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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378화 (378/1,007)
  • 제 500화

    정의에도 가격표가 붙어 있었고, 최강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에도 가격표는 있었다. 유재원은 그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마음이었다. 이런 일도 크게 보자면 전생에 졌던 빚을 되갚아주기 위한 덫을 놓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영리한 최강욱은 그렇게 나가는 비용 이상으로 부가 가치를 만들어서 왔다.

    아직 보여주지 않은 문서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고급 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다.

    여의도 정치인들의 진면목은 쉽게 알 수 없다. 평소엔 좋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정작 표를 줘서 입성시키니 말한 것과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최강욱은 직접 뛰면서 수집한 정보들을 알뜰히 모아서 정리했다.

    당연히 유재원이 마스터플랜을 짜면서 만든 데이터와는 차원이 달랐다. 본인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절대 가식을 보일 수 없었기에, 매스컴 기사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들이 잔뜩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마스터플랜을 짤 때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건 기술이었다. 그 다음이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유재원이 무슨 높은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인터넷 정도만 할 수 있었기에 커뮤니티의 글이나 기사를 보는 게 전부였다.

    반면 지금 최강욱이 가져온 건 생생히 살아 있는 정보였고, 남이 알 수 없는 사안까지도 담겨 있는 것이라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다.

    유재원은 가장 위에 있는 문서 하나를 들어 살펴봤다.

    최강욱의 꼼꼼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정보를 수집하는 차원을 넘어서 역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서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다.

    “저기, 컴퓨터 파일로는 없나요?”

    “아, 그것이…….”

    일반 업무라면 직원들의 손을 빌렸겠지만, 이건 매우 민감한 정보라서 최강욱 본인만 다뤘기 때문이다.

    괜히 직원들 시켰다가 유출되면 상대도 곤란하고, ID 그룹도 좋은 구실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혼자서 정리를 했다. 그런데 최강욱은 컴퓨터보다는 수기가 더 손에 익은 사람이었다. 일단 컴퓨터로 틀을 잡아 놓고 손으로 내용을 채우는 식으로 문서를 만든 것이다.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타자 속도가 빠른 유재원이니 이 정도 되는 문서를 모두 워드파일로 만드는 데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국회와 법원 사이의 알력 싸움이 재미있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강욱의 이야기보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판사 탄핵으로 시작된 입법권과 사법권의 세력 싸움이었다. 판사가 국회에 의해 탄핵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고, 이번 일로 사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사법부는 대법원장의 대국민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국회에 빼앗긴 위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란다.

    “사실은 반격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강욱의 설명이 정답이다.

    사법부가 기민하게 움직인 대상은 바로 재판에 걸린 국회의원들이었으니 말이다. 예전엔 쉽게 나오지도 않았던 구속영장이 따박따박 떨어졌고, 가벼운 벌금 정도로 끝날 것들이 집행유예 이상으로 나오기도 했다.

    “흐흐, 이제야 견제 작용이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 거네요.”

    국민들이 삼권분립을 선택한 것은 거대 권력들이 상호간에 견제를 하라고 만든 것이었다. 실상은 삼권 불가침으로 서로의 영역에 대해선 노터치로 일관하면서 기득권을 공고히 했다.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제강점기 피해자들 관련으로 판사들이 탄핵되면서 그러한 불문율이 박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해당 판사들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 직전까지 설마 탄핵이 되겠느냐 싶었는데,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판사들이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에게 솜방망이 대신 홍두깨를 휘두르자, 국회에서는 이번에 판사들에게 제동을 걸겠다고 나서는 중이란다. 바로 전권예우 문제를 다루겠다는 것이다.

    “네, 이게 사실 정상적인 분립의 모습이었지요.”

    최강욱도 유재원의 말에 동의했다.

    입법부, 사법부라는 거대한 권력이 서로의 치부를 가지고 타협없이 싸우면 싸울수록 국민에겐 좋은 것이었다.

    “맞아요. 하여튼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죠.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동감입니다.”

    이 재미있는 싸움도 결국엔 적당히 타협하게 될 텐데, 기왕이면 그 기간이 길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해외에서 회장님을 뵈려고 손님이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최강욱이 주제를 바꾸었다.

    비서실장으로서 유재원의 스케줄을 최강욱도 매일 같이 확인했다. 특히 지금처럼 한국에 있을 때면 더 열심히 챙겼다. 며칠 후 넥스트컴캐스트의 사장과 임원들이 방문한다는 소식도 당연히 접했다.

    “모처럼 한국에서 우리 식구들이 정모를 하게 됐네요.”

    “예, 그런데 우리 식구들뿐만 오는 게 아니던데요?”

    “응?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아, 아직 못 보셨군요. 안드로이드 보안영역 지원 업체와의 계약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만텍 쪽에서 격을 더 높여 체결했으면 한다는 요청이 올라왔었습니다. 불러만 준다면 기꺼이 한국으로 날아오겠답니다.”

    최강욱의 설명이 이어지자 유재원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다.

    계약식은 그냥 케빈 존슨 사장과 해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화제성 면에서는 유재원과 사인하는 게 훨씬 좋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름값이야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니 말이다.

    “떠들썩하니 재미있을 거 같네요. 그럼 준비 잘 부탁해요.”

    “물론입니다.

    최강욱의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든든하게 느껴지는 유재원이었다.

    #362 선택과 집중(4)

    1994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11월이다.

    한반도의 기상관측 역사상 최고의 폭염을 보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차가워진 기온과는 다르게 한국은 온갖 이야기들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역시 제일 큰 이슈는 다리 상판이 뚝 부러진 수성 대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만 크게 보도된게 아니라 전 세계 토픽이었을만큼,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고도성장에 대한 부작용이 이제 하나 둘 나오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고가 났음에도 사상자가 0명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언론도 많았다. 당연히 총리실 안전 점검단이 재조명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떼 방북 이후 김 대통령에 밀려 존재감이 없어졌던 전명헌이 다시금 전면에 등장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성 대교 붕괴사건의 사후처리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을땐, 한국의 공중파나 신문사들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많은 취재진이 왔었다.

    -재원이, 네 덕에 산다!

    덕분에 기자회견이 끝난 다음 유재원에게 고맙다고 하는 말을 잊지 않는 전명헌이었다.

    “전문가라고 자신하시더니 진짜였네.”

    그때를 생각한 유재원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로 수성 대교의 시공사인 동아건설에 대한 처리를 놓고 전명헌이 보여준 조치들은 유재원도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줄 만했다.

    동아건설이 최근 시공을 완료한 시설물에 대해 일제히 점검이 이루어졌다. 수성 대교를 이렇게 날림으로 지은 동아건설이 차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완벽하게 지을거라고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최근에 지은 건물에서도 심각한 설계 변경이나 하자가 발견되었을 경우에, 동아건설을 퇴출시키고, 자산을 몰수하는 조치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몰수된 자산으로 제2의 수성 대교 건설에 예산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동아건설측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동아건설 편을 들어주는 곳은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다리 상판이 뚝 떨어지는 모습을 전 국민이 보았다. 이후 정밀점검으로 밝혀진 사고의 원인도 동아건설의 설계 미숙과 부실의 요인이 훨씬 중대했다.

    태생이 기업 편을 드는 경제신문들도 이번 사안만큼은 친기업적인 발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확실했다.

    요즘 하나둘 동아건설이 최근 지어올린 건물이나 산업시설의 점검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역시나였다.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거지.”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 없었다.

    철근이 빠졌다거나, 콘크리트 강도가 기준치 미달인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지은지 10년도 안 된 건물인데 심각한 균열이 있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동아건설이 지은 원전에서도 설계와는 다른 점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다.

    이런 소식이 나올 때마다 동아건설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수성 대교가 붕괴되기 직전과 지금의 주가를 비교하면 4번은 반토막이 난 수준이었고, 오늘도 무시무시하게 하락 중이었다. 만약 한국의 주식 시장에 하한가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수성 대교가 붕괴된 날 이 가격을 찍었을텐데, 가격변동상한제 때문에 살았다.

    물론 살아도 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동아건설의 시장 퇴출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0월 말 국회에서는 OECD가입 결의안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개혁 입법이 이뤄졌다. 최강욱이 장담했던 법률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있었다. 건물주들의 손해 배상이 대거 예정되어 있는데, 동아건설이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동아건설은 물론이고, 동아그룹 산하의 다른 계열사들까지도 위기가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웃기는 점은 동아건걸 오너의 반응이었다.

    -동아그룹 최문기 회장. 모든 업적 매도되는 현 상황 매우 억울.

    -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기술력 있는 일류 건설사.

    -수성 대교 붕괴 원인 분석에 최대한 협조할 것과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

    무엇이 억울하단 말인지 유재원은 도통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건설 관련해서는 유재원의 전문 지식은 0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풀이는 전명헌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건물이나 대규모 인프라를 지을 때, 건설사 자체적으로 남겨 먹는(?) 것도 있지만, 보통은 사업을 발주한 쪽에서도 함께 남겨 먹는게 기본이었기 때문이란다. 비자금 조성할 때 건물 짓는 것처럼 쉬운 건 없다나?

    그러니까, 100억짜리 공사를 한다고 신고한 다음, 50억만 실제 건설에 쓰고 나머지 50억을 돌려받으면, 50억은 이제 마음껏 써도 되는 비자금이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시공사도 사이좋게 해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재원이 미래건설에 의뢰한 ID 그룹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건설처럼 조 단위가 넘어가는 사업을 시작하고서 비자금 조성을 안하는건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 전명헌이었다.

    사실 전명헌도 처음엔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건설에 대해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101층이라고 해도 본인이 내린 견적에 비해 공사비가 너무 컸다. 그런데 착공이 되는걸 보고 역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유재원은 입금한 공사비 중 1원도 되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들어온 감리사는 눈에 불을 켜고 설계와 똑같이 지어지고 있는지 감시했다. 게다가 투입되는 자재의 등급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던 것과 몇 단계 상위 등급이었다.

    건설노무자들에 대한 대우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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