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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울티마 온라인(10)
제임스는 눈을 비볐다.
알파팀의 사무실에 유재원이 앉아 있는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던 탓이다.
7일 동안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다녀온 제임스였다. 통신환경이 워낙 열악한 곳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제임스였다. 덕분에 사전에 연락 받은 게 없었던 제임스는 까무러칠만도 했다.
유재원과 제임스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지만, 제임스는 유재원의 모든 걸 존경하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경악에 빠진 제임스였는데, 몇 초가 지나자 느낌이 확 달라졌다. 예전엔 못 보았던 자리에 앉은 유재원으로부터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한국말이 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코딩을 하는 중이었는데, 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진득한 기운을 풍겼다.
“세상에.”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나는 소리에 놀라 얼른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동양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제임스는 명상 수련도 조금 배웠고, 덕분에 유재원이 전설의 무아지경 속에서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다고 완벽하게 착각해버렸다.
제임스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고양이 걸음으로 움직여, 유재원 뒤에 살짝 섰다.
유재원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나중에 알아봐도 되지만, 무아지경 속에서 프로그래밍 하는 걸 구경할 좋은 기회였으니,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유재원은 꼬박 밤을 세는 중이다.
알파팀의 글라이드 X 담당인 제임스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 상태로 프로그래밍에 돌입했다.
기간 내 출시를 하기엔 살짝 빠듯한 일정이긴 했어도, 이렇게 밤을 셀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전생의 이력이 뿜어졌다.
소스코드가 관리되는 비밀 서버에 접속해서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건 어제 낮부터였고, 만화책을 보듯 휙휙 넘겨서 보니 몇 시간 만에 차기 안드로이드의 개발 현황을 파악하는 데 완료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알파팀이 확대 발전시켰다는 커널의 소스코드에서 발견한 허술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적화 문제도 있었고, 나중에 탈이 날 버그도 보였다. 패키지 상태로 전송받아 설치한 걸 돌려봤을 때는 몰랐는데, 소스코드를 보니 이러한 문제점들이 딱 보였다.
“어디서 손대야 할지 모르겠네. 에라 모르겠다. 다 고치자!”
다 뜯어 고치자는 무서운 소리를 했던 게 새벽 1시쯤이었고, 그 일이 제임스가 올 때까지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회사 내규상 이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개발직의 경우 소프트웨어 출시가 코앞으로 온 경우에 한해 작업 시간을 늘릴 수 있지만, 평소에는 어림없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엄밀히 따져서 개발자도 아니었고, 사주였다. ID 그룹 회장이라는 유일무이한 지위였고, 안드로이드 사의 주식을 가진 주주 말고는 유재원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주의 특권 중 하나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덕분에 사장이나 회장들이 회사 안에서 폭군이 될 확률은 매우 높은데, 유재원은 기껏 하는 일이 자발적인 야근이었다.
어쩔 수가 없다.
알파팀이 차기 안드로이드의 커널 소스코드를 보니 묵과할 수준이 아니었던 탓이다.
차기 안드로이드를 만든다고 소스코드 전체를 완전히 엎고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건 아니다. 2.0 버전의 커널소스 상당부분을 재활용하여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성능과 기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안드로이드 2.0 버전의 커널은 유재원이 거의 대부분을 혼자서 만들었다. 단 하나의 함수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고, 단 한 글자도 낭비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알파팀이 작업한 소스코드를 보니 유재원의 눈에 차지 않는게 너무도 많았다. 최적화를 할 수 있는데 그냥 넘어간 것도 상당했고, 복잡하게 꼬아놔서 작성한 본인이 아니면 쉽게 유지보수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부분도 많았다.
HPC 인증 부품의 대중화로 컴퓨터의 성능이 크게 올랐기에 망정이지, 컴퓨터의 성능이 떨어지면 2.0보다 느리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가뜩이나 움직이는 배경화면, 보다 많은 색을 사용하고 크기도 커진 아이콘들, 각종 창을 열고 닫을 때 일어나는 짧은 애니메이션 등등의 비주얼적 요소를 한층 강화한 상태인지라, 실패작이 될 수도 있었다.
유재원은 일단 최적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CPU 자원 관리 부분의 소스코드를 열어서 재설계 중이었다.
기존의 HPC의 성능을 100% 활용하고, 앞으로 출시될 CPU에 추가될 MMX와 3D NOW! 같은 새로운 확장명령어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돈을 쓴 소비자에게 확실한 경험을 선사해주고자 유재원은 새벽부터 지금까지 코딩 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창의력의 극한을 발휘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본인만의 운영체제를 만들겠다는 건 이전 생에서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도스부터 시작해서 리눅스까지 소스코드가 공개된 운영체제를 깊게 팠다. 그리고 그러한 소스코드를 머신러닝을 통해 시대별 시스템에 맞게 최적화된 코드로 추출했고, 기억의 궁전 속에 담아 놓았다.
당연히 그냥 저장만 해놓는 건 아니었다. 전공이 아니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거라면, 그냥 암기만 했을 테지만, 프로그래밍은 유재원의 최대 관심사였고, 특기였다. 그렇기에 기계만 학습한게 아니라, 유재원도 함께 공부하면서 머릿속 기억의 궁전 속에 넣었다.
다만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버전별로 완벽하게 구분되어 담겨져 있는 건 아니다.
유재원이 신은 아니었다. 회귀 후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컴퓨터 업계의 큰 변화는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입을 최소화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업계의 판을 크게 흔들지 않으면 탄탄하게 자리 잡은 기존 업계를 능가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기에, 과감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코퍼마인 공정의 이른 보급도 그러한 판 흔들기 전략 중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일찍 MS가 무너지는 바람에 본래보다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여하튼, 유재원은 이러한 로드맵을 예상했고, 발전하는 컴퓨터의 수준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소스코드를 정리해 놓았다. 심지어 독립된 기능 별로 모듈화를 시켜 놓았기에 필요할 때 곶감처럼 쑥쑥 뽑아다가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다만 소스코드의 길이가 길면, 한 번 보고 그걸 다 옮길 수가 없다. 유재원의 기억력이 남다른 수준이긴 한데, 수천수만 줄이나 되는 방대한 소스코드를 점 하나까지 완벽하게 옮기는 건 무리였다.
덕분에 유재원이 고안한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금씩 옮기는 것이었다.
본인이 아는 내용이라면 스스로 작성하고, 가물가물해지면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서 큰 그림을 보고 나온 다음 다시 코딩을 함으로서, 일반 프로그래머와는 차원이 다른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헉!”
그런 유재원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임스는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다시금 두 손으로 입을 막으려 했지만, 늦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하얀 백지 상태의 모니터에 한눈에 보기에도 복잡한 C언어의 코드들이 가득 차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제임스도 S급의 프로그래머였으니 유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전설, 풍문으로만 들리던 유재원의 진면목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그저 감동중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컸다.
“응?”
가까이서 들린 인기척에 유재원은 깜짝 놀랐다.
기억의 궁전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홀로그램이 떡하니 나타나고 그걸 조작하는 식이 아니니 남에게 자신의 제일 큰 비밀을 들킬 일은 전혀 없다. 다만 기억의 궁전에 들어갈 때의 본인 모습은 그다지 좋은 꼴은 아닌지라, 남에게 보여주기엔 좀 그랬다.
유재원은 표정을 정리하고 얼른 뒤를 돌아 보았다.
“제임스 팀장님? 언제 오셨어요?”
다행히도 뒤에 있는 사람이 제임스라는 걸 보고 살짝 안도했다.
MS와 재판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지만, 함께 커다란 전투(?)를 치른 동지라는 유대감이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아, 14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유재원의 물음에 제임스는 시계를 보며 정확한 시간을 말했다. 유재원도 시계를 보았고, 아침 7시 20분임을 확인했다. 그제야 피곤함이 조금 밀려왔지만 심한 건 아니였다. 혈기왕성하다는 17살이라 그런지 며칠은 더 밤을 새도 끄떡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혈기만 믿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골병이 드는 것이다. 유재원은 과감하게 프로젝트 저장을 누르고는 키보드에서 손을 땠다.
그 모습에 제임스는 조금 미안해진 얼굴이다. 유재원이야 평소 하는 대로 했던 것인데, 제임스가 보기에 조금 전 집중 상태는 1년에 한두 번 오기도 힘든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출근하세요?”
“휴가 복귀하는 날이라 일찍 와서 감을 찾으려고 그랬습니다.”
고용주 입장에서 듣기에 참 좋은 말이었다. 다만 유재원은 사상이 조금 불순한 녀석인지라 흡족하다기 보다는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전생에 일만 하던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집에 돌려보내기도 좀 그랬다.
“하암, 그러시구나.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
“아,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런데 여기에 쉴만한 데가 없는 데 말입니다.”
프로그래머들에게 간이침대는 필수 용품이었다. 특히 출시일자가 가까워지면 사무실이 곧 숙소로 변한다. 근무 환경이 좋다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공간이야 얼마든 줄 수 있지만 사무실에 허가 받지 않은 집기를 들이는 건 엄격히 금지했다.
이와 함께 회사 본사를 무슨 커다란 복합 쇼핑센터처럼 꾸미는 것도 별로였다. 회사 안에 식당이며 카페며, 수많은 편의시설을 들이는 건 결국 집에 가지 말고 일만 하라는 소리 아니겠는가.
밥은 밖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여가도 알아서 즐기라는 것이 유재원의 방침이었다. 단순히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점심값으로 미국은 8달러, 한국은 5천 원을 지원해주고 있고 다른 지역도 비슷한 수준으로 식대를 지원하고 있다.
취미나 학비도 마찬가지다. 독서나 영화 감상은 물론 각종 운동이나 야간 학교 혹은 학원비도 적정한 수준에서 보태고 있다.
여하튼, 회사 안에서는 오직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놨기에 잠을 자려면 유재원은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알아요. 잠깐 호텔에 가서 눈만 붙이고 와야죠. 아참! 부탁이 있는데요.”
“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오후 2시쯤에 다시 올 건데, 그 때쯤에 알파팀 전원을 회의실로 모아주세요. 공지사항 몇 가지하고,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요.”
많이 자봐야 4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인데, 유재원에겐 피로를 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지시에 제임스가 바로 대답했다.
법원의 증언 이후로, 남들 앞에 서서 뭐라고 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제임스였기에 어떻게 이이야기를 전하지라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지만, 유재원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제임스에게 뒷일을 맡긴 유재원은 본인의 컴퓨터에서 완전히 로그아웃한 다음 자리를 떴다.
-김 대통령, 평양 도착!
-김일성 주석, 평양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 대통령 영접!
-남과 북, 세기의 악수!
-김 대통령, “김일성 주석의 환대에 감사, 50년간 쌓였던 한이 한번에 풀릴 수는 없을 것, 그러나 시작이 반.”
-김 주석,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다. 100년이 가도 무너지지 않을 신뢰관계 구축을 위해 모든 사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보자.”
임시 숙소로 정한 호텔에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뉴스가 잔뜩 갱신되었다.
한국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접속할 필요도 없이, 그냥 CNN만 틀어 놔도 한국의 소식들이 속보로 정해졌다.
서해 직항로로 평양에 잘 도착한 김 대통령을 위해 김일성 주석이 직접 공항까지 나와서 영접했다고 한다.
북한의 방송 환경이 열악해서 라이브로 그 화면이 전해지진 못했지만, 나중에 전달된 영상들이 저녁 뉴스를 타고 전 세계 텔레비전을 탔다. 특히 막 비행기에서 내린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장면은 몇 번이고 재생되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된 나라에서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건 최초였으니,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뉴스였다.
특히 한국의 반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오죽하면 오늘 나왔다는 한국의 모든 신문 1면은 두 사람의 악수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일부 진보적인 신문의 경우 한 마디 문구도 없이, 두 사람의 사진만 가득 담기도 했다.
“흐음, 이번엔 진짜 달라지려나?”
짧은 쪽잠에도 피로가 확 풀린 유재원은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은 이전엔 없었던 초특급 사건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지 기대도 컸고, 이번 일로 일어날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 남북 관계에 영향을 줄지도 유재원에겐 너무도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유재원도 한국 사람인지라,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긴 했다. 그래도 정말 잘 풀려서 화해 구도가 제대로 형성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예전과 같이 핵개발을 위한 시간끌기용 작전인지는 차가운 머리로 냉정히 따져봐야 하는 것이었다.
“바빠서 컴퓨터를 안하나?”
아쉬운 건 며칠 전부터 평양의 루트킷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에 맛이 좀 들린 것처럼 자주 사용하더니 갑자기 뚝 끊겼다. 루트킷이 들킨 것 같진 않고, 아예 컴퓨터를 안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참 아쉬웠다.
접수되는 정보가 매우 단편적이긴 해도 도움이 되는 게 분명 있었는데, 들어오는 게 없으니 좀 답답해진 느낌이다.
“뭐, 당장 하루만 지나면 알게 되겠지.”
공동선언문의 유무, 혹시 선언문이 나온다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조항들의 구체화 정도에 따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재원은 수십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봤고, 합의문이나 회담 결과에 따른 후폭풍도 몸소 체험했기에, 문장만 보면 바로 각이 잡힐 것이다.
“이제, 다시 달려 볼까.”
유재원은 제임스에게 말했던 2시가 가까워지자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다.
띵!
타이밍 좋게도 컴퓨터를 끄려는 순간, ID톡 알람이 울렸다. 누군가 봤더니 한국 정보팀의 안종철 팀장이었다.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전화번호 조사를 마쳤습니다.
뭔가 봤더니 전명헌의 통화 목록 중에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서 통화는 잦았던 전화번호의 조사 결과였다.
유재원은 전화번호를 안종철에게 주면서 누구의 전화로부터 나왔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저 전화번호 그 자체를 주면서 해당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을 뿐이다. 덕분에 안종철이 보낸 문서에는 사람 이름, 혹은 단체의 이름이나 직함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이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전화번호와 함께 연결된 통화 횟수, 통화 시간까지 따져 보는 게 정확하다. 해당 자료는 유재원의 쉘북 안에 따로 정리되어 있었기에, 파일을 열어서 붙여 넣기만 하면 깔끔하게 연결된다.
“역시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네.”
국회의원, 정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대부분이다.전명헌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에 부합하는 사람들이었다.
국회의원의 경우 통일국민당이 제일 많았고, 민자당의 의원들, 심지어 민주당 의원들과의 통화도 많았다. 국회에서는 치고받고 싸워도 밖에선 형님동생 한다더니, 통화 목록에도 그러한 경향이 확실하게 보였다.
기업인들의 경우엔 아주 두루두루 통화하셨다.
특이한 점이라면 전명헌의 자식보다는 미래 그룹 사장단들과의 통화 횟수와 시간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통화 내용이야 짐작할 수가 없지만, 통화 시간이나 빈도를 보면 전재구, 전재근, 전재준보다 미래그룹 사장단들이 훨씬 많았다. 어째서 미래그룹이 2세대로 넘어오면서 일명 가신집단이라는 분들이 문제가 되었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회장님들과의 통화도 제법 있었다. 유재원과 앙숙 사이가 된 일성의 최현희 회장은 물론, 대호나 금성도 있었다. 전명헌이 재벌들의 청탁이나 압력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면,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통화라고 짐작했다.
“이렇게 자주 통화하는 전화라면 이름을 저장해 놓으시지, 왜 그냥 두셨을까?”
생각해 보니 전명헌에겐 쿼티자판도 아니고 조그만 다이얼패드로 이름을 일일이 입력하는 게 힘들었을 것 같다. 더욱이 전명헌도 수행비서가 항상 옆에 있으니, 전화가 오면 번호만 보고 누구인지 말해 줄테니, 주소록을 관리할 필요는 없었다.
“응? 이 이름은 뭐지?”
김경자? 김현주?
전명헌의 주소록 중에 평범한 여자 이름이 좀 보였다. 직책이나 직업이 모두 없음으로 되어 있기에 전명헌과의 연결점을 찾으려 해도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유재원의 감각은 이 이름에 대해 더 조사해보고 싶다는 쪽이었지만, 그만 두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듯 이쯤에서 멈추는 게 이성적인 판단 아니겠는가.
-그리고, 최근에 수집된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뭔데요? 곧 나가봐야 해서 짧게 설명해주세요.”
유재원은 컴퓨터에서 문서를 모두 닫았고 안종철의 보고도 짧게 받겠다는 표시를 했다.
-전에 ID 테크놀로지에서 퇴사했던 김택준 팀장 일입니다. TJ소프트라는 상호로 회사를 차렸습니다.
“TJ소프트?”
김택준의 행보는 유재원도 관심도가 높았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TJ소프트라니. 원래 김택준이 설립하는 회사는 NC 아니었나? 유재원으로 인해 김택준의 행보가 달라지면서 회사 이름도 바뀐 모양이다. 아마도 본인의 이름인 택준에서 따온 게 분명했다.
-TJ소프트는 동서게임채널과 유통계약을 맺고 혈맹이라는 게임을 5월 31일에 출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예? 뭐라고요?”
유재원은 처음에 글자를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안종철이 보낸 쪽지에는 5월 31일 출시가 확실히 쓰여 있다.
개발 예정이 아니라, 출시라니?
김택준이 사표를 냈다고 했을 때, 유재원은 이제 회사에 나가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개발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