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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SPEED 010(9)
유재원에게 통화가 연결되려면, 보통 통화 의향을 먼저 물어보는 게 기본이지만, 부모님과 티파니 그리고 전명헌이라면 프리패스다.
“할아버지?”
-오냐! 한국에 들어 왔다고?
“네! 지금 서울로 들어왔어요! 어떻게 저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타이밍 좋게 전화를 다 주셨네요.”
-후훗, 다 아는 수가 있단다.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감을 잡았다. 본인이 입국하면 뭔가 위로 자동 보고되는 조치가 있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감시를 하는 건지, 보호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자신이 한국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였으니 기분이 막 나쁘진 않았다.
-비행 중에 별 탈은 없고?
“그럼요. 겨우 한나절 비행기 탄 걸로 무슨 탈이 날 나이는 아니지요!”
더욱이 마음 놓고 대화도 할 수 있고, 살짝 어리광도 부려볼 수 있는 사람이 전명헌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전화에도 이어지는 대화는 훈훈함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가뜩이나 김일성 사망 소식 때문에 청와대도 난리난거 같은데요.”
-뭐냐? 천리안이라도 있는거냐?
“흐흐, 뭐 이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시중에서는 사재기도 일어났다고 하는데, 청와대라고 괜찮겠어요?”
-그래. 정답이다. NSC도 열고, 전군 준비태세 점검도 하고 난리도 아니다. 게다가 조문 문제로 시끄럽단다.
역시 그놈의 조문이 문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걸로 청와대 내부에서 약간의 세력 다툼이 있다고 한다.
비록 남북정상회담을 하긴 했지만,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킨 원죄가 있는 사람이었다. 6·25전쟁 때문에 희생된 사람의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지금, 조문을 가는 건 남북정상회담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 김 대통령이나 전명헌과 같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북한을 정식 대화 파트너라고 생각한다면, 조문을 가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이 어마어마한데도 반대의 목소리가 분명한걸 보면, 북한에 대한 감정이 하루아침에 풀릴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재원이 네가 판단하기에 누구 말이 맞는 거 같으냐?
유재원이 입국하자마자 전명헌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었는데, 유재원의 조언 방향에 따라 전명헌의 생각도 확고해질 것 같다.
“가긴 가야겠죠.”
이에 대해서는 유재원도 많이 생각한 일이었기에, 답은 바로 나왔다.
-그렇지?
역시 북한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전명헌은 유재원이 긍정을 표하니 바로 목소리가 올라갔다. 단순히 애착만 있는게 아니라, 북한 개발 사업도 전명헌이 보기에 매우 유망한 먹거리인지라 여러가지 판단이 담긴 결정이긴 했다.
하지만 유재원의 말은 아직 다 끝난게 아니었다.
“그런데 웬만하면 할아버지가 가는건 삼갔으면 좋겠어요.”
-응? 왜 내가 가지 말라는 것이냐? 정부 측 대표로 나 말고 갈 사람이 누가 있다고?
“북한과의 관계가 지금처럼 좋으면 상관없지만, 북핵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은 언제든 꽁꽁 얼어붙을 수 있거든요. 그때가 되면 조문 간 걸 가지고 할아버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분명 나올 거예요. 차라리 비서실장보고 가시라고 하는게 좋을거 같아요.”
-흐음.
전명헌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유재원의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표시다.
-네 말이 정답이다. 하지만 지금 남쪽 사람 중에 김정일을 만나 본 사람은 없지 않느냐? 이번 기회에 가서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눠 보는게 나을 것 같은데 말이다.
돌아오는 대답에 유재원은 전명헌의 생각이 확고하다는 걸 알았다.
전명헌의 최대 속성이란 실전적 행동주의 아니겠는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에게 해봤냐고 물어보는 양반인데, 본인이 가지 말라고 해서 순순히 안갈거라고 기대하는건 무리였다. 더욱이 지금 단계에서는 김정일을 만날 기회를 살리는게 맞았다. 그리고 김정일을 만난다면 전명헌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21세기라는 불지옥에서 돌아온 유재원에게 김정일은 낙제점으로 평가가 끝난 인물이라는게 아쉬웠다.
김정일의 성향을 봤을 때, 분명 북핵을 만들 것이고, 그로 인해 북한 경제도 파탄 나고 고난의 행군도 시작될 것이 확실했다.
“음, 그러면 혼자 가지 마시고, 정당 대표들과 함께 가시지요?”
유재원이 차선책을 냈다.
혼자서 덤터기를 쓰기 보다는, 물귀신처럼 여러 사람과 함께 가면 그나마 비난의 집중도가 줄어들 테니 말이다.
김 대통령부터 조문을 가자고 하는 판이니 민정당 원내대표도 싫다고는 못할 것이고, 다른 야당은 본래 북한에 유화적인 사람들이니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흐음, 알겠다.
스포트라이트를 나눠야 한다는 소리에 전명헌은 싫은 티를 냈지만, 그것까지 거부하진 않았다. 유재원의 우려는 분명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그런데, 바로 집으로 내려가는 거냐?
“네, 원래 방송이 하나 잡혀 있었는데, 이번 일로 취소 되서 서울에는 볼 일이 사라졌거든요. 평소라면 할아버지 보러 가겠지만, 지금은 바쁘실 거고요.”
-아, 그거 참 아쉽구나.
전명헌은 무리를 해서라도 스케줄을 잡고 싶은 마음이지만, 유재원의 말대로 지금은 무척이나 바빴다. 다른 정당들과 만나서 조문단을 꾸리려면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북에 다녀 온 후에 꼭 좀 보자.
“알겠어요.”
-개인적인 일 뿐만이 아니라, 제주도 건으로 할 말이 있으니 꼭 좀 시간을 내려무나.
제주도 건이라니?
유재원의 제주도 투자는 순조로움 그 자체였다.
제주도 사람들이 보통은 육지 사람을 경계하고 땅을 내놓는 걸 꺼려한다고 해도,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평소의 땅값보다 2, 3배 비싸게 부르면 마지못해 승낙하기도 했고, 서울 사람이 땅주인인 경우도 많았다.
요즘엔 거의 제주도에 살고 있는 황재홍이 최근 올린 보고서를 보면 김녕과 월정리 해안가 부분은 50%정도 매입이 끝났고, 섬 안쪽의 경우엔 70%이상이 들어왔다. 이러한 ID 그룹의 공격적인 제주도 투자를 보고 따라 나서는 큰손들도 많아져서 제주도 부동산에 활기가 생겨났다.
“알겠어요. 다녀오신 후에 연락주시면 바로 시간을 낼게요.”
-그래, 그러면 있다 보자.
전명헌이 본인에게 나쁜 제안을 할 일은 없다는 생각에 유재원은 바로 승낙했다.
-정부와 국회. 북에 공식 조문사절 파견키로.
-조문단 대표로 전명헌 총리, 국회 원내 정당 대표들과 함께 간다.
-남북관계 개선에 노력했던 시민단체장들, 원로도 방북 승인.
-북한, 남측 조문단 방북 승낙. 이례적 빠른 속도.
-조선 중앙 테레비에 남측 조문단 방북 소식 보도.
다음 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조문단 구성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박상한 사건이 온 미디어를 뒤덮었다면, 오늘은 조문단 구성과 방북 일정에 대한 뉴스가 가득했다.
“쯧쯧, 이런 게 냄비 근성이라는 건가?”
유재원이 혀를 찼다.
텔레비전만 보고 있으면 박상한 사건은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각 신문의 성향에 따라 정부의 공식 조문단이 구성된 것을 비난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는 기사를 내면서 박상한 사건은 사라져버렸다.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칼을 갈았던 유재원에겐 참 허무한 일이었다.
스탠포드의 교수님들께 연락해서 받은 사회과학실험 자료도 한 가득이었고, 엉뚱한 실험을 많이 하는 영국의 논문을 검색해 찾은 자료도 많았다. 당연히 게임중독과 폭력성의 관계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자료들이었다.
게임과 폭력성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일은 이미 해외에서 많이 있었던 일이었기에, 많은 시간을 공들일 필요 없이도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박상한과 관련된 자료들도 많이 찾아 두었다. 정보팀을 동원하기도 했고, 기억의 궁전에 저장된 자료를 옮겨놓기도 했다.
역시 박상한의 내력을 살펴보니 게임중독보다는 부모와의 유대감에 문제가 있었다.
박상한은 이기적인 성격이지만, 무슨 일을 하면 끝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타입이었다. 술도 좋아해서 비행을 일삼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엇나가는 모습을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했고, 그럴 때마다 더욱 엇나갔다.
이러한 충돌은 대학교 진학때 폭발한다. 박상한이 원래 관심을 두던 건 자동차였고 진로도 이쪽으로 정하려 했는데, 그의 부모는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한약재상이라서 자신의 뒤를 아들이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단다.
문제는 박상한의 학업 성적은 한의대를 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원하는 자동차 관련 학과에 진학시킬 마음도 없었다. 결국 원대 경영학과에 갔는데,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부모는 최후의 수단으로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당연히 강제로 보내진 유학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사설 카지노에서 커다란 도박 빚을 지고 한국에 돌아오게 된 게 최근인데, 빚쟁이로부터 압박을 받자 결국 끔찍한 패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게임은 박상한에게 현실을 잠깐 잊을 수 있는 도피처에 불과했다. 둠과 같은 게임을 열심히 하다가, 보다 신선하고 자극적인 혈맹 온라인으로 옮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팩트를 통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박상한의 컴퓨터 속에서 게임이 발견 됐다고, 게임이 폐륜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양반들에게 팩트 폭격을 해주려고 칼을 갈았던 유재원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예정보다 일찍 가버린 통에 기약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유재원은 아쉽긴 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전생에 이정도 타이밍이 어긋나는 걸로 마음이 상할 유재원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토론회는 유재원의 대책 중 하나였을 뿐이고, 게임의 이미지를 확 바꿀 대책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 정식 스케줄을 시작해 볼까.”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TG그룹 이용권 사장과의 미팅이다.
시범 서비스를 앞둔 TG 모바일 점검을 비롯해 ID 그룹과 함께 하고 있는 여러 가지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아, 부담스럽게 또 나와서 계셨어요? 제가 많이 늦은 건 아니죠?”
유재원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용권에게 인사부터 했다.
이용권 사장은 TG그룹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예전처럼 TG그룹 본사 로비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님이 오시는데, 사장인 내가 먼저 나와 기다리는게 당연하지.”
엄연히 독립된 회사의 회장이고, 사장인데 마치 하나의 조직처럼 말하는 이용권이었다.
“그나저나 ID톡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신수가 좋으신데요? 요즘 따로 챙겨 드시는 거라도 있나요?”
이용권의 안색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예전에 봤던 것과 확실히 달라져서 빈말은 절대 아니었다. 예전에 봤을 때도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꽤나 많아졌다. 말은 가볍게 해도 행동 자체는 커다란 조직을 이끄는 거물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긴, TG그룹의 규모는 이제 한국 10대 기업을 기웃거릴 만큼 커졌다. TG 모바일이 제대로 터지면 10위권 안에 드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자, 그러면 바로 올라갈까?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진작 끝났단다.”
“네!”
유재원을 닮아서 이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용권이다.
오늘 유재원이 이용권을 만난 건 상용서비스의 준비 상황과 빠르면 올 가을, 늦어도 겨울쯤에 정식 시작할 TG모바일의 사업계획서를 보고 받기 위해서였다.
승강기를 타고 TG빌딩 최상층에서 내렸고, 임원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유재원과 이용권이 나란히 등장하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이했다.
회의실의 모습 하나로 유재원은 기업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TG그룹은 확실히 한국의 대기업 스타일이었다. 미리 와 있던 이들은 모두 다 정장 차림이었고, 분위기도 무척이나 엄숙했다.
회의실에는 ‘ㄷ’자 형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가운데 상석엔 두 개의 화려한 의자가 있었다. TG모바일의 임원들이 양쪽에 쭉 도열해 있는데, 완전히 계급 순이었다. 레드먼드에서 유재원이 가끔 알파팀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레드먼드는 시장통이었고, 여긴 무슨 청와대 국무회의장 같았다.
“자, 앉자.”
이용권의 권유에 유재원은 상석에 앉았다. 그러자 기립해 있던 TG모바일의 임직원들도 자리에 앉았다. TG모바일의 지분 49%를 혼자 소유하고 있는 유재원이지만, 경영은 완전히 이용권에게 위임했다. 감사를 위해 ID 그룹이 임명한 인사를 빼면 다들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이였기에,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고 바로 프레젠테이션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TG모바일의 모바일 기획본부장 정민호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의 발표는 40대 초반의 딱딱한 인상의 남자가 맡았다. 쉘북과 연결한 프로젝터로 ID 오피스 화면을 띄우고 붉은 빛이 나오는 레이저포인터를 잡은 모습이 비장했다.
그렇게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정민호가 풍긴 분위기와 그대로 이어졌다.
딱딱했고, 지루했다.
유재원이 콕 찍어 알려준 이동통신 상표인 스피드 010의 로고를 비롯해 여러 가지 프로모션 방법 등등은 딱 94년도 감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포터 자동차 하면 떠오르는 파란색에 두꺼운 고딕체로 만든 스피드010이라는 로고도 시대감성에 충실했다. 공들인 티는 나지만, 너무도 구식 느낌이라고 할까.
현미경 보듯 눈에 거슬리는 디자인들을 파고들면 할 말이 많아지는 유재원이지만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로고 같은 건 아무래도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었고, 유재원이 가진 감각은 지금과는 너무도 먼 미래의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800MHz 대역이란 황금주파수와 시작 단계부터 파격적인 커버리지를 갖추고, 티파니폰까지 준비된 TG 모바일은 저거보다 못난 로고를 가지고 사업을 해도 절대 망할 일이 없는 사업이었다.
“응?”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청취하던 유재원의 입에서 다시금 의문의 소리가 나온 건, 스크린에 서비스 요금 항목이 떠오를 때였다.
“가입비? 10만원?”
정면에 딱 보이는 가입비 10만 원이라는 항목이 너무도 압박적이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