 ID 그룹이 유일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직도 그 성장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밍턴도 ID 테크놀로지의 올해의 연말 결산을 준비하면서 그러한 증거들은 수두룩하게 나왔다. 레밍턴은 연말 결산을 하면서 어서 빨리 그 증거들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오늘은 ID 테크놀로지 차례가 아니었다.

계열사도 여럿 거느리고 있고, 연구소부터 자선단체까지 다양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ID 그룹이었다. 그래서 시작은 가볍게 외각 조직부터 하고, 핵심 계열사는 좀 더 준비 시간을 줘서 정확한 연말결산을 준비토록 배려했다.

연말정산의 시작은 ID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ID 하이테크부터 하는 것으로 정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샤일로프 박사님도 안녕하세요. 그간 잘 계셨지요?”

ID 하이테크 연구소 소장인 샤일로프 박사가 오랜만에 연구소에서 나왔다. 하이테크 연구소는 안드로이드 사 본사가 있는 레드먼드에 있었고, 샤일로프 박사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넘어오자마자 그곳에 가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풍족한 지원 덕에 그간 상상만 했던 장비와 실험을 직접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지 몇 년은 되었음에도, 그의 말투에는 러시아식 억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샤알로프 박사는 연구소의 임원급 인물들도 함께 대동하고 방문했기에, 이들과도 잠깐 악수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색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이테크 연구소에 연구직종으로 채용되는 사람들은 유재원과 최소 한 번은 대면했기에, 다들 기억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사가 끝나가 곧장 결산 보고서 발표를 시작했다.

“그러면 ID 하이테크 연구소의 1994년 연말결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발표를 맡은 이는 ID 하이테크 연구소에서 고급 컴퓨터 보안 기술을 연구하는 카스퍼스키 수석 연구원이었다. 레밍턴처럼 하이테크 연구소의 시작과 함께 한 인물이었고, 연구소 소속 학자 중에 제일 어리면서 컴퓨터에 대해 전문가였다. 게다가 영어도 제법 훌륭하게 할 수 있는 터라 발표자가 되는 건 당연했다.

곧이어 커다란 프로젝터 스크린이 띄워졌고, 오늘 발표할 보고서의 목차가 가장 먼저 표시되었다.

목차는 간단했다. ID 하이테크 연구소에서 그간 어떤 연구를 했고, 연구의 성과는 어디까지 왔으며,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하게 될지에 대해 요약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예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보통 다른 회사였다면 제일 먼저 나왔을 항목이다. R&D에 무지막지한 예산을 쏟아 붙는 만큼, 수익도 빠르게 내길 바라는 게 일반적인 회사의 연구소에 대한 인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 기초 연구에 대한 지원은 적고, 수익과 직결되는 응용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유재원은 R&D에 대한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하이테크 연구소에 대한 투자도 확실했다. 애초에 하이테크 연구소를 설립할 때부터 연구소보고 돈을 벌어오라는 지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결산 보고서 형식에서 돈에 대한 것보다 연구 과제에 대해 집중해 작성하라고 지시한 것도 유재원이었다.

ID 하이테크연구소가 진행 중인 과제들은 폭이 매우 넓었다.

지금 발표하는 카스퍼스키가 담당하고 있는 고급 보안 기술부터, 각종 모바일 기기 설계, 드론과 로켓, 광학 기술과 영상 처리 기술, 심지어 연구 소장인 샤일로프 박사의 특기인 핵물리학까지.

ID 그룹을 IT업체로 인식하고 있던 대중이 보았다면, 머리에 물음표가 뜰만한 연구 분야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항목이 아직은 연구 중이라는 꼬리말을 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로켓 엔진이나, 효율 좋은 스마트 원자로 같은 물건이 하루아침에 뚝딱 나올 수는 없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연구가 물음표인 것은 아니다.

“올해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 것으로 드론 연구가 있습니다.”

작년 대전 엑스포에서 선보인 드론인 제법 센세이션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엑스포가 끝나자 드론에 대한 존재는 잊혀졌다. 실생활에서 사용할만한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탓이다.

대신 연구는 이후에도 꾸준히 진행 중이었는데, 그 성과가 제법 크게 쌓인 모양이다.

드론이라는 아이템 하나만으로 하이테크 연구소의 연말결산 보고서 전체 분량 중 1/3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단순히 분량을 채운다고 쓸데없는 내용을 잔뜩 넣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하이테크 연구소 임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호오. 그러면 드론 연구부터 보고해주세요.”

유재원의 말에 카스퍼스키가 기다렸다는 듯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러자 엑스포에서 선보였던 것보다 더욱 작아지고, 훨씬 완성도 있는 모델이 드러났다. 모델의 이름이 MK3이라는 걸 보니 3번째 개선 모델인가 보다.

동시에 설명문이 나타났는데, 재원의 호기심을 끌만한 단어들이 상당했다. CIA, FBI는 기본이고 국방고등연구계획국과 같은 생경한 조직의 이름부터, 암논 샤슈아 같이 뭔가 유태인스러운 이름도 보였다.

기다리면 어련히 설명을 해줄 텐데도, 호기심 폭발한 유재원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368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4)

하이테크 연구소의 드론 연구는 상당히 전문적이고도 고도화된 상태였다.

무작정 주먹구구로 일단 만들어 봤던 초기 연구팀은 이제 없다. 연구원들의 특기를 살린 분업화된 팀이 각자의 파트를 맡아서 열심히 개발 중이었다.

파트는 크게 4가지 부분으로, 드론의 골격과 소재를 연구하는 프레임 팀, 무선 제어를 비롯해 데이터 통신을 담당하는 무선팀, 비행 안정성을 높이는 자세 플라이바이와이어팀, 마지막으로 드론용 디지털 카메라 개발을 담당하는 팀이 있다. 각 팀마다 최소 10명에서 많게는 30명이 넘는 개발 인력이 투입되어 있으니, 드론 하나에만 100명이 넘는 고급 연구원들이 투입되어 있다.

“그렇게 팀을 딱딱 나눠놓으면 팀간의 소통이 좀 어려워지지 않나요?”

“그러한 우려도 있지만, 팀과 팀 사이의 전환을 자유롭게 했고 매주 정례 회의나 ID톡을 통한 채팅 등으로 다양한 대화 창구를 만들면서 소통으로 인한 문제는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유재원의 지적에 드론 개발의 총괄책임자인 안톤 박사가 얼른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를 받은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다음 슬라이드로 넘기겠습니다.”

멀뚱히 서 있던 발표자인 카스퍼스키는 다시금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이렇게 전문화된 이후로 처음 완성된 MK3 모델에 대한 설명이었다.

가볍고 단단한 신소재를 채용하고 배터리 용량을 늘려 비행시간을 10% 늘렸고, 강해진 컨트롤러의 출력으로 기민한 반응 속도와 한층 길어진 제어 거리를 달성했다. 여기에 4개의 모터와 연동된 자세제어프로그램과 이를 구동할 임베디드 시스템이 있어서 갑작스러운 강풍이 불어도 추락하지 않을 정도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엑스포에서 공개했던 매우 단순한 모델과 비교하면 MK3는 어느 정도 유재원이 알던 초기형 드론과 비슷해졌다.

“CIA나 국방고등연구계획국에서 관심이 대단합니다.”

미국 국방부가 주로 사용하는 드론은 미사일가지 장착되는 대형이지만 첩보용으로 쓰기에는 쿼드콥터 형태의 드론이 매우 적합했다. 엑스포에 공개할 때 한눈에 전략적인 용도를 알아본 이들은 ID 그룹에 다양한 형태의 관심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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