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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워크래프트와 아이들(2)
1994년 9월 3일.
평범했을 9월의 첫 번째 주말을 세계는 앞으로 워크래프트의 출시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물론 게임에 관심이 있을 사람들에게만 각별해질 날이지만, 블리자드의 게임을 즐길 일들은 앞으로 억 단위로 나올 테니, 충분히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재미있는 건 정작 개발진들은 본인들의 작품이 그렇게나 흥행이 될 지 예상하지 못했고, 오히려 매우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망하면 어쩌지?”
마이크 모하임 사장은 산더미처럼 쌓아 있는 워크래프트: 인간과 오크 패키지를 보면서 망하면 어쩌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게. 우리집 창고는 이제 꽉차서 패키지 박스 놓을 자리도 없는데.”
마이크 모하임의 말을 받는 앨런 애드햄 공동 사장도 반 농담, 반은 진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둘이 나와 있는 곳은 실리콘밸리의 대형 쇼핑센터인 베스트바이의 게임 매장이었다.
게임 매장은 ID 엔터테인먼트와의 특별한 계약을 맺고, 섹션 전체를 워크래프트의 광고판과 배너로 가득 채웠다. 마치 이 거대한 매장에서 워크래프트만 파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비단 실리콘밸리의 베스트바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같은 형태의 구성을 꾸렸다.
이게 다 돈이다.
베스트바이측에 광고비를 내고 일주일간 공간을 독차지 한 것이다. 처음 시도하는 방식이라서 조금은 저렴하게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제법 큰돈이 나갔다.
광고비는 이뿐만이 아니다.
워크래프트는 무려 전 세계 동시 발매였다. 북미, 아시아, 유럽까지 컴퓨터 보급률이 높은 선진국들은 모두 9월 3일 발매한다. 일부 나라의 경우엔 자국 언어로 풀더빙을 했고, 시장이 좀 작다 싶으면 자막을 넣어줬다.
이게 또 다 돈이다.
마지막으로 한 달 전부터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광고가 있다. 오프닝 영상을 비롯해 컷신과 인게임 화면을 조합해 만든 15초 혹은 30초짜리 광고였다. 동영상을 제작하며 블리자드의 CG기술력은 몇 차원 상승했다고 할 만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퀄리티라고 자부할 수 있는 영상이었다. 이는 CG렌더링에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클라우드 시스템을 사용한 덕이었다.
그렇게 동영상을 만들고 이걸 게임과 광고에 쓴 것 역시나 모두 돈이다.
“마케팅 비용이 게임 제작비 이상인 거 같은데.”
“그러게. 유 회장님 손이 크다는 걸 알았는데, 직접 보니 상상 이상이네.”
마케팅 비용 이야기를 하며 혀를 내두르는 두 사람이지만, 이 부분에 와서는 목소리가 좀 가벼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케팅비용은 전적으로 블리자드의 모기업인 ID 엔터테인먼트다 부담하겠다는 계약서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마케팅 비용도 정산에서 함께 공동으로 부담하는 게 보통인데, 이번만큼은 ID 엔터테인먼트의 전액 투자라는 의미였다.
실질적인 부담이야 좀 줄긴 했는데, 덕분에 심적인 압박감은 상당했다. 유재원이 워크래프트의 흥행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게 하루하루 쏟아지는 광고나 이벤트를 통해 확실히 전달되었으니 말이다.
모하임과 애드햄, 블리자드의 공동 사장들의 근본적인 걱정도 거기에서 나온다.
마케팅으로 이정도 비용을 쓰는 건 블리자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에 실리콘 시냅스라는 이름으로 게임을 냈을 땐, 게임 잡지 정도에 광고를 뿌리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한 마케팅 비용을 뿌리면서 글로벌 런칭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덕분에 아무리 마케팅 비용은 모기업이 부담한다고 해도, 혹시나 자신들의 게임이 잘 팔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너무도 컸다.
“개장까지 10분 남았습니다.”
그런 둘에게 직원에 와서 매장 오픈까지 10분 남았음을 알렸다.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매장 밖 입구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 낙담했다.
일본 같으면 새벽부터 긴 줄이 이어지고 있어야 했다.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이벤트처럼 뭔가 대형 게임이나 제품이 판매를 개시하면 긴 줄을 그리는 게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밖에는 겨우 몇 십 명이 줄을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오전 시간이라 좀 애매한 시간대라고 해도 기대보다 적은 숫자인지라 둘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블리자드의 두 공동 사장들은 지금 베스트바이 실리콘밸리점에 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왜 사서 고생이시람?”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블리자드에 대한 골수팬이 크게 형성되지 않았기에, 일본의 대작 게임이 나왔을 때처럼 게이머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판매량에 대해선 유재원은 큰 걱정하지 않았다.
게임의 본질은 인지도가 아니라 재미에 있다.
인지도가 높은 게임의 후속작이라면 발매 첫날 매장마다 긴 줄을 만드는 장사진이 펼쳐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게임성이 바닥인 망작이라면 게이머들은 바로 알아본다. 아무리 깊은 팬심이 있더라도 재미없는 게임을 억지로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반면 인지도는 약해도 게임성이 확실하다면 결국 게이머들은 알아본다.
워크래프트의 게임성은 이미 검증이 끝났다.
매력적인 세계관이었고, 블리자드의 기술력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에 유재원의 천금과 같은 조언이 곁들여 지면서 워크래프트의 완성도는 이전의 것을 확실히 뛰어 넘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재원은 성공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과감한 배팅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글로벌 마케팅 비용으로 수천만 달러를 배정한 것이다. 이를통해 텔레비전부터 잡지까지 광고의 총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워크래프트에서 딱 하나 부족한 인지도를 채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물론 이렇게 한 달 전부터 광고를 펼쳤지만, 일본의 게임사처럼 첫 날부터 게이머들의 줄을 길게 세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광고비를 많이 써도 게이머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니 말이다. 대신 광고로 쌓인 인지도는 게임이 진짜 재미있다는 게 알려지면 강렬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다만 그건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니 판매점에 가서 게이머들이 얼마나 왔나 보는 건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대신 확실하고 간편한 방법이 있다.
“그냥 배틀넷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띄워 놓으면 간단한데.”
워크래프트를 구매한 게이머들이 얼마나 되는 지 살펴보는 가장 확실하고 간편한 방법이 바로 배틀넷 관리자로 로그인 하는 것이다.
워크래프트로 멀티 플레이 게임을 즐기려면 인터넷은 필수다. 인터넷 연결 후, 배틀넷에 접속해 패키지 안에 동봉된 키를 본인의 아이디와 연동시켜야 배틀넷에 온전히 접속된다. 그러한 게이머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어 예쁜 그래프로 표시해주기까지 한다.
“두 사장 입장에선 알아도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또 그렇다. 자기가 만든 작품이 처음을 세상에 빛을 보는 날인데, 컴퓨터 앞만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알겠어요. 오늘은 괜찮겠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안정적인 멀티 플레이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니까, 내일부터는 두 분 중 하나라도 들어오라고 해요.”
“예, 회장님.”
유재원의 지시를 김대석이 받았다.
21세기 게임의 주류는 온라인 게임이었다. 그러니 동시 접속자 수가 마케팅의 주요 포인트였고, 게임 서비스 첫 날 서버가 터져 나가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일이 많았다. 사람이 몰릴 걸 예상했음에도, 이보다 훨씬 많은 게이머들이 찾아서 서버가 터졌다는 식이다.
온라인 게임의 역사가 막 시작했다면 모를까, 나중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막장으로 흘렀을 경우엔 아예 첫날에는 의도적으로 서버당 수용 인원을 줄여서 서버가 터진 것처럼 연출할 정도였다.
배틀넷 역시 당연하게도 ID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만들어졌다. 물론 공짜로 해준 게 아니라 정당한 사용료를 받고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다만 배틀넷은 블리자드의 전유물은 아니다. ID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출시하는 모든 게임들의 멀티 플레이를 배틀넷으로 통합해 처리될 예정이었다. 대신 배틀넷 유지비용 역시 게임사들이 나눠지기로 했기에 부담은 크지 않았다.
하여튼 ID 클라우드 서비스로 만든 멀티 플레이였기에, 아무리 사람이 몰려도 서버가 다운될 일은 없다. 대신 계약한 수용인원에 다다를 경우에 대기열이라는게 생겨난다. 그때가 선택의 기로다.
일시적으로 서버를 좀 더 추가해 대기열을 줄일지, 아니면 지금의 인기는 과열된 것이니 괜히 서버를 추가했다가 돈만 버린다고 생각하고, 열기가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 말이다.
무엇이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서버를 늘렸다가 순식간에 거품이 빠져서 손해로 이어질 수도 있고, 진짜 이용자들이 늘어난 것인데 알아보지 못해 대응하지 않았다가 게이머들의 실망을 키울 수도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운영을 하려면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면 94년부터 배틀넷을 운영하는 개발사들은 축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부터 대규모 멀티플레이에 대한 노하우를 쌓는다면 21세기에 들어 완벽한 전문가들로 거듭날 테니 말이다.
띵~!
살짝 생각에 잠겼던 유재원을 깨우는 알람이 울렸다.
“와, 벌써 1,000명이 넘었네.”
유재원의 컴퓨터에 띄워졌던 배틀넷 모니터링 프로그램이 보낸 알람이었다.
정식 발매를 시작한 지 아직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동시 접속자가 1천 명이 넘었다는 알람이 뜬 것이다.
“그런데 성미 급한 사람들 참 많네. 시작된 매치만 벌써 200 게임이 넘었어.”
로그인한 사람들을 보니 워크래프트를 실행하자마자 멀티플레이에 들어온 사람들도 상당했다.
유재원은 그 대목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돈과 인력을 아낌없이 투자해 만든 오프닝 영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한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싱글플레이도 마찬가지다.
공들여 만든 워크래프트의 싱글플레이 시간은 50시간이 넘는다. 인간 진영, 오크 진영 이렇게 각각 15 스테이지가 있고, 마지막 스테이지는 공통의 맵을 사용하는데, 플레이 진영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는 식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쉽지만, 나중에는 점점 어려워진다. 게다가 맵도 커지면서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유닛도 골고루 사용하도록 했고, 컨트롤 실력도 제법 필요했다. 약간의 퍼즐도 있어서 유재원도 한 번에 클리어하지 못했을 정도다. 그러니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50시간정도를 플레이해야 두 진영의 엔딩을 모두 볼 수 있다.
이렇게 싱글플레이를 마치면 게임에 대한 이해력도 자연스럽게 높아져서 멀티플레이에서도 바로 적응이 된다. 그런데 이걸 다 생략하고 멀티플레이부터 시작면, 비싼 돈 주고 산 게임의 콘텐츠 중에 반 이상을 그냥 버리는 거나 같았다.
“아, 데모판을 공개한 지 좀 됐지.”
아무래도 지금 멀티플레이에 들어온 사람들은 데모판으로 조작법을 익힌 사람인 것 같다. 일부는 호기심, 아니면 실수로 들어온 모양이다.
“그러면 좀 하는 사람들도 있겠네?”
일찍 공개된 데모판과 오늘 출시된 정식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영웅 시스템이다. 데모판에는 없고 이번에 나오는 정식판부터 적용되었다.
다만 영웅 유닛을 따로 뽑는 건 아니다. 워크래프트 속의 주요 인물들이 처음부터 유닛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일반 유닛 중에 경험치를 많이 먹은 유닛이 영웅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경험치는 적과의 전투가 붙었을 때 받게 되는데, 여러 번 싸우고 오래 살아남아 일정 수치를 넘기면 영웅 유닛이 되는 식이다.
영웅 유닛이 되면 별도의 이름이 부여되고 외형도 좀 달라진다. 당연히 공격력이나 이동 속도 등에도 상향이 있다. 이렇게 태어난 영웅 유닛의 능력치는 다음 스테이지로도 이어져서 싱글플레이의 중후반 스테이지로 가면 존재감이 매우 중요해진다.
멀티플레이에서는 싱글플레이에서처럼 슈퍼파워를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경험치가 많이 쌓인 유닛을 잘 관리하는 게 상위 랭커와 하위권을 가르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영웅 유닛에 너무 힘을 줘서 가볍게 게임을 하는 일반 게이머들의 진입을 어렵게 하진 않았다. 만랩으로 올린 영웅 유닛도 둘러싸이면 순식간에 죽는다.
“한 번 해볼까?”
유재원은 곧장 워크래프트를 실행하고 배틀넷으로 들어갔다.
개발 중에는 래더 위를 날아 다녔던 유재원이었지만, 정식 발매로 랭크는 물론이고 배틀넷까지도 완전히 초기화된 상태였다. 그렇기에아이디부터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했다.
“아이디라면 진작 생각해 놓은 게 있지.”
사용자 등록화면에서 유재원은 ID 항목에 ID*ONE이라는 글자를 주저 없이 넣었다. 이름 그대로 ID 그룹의 일인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배틀넷 아이디를 생성한 유재원은 곧장 등급전 매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배치고사를 먼저 본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등급전 매치입니다.
-처음 접속해주셨습니다.
-비슷한 실력의 경쟁자를 찾기 위해서는 배치고사를 통해 당신의 실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리지널 워크래프트에는 승률만 표시되었고, 따로 등급은 없었는데, 유재원의 의견으로 금은동 방식의 랭크 구분이 만들어졌다.
제일 낮은 등급은 브론즈였고, 제일 높은 등급은 플래티넘이다.
사람의 특성 중 하나가 순위를 따지는 것이었다. 순위는 곧 치열한 경쟁을 의미한다.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질색하겠지만, 게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임 랭크를 올리기 위해서 한판이라도 게임을 더 할 테고, 그것이 곧 흥행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보다 세분화된 랭크를 만들었다.
그렇게 게임을 시작한 유재원은 연달아 5게임을 치렀다.
-ID*ONE, 당신의 등급은 플레티넘입니다.
압도적인 실력에 합당한 등급이 나왔다.
-경쟁전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높은 등급을 얻은 유재원은 3게임 정도를 해보고는 그만 두었다. 역시 오늘 막 출시된 게임이라 그런지, 제대로 부대를 운용하는 게이머들은 하나도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3판째에 데모 버전을 플레이해본 게이머를 만났다.
조합도 제대로 갖추었고, 컨트롤도 제법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의 현란한 부대 운용과 영웅유닛 활용에 백기를 들었다. 데모 버전의 양상과는 확실히 달라져서 상대는 속수무책이었다.
“흠, 유저들이 워크래프트에 익숙해지려면 한 달은 걸리겠네?”
싱글 플레이도 다 깨고, 멀티 플레이의 운영법도 익히는 데 한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싶다. 한 달 후엔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이 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퀘이크까지 쏟아진다.
게이머들이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ID 엔터테인먼트의 신작 폭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과연 워크래프트가 이 치열한 내전을 버텨낼 수 있을 지는 유재원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