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7화
컴퓨터 보급률이 대폭 늘어났다는 게 체감 되는 대목이 퀘이크였다. RTCW의 발매 첫 주 판매량도 굉장했는데, 퀘이크는 이보다 20만 장이 더 나갔다. RTCW의 첫 주 판매량은 112만 장이었던 반면, 퀘이크는 130만 장을 훌쩍 넘었다.
개발비는 첫 주 판매량으로 다 회수했고, 이제부터는 파는 족족 수식으로 잡아도 무방할 정도다. 물론 서버 운영비는 지속적인 지출이 있겠지만, 멀티 플레이 자체가 복사 방지는 물론이고 새로운 게이머를 유입시키는 효과가 크기에 큰 문제도 아니었다.
더구나 존 카멕이 처음부터 작정했던 e스포츠에 관한 대비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예? ESPN이라고요?”
“네, 운 좋게도 결승전을 ESPN에서 중계하기로 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퀘이크 출시 행사를 위해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온 존 카멕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줬다. 내년 3월 초에 개최될 결승전을 스포츠 전문 방송인 ESPN에서 중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토요일 저녁 시간대라서 완벽한 프라임 타임이었다.
북미 전역에 메이저리그나 미식축구를 방송하던 채널에서 e스포츠를 중계한다고 하니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니, 타이밍이 절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이저 리그는 스프링 캠프를 시작하기도 전이었고, NFL은 시즌 마감이 된 때라서 뭘 방송하기가 애매한 때였다. 여기에 ESPN의 시청 취약 계층이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라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들을 잡기 위해 휴식기에 작은 이벤트성 경기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 진행 중인 PC방 워크래프트 대회는 텔레비전은커녕 인터넷중계 조차 없었다. 그냥 경기 당일 해당 PC방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그 소감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는 게 전부였다.
반면 퀘이크는 시작부터 ESPN이다. 물론 한 번 중계하는 임시 이벤트였지만, 만약 반응이 좋으면 방송을 계속 이어갈 가능성도 높다. 설사 ESPN이 아니더라도, 케이블 방송 회사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화제의 지속성이다. 지금이야 신기해서 많이들 보겠지만, 아직은 게임이라는 장르가 대중화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FPS는 화면 전환이 너무도 빨라서 지켜보는 재미가 아무래도 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최초의 정식 방송이니 앞으로 여러 모로 기억될 기념비적인 역사가 되어줄 것이다. 유재원도 이번 이벤트가 절대 망할 일이 없도록 결승전 무대를 꾸미는 데 있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모두 풀어줄 작정이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존 카멕 다음으로 유재원과 대면한 이는 ID 인베스트먼트의 빈센트 그린힐 사장이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아진 느낌이지만, 눈빛이나 분위기는 여전히 열정이 넘쳐흘렀다.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올리면서 수백 억 달러의 자금을 굴리고 있으니,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모양이다.
“다름이 아니라, 투자 리포트 때문에 불렀어요.”
“아하! 리포트 말씀이십니까?”
투자은행이나 증권사들은 한 해를 결산하는 리포트를 내는 게 보통이다. 그러면서 새해 전망도 내놓는데, ID 인베스트먼트는 이제까지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리포트를 내는 건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함인데, ID 인베스트먼트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돈이 알아서 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너인 유재원은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투자자를 모집하는 데 집중했는데, 한국에서는 유재원의 이름 석 자면 어떠한 광고보다 효과가 좋았다.
“이제 우리도 새해 전망에 대한 리포트를 슬슬 내놓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은 거부감 없이 지시를 받았다. 유재원의 결정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더욱이 리포트 발행은 그다지 부담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ID 인베스트먼트엔 월 스트리트에서 난다 긴다 했던 유능한 인재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협력 관계에 있는 경제 연구소도 여럿 있으니 그럴 듯한 리포트를 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잡아야 할까요?”
당연하게도 유재원이 리포트를 내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한국 때문이다.
“우리 거점은 한국에 있으니, 한국을 중심에 놓아야겠지요.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편애나 편견 없이 최대한 사실적으로 평가하시고, 보수적으로 전망하시면 됩니다.”
한국에 거대한 경제 위기가 찾아 올 날이 이제는 3년도 남지 않았다. 이를 대비한 유재원의 첫 번째 대책이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였다.
#367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3)
“갑자기 나만 한가해진 느낌이네.”
세상에서 제일 바쁜 11월을 보낸 유재원이었다. 그런데 12월 초에 이르러 할 일이 뚝 떨어졌다.
물론 ID 그룹 차원에서는 아직도 바쁘긴 매 한가지였다. 퀘이크와 안드로이드 95 시리즈, ID 오피스 95를 출시했다지만, 사용자의 쏟아지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치명적인 오류에 대한 대응을 위해 만전을 기해야 했다.
유재원이 가장 중요한 커널 시스템을 손봐줬기에 시스템 크러쉬가 터지는 치명적인 오류는 없이 안정적이긴 했지만, 하드웨어나 응용 소프트웨어와 운영체제 사이의 호환성의 문제나 100일 마다 메이저 패치를 위해서는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어야 했다. 여기에 유재원이 새롭게 구상한 여러 사업들을 준비하는 부서들은 연말이 따로 없었다.
설사 따로 내린 지시가 없는 부서라고 하더라도 연말에는 바쁠 수밖에 없다. 올해의 성적을 평가하는 연말 결산을 준비해야 하는 탓이다.
“티파니보고 놀아달라고 할 수도 없고.”
심지어 티파니도 아직은 바빴다. 시험 기간인 탓에, 놀아달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 지는 뻔했다.
“게임도 이젠 좀 부담스러운 느낌인데.”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즐겼던 자사의 게임들이지만, 이제는 살짝 질리는 느낌이다. 덤으로 게임을 즐기는 일도 재미보다는 부담이 슬슬 커지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싱글 플레이는 진작 엔딩을 보았고, 멀티 플레이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떤 게임의 멀티 플레이를 하던 아직 유재원과 비슷한 실력을 보이는 상대는 없었던 탓이다.
워크래프트가 출시된 지 이제 2달이 넘었지만,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정교하진 않았다. 초 단위로 빌드를 짜고, 어마어마한 피지컬로 멀티테스킹을 자랑하며 곳곳에서 난전을 벌이고도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유재원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다.
FPS게임인 RTCW와 퀘이크도 마찬가지였다.
가공할 동체 시력과 정교한 컨트롤 덕에 진심으로 게임에 임하면 FPS게임도 넘을 수 없는 실력을 뿜어낼 수 있다.
덕분에 ID*ONE이라는 배틀넷 아이디는 게이머들 사이에 아주 유명했다. 처음엔 핵을 쓴다고 신고가 쏟아졌고, 핵이 아닌 걸로 밝혀진 다음에는 더더욱 유명해졌다. 당연히 아이디의 주인이 유재원이라는 것도 다 알려졌다.
만약 지금 시대에 게임 스트리밍 방송 같은 게 있었으면, 유재원이 떴다고 난리가 났을 테지만, 다행히 지금은 같이 게임하는 사람들에게만 반응이 오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난리인 통에 게임도 예전처럼 열심히 즐기는 것도 무리였다.
“내 일은 내가 찾아서 해야 할 팔자구만.”
그룹 회장에게 일을 시키는 간 큰 부하 직원은 없다.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임직원들과 격 없이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결국 회사에서 제일 높은 회장님이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 좀 하라는 식의 지시 같은 건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유재원은 본인의 이메일함을 켜고 할 일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보고서야 늘 올라오는 것이기에 찾는 다면 얼마든지 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호오, 이건 좀 재미있네.”
ID 인사팀에서 올린 중간관리자 평점 변동 보고서라는 이름의 문서였다. 그룹 전체의 팀장이나 부장급 인사들에 대한 각종 평가점수가 변동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매우 큰 변화가 생긴 사람들을 따로 추린 것인데, 그룹의 규모가 거대하다 보니 그렇게 추린 사람도 100명이 넘었다.
변동 사항을 보면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어떤 사고를 쳤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물론 인사팀 자체 적으로 만든 것이라 정보팀의 보고서와 크로스체크를 해야 제대로 된 사정을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보는 걸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문서를 보던 유재원의 눈에 특이한 게 들어왔다.
“이 사람, 이거 뭐지?”
차동진은 한국 ID 테크놀로지에서 POS사업부의 인사부장이 있는데, 인사 평점에서 올해에만 마이너스 12을 찍은 것이다.
더구나 마이너스 점수가 누적된 이유도 매우 단순했다. 차동진 부장의 밑에 있던 인사팀 직원들이 사표를 내거나, 근무지 변경을 신청하면서 누적된 점수다. 점수 부과 이유는 부하직원의 관리 미숙이다.
부하직원이 퇴사나 근무지 변경 신청을 한 것 가지고, 직속상사에게 벌점을 부과한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면 심심할 때마다 사표를 내거나, 근무지를 바꿔 달라고 하는 부하직원들이 상전이 되는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당연히 직원들 자체적인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한 것이면 상사의 인사고과에는 반영하지 않는다. 즉, 인사 평점에 반영이 되는 상황이란 상사가 직접 부하직원들에게 퇴사 권고나 근무지 변경을 지시한 경우에 발생한다.
본인의 인사고과에 마이너스 점수가 찍힌다는 걸 감수하고 조치를 했다는 것인데, 한 명 당 –2점이니 올해에만 6명이나 내보냈다는 이야기다.
이는 ID 그룹 전체를 다 돌아봐도 신기록이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12점이나 찍혔지만, 전체 인사고과 점수는 78점으로 매우 준수했다는 것이다. 만약 인사조차가 아니었으면 90점으로 ID그룹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의 평점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유재원은 차동진이라는 부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음, 감사실이 좋겠다.”
유재원은 처음엔 정보팀에다가 지시를 하려 했다가 180도 선회해 감사실을 선택했다.
정보팀이 움직이는 게 간편하긴 했는데, 그러면 직원들을 사찰하는 것처럼 보여질 것 같았던 탓이다. 실제로 정보팀은 대외 정보를 수집한다거나, 경쟁사들의 첩보를 차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조직이기도 했다.
반면 감사실의 경우엔 내부 조직을 살펴보기 위해 만든 조직인 만큼, 명분은 확실했다. 다만 감사팀이 뜨면 해당 조직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겠지만, 차동진이라는 양반이 워낙 특이한 일을 벌였으니 해명도 직접 들어보고, 인사 조치의 연유를 따져 보는데 감사실만큼 적합한 곳이 없을 것 같다.
-확실히 특이한 케이스군요.
ID톡의 음성 대화를 통해 지시를 하니 임은경 감사실장이 즉각 반응했다. 임은경 감사실장도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는 것에 대해 공감했다.
-제가 직접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네, 너무 심하게 닦달하진 마시고요. 그리고 좀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정확하게 알아봐 주세요.”
임은경 감사실장의 출신이 검사라서 살짝 걱정이 되는 유재원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