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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SPEED 010(11)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통일국민당의 대선전이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국민여가수 이성희의 국회의원 출마였다. 구태로 가득한 정치판에 국민들에게 익숙하면서 새로운 얼굴로 승부했고, 그게 유재원의 지원과 맞물리면서 50석 이상의 대승을 거두는 비결이 되었다.
그렇게 국회에 입성한 이성희는 여러 개혁 입법을 실현 시키면서 국민에게 걸었던 약속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좌절한 경험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다른 국회의원들도 선거철에는 무조건 해줄 것처럼 말했으면서, 정작 국회에 입성하고는 말을 바꾼 게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이 때문에 임기가 반이 넘게 지났지만, 국민과 약속했던 공약은 반의 반도 실행하지 못해서 살짝 회의감이 들고 있던 때, 유재원의 연락이 온 것이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고, 약속장소로는 청담동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순식간에 정해졌다.
ID 그룹의 유재원 회장은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통일국민당 의원들에게는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통일국민당의 선대위원장을 맡아서 돌풍을 일으킨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 이성희는 유재원과 만남이 선거 시작 전 결의대회를 할 때 짧게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다는 점이다. 당시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한 이성희에겐 유재원의 유세 지원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유재원이 갑자기 연락을 해서, 예전의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을 때,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당연히 승낙했다.
이후, 하루 종일 무슨 은혜인가 생각해 보면서 약속을 기다렸고, 원래의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이성희의 성격이 본래 격식없는 자유분방한 타입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자리를 안내 받은 이성희는 더 깜짝 놀랐다.
“어? 유재원 회장님?”
약속시간보다 일찍 왔는데, 그보다 먼저 유재원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가오는 이성희를 알아본 유재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살짝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유재원이 먼저 말을 꺼내 대화를 시작하지 그 어색함은 단숨에 사라졌다.
“진짜요?”
이성희 의원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빠르게 되물었다.
“네! 진짜에요. 제가 그 유재원입니다.”
유재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답변의 내용을 보면 이성희가 유재원을 못 알아본 사람인 것처럼 들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회장님이 그 한바탕 웃음으로라는 데모 테이프를 보낸 학생이라는 거예요?”
“네, 제가 150만 원을 불렀는데, 이성희 님은 직접 전화를 주셔서 500만 원으로 올려 주셨잖아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네요.”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 데 있어 둘 만이 아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것처럼 좋은 건 없다. 유재원이 옛날 데모 테이프 이야기를 꺼내자 이성희도 옛 기억이 확 떠올랐다.
보람찬 하루의 스케줄을 끝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팬레터와 선물들 사이로 두툼한 봉투 하나가 먼저 보였다. 그걸 집어 들면서 유재원과의 인연이 생겼다. 이성희처럼 인지도가 높은 가수에게는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곡이라고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담겨 온 노래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건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귀에 딱 꽂히는 게 대박이었다. 더욱 놀란건 안에 담긴 연락처로 전화를 했을 때 들려온 앳된 목소리였다.
데모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도 매우 어린 티가 났는데, 전화를 들어보니 국민학생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노래 값으로 500만 원을 보내준 것이었는데,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고, 소식도 없었다.
그때 통화를 하면서 부모님이 음악을 못하게 하는 뉘앙스였기에, 결국 재능을 포기했구나 싶었는데, 그 주인공이 ID 그룹의 회장이었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럼 저번 선대위 위원장 할 때 아는 척은 왜 안 하신 거죠?”
더욱이 초면도 아니었다는 게 지금에 와서 살짝 화가 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잖아요. 게다가 이성희 의원님도 선거운동 하느라고 바쁘기도 했고요.”
유재원의 변명에 이성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그때를 생각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총선판에 나와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음악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귀에 들어왔을 거라고 본인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지금은 때가 되었다는 것일까?
정답이다.
사실, 음악 테이프 건은 유재원에게 있어 살짝 마음에 걸리는 사안이었다.
사업을 시작할 시드 머니를 만들 방법들을 열심히 찾았는데 최선의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복권이나 증권은 나이 때문에, 혹은 비밀 유지 때문에 어려웠고, 다른 방법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명을하든 결국 원작자 대신 본인이 창작의 대가를 가져간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 원작자를 찾아가서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유재원이 손실 보전은 물론 그 이상의 보답을 위해 찾은 방법이 지금 이성희와 함께 의논할 일이었다.
“이성희 의원님은 다음 총선에 진짜 불출마 하실 거예요?”
“헛! 설마 유 회장님이 비싼 밥 사주시는 게, 제 불출마 약속을 거두려고 하기 위해서인가요?”
이성희의 말대로 그녀는 선거운동을 할 때부터 국회의원은 한 번만 하겠다고 했다. 뒤는 없으니, 앞뒤 재지 않고 내뱉은 약속은 무조건 지키겠다는게 그녀의 공약이었다. 이성희는 공약대로 움직였지만, 입법이 이뤄지려면 국회에서 과반을 얻어야 했으니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서 더더욱 국회의원에 정이 떨어진 이성희는 임기가 끝나면 본업인 가수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천만에요. 확인 차 여쭤본 거예요. 가수로 돌아가신다면 제가 매우 중대한 정보와 제안을 드리려고요.”
“정보? 제안? 유 회장님이 그러니 뭔가 무서운 느낌인데요?”
무서운 일은 아니지만, 간단히 넘어가면 나중에 큰 일이 나는 일이었다.
바로 모바일 시장 발전을 예상치 못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어설픈 대응으로 인해 크나큰 병폐로 자리 잡았던 걸 미리 바로잡는 일이니 말이다.
“이성희 의원님도 아시겠지만, 이번 달 15일부터 이동통신 시범서비스가 시작하잖아요. 빠르면 올 겨울, 늦어도 내년부턴 전면적으로 서비스하고요.”
“네, 저도 TG모바일에 하나 신청했어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필수품이잖아요.”
“오, 발 빠르시네요.”
시범서비스 신청은 저번 달부터 인터넷으로 받는 중이었다. 아직 대리점이 정식으로 열리지 않은 탓이다.
“하여튼, 이동통신도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인터넷도 빠르게 보급되면서 일어날 변화를 생각해 봤는데, 대중음악시장도 상당히 바뀔 것 같더라고요.”
“진짜요?”
이성희는 유재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 최고의 IT전문가가 유재원이었다. 본인이 스스로 능력을 보여줬고, 그 결과가 PC운영체제 점유율 95%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였으니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 유재원이 대중음악시장에 변화가 있다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재원이 하는 말은 이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절대 틀릴 일이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음반의 유통은 카세트테이프나 CD를 음반가게나 리어카에서 파는 게 전부였잖아요. 앞으로 AAC 형태의 디지털 유통이 대세가 될 거라고 봐요. 디스켓 한 장 용량이면 노래 하나를 테이프보다 좋은 음질로 담을 수 있고, 좀 더 용량을 높이면 CD음질도 능가할 수 있거든요. 인터넷 전송 속도도 이젠 무척이나 빨라져서 몇 초면 한 곡 다운받고요.”
아직은 아리송한 얼굴이다.
AAC라는 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통합 코덱 중, 오디오 코덱만을 뜻한다. 안드로이드 오디오 코덱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확장자였다.
음질은 예전 MP3보다 훨씬 좋았다. MP3와 같은 손실압축방식이지만, 알고리즘을 개선해서 적은 용량에 보다 고음질을 달성했다. 운영체제에 기본 탑재된 코덱인 덕에 대중화도 쉽게 성공해서 요즘 불법 공유 사이트를 보면 AAC파일들이 흔하게 보이는 중이다.
“그렇게 받은 음악파일을 컴퓨터 앞에서 음악을 듣고, 앞으론 이런 휴대전화나 전용 재생기에 들고 다니는 게 대세가 될 거라는 이야기에요.”
유재원은 그러면서 본인의 티파니 폰을 꺼내 보였다.
최종 완성형이 아닌 프로토타입인지라 이성희에게 보여주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유재원이 사용하는 프로토타입은 특별한 오더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리테일판에는 없는 기능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중 하나가 AAC파일 재생이다. 내부 저장 공간이 64MB나 되고, AAC디코딩을 위한 커스텀 칩도 박아 놓아서 음악 감상에 탁월했다. 물론 최신의 기술을 사용한 탓에 가격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지만, 당장 해가 바뀌면 가격은 한층 저렴해질 것이다.
유재원은 바로 이성희에게 티파니 폰에 담긴 이성희의 곡을 들려주었다. 이어폰을 착용하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 이성희도 깜짝 놀랐다. 손바닥만한 휴대폰에서 상상 이상의 음질로 노래가 나오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다음곡, 이전곡 혹은 곡 중간에 특정 지점으로 가는 것도 버튼만 누르면 금방이었다.
“이런 디지털 파일의 유통이 대세가 되면 좋은 점이 많아요. 일단 유통망이 간소화되면서 아티스트와 청취자를 바로 연결할 수 있죠. 그러면 음원의 소비자가격을 내리면서도, 저작권자에게 배분되는 액수는 테이프나 CD보다 훨씬 커질 거예요. 판매량 집계도 컴퓨터를 통해 자동으로 집계 되니까 정산할 때 피곤하게 소속사나 유통사와 싸울 일도 없겠지요?”
유재원의 설명에 이성희는 즉각 반응했다.
“세상에! 혁명이네요”
“후훗, 정보기술의 파급력이 이런 식이지요!”
우쭐하면서도 살짝 마음에 찔리는 건 있었다.
컴퓨터 파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보니, 불법 복제가 무척이나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바일 시대가 되면 장점이 확실히 부각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유재원은 이성희가 정리만 잘 해주면 한국을 테스트 필드로 삼아서 보다 일찍 음원 혁명을 시작해볼 계획이었다.
그러면 가수나 작사가, 작곡가, 연주가에게 그 혜택이 고루 돌아갈 것이고, 유재원의 마음의 빚도 조금은 덜어질 것 아니겠는가.
“제가 생각해 봤을 때, 디지털 음원의 분배 비율은 7:3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7:3? 가수가 3인가요?”
“무슨 말씀을. 저작권자들이 7이지요. 유통망을 가진 쪽이 3이고요. 음, 디지털 음원으로 유통되는 앨범 한 장이 1만원이라고 치면 저작권자에게는 7천원이 돌아갈 거예요. 부가가치세나 카드결제 수수료 같은 건 유통사인 저희 쪽에서 부담할 거니까요. 7천원을 어떻게 분배할 지는 각자 결정하시면 되는 거고요.”
“세상에!”
국민 여가수인 이성희도 테이프 하나가 팔려봐야 100원도 못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행사나 CF를 통해 수익이 좀 났고, 음반을 팔아서 돈을 모은 건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음원으로 매출액의 70%나 받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 유재원이었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직 디지털 재생 환경의 보급률이 낮아서 디지털 유통을 시작한다고 바로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달라질 거고, 늦어도 21세기가 되면 대세가 될 거라고 확신해요.”
“유 회장님이 말해주신 대로만 된다면, 몇 년 기다리는 게 대수도 아니지요..”
이성희 의원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전에 처리해야 될 게,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의 계약이에요. 거기는 아직 디지털 유통에 대한 대책이 없잖아요. 이성희 의원님이 이번 문제를 다뤄주셨으면 좋겠어요.”
전생에서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무지로 인해 디지털 음원의 유통 권리를 아주 헐값으로 넘겨버렸다. 이로 인해 한국 가수들은 미국과 달리 음원 수익은 거의 기대하지 못했고, 행사나 광고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뿐만이 아니라 연예계에는 아직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표준계약서 같은 걸 만들어서 계약기간이나 각 수익에 따른 분배 비율 같은 걸 미리 정해놓으면 디지털 시대가 되더라도 혼란이 크게 줄겠죠.”
한류는 진짜였다.
몇 번의 부침이 있어서 사그라지는 듯싶다가도 다시 새로운 활력이 공급되어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유재원은 디지털 음원 문제와 함께 한국 연예계의 병폐 몇 가지를 미리 해결함으로서 그 불길이 훨씬 크고 강하게 타오르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ID 그룹에 직접적인 이익은 아니지만, 한국의 이미지를 높임으로서 얻는 부가적인 이득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이성희 의원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일이 커져서 당황했다. 더욱이 표준계약서 문제는 생각해 본 사안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할게요!”
국회의원인 이성희는 유재원의 존재감이 단지 기업인으로서만 있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봤을 때 이건 통과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던 법안도 유재원이 여론을 만들어주니 통과된 적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셨는데, 안 하면 바보죠. 대신 확실하게 밀어주셔야 해요.”
유재원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끈끈한 우정의 악수를 하는 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며칠이 지났다.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 조선중앙TV에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태양궁을 찾은 전명헌과 남측 조문위원들이 허리를 숙여 묵념을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큰 논란이 일어났는중에, 토막 뉴스로 이성희 의원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방문했고, 연예기획사들에 소속 연예인들의 계약 현황도 보고 있다는 기사도 한 토막 나왔다.
행동력 좋은 이성희 의원은 유재원과 저녁 식사 후에 바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본업이 가수였고, 유재원과의 인연도 깊은 만큼 확실히 믿음이 갔다.
그렇게 뉴스가 끝났음에도 유재원은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다.
-7월 15일, 이동통신의 신기원 SPEED 010, 새로운 시대를 시작합니다.
TG모바일의 스피드010의 첫 이미지 광고나 나왔다.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을 직접 보고서야 유재원은 텔레비전 앞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