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6화
심지어 케이블 방송이긴 하지만, 북미 전역에 생방송으로 방송도 된다. 물론 행사 전체가 아닌 유재원의 발표 부분만 한정이지만, CNN이 무려 30분이나 라이브로 안드로이드 95의 발표 현장을 생중계 해준다.
당연히 이러한 조치는 CNN의 창업주인 터너 씨와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로, 안드로이드 사의 대주주 중 한 사람이 터너였고, 이번 안드로이드 95의 발표에 매우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유재원도 그런 기대에 부응해 수천 명의 손님들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참고로 실리콘밸리의 대형 컨벤션 센터의 수용 인원은 만 단위를 훌쩍 넘으니 수천 명이라고 하면 빈자리가 보일 정도지만, 메인이벤트 홀 한정으로 입장객 숫자를 줄였다. 유료 입장권을 판 건 아니지만, 선착순으로 입장시켰다. 대신 체험관은 컨벤션 센터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 계속 입장시켰기에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다.
당연히 안드로이드 95의 판매도 시작되었다. 초판이라고 해서 뭔가 특전이 제공되는 건 아니었지만, POS기기를 20대나 설치한 초대형 판매 부스임에도 구매하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긴 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떠들썩한 와중에 유재원은 안드로이드 95의 정식 발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95와 오피스 95는 이전 버전과 비교해 전체 코드의 70%를 세로 코딩했을 만큼 대대적인 재설계가 된 혁신적인 운영체제입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아이보리색 니트를 걸친 캐주얼한 차림의 유재원은 그야말로 자신감의 화신이었다.
“안드로이드 2.0이 HPC의 강력한 퍼포먼스의 맛보기만 보여드렸다면, 안드로이드 95는 HPC의 진면목을 120%끌어낼 수 있게 했습니다. 즉 HPC 이상의 스펙을 가진 컴퓨터라면 안드로이드 95로 업그레이드하는 것만으로도 최대 20%의 속도 향상을 느끼실 수 있다는 말이지요.”
유재원은 그러면서 슬라이드를 넘겨 특정 게임들의 FPS를 띄웠다.
둠 2부터 최근 나온 RTCW까지. 다양한 게임에서 동일 시스템에 운영체제만 변수로 놓고 뽑아낸 자료였다. 최대 20%라고 해서 특정 수치만 20%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향상만 있는 건 아니었다.
최적화가 너무 잘 되어 이제는 뽑아낼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둠 2의 경우에도 10% 이상의 향상은 있었으니 말이다.
“보시는 것처럼 안드로이드 95는 HPC의 강력한 성능을 완벽하게 끌어내는 데 제일 먼저 초점을 맞췄습니다. 덕분에 한층 강력해진 성능을 온전히 사용자가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보다 화려한 바탕화면을 사용하면서도 느리다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유재원의 화려한 멘트와 함께 스크린에 띄워진 슬라이드가 바뀌었다.
안드로이드 95가 자랑하는 동영상 바탕화면이다. 동영상 재생을 3D 가속 카드가 맡게 되면서 오로라가 움직이는 모습, 해파리가 물 속을 유영하는 모습 등을 담은 짧은 동영상을 계속 루프 시키면서 비주얼을 폭발시켰다.
자세히 보면 똑같은 화면을 계속 재생한다는 걸 알겠지만, 그냥 넋을 놓고 보고 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끝까지 동영상을 루프하는 건 아니다. 전체화면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일시 정지시켜, 해당 프로그램에 컴퓨터의 모든 파워를 밀어 준다.
비주얼 강화는 단지 바탕화면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바탕화면의 기본 컬러는 하이컬러인 16비트로 설정했기에, 아이콘도 화려해졌다. 해상도를 높이면 아이콘의 크기도 커져서 시인성도 좋게 만들었다. 게다가 파일 탐색기를 비롯해 여러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에 유리 질감과 같은 반투명 효과를 적용시켰다.
이렇게 새로워진 안드로이드 95와 2.0의 바탕화면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성능과 비주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유재원이 다음 슬라이드로 꺼낸 건 당연히 보안이었다.
“보안영역에 대해서는 유저님들도 이미 많은 보도를 통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모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터넷 쇼핑을 위해 입력한 신용카드 번호가 중간에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테니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보안영역이라는 도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방식은 매우 간단했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인터넷 회사들에게 주지 않고, 개인이 직접 입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 입력하는 건 번거로우니, 본인의 컴퓨터에 입력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자동으로 입력되도록 저장하는데, 이를 특정한 저장공간에 특별한 암호로 암호화하여 저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직접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 보안영역의 데모를 보여드리죠.”
유재원은 메인 이벤트홀의 대형 스크린과 연결된 뉴에그2 컴퓨터를 조작했다. 안드로이드 95 게이밍 에디션 에드웨어 버전이 설치된 컴퓨터였다. 뉴에그2는 원래 운영체제가 탑재되어 출고되는 컴퓨터라서 에드웨어 버전은 없는 것인데, 95 발표를 위해 가장 낮은 버전을 선택한 것이다.
가장 등급이 낮은 버전이라도 최적화부터 보안까지도 완벽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처음 한 번은 입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을 지모를 인터넷 서버로 개인정보를 전송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컴퓨터에 고도의 암호화를 사용해 저장됩니다.”
유재원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본인의 아이디를 공개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임시로 아이디를 만들었고, 카드 번호도 임시로 발행한 기프트카드를 입력했다. 그리고서 곧장 홈쇼핑 사이트를 접속했는데, 바로 P마켓이었다.
연초에 사내 벤처를 모집했을 때, 선정된 두 가지 아이템 중에 선정된 인터넷 쇼핑 사이트인데, 회사가 직접 물건을 올리는 게 아니라 중개만 담당하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판매하고픈 개인이나 기업이 직접 아이템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보안영역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라면 이렇게 클릭 한 번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할 수 있고, 긴 카드 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이 마찬가지로 클릭 한 번으로 입력됩니다. 물론 보안성이야 말 할 것도 없지요.”
클릭 몇 번으로 인터넷 쇼핑을 마치는 모습을 보여주자 반응이 대단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결제 단계에서 좌절한 경험은 거의 모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원클릭 결제 기능이 있는 쇼핑몰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쇼핑을 마칠 수 있지만, 원클릭 결제 기능의 보급은 그다지 빠르지 못했다. 바로 수수료 때문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카드를 쓰는 것처럼 별 의미 없는 수수료인데, 판매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이트에 원클릭 결제 버튼을 달아 놓는 게 제법 부담이 되는 비율이었다.
반면 보안영역 프로그램의 자동 입력 기능을 이용하면 현실과 똑같은 수수료 비율이니 그나마 부담이 적다.
물론 보안영역을 지원하는 쇼핑몰을 만들기 위해선 안드로이드 사가 정한 보안통신 규격에 맞춰 사이트를 개편해야 하는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훨씬 저렴한 건 사실이었다.
유재원이 설명하지 못한 새로운 기능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어 입력기의 대대적인 개선이나 리부팅 시나리오 최소화 같은 기능은 따로 시간을 내서 자랑해도 될 만한 것이지만, 과감히 생략했다. 이 자리에서 발표할 신제품은 하나 더 있었으니 말이다.
“ID 오피스 95입니다.”
바로 ID 오피스 95였다.
각 프로그램마다 한층 강화된 새로운 기능들은 물론이고, 오피스 95 공통으로 웹 표준 최신 버전인HTML 2.0을 기본 지원하고, 인터넷을 통한 공동 작업과 웹하드를 지원하며 사무용 프로그램을 선도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함께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앞서 있던 ID 오피스는 한층 더 날카롭게 치고 나갔다. 리눅스를 품에 안은 오픈 소스 진영에서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ID 그룹이 치고 나가는 속도는 더더욱 빨랐다.
“그리고, 하나 더!”
오피스 95까지 설명을 마쳤으니 손님들은 이제 슬슬 끝나가는 분위기라는 걸 느낄 때, 유재원은 하나 더를 외쳤다.
“레밍턴 사장님!”
그러자 이번에도 레밍턴 사장이 카트를 끌고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객석의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크게 올렸다.
벌써 3번째이니 ID 그룹의 신제품 발표회에 레밍턴의 등장은 전통으로 굳어질 모양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전문 영역의 연구자들을 위한 i웍스를 소개합니다.”
카트를 가리고 있던 베일이 걷히며 i웍스의 찬란한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다. ID 테크놀로지의 상징과도 같은 알루미늄 케이스였고, 한쪽 면이 강화유리로 되어 안이 훤히 보이는 디자인으로도 파격적이었다.
뉴에그2까지는 둥그런 곡선이 많았지만, i웍스는 전문가를 위한 컴퓨터 답게 선이 굵은 직선이 가득했다. 덕분에 한층 견고해보였고, 뭔가 중후한 맛도 풍겼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
전원을 켜자 부팅이 시작되었고, 케이스 내부에 녹색의 LED가 빛을 발하면서 이제껏 보통의 컴퓨터에선 볼 수 없는 비주얼적인 충격을 안겨 줬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크릴 관을 통한 수냉 시스템이라는 걸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녹색의 형광 냉각수가 CPU와 3D 가속카드를 거쳐 지나가는 모습이, 무슨 외계인 컴퓨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i웍스는 사용자가 가진 잠재력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워크스테이션입니다. 또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워터 쿨링 시스템은 아무리 과격한 작업이라도 탄탄한 안정성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유재원은 긴 말하지 않았다.
i웍스로 구동한 전문 프로그램이 뿜어내는 퍼포먼스를 요약한 비디오 클립을 재생하는 것으로 유재원의 발표는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쇼가 끝난 건 아니다.
곧이어 안드로이드 사 알파팀의 팀장이나 i웍스 개발에 직접 참여했던 TG컴퓨터의 연구원들이 올라와서 매우 전문적인 영역에서 시범과 질의응답을 갖게 될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유재원이 향한 곳은 판매대였다.
특전은 없지만, 그 자리에서 판매되는 제품에 사인을 해주는 작은 이벤트를 기획했기 때문이다.
일부 대형 쇼핑몰이나, 소프트워에 판매 전문점에서는 자체적인 경품 행사를 하기도 했다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유재원의 사인에 더욱 열광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신제품 발표회였다.
-안드로이드 95 돌풍!
-ID 오피스 95, 인터넷 비즈니스를 위한 최고의 선택!
-i웍스, 미래에서 온 워크스테이션!
-ID 그룹, 홀리데이 시즌의 완벽한 승리자로 등극하나?
-퀘이크 열화와 같은 반응! 주간 판매량 신기록 경신!
-존 카멕, 퀘이크 프로 리그 발표, 1등 상품은 무려 페라리!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와 새해까지.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축제와 같은 분위기의 미국에서 가장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곳은 역시나 ID 그룹이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조금 있었던 안드로이드 95가 발표되었고, 소문으로만 돌았던 i웍스도 정식 판매를 시작했다. 여기에 존 카멕의 신작 퀘이크가 발매되면서 그야말로 게이머들에게는 축제와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