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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SPEED 010(8)
-김일성 사망
-노동당 중앙위 등 명의로 당원, 인민에 선포.
-6월 26일 새벽 2시, 심근경색으로. 7월 7일 장례식.
-김정일 사실상 권력 승계
“드디어 한 세대가 끝났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재원은 신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재원이 보고 있는 신문은 미국 신문이 아닌, 한국에서 공수된 26일자 신문들이다. 이들 신문들의 공통점은 1면 머리기사로 ‘김일성 사망’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고 있다는 것이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신문이 대다수지만, 매우 극우적 성향의 신문은 붉은 바탕에다가 쓰기도 했다.
김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을 하긴 했지만, 북한과의 감정이 하루아침에 정리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어떤 길을 가려나?”
미국도 긴급 속보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할 만큼 커다란 뉴스였다. 한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난리가 났다. 김 대통령은 새벽에 보고를 받자마자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소집했다고 했다.
휴가를 나갔던 군인들도 다 복귀했고, 훈련도 취소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해 경계했다.
김일성이 오늘내일 한다는 건 다 아는 사안이었고 관건은 후계자인 김정일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모여지고 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라서 그런지 미국 언론들도 이렇다할 결론을 내리진 못하고 있었다. 유재원의 경우 은둔의 독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전과 달리 남북관계에 큰 진전이 생겼던 만큼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했다.
다만 이번 김일성 사망으로 인해 유재원의 한국행 스케줄 하나가 취소되어버렸다. 바로 게임의 부작용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기로했던 심야 토론이다.
하긴, 이 상황에 한가한 게임 이야기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취소된 게임 이야기 대신 주제로 잡힌 건 북한의 급변한 상황과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토론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유재원은 녹화라도 뜬 다음에, 나중에 방송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까지 유연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행을 취소하지 않은 건, 한국에 가서 할 일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도 둘러보고, TG모바일의 시범서비스 행사와 티파니폰 발표 등등 여러 행사들이 잡혀 있었다. 취소된 방송 토론회도 김일성 사망 충격이 가시면 재게 될 것으로 유재원은 생각했다.
“회장님, 이제 탑승 시각입니다.”
“네, 가죠!”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신문을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덥다.”
10시간을 넘게 날아 한국에 도착한 유재원 첫 감상은 덥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선선한 기후와 달리, 한국은 6월인데도 더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94년도 더위는 기상이변이 생기기까지 역대 급으로 높았던 온도였다. 덕분에 21세기 초중반까지 계속 회자되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화끈한 맛을 살짝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유재원의 지시로 인해 자택은 물론이고, ID 그룹의 사업장, ID 파운데이션 산하 학교법인이나 지원하는 모든 조직에 에어컨을 들여다 놨다는 것이다.
설치된 제품은 미국 캐리어 사의 한국 라이센스를 가진 대호전자 제품으로 설치 장소에 따라 조그만 창문형 에어컨부터, 시스템 에어컨까지 다양했다.
재미있는 건 이 주문의 발주는 여주시의 대호전자 대리점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여주시의 대호전자 대리점은 작년에 주인이 바뀌었는데, 새로 인수한 분이 유재원의 어머니 김말숙과 함께 주부사원으로 일했던 분이었단다. 동기나 다름이 없었는데, 판매 수완은 훨씬 좋아서, 제법 큰 돈을 모았고 이를 통해 대리점을 인수했다고 했다.
유재원이 어렸을 때는 두분 사이에 라이벌 의식도 있었다고 했는데, ID 그룹이 세워지면서 그 의미가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좋은 감정만 남아서, 이렇게 도움을 준 것이다.
유재원도 그룹 공금으로 에어컨을 사는 것이었다면, 다른 회사들의 견적서도 받아봤을 테지만, 한국에 에어컨을 사는 건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기에, 대호전자의 견적서만 받았다.
단독으로 견적을 받아도 주문 액수가 수백억 원 대에 이르렀기에, 대호그룹 차원에서 할인을 제법 해주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남는 장사였고, 그만큼 대리점 주인 아주머니에게 돌아가는 콩가루도 제법 되었다. 당연히 에어컨 대량 주문이 들어간 달에 전국 대호전자 대리점 매출 순위에서 여주시가 톱을 찍은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덕진리 집이야 진작 에어컨이 설치가 된 상태이니, 얼른 집으로 가서 찬바람 맞으며 피로를 풀고 싶었다.
“회장님, 입국을 환영합니다!”
“아, 실장님! 바쁘실 텐데, 번거롭게 나오셨어요.”
이번에도 입국장을 나서자마자 최강욱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잠시나마 더위가 살짝 가시는 느낌이다.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살짝 들었는데, 최강욱의 얼굴에서 주름이 늘어난 게 보였던 탓이다. 유재원을 대신해서 한국 조직을 이끌고 있으니, 그 스트레스가 대단할 것이다.
특히 요즘엔 어려운 입법 과제와 언론의 공격을 다 막아내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또 마중을 나오셨다.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회장님의 도깨비 방망이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으니 말입니다.”
도깨비 방망이라니?
순간 유재원은 본인의 내력을 최강욱이 눈치챈 거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거기까진 아니었다. 유재원이 세상에 보여준 능력을 도깨비 방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최강욱의 눈에는 신제품 개발부터, 중요한 결정까지 유재원이 관여하기만 하면 대박이 터지니, 도깨비 방망이가 휘둘러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최강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항을 나섰다. 거기엔 예의 그랜저 리무진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명헌의 선물이었던 각진 그랜저도 시간이 좀 지나니 낡아 보였다. 특히 거리의 신차들을 보면 유선형 디자인이 많아져서 각진 그랜저와 확실히 대비되었다. 그래도 관리가 잘 되어서 광택이 번쩍거리니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이번에도 유재원과 최강욱이 뒷자석에 나란히 탑승했고, 김대석은 조수석으로 갔다. 여기에 경호원들의 차량이 앞뒤로 2대씩 붙어서 이동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많아진 경호원 숫자에 최강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김일성 사망 소식에 경호 단계를 격상했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최강욱이 이렇게 생각할 만큼, 한국의 위기의식은 심각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사재기였다. 동네 슈퍼마켓이나 시장에서 라면과 깡통 제픔, 부탄가스 등이 싹 떨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두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의 경호 강화도 이러한 위기감에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최강욱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평소보다 경호원의 숫자가 많아진 건, 평양의 루트킷이 사용자 검색어로 유재원과 관련된 것을 잔뜩 보내왔던 탓이었다.
검색어는 곧 그 사람의 주요 관심 사안이라 볼 수 있었다. 즉, 김정일의 레이더에 유재원이 포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북한의 특수한 체제라는 걸 감안하면 김정일이 콕 찍어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러한 우려도 북한을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고가 터지고 나서 당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도하게 준비하는 게 유재원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북한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차가 출발한 다음, 최강욱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역시 일부러 나오신 이유가 있었군요.”
최강욱의 질문에 유재원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렇지만 최강욱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긴, 이 시대 사람에게 김일성의 죽음은 상당히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유재원이야 거의 통일 직전까지 간 남북관계를 생생하게 체험한 경험이 있지만, 최강욱은 남북 대립 상황만 쭉 봤으니 말이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아무 일 없을 거 같아요.”
그렇기에 유재원은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가서 사실을 말해줬다.
“아무 일이 없다고요?”
“네,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일각에서는 일어나기 바라는 그런 전쟁은 없을 거예요. 다만 김정일이 정권을 잡아서 안정화하기까지 북한은 외부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고, 권력을 안정화시킨 후에는 경계를 해야 할 거예요.”
“경계라니요?”
“세습을 끝냈으니, 본인의 존재감을 확 보이려고 할 게 분명하잖아요. 이를테면 무력 도발이죠. 대대적으로 벌이진 못해도 국지도발 정도로 긴장감을 높일 거 같은데요.”
유재원의 담담한 말에 최강욱의 입이 떡 벌어졌다.
최강욱이 얻고 싶어했던 답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던 탓이다. ID 그룹은 북한과 관련된 사업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예전 유재원의 지시로 진행 중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통신망 사업으로, 중국과 합작 법인을 만들어서 북한의 통신분야에 진출한다는 것이다.
임무를 받은 최강욱은 중국에 적당한 회사를 물색 중이었고, 연변에 거점을 둔 동방통신케이블 유한회사와 이야기가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지도발 이야기를 하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재원의 내력을 모르는 사람이면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넘겼을 테지만, 최강욱은 유재원이 예측하는 것은 모두 현실로 이뤄졌다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실제로 김정일은 1995년과 1996년에 무장공비를 보내 도발을 일으켰다. 95년은 부여에서 일어났고, 96년엔 잠수함을 타고 내려오다가 강릉에서 걸렸다.
특히 강릉 무장공비 건은 규모가 상당히 커서 북한에도 몇 대 없는 상어급 잠수함이 동원되었고 침투조는 무려 26명이나 되었다.
북한의 정권이 세습 될 때마다 대남도발을 크게 하는 건, 마치 정통 세습자인지 판별하는 통과의례처럼 보일 만큼, 규칙적이었다.
“헉! 국지도발이요?”
최강욱은 깜짝 놀랐다.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남북관계가 이렇게나 좋아졌는데, 놈들이 일을 벌여 대치국면을 만들까요?”
덕분에 날카로운 반문도 즉각 돌아왔다.
“그러게요. 이번엔 남북정상회담까지 했고, 북미회담도 추진 중이니 다를 수도 있겠네요.”
그 점에 대해서는 유재원도 딱히 해드릴 말이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변수는 유재원의 예측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이벤트였다. 전보다 훨씬 긍정적인 예측을 할 수 있겠지만 섣불리 예단하는 건 금물이다.
“이번에라니요?”
그런데 최강욱이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순간 말실수를 깨달은 유재원의 두뇌가 100%로 회전했다. 유재원이야 21세기 중반까지의 상황을 보았으니 이번에라는 말이 그냥 나왔는데, 지금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예전에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있었잖아요.”
프로그래밍에 집중하던 때보다 빠르게 돌던 유재원의 명석한 두뇌가 변명거리로 찾아낸 건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김정일이 막 실무를 시작했을 때거든요. 뭔가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마침 미군이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자르려고 하니 본때를 보여주라고 지시해서 일이 터진 거예요.”
유재원의 설명에 최강욱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앞자리 조수석에 있던 김대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사건이 있던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전쟁설은 김일성이 죽은 지금 생생했지만,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만큼은 아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북한초소 관측을 방해하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쳐 내는 작업을 하는 중에, 북한 측에서 갑자기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미국 장교 2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의 사건을 보고 받은 미국은 크게 분노했고,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그 유명한 7함대도 서해로 진입했고, B-52전략폭격기 3대와 스텔스기로 유명한 F-111 20대가 올라왔다. 해병대 병력도 1만2천 명이 증파 요청이 되었고, DMZ 근처의 방공포병 부대도 언제든 포탄을 날릴 준비를 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병력을 준비시켜 놓고 사건의 원흉이 된 미루나무 제거 작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북한이 다시 방해를 하면, 바로 북진을 할 기세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을 벌인 김정일은 이 대목에서 쫄보 기질을 제대로 보여줬다. 대응은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세상에. 그런 비화가 있었습니까?”
최강욱은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사건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네, 동아시아전략연구소를 지원하면서 여러 모로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어요. 덕분에 저도 알게 되었어요.”
동아시아전략연구소라는 건, 미국 정계를 대상으로 하는 친한파 양성 싱크탱크다. 미국의 ID 파운데이션 산하에 기관인데, 말이 싱크탱크지 연구원은 거의 없다. 미국 정치인들이나 학계의 저명한 교수들을 후원하면서 한국을 알리는 데 주력하는 기관이었다.
클린턴이나 엘 고어를 비롯해 민주당 의원들을 집중하고 있는 데, 반응은 제법 괜찮았다. ID 그룹이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만큼,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동아시아전략연구소는 단순 로비 조직이니, 조금 전 말했던 고급 정보를 얻기에는 무리였지만, 최강욱을 납득시키는 데 쓰기엔 딱 좋은 변명이었다.
“그러면, 우리 그룹의 대북전략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하죠. 김정일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는 거예요.”
대북사업은 ID 그룹에게 급할 게 하나 없는 일이었다.
미래그룹이야 당장 금강산 개발을 한다고 난리였고, 개성경제 특구에 관심을 두는 중소기업도 많았다.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다들 열심히 뛰고 있다. ID 그룹까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유재원의 판단이다.
애초부터 훌륭한 관광 자원인 금강산이나, 노동력을 보고 들어가는 개성특수와는 달리 통신사업은 북한국민을 대상으로 수익을 내야 한다. 북한의 소득 수준이란 제3세계 수준으로 형편없기에 값비싼 인프라만 깔아주고 돈은 땡전 한 푼 못 받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지금의 남북 관계는 긍정적인 예측이 높지만, 만에 하나 예전처럼 도발도 벌이고, 핵개발도 해서 급격히 나빠진다면 투자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러니 급하게 갈 것 없다는 것이 결론으로 나는 건 매우 합당한 귀결이었다.
따르릉!
최강욱과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벨 소리가 났다. 카폰이 아니라 김대석의 티파니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여보세요? 예, 김대석입니다. 네네! 바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뭔가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던 김대석이 유재원을 돌아보며 본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명헌 총리님이십니다.”
“할아버지가요?”
김대석의 휴대폰을 보니 발신인 항목에 전명헌의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있었다.
“여보세요?”
몇 가지 의문이 바로 떠올랐지만, 일단 전화 먼저 받는 유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