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79화 (379/1,007)

제 501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제일 좋은건 역시 노임 많이 주는 것인데, 유재원은 여기에서도 국내 최고 수준을 지켜주었다. 게다가 점심도 무료 제공이라는게 상당히 큰 이점이었다. 보통안 함바집이라고 해서 공사판 안에 임시 식당을 차려 놓고 억지로 밥을 먹게 했다. 함바집 운영권을 두고 억대의 돈이 돌아갈 만큼 공사판에서 큰 이권 사업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주변 식당들과 계약하고 식권을 나눠줬다. 식권 하나로 먹고 싶은데 가서 먹으면 된다. 식당에서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재료를 아껴 맛이 떨어지면 주변의 다른 식당으로 가면 되기에, 계약한 식당들 사이에 맛이나 양에 대한 경쟁이 생길 정도다.

인부들의 유일하게 불만이라면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즉각 퇴장시키는 점이었다. 처음엔 가혹하다는 말이 나왔지만, 층수가 누적되며 작업 환경이 지상에서 점점 높아지자 다들 조심하게 되었다.

덕분에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공사장은 아직도 무사고 행진중이었다.

하여튼, 최문기 회장의 최근 인터뷰는 동아건설을 그렇게 계속 압박하면, 같이 해먹은걸 다 불어버리겠다는 엄포나 다름이 없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전명헌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리 나대봐야 자기만 죽겠지.

윗선에선 이미 동아건설의 퇴출은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한다. 본보기를 보임으로서 문민정부는 다르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를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확실히 잡겠다는 것이다.

동아그룹이 제법 큰 기업집단이긴 해도, 정권 눈에 나면 분해되는 건 순식간이다. 게다가 80년대처럼 비자금 안낸다고 때리는게 아니라, 광범위한 부실시공 때문이라는 명분도 있으니 국민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자명했다.

오히려 이렇게 윗분들을 자극하면 구속될 위험을 스스로 키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수성 대교 참사 예방한 인터넷 신문고 재조명!

-인터넷 신문고 민원 쏟아져!

-총리실, 인터넷 신문고 확대 개편, 담당 비서관에 전문 인력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신문고를 재조명하는 기사들도 당연히 쏟아졌다.

유재원이 제보글을 올리기 전까지는 파리만 날리던 인터넷 신문고에 온갖 민원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명헌 총리도 이에 맞춰 인터넷 신문고를 담당할 조직을 대폭 확대 개편했다. 그러면서 이전에 이를 담당하던 비서관의 행방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정보팀을 통해 알아보니 아쉽게도 원대 복귀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동아건설로부터 뭔가 받고 제보를 무마했다는 심증이 깊지만, 이걸 밝히려고 들면 잘나가는 전명헌에게 찬물을 끼얹는 셈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통일국민당이 너무 커지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4년 전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끝나지 않았던 터라, 지방의회 의원들만 뽑았던 반쪽 선거였다.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는 시장부터 도지사까지 기초단체장을 모두 뽑는 본격적인 선거였다.

유재원의 기억에 따르면 여당은 박살이 났고, 야당의 비약적인 선전이 돋보이는 선거였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문민정부는 과거 군사정권과 확실히 선을 그었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고속성장의 부작용이 터지고 있지만, 그것도 유재원의 도움 덕에 매끄럽게 넘겼다.

단순히 잘 해결했다는걸 넘어 국민안전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국정을 주도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기세라면 95년도 지방선거는 민자당과 통일국민당이 사이좋게 나눠 먹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고 이게 아주 나쁜건 아니지.”

이후의 전개에 대해 머릿속으로 간단히 시뮬레이션을 해본 유재원은 딱히 나쁜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쪽으로 확 쏠린 권력이니 심판을 받을 때에도 확실히 받게 될 거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재원은 다이어리 파일을 닫았다. 처음엔 일기처럼 하루하루 쓰던 기록인데, 지금은 거의 비망록 수준이었다.

이제는 당분간 신경 써야할 사건은 없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본인의 비즈니스에 집중하면 된다.

바로 다음날.

-안드로이드 사, 보안영역 서포트 업체 확정!

-한국 최초의 컴퓨터 보안업체 킴랩. 아시아 권역 업체 선정 쾌거!

-킴랩, 수 조원 대 컴퓨터 보안 시장 선점에 투자 문의 극성!

경제신문은 물론 대형 일간지 신문에 ID 그룹 관련한 큼지막한 기사들이 올라왔다. 어제 미국 안드로이드 사가 보안영역 서포트 업체들을 발표한 기사들이 새벽 신문에 담겨 올라온 것이다.

당연히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건 한국 업체인 킴랩이었다.

세계 유수의 컴퓨터 보안 업체를 제치고 한국의 업체가 리스트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얼마 없었기에 그 임팩트가 상당했다.

웃기는 점은 발표가 어제 이뤄졌는데, 벌써 투자문의가 있다는 식의 기사였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인데, 언제 투자자를 만나 투자 의향을 물어봤단 말인가. 그냥 이후의 일을 예측해서 쓴 기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재미있는건 이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넥스트컴 게시판이나,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아다니면 킴랩 주식을 사야겠다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상식적으로 앞으로 수천억원대의 이익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투자를 할 수만 있다면 대박을 맞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김철수를 찾을 수 없었다.

-ESET 사장, 시만텍 회장 극비 방한!

-ID 그룹, 오늘 서울 한 호텔서 보안영역 서포트 조인식 발표.

-ID 그룹 중역들 대거 한국 방문, 제주도로 집결

그도 그럴 것이 잠시 후 있을 조인식을 위해서 칩거 중이었기 때문이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눠 갖는 간단한 일이지만, 세계적 뉴스거리가 되기 위해서 최강욱 비서실장이 행사를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곧 안드로이드 95를 발표하기 전 분위기를 띄우는 데 쓸 이벤트로 충분했다.

“차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보안영역 서포트를 위해 기꺼이 참가해주신 업체에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안드로이드 95 보안영역 계약식

지금 유재원이 나가 있는 무대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쓰인 글귀였다.

조인식에 앞서 유재원은 모인 취재진을 향해 보안영역을 담당할 3개 업체가 어떻게 선정이 되었는지 짧게 브리핑을 했다. 일각에서 팔이 안으로 굽어 같은 한국 업체인 킴랩을 선택했다는 말이 나왔던 탓이다.

당연히 그 말은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컴퓨터 보급이 일본보다 늦었던 한국이었고, 그런 한국의 업체가 일본을 제치고 선정되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에 대해 유재원은 순위표와 종합 점수를 일부 공개함으로서 오해를 불식시켰다. 이후 본격적인 조인식이 시작되었다.

“시만텍 덴 슐만 회장님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조인식은 회사마다 각각 치른다는 점이다. 무대가 같으니 동시에 올라와서 함께 하면 더 큰 그림이 나올텐데, 시만텍과 ESET 사이의 경쟁의식이 워낙 커서 그러지는 못했다.

같이 무대에 서면 지금의 순위가 마치 공식화 되버린다는 위기의식이 ESET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었기에, 유재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개별적인 계약식을 치러 주었다.

그렇게 연이어 치러진 계약식 중 한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당연하게도 킴랩의 김철수였다.

이미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올라간 유재원, 그리고 제2의 유재원이라는 평가를 몇 년 전부터 받아왔던 김철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란히 서는건 이번에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옙! 절대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주고받으면서 덕담을 주고받는 것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사인을 마친 계약서를 주고받은 후 악수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김철수의 표정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했다. 사실 김철수가 아니라도 누가 이 자리에 있다면 다 저런 표정일 것이다. 계약금으로 오늘 100억 원이 입금될 예정이니 말이다. 카메라가 없는 집에 가면 어떤 얼굴이 될지 모르겠다.

동시에 김철수가 100억 원을 어떻게 쓸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킴랩의 현재 직원 숫자가 12명이라고 했던가.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얼마나 줄지, 신규 직원은 얼마나 채용할지 등등 이후의 모습을 지켜보면 김철수의 진면목이 나올 것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김철수의 모습을 지켜 볼 시간은 유재원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계약식보다 훨씬 큰 스케줄이 남았던 탓이다.

바로 넥스트컴캐스트의 앞날을 좌우할 프레젠테이션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363 선택과 집중(5)

1994년 11월 5일.

유재원을 비롯한 ID 그룹 임원들이 제주도에 모였다. 구체적인 장소는 예전 ID 테크놀로지의 워크숍을 치렀던 중문 관광단지의 호텔이었다.

최강욱 비서실장을 필두로 황재홍 ID 인베스트먼트 한국지사 사장,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에서 날아온 넥스트컴캐스트의 사장과 임원들이 주요 인사였다. 빠진 사람들은 신제품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안드로이드 사의 임직원, 마찬가지로 티파니 폰의 양산에 눈코 뜰세 없이 바쁜 ID 테크놀로지의 레밍턴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다.

반대로 큰 프로젝트를 두 개나 완료했던 ID 엔터테인먼트의 스테판 바버를 비롯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공동 사장과 직원들, ID 소프트웨어의 RTCW팀은 거의 모두 한국행을 선택했다.

ID 엔터테민먼트의 스테판 바버 사장 역시 비즈니스를 위한 입국이었다. 그러면서 ID 엔터테인먼트에 속한 블리자드와 RTCW에게는 포상 휴가를 준 것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신규 출시작임에도 꾸준한 판매량을 보이는 워크래프트는 분명히 성공한 작품이 되었고, 매일 판매량을 갱신하는 RTCW도 대박을 터트렸다. 두 팀 모두 게임을 개발한다고 고생했으니, 전통에 따라 포상휴가를 주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제주도로 다 가라고 한 건 아니었고, 선택지를 주었다. 제주도를 비롯해 몰디브나 발리 같은 유명 휴향지가 후보에 올랐었다. 그중에서 대다수가 제주도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약을 좀 팔긴 했다. 겨울 바다의 고즈넉한 정취, 한라산의 울창한 산림을 통해 개발에 지친 영혼에 힐링과 리프레쉬를 줄 수 있다고 말이다. 게다가 유재원도 자주 찾는 휴양지라고 하니 개발자 너도나도 제주도를 선택했다.

약발은 상당히 강력했다. 로메로를 비롯한 RTCW개발팀의 경우엔 예전에 한 번 찾아왔던 곳이라서 선택이 좀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예전의 기억이 좋았던 모양인지 대다수가 제주도를 선택했다. 블리자드 직원들의 경우엔 힐링과 리프레시라는 단어에 꽂혀서 다수가 제주도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라이트닝볼트의 볼트 사장과 직원들도 제주도에 들어왔다. 워낙 거물들이 많아 존재감은 좀 약한 인물이지만, 볼트 사장도 올해 큰 성과를 냈던 사람이었다. 저렴한 모델2를 출시하서 실리콘벨리와 센프란시스코에 전기 자전거를 유행시켰고, 인터넷 판매에도 제법 큰 성적을 내었다.

다만 볼트 사장은 포상여행으로 제주도를 찾은 건 아니다. 유재원의 제주도 개발 개획과 관련된 역할이 있었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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