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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파워 블로거(2)
약관이라는 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문서를 재미있게 읽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도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다른 기업들이 제공하는 약관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딱딱한 문장에도 강도라는 게 있다.
엘런이 최종적으로 보고한 약관은 유재원이 일상의 말로 전했던 문장이 법적인 용어로 탈바꿈하여 완성되었다.
딱딱한 문장의 강도는 아무리 깨물어도 부스러기조차 나오지 않을 다이아몬드에 비견될 정도다. 마치 어떻게 해서든 회사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고 딱딱한 법률 용어로 무장한 보험사의 약관처럼 보인다.
“음, 내가 엘런에게 지시를 잘못 줬나?”
유재원은 엘런에게 지시할 때를 되돌려 보았다. 인터넷 체제를 대비하기 위해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고, 여러 제품들의 라이센스 소유권 역시 임대라는 걸 확실히 못 박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다.
다만 약관의 문장에 대해선 따로 언급한 게 없었다. 그러니 엘런은 평소 하던 대로 어려운 말로 쓴 모양이다.
유재원은 곧장 엘런과 다시 1:1 대화를 연결했다.
-예, 엘런입니다.
“보내준 약관을 다 읽지는 못하고, 제가 이야기 했던 부분만 훑어만 봤어요. 역시 엘런이라 확실하더군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원래는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어볼 작정이었는데, 너무 딱딱해서 몇 줄 읽기도 힘들었던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처음 유재원의 말에는 칭찬으로 알고 우쭐했던 엘런은 뒤이어 나온 말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 회사가 보험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기업과 기업의 비즈니스도 있지만, 그래도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일이 훨씬 많아요.”
-그렇습니다.
대충 보면 ID 그룹은 기업간의 비즈니스가 더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소매점에서 운영체제를 구매하는 사람들의 숫자 보다는 완제품 컴퓨터 업체가 번들 버전으로 구매해 자동 탑재하는 숫자가 훨씬 많으니 말이다.
운영체제뿐만이 아니라, 게임 역시 3D 가속 카드의 번들게임으로 탑재되는 숫자가 훨씬 많다. 그렇지만 결국 최종사용자는 일반 개인이다. 그렇기에 소프트웨어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최종 책임은 안드로이드 사나 ID 테크놀로지가 져야 한다.
“알기 쉬운 말로 써야 최종사용자들도 본인 책임인지, 아니면 우리 책임인지 먼저 인지가 될 거 아니에요. 저는 약관이 킬링타임용 소설처럼 술술 읽혔으면 좋겠어요.”
-헉! 그렇게나 쉬운 말로 써야 한다는 겁니까?
“재미있게 쓰는 건 무리겠죠. 하지만 억지로 어렵게 쓰는 것도 문제라는 거예요. 우리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재원은 ID 그룹을 세우면서 결심한 것이 극한의 영리추구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약관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도 유재원의 기준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예전에 출시된 제품들은 출시를 준비하는 데 바빠서 약관까지 미쳐 챙기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겠다는 유재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작업이 다 무용지물이 된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엘런의 대답은 쉽게 나왔다. 레퍼런스로 쓸 약관은 만들어졌으니, 이를 바탕으로 가독성 좋고, 어렵지 않게 풀어 쓰는 건 보다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1월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무리해서 작업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리고 변환 작업이 어렵다면 외부 필진을 쓰셔도 괜찮고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절대 무리하진 않겠습니다.
엘런은 유재원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했다. 덕분에 유재원은 추가 설명 없이 대화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사상 최고의 폭염!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강타.
8월에 접어들면서 무더위가 동아시아를 덮쳤다. 한국이나 일본 등등 기상기록을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연일 갱신 중이었고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야외 작업장 강제 휴무 고민중!
“뭔 고민이래? 당장 해야지.”
40도에 육박하는 더위인데도 강제 휴무를 시행하는 게 아니라, 고민 중이라는 정부의 기사에 유재원은 기가 찼다. 안전 의식 자체가 없으니 그런 사고들이 줄줄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학교는 방학이라서 더위에 약한 학생들은 집에서 쉴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입 시험을 앞둔 고3들은 학교에 억지로 나와서 있어야 하니 애로 사항이 상당할 것이다.
“재원아! 이제 출발할 시간이야!”
티파니의 목소리였다.
보통은 남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여자친구 혹은 아내는 화장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촉박해지는 일이 많은데, 유재원과 티파니는 반대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유재원이었고, 반면 티파니의 시간 감각은 칼처럼 예리했다.
“알았어!”
유재원은 바로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혹시나 확인하지 못한 중요 메일이나 ID톡이 남았나 잠깐 본다는 것이 웹서핑으로 빠졌던 것이다.
이번에 유럽행은 1994년 세계수학자 대회가 있는 스위스가 목적지였다. 하지만 수학자대회만 참석하고 바로 돌아오는 계획은 아니었다. 여름휴가를 겸하는 것으로 채류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고, 스위스 여행의 동행으로 티파니는 그리고 부모님까지 합류했다.
유재원은 큰아버지나 다른 친척들도 권유를 했는데, 맡고 게신 일이 바쁘셔서 스위스 여행은 단출하게 꾸려졌다.
인원은 단출해도 여행의 일정은 넉넉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것을 시작으로 취리히에서 곧장 수상식장으로 가는 건 아니였기 때문에 취리히 시내를 둘러보고 쇼핑도 하는 일정이 여유로웠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마테호른에 가는 일정도 있었다.
이후 스위스로 가서 세계수학자 대회에 참가하고, 메달 수여가 끝나면 프랑스와 독일을 두루 둘러보는 일주일짜리 여행 코스였다.
비서실에서 잡은 숙소나 식당도 가성비는 고려하지 않은 최고의 호텔과 레스토랑만 선택했으니 불편함은 전혀 없는 일정으로 잡혔다.
물론 비즈니스를 위한 일정도 몇 가지 있긴 했다. 세른(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들려 팀 버너스리 경을 만나는 일정이 대표적이다. 세른은 세계수학자 대회가 열리는 취리히와는 반대편에 있는 제네바에 있는 곳이지만, 스위스가 작은 나라라서 차로도 금방 갈 수 있다.
이런 몇 가지 공적인 일도 있지만, 전체 테마는 휴식이자 관광이다. 덕분에 유재원의 준비물은 매우 간소했다.
작은 가방 하나가 본인이 챙긴 준비물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유재원은 꼼꼼하게 다시 한 번 열어 챙겨놓은 물건들이 잘 있는 지 확인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여권에 미국 돈은 물론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으로 각각 100만 원 정도 현금과 이번에 새로 뽑은 신용카드도 잘 있었다. 유럽 통합의 수준이 보다 높아지면 유로화 하나로 끝이겠지만, 지금은 나라마다 각자의 화폐를 쓰기에 따로 준비했다.
“여권, 현금. 신용카드도 OK!”
신용카드의 경우엔 로마 군인 얼굴이 선명하게 박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였다. 아멕스 하면 일명 블랙카드라는 센츄리온이 딱 떠오른다. 엄청난 특권을 주는 만큼, 꽤나 깐깐한 자격 심시를 치르는 것도 유명하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가방에 있는 건 평범한 녹색이었다.
유재원이라면 문제없이 심사를 통과할 수 있고, 원한다면 몇 장이라도 뽑을 수 있을 텐데, 평범한 그린카드인가 하면, 아직은 해당 등급의 카드가 발행될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재원의 소지품은 비상을 대비한 것이다.
실제로 유재원이 뭔가 비싼 물건을 구매하면 실제 계산은 비서인 김대석이나, 다른 수행원들이 대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에 카드 꺼낼 일이 없어서 그냥 발급도 빠르고, 분실하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그린카드로 받았다.
“카메라하고 추가 베터리도 OK!”
작은 가방에서 제일 큰 부피를 차지하는 건 주먹 크기의 렌즈가 달린 일체형 카메라였다. 일반적인 카메라가 아니라 이번에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과 함께 출시한 디지털 카메라였다.
정확한 모델명은 DSC-F101.
전생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이, 정말 뜬금없이 출시되었다.
원인을 따져 보니 유재원에게 있었다.
바로 티파니폰에 탑재되는 CCD덕이었다. 보급형이든 고급형이든 50만 화소짜리 CCD가 기본 탑재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호평이 대단했다. 한국에서 시범 서비스 중인 이동통신이었고, 휴대폰 제조에 뛰어든 업체들의 경쟁이 대단했다. 여기엔 한국의 대기업 산하 전자회사는 물론 노키아와 모토롤라 같은 이동통신 세계의 강호들도 참여했었다.
다채로운 신제품들이 쏟아졌는데, 여기에서 제일 빛난 건 티파니폰이었다.
유재원이 봤을 때나 작은 크기의 LCD이지, 다른 경쟁 제품과 비교했을 때에는 대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큼지막한 LCD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했는데, 문자나 주소록, 계산기는 물론 게임기능도 확실했다.
여기에 사진찍기 기능은 다른 제품과는 경쟁할 수 없는 티파니폰만의 독자적인 기능이었다. 티파니폰에 들어가는 CCD가 바로 소니에서 만든 모듈인데, 이제까지 시장성이 보이지 않아 묵혀 놓았던 것이다.
카메라의 세계는 아직도 아날로그가 대세였으니 말이다. 혹시나 하고 시범적인 물건을 만들어 봤다가 시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창고에 넣어뒀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티파니폰의 카메라 기능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디지털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성능을 조금 강화해 출시한 디지털 카메라가 F101인 것이다.
렌즈 일체형 디지털 카메라의 형태인데, 120만 화소의 CCD, 광학 4배 줌, 화각은 24~70mm까지 지원되는 당대 최고의 디지털 카메라였다. 저장매체도 플래시메모리인데 무려 32MB나 되는 용량을 자랑한다.
대신 메모리 스틱이라는 형태로 독자 규격을 사랑하는 소니의 유별난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물론 가격도 환상적이다. 32MB짜리 메모리 스틱 하나가 50만 원이 넘는 가격을 자랑했다. 그런 메모리 스틱이 유재원의 가방 안에 다섯 개가 더 있었고, 충전이 완료된 보조 배터리도 2개가 더 있었다.
“이정도면 일주일짜리 여행기 쓰는 데 충분하겠지?”
디지털카메라와 넉넉한 메모리, 보조 배터리까지 확실히 챙긴 건 이번 유럽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100%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기왕 사진을 찍는 거라면 번거로운 필름 카메라 대신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여기저기에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이를 테면 본인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여행기라고 올려두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줄 것 같다. 물론 아직 유재원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홈페이지는 없지만, 여행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면 딱 아니겠는가.
그렇게 준비물을 모두 확인한 유재원은 바로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유재원만 나오면 출발할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기에, 일행들은 곧바로 공항으로 출동했다.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취히리까지의 비행시간은 10시간이 넘었다.
저녁 비행, 아침 도착을 선호하는 유재원 덕이지만, 이번엔 부모님이 동행하시는 터라, 오전에 출발해서 저녁에 도착하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자는 것도 좋지만 시차 적응을 위해선 해당 지역이 밤이 되었을 때 자는 게 최고였다.
“아구구.”
덕분에 비행기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앉아 있기만 해야 했던 부모님은 좀 지루하고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특히 유재원의 아버지 유봉만은 비행이 무사히 끝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펴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심지어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오도독 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재원이야 아버지가 피곤하실 때 종종 보던 모습이지만, 티파니는 이런 관절기가(?) 처음인 모양인지 두 눈이 커졌다.
“티파니도 있는 데 할배 같은 소리 좀 그만 해요.”
괜히 민망해진 어머니 김말숙의 타박에 멋쩍은 듯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제 와서 짐짓 괜찮은 척 해도 이미 늦었다.
“호텔에서 보내온 자동차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김대석이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와서 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공항을 나서서 보니 호텔이 보낸 픽업용 자동차 4대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숫자가 많아졌나 하면, 유재원과 티파니 그리고 부모님을 위한 차가 2대였고, 나머지 2대는 ID 그룹 경호팀을 위한 차였다.
숙소까지 가는 건 호텔 픽업 서비스를 이용하고, 이후에는 현지에서 렌탈 자동차를 타는 것이 이번 스위스의 이동 계획이었다.
경호원들은 꼼꼼히 자동차를 살폈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부모님과 유재원을 차로 모시려고 했다.
“잠깐만요!”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따라가던 유재원은 잠깐만을 외쳤다. 그리곤 곧장 기내에 가지고 탔던 작은 가방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인증샷 한 방 찍고 가요.”
사진을 많이 남기겠다는 포부를 스위스 땅을 밟자마자 실행하는 유재원이다. 사진이라는 소리에 다들 차 앞으로 모였다. 곧이어 부모님과 티파니의 발걸음도 멈춰섰고, 경호원들도 유재원과 가족들주변으로 대형을 갖추었다.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자동적으로 김대석이 카메라를 넘겨받았다.
“하나 둘 셋, 김치!”
언제적 김치인 것인지, 정겹게 느껴지는 김대석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찰칵 하는 경쾌한 셔터 소리가 났다.
유재원 일행의 스위스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