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4화
이대로 진행이 된다면 바닥부터 시작하는 한국 방식과 개발사가 주도하는 미국 방식이 사이 좋게 경쟁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유재원도 두 가지 방식의 e스포츠 조성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결과는 전생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면, 제가 까치PC방 측과 접촉해서 여러 가지 지원책에 대해 논의해보겠습니다. 최소한 대회 중엔 실내금연은 해야지요.”
유재원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김대석이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번 건은 김 비서님이 맡아서 잘 해주세요.”
“예, 회장님.”
일을 맡게 된 김대석은 다부진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며칠 후.
유재원은 고향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박상권 사장님의 결혼식 참석 후, 덕진리 고향집으로 내려온 유재원은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고, 은사님들을 찾아뵙기도 했다.
주민이나 영식이는 언제 봐도 친했지만, 수경이나 은혜 같은 여자인 친구들과는 지금도 서먹해진 느낌이 생겨나 좀 아쉽기도 했다. 아무래도 유재원에게 외국인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알려진 이후부터 태도가 좀 달라졌는데, 그게 좀 오래 가는 모양세였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수경이 같은 경우엔 자기도 유학을 가서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친구를 만들겠다고 영어 공부에 불을 켜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식이는 여전히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유지하고 있었고, 주민이는 역시나 공부보다는 게임에 열중했다. 모든 게임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주민이지만,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역시나 워크래프트라고 했다.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도 출시하자마자 사서 끝판을 깨고, 멀티플레이도 섭렵했다고 하는데,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재미는 역시 워크래프트가 크다는 평이다.
-재원아! 게임만 잘해서 먹고 사는 직업이 있을까?
다만 주민이는 다들 공부하는데, 자기 혼자 게임에 푹 빠져 있는 게 스스로 돌아 봐도 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인지, 저녁즈음 ID톡으로 유재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있지.”
-뭐? 진짜?
있다는 소리에 오히려 질문을 던진 주민이가 깜짝 놀란 모양이다.
게임만 해서 먹고 사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친구인 유재원이 따끔한 질책을 담은 조언이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법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지금이야 게임을 즐기는 게 사회악처럼 그려지지만, 몇 년 만 지나면 인식이 싹 달라질 거야. 게임대회가 우후죽순 생길 거고, 상금도 엄청나게 걸릴 거야. 그러다가 프로팀도 만들어지고 대기업들의 스폰도 붙고 리그도 생겨나겠지. 국가대항전도 벌어질 거고. 여기에서 뛰는 선수들이 바로 프로게이머지.”
-우와! 대박이다!
유재원의 설명에 주민이의 반응은 역시 단순했다.
프로팀 창단까지 몇 년이 걸릴지는 유재원도 모르겠지만, 주민이의 실력을 보면 프로 레벨에 오르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게임에 있어서는 어렸을 때부터 영재교육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친구인 유재원 덕에 프로화가 될 만한 게임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워크래프트를 놓고 보면 상위 1%인 플레티넘 등급이니 동네 PC방 대회는 쉽게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다.
더욱이 주민이는 혈맹과 같은 온라인 게임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임이 너무 단순하다는 이유였다.
박상한 사건에 크게 데인 혈맹 온라인이었지만, 최근엔 반등에 성공해서 동시접속자 숫자가 5천 명을 넘기는 등 흥행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혈맹 온라인에 올인했던 TJ소프트의 김택준은 그야말로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MMOPRG방식의 온라인 게임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프로화는 절대 되지 않을 장르였기에, 주민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함정 카드 하나를 통과한 것이다.
-아, 잠깐만 기다려봐!
친구 하나 잘 둔 덕에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주민이였다. 심지어 결단력도 빨랐다. 저녁을 드시고 있던 부모님을 거실로 불러 유재원과 나눴던 채팅 내용을 보여드리고, 진로를 프로게이머로 아예 확정해버렸다.
-부모님도 적극 지원해주신대!
주민이의 부모님은 프로게이머가 뭔지, e스포츠가 뭔지 모르는 순박한 시골 어르신들이었지만, 유재원의 보증에 그냥 OK였던 것이다. 덕진리 한정으로 유재원의 말은 그 어떤 것보다 신용이 높았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실 분들이니, 주민이네 부모님의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다.
“뭐? 진로를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정해도 되는 거야?”
-에이, 재원이 네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지.
팔자 좋은 주민이였다. 덕분에 부담감은 오히려 유재원이 느꼈다.
만에 하나 e스포츠 활성화가 좀 늦어진다면, 장담했던 것이 도루묵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그 부담감은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자발적인 e스포츠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ID 그룹이 끌고 가면 그만이다. 그룹의 사업 영역 중에 게임 개발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 ID 그룹도 당연히 e스포츠팀을 운영해야 한다.
거기에 딱 맞는 인사가 주민이였으니 말이다.
물론 가장 좋은 테크트리는 본인이 e스포츠에서 뛰어난 선수로 활약하다가 코치나 감독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다더라도 유재원의 능력이면 친구 하나의 뒤를 봐주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야, 배틀넷으로 와라!
주민이는 완전히 본격적이었다.
-어제의 설욕을 갚아주마! 사실 어제는 진로 고민 때문에 내가 100%의 전력을 발휘하지 못한 거였거든. 이젠 확실히 밟아주마.
어설픈 도발까지 이어졌다.
프로게이머라는 아직은 실체도 없는 직업에 대해 완전히 푹 빠져버린 모양이다. 유재원은 혀를 차면서도 워크래프트를 실행했다.
“새로운 도전자는 언제나 환영이지.”
진짜 100% 실력 발휘한 유재원을 이길 수만 있다면, 세계 어디를 가서도 프로게이머라는 명함을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 거다.
“나도 어제는 한 손으로 했거든. 오늘은 제대로 받아줄게.”
얼덜결에 주민이의 진로가 프로게이머가 되었으니, 유재원도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상대해줄 생각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았다.
덤으로 며칠 후에 있는 까치 PC방 게임대회에 대비하자는 마음도 있었다.
이날 유재원은 주민이과 12게임을 했고,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또한 게임마다 모두 다른 전략을 선보였고, 그 완성도는 아직 밸런스 패치가 이뤄지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최강이었다.
시간이 흘러 까치PC방 대회가 있는 10월 15일이 되었다.
그동안 김대석은 서울을 오가면서 뭔가 열심히 준비하는 듯 했다. 그 준비가 나름 탄탄했던 모양인지, 덕진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안에서는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준비가 엄청나게 잘 된 모양이죠?”
“최선을 다 했습니다. 다만 회장님 눈에 찰지 걱정입니다.”
“걱정마세요. 상황이 어떻든 즐겜하고 올 테니까.”
유재원이야 초창기 PC방 환경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지금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냥 이번 대회 참여로 뉴스에 크게 나오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워크래프트도 잘 팔리고, 다른 PC방들도 대화를 열면서 e스포츠의 태동기를 열어 준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오히려 지금 유재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고민은 바로 인터넷 신문고였다.
수성대교 붕괴에 대한 예측을 담은 글을 올린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심지어 어제 저녁에 보니 유재원이 이제껏 꼬박꼬박 올렸던 수성대교 붕괴 조짐에 대한 제보글들이 모두 블락된 상태로 바뀌어져 있었다. 검토 후 통보해주겠다는 리플이 남겨져 있긴 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 보니 그냥 씹어버린 모양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커지는 유재원이다.
사고가 났던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서, 유재원도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차라리 이름을 밝히고 제보글을 올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질 때 유재원의 안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났다.
김대석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공적인 것이라면, 유재원의 전화로 바로 걸려오는 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지인들 중에 지금 유재원에게 전화를 할 사람을 추려보니 답이 딱 나왔다.
“할아버지신가?”
정답이다. 티파니폰을 꺼내 보니 발신인 항목에 전명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딱 박혀 있었다.
-재원이냐?
“네, 할아버지, 저예요. 오늘은 무슨 또 일이에요?”
한국에 입국한 다음에 3일에 한 번은 통화하고 있었기에, 유재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심드렁함이 담겨 있었다.
-요즘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말이다. 김정일의 침묵이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니 참 답답하구나.
최근부터 이어지고 있던 전명헌의 하소연이라는 건 남북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김일성과 면담,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남북 관계는 유례가 없을 만큼 화해 분위기였고,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고 새로 등극한 김정일은 아직도 그 어떠한 후속 조치도 없었다.
말로는 김일성의 유지를 이어나가겠다고 했지만, 모든 협력 사업들은 올스톱 상태였다.
현장중심에 속전속결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전명헌에겐 정말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었다. 게다가 남북경협은 단지 경제적인 이득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키포인트였다. 바로 내년도 지방선거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이슈였으니 말이다.
당장이라도 금강산 개발에 첫 삽을 뜨고 싶었고, 북한에 공단도 크게 짓고 싶었다. 덤으로 이산가족 상봉도 정례화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이 완전 정지 된 상태였다. 그나마 정부 여당은 경제 관련으로 큰 지지지를 받는 중인데, 통일국민당은 남북경협 말고는 없었다.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쪽박 찰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무척이나 팽배한 상태였다.
전명헌의 하소연을 한참 들어주던 유재원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요.”
-응? 김정일을 움직일 방법이 있느냐?
“제가 도깨비도 아니고, 이북에 있는 김정일을 어떻게 움직이나요? 그건 아니고, 국내에서 이슈를 크게 만들어보는 거지요.”
-국내 이슈라니?
“총리실 직속 조직에 안전 점검단이라는 거 있잖아요.”
-응, 있지.
“할아버지가 그걸 움직여 국민들에게 임팩트를 크게 주는 거죠.”
-임팩트? 이게 남북경협을 능가할 꺼리가 있다는 게냐?
“제가 한강다리를 여러 번 넘으면서 유독 불쾌감을 느끼는 게 있었거든요. 다리 상판 마디마다 크게 덜컹거리는 게 붕괴 징조가 뚜렷하다는 거예요. 거기 한 번 대대적으로 점검해 보시죠? 아예 길목 차단하고서 떠들썩하게 보도하면 그 끔찍한 부실함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
유재원은 결국 인터넷 신문고만으로 붕괴사로를 처리하는 건 포기했다. 차라리 전명헌을 직접 움직이는 게 확실할 것 같다는 생각에 다리를 언급하게 된 것이다.
-혹시, 그 다리가 수성대교냐?
“헉! 할아버지도 아셨어요?”
헛바람 먹는 소리가 절로 났다. 수성대교를 전명헌이 직접 언급할 줄은 예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터넷 신문고에 누가 자꾸 수성대교에 붕괴 징조가 나타났다고 자꾸 올린다는 보고가 올라와서 말이다. 설마, 그게 재원이 너였느냐?
유재원은 깜짝 놀랐다.
이제껏 신문고에 올린 글들은 전명헌까지 보고가 올라갔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후속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무얼 의미하고 있는 건지, 유재원의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