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31화 (33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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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No Pay, No Gain.(13)

하늘 위에서 밀린 업무를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오프라인용으로 받아둔 문서를 다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캘리포니아에 어바인의 존웨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바로 렌터카를 빌려 타고 실리콘 시냅스가 있는 알턴 파크웨이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다 게임계의 전설들이네.”

차 안에 앉은 유재원은 이번 출장길을 잠깐 상기했다.

존 카멕부터 시작해 리처드 개리엇을 거쳐, 오늘은 마이크 모하임이다. 내일은 시드 마이어의 마이크로포즈. 윌 라이트의 막시스까지 있으니, 90년대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게임 업계에 커다란 획을 그은 전설들을 만나는 일정인 것이다.

이 말인즉슨 해당 스튜디오와 개발자들은 ID 엔터테인먼트의 깃발로 모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드로이드 사 상장 후 쌓인 두둑한 자금력으로 공격적인 가격을 제시하니 다들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해당 개발자들은 지금도 큰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라 액수에 크게 연연하진 않았을 것이다. 존 카멕의 ID 소프트웨어를 비롯해 ID 엔터테인먼트 소속 게임 개발사에 보장된 자유로운 개발 환경과 전폭적인 지원을 보고 ID 엔터테인먼트를 선택한 사람들도 많았다.

월스트리트나 게임 업계에서는 유재원의 게임 개발사 인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난리였지만, 유재원은 맥시스를 끝으로 더는 회사를 모으지 않았다. 21세기 초까지 게임 업계를 휘몰아칠 라인업으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중반부터는 스타 개발자가 아니라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대작 게임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개발자 욕심도 딱 여기까지였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벌써요?”

존웨인 공항에서 실리콘 시냅스 사무실까지 멀지도 않았다.

덕분에 좀 움직인다 싶더니 도착이다. 샌디에고 강이 바로 옆에 흐르면서 한적한 곳에 자리한 실리콘 시냅스 사무실 앞에 마이크 모하임, 앨런 애드거, 프랭크 피어슨 같은 전설과 같은 인물들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리콘 시냅스 도착한 유재원은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마이크 모하임부터 고용된 지 3달도 안 된 앳된 그래픽 디자이너까지, 30명 남짓한 개발진과 일일히 악수도 하고 사인도 해줘야 했다.

일반 대기업 오너와 달리 유재원의 경우엔 스타성이 좀 있긴 했는데, 반응이 일반적인 수준 이상이었다.

알고 봤더니 비공개 베타버전의 인터넷 매칭으로 유재원과 붙었다가 크게 깨졌던 사람들일 수록 유재원에게 열광했다. 유재원이 보여준 신들린 마이크로 컨트롤과 동시에 전투에서 유닛이 소모될 때마다 끊이지 않고 물량을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피지컬을 보고 반해버린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게임을 만든 건 자신들인데, 자신보다 더 게임을 파악했고, 유닛 상성을 무시하는 컨트롤에 혀를 내둘렀단다.

덕분에 유재원은 실리콘 시냅스에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기가 다른 개발사보다 쉬웠다. 다들 경청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재원은 워크래프트에 대한 피드백은 따로 줄 건 없었다.

이메일로 날아온 비공개 베타버전 중에 가장 플레이 타임이 길었던 것은 워크래프트였다. 수십 판의 매칭을 치르면서 직접 플레이로 보여주기도 했고, 채팅으로 많은 의견을 나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걸 다 말하진 않았고, 이 자리에서 쓰기 위해 아껴둔 피드백 하나가 있었다.

“멀티플레이에서도 저장하기와 리플레이 기능을 넣으면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플레이어가 직접 저장하지 않아도 1분 간격으로 자동 저장되도록 해야겠죠.”

“에? 멀티 플레이를 저장한다고요?”

개념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플레이 중에 저장하기를 하고, 다시 이어서 한다면 매칭했던 플레이어가 배틀넷에 들어와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맵과 유닛의 숫자와 배치된 위치, 채집된 자원과 남은 수치 등을 모조리 저장해놨다가 불러오면 그만이죠. 대신 쓰레드를 잘 활용해서 저장할 때 미세한 렉이 발생하면 안 되도록 해야 경기에 지장이 없겠지요.”

저장하기와 리플레이 기능은 e스포츠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수억 원의 상금이 걸린 결승전 마지막 매치에서 갑자기 셧다운이 되기라도 하면 대망신 아니겠는가. 저장하기 기능이 있다면, 가장 최근에 저장된 것을 불러와 경기를 재개하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진 마세요. 정식발매 하고, 휴가도 다녀온 다음에 차근차근 만들어서 패치로 배포하면 되잖아요.”

e스포츠를 위한 기능이고, 그냥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쓸모 있는 건 아니다. 괜히 세이브 기능을 만든다고 개발 일정을 뒤로 늦출 이유는 없었다.

유재원의 말에 마이크 모하임를 비롯한 실리콘 시냅스의 프로그래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쉽지 실제 구현을 하려면 무척이나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 확실했다. 더욱이 워크래프트의 골든 디스크행까지 며칠 남지도 않은 시점이라 여력이 없었다.

컴퓨터 게임의 장점이 유연한 패치 배포였으니, 유재원의 말마따나 여유를 가지고 만들면 된다.

“아, 그리고 말인데 이건 제 개인적 의견이니 마음에 안 들면 무시하셔도 되요.”

유재원은 실리콘 시냅스에 방문한 진짜 이유를 꺼내기 전에 밑밥을 깔았다.

실리콘 시냅스를 인수할 때 자율성을 보장한다고 했던 말이 있어, 혹여 강압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크래프트의 골든 디스크 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더는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이라면 항상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마이크 모하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유재원이 준 피드백들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된 조언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건 게임 외적의 이야기인데요. 혹시 회사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요?”

유재원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는 바로 사명 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에게 실리콘 시냅스라는 이름은 좀 낯설었다. 반도체의 소재인 실리콘과 뇌를 구성하는 시냅스를 연결한 것이니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좀 직관적이지 않았다. 특히 게임 역사에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을 워크래프트에 실리콘 시냅스 제작이라는 표시가 붙는 건 영 아니었다.

그렇지만 창업자들에겐 자부심이 있는 이름일테니 조심스럽게 말한 것인데,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 밖이었다.

“우와!”

웬 탄성이람.

마이크 모하임 옆에 앉아 있던 프랭크 피어슨의 탄성이었다. 그러더니 마이크 모하임의 등짝을 착 소리나게 때리면서 크게 말했다.

“회장님, 말씀 들었지? 내가 뭐라고 했어? 회사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

“그래, 실리콘 시냅스라니. 예전에 잘못 걸려온 전화가 또 생각나네. 가슴 보형물……. 아차! 아, 아닙니다.”

프랭크의 말에 맞장구치던 앨런 에드거가 유재원의 보고 아차 싶었는지 바로 말을 끊었다. 그래도 원래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는 다 알 것 같다.

“아, 네. 그 문제 대해선 이친구들 말처럼 저희도 회사 이름에 대해 고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회장님도 괜찮은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지요.”

“블리자드 어떠세요? ID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시니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동질성을 부여하면 더 좋을 거 같네요.”

마이크 모하임까지 이렇게 말해주니 유재원은 블리자드라는 단어를 편안하게 말할 수 있었다.

“블리자드?”

“오, 느낌 있는데?”

“워크래프트를 시작으로 게임판에 우리만의 눈폭풍을 휘몰아치는 거지!”

창업자 셋이 모두 마음에 들어했다. 원래 블리자드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도 본인들이 영어 사전을 펼쳐놓고 뒤적거리며 찾다가 선택했으니 아마도 끌리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실리콘 시냅스의 방문에서도 모든 목적을 달성한 유재원은 다른 곳에서처럼 임직원들에게 금일봉을 일일이 나눠준 다음 일정을 바쁘게 시작했다.

마이크로프로즈, 맥시스 등등 유재원이 남은 ID 엔터테인먼트의 방문을 모두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건 3월 5일 경이었다.

다른 개발사에서도 유재원은 큰 환영을 받았다.

모회사의 오너이면서도 시간의 압박 없었고, 예산을 가지고 장난 치지도 않으면서 금과옥조 같은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었으니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최고였기에, 오히려 유재원이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걸 다들 아쉬워했다.

길었던 ID 엔터테인먼트 소속 게임 개발사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유재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쇼핑이었다.

“허먼 밀러라는 곳에서 에어론 체어라는 게 있어요.”

“허먼 밀러, 에어론 체어 말씀이십니까?”

“네, 에어론 체어로 우리 그룹 의자 전체를 교체하고 싶거든요.”

그렇다고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서 하는 건 아니었다. 단일 품목 하나를 대량으로 주문하는 거라서 그냥 수행비서인 김대석에게 말만 하면 된다.

의자를 바꾸는 걸 유재원이 챙기는 건 너무 행보관 같은 모양새 같지만, 유재원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유재원이 의자를 바꾸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개발자들의 환경이 극과 극이었던 탓이기도 했다. ID 소프트웨어 같이 새로 지은 자신만의 본사 빌딩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쾌적한 개발 환경을 자랑했다.

반면 마이크로프로즈는 좀 많이 낡았다. 특히 개발자는 의자에 앉아서 장시간 근무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의자가 나쁘면 컨디션이 쉽게 무너지고, 컨디션이 무너지면 업무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다행히도 몇 주 전 사무기기의 명가인 허먼 밀러에서 신제품이 나왔으니, 에어론 체어라는 물건이었다.

메쉬라는 최신의 소재를 적극 사용했고,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에 여러 편리한 기능이 들어가 있어서,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나 엉덩이에 피로가 덜 쌓이는 최신 의자였다.

“그러면 최소 5천 대 이상 구매해야겠네요.”

“그래야죠., 그런데 중역들에겐 어울리진 않으니, 임원들에겐 물어보고 진행하고요. 아, 저는 에어론 체어에요.”

“알겠습니다.”

유재원이야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 에어론 체어가 제격이지만, 사장이나 이사들은 통칭 사장님 의자라는 가죽 의자를 더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개발사들은 근무 환경을 싹 바꿔야겠더라고요. 일부 스튜디오는 아예 최신의 오피스 빌딩으로 입주를 하든가, 아니면 리모델링을 해서라도 바꿔야해요.”

“예, 회장님.”

ID 엔터테인먼트 소속 계열사를 다 돌아본 건 게임 개발 상황을 체크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근무환경을 살펴보는 것도 있었다.

“음, 회장님. 의자 하나가 100만원도 넘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대량 주문을 해도 할인율이 크지 않습니다.”

지시를 받은 김대석이 바로 전화를 걸어 가격을 알아본 모양이다. 가격을 듣고 황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 이름값이 좀 있어요. 그래도 그걸로 주문해주세요.”

다른 사무가구 회사에서 나왔다면 훨씬 저렴한 가격, 어쩌면 반값에 나왔을 물건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주문을 유지했다. 사무기기 교체는 어느 나라든 비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항목이니 세금으로 처리하면 부담이 확 사라진다.

“알겠습니다.”

김대석이 유재원의 주문을 처리하러 나가자, 유재원은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일단 서재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 전원을 켜는 것이 첫 단계였다.

휴대폰의 모양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나온 프로토타입에서 계속 개선점과 디자인 변경을 해서 이제 대량 생산을 앞둔 티파니폰의 최종 디자인이었다. 이걸 서랍에 넣어둔 건 CDMA 통신망은 샌프란시스코에서만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망이 없는 다른 지역에선 그저 휴대용 게임기에 불과했고, 혹시나 티파니폰의 최종 디자인이 파파라치에 의해 유출될 수도 있어서 이번 출장에서는 들고 다니지 않았다.

휴대폰이 켜지니 진동이 끊이지 않았다. 유재원에게 날아온 문자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 통화가 제법 쌓였던 것이다. 티파니나 정말 중요한 전화는 인터넷이나 김대석을 통해 출장 중에도 다 연결되었기에, 유재원은 한 번 쓱 보고는 알림을 모두 지웠다.

다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ID톡에 로그인을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업무였다.

“뭐야? 벌써 이메일이 100개가 넘게 왔어?”

가장 먼저 유재원을 반긴 건 역시나 가득 들어찬 이메일함이었다. 스펨메일은 이미 필터링을 거쳐 모두 제거되고 남은 진짜 이메일이 100건을 넘겼다.

바로 들어가 보니 대부분의 이메일들은 ID 그룹의 수많은 직원들로부터 날아온 사업 계획서였다. 며칠 전 발표했던 사내 벤처기업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었다.

“선착순이라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ID 오피스 파일로 만들어서 보내라고 했고, 탄탄한 수익모델이 있어야 한다고 했을 뿐, 언제까지 보내라고 기한을 정한 건 없다. 좋은 아이디어와 확실한 수익모델만 있다면 언제든 사업계획서를 승인할 것이다.

사내 벤처 정책은 단지 IT붐에 편승하고, 생색을 내려고 만든 게 아니라 진짜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 회사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한 대책이었다. 나중에 덩치가 커져서 독립한다하더라도 지분이 확실하니, 범 ID 그룹 계열로 묶어 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읽어 볼까?”

유재원은 바로 자세를 잡고 이메일을 열어 첨부파일을 다운받았다. ID톡에서 이메일을 관리하는 기능도 있었기에 일일이 클릭해 다운 받을 필요 없이 그저 클릭 한두 번이면 일괄적으로 처리되어 문서가 열렸다.

“음.”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메일을 끝까지 보았던 유재원에게 약간의 실망감이 찾아왔다.

직원들이 보낸 사업계획서들 중에 유재원의 문턱을 넘은 건 없었던 탓이다. 가장 많은 건 게임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검색엔진,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그리고 중고 상품 쇼핑몰을 만들어보겠다는 IT사업도 있었다.

게임이야 만들어서 팔면 수익이 생기는 것이니, 유재원이 특별히 강조한 수익모델은 확실했다. 다만 만들겠다고 하는 게임들을 보면 요즘 유행인 3D FPS장르였다. 데모판이라도 있으면 좀 높이사줄 텐데, 데모판이 첨부된 계획서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나리오가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월등한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검색엔진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계획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색이나 뛰어난 비즈니스 모델은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꽝은 아니었다.

“어? 이건 설마 이베이?”

제일 나은 계획서를 하나 뽑자면 중고거래 중계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하는 계획서였다. 넥스트컴 소속 팀장 하나가 보낸 것으로, 중고거래 게시판을 맡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넥스트컴에서 특별히 조회수가 높은 부분이 중고거래 파트였는데, 여기서 착안해 중고거래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깜짝 놀라 자세히 봤는데, 계획서의 내용을 보니 이베이급은 아니었다.

파는 사람이나 사겠단 사람이 직접 매매 상품의 설명이나 사진을 직접 올릴 수 있는 방식에 혁신이 없었다.자유 게시판과 같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업계획서를 보낸 사람의 이름이 이베이의 창업자인 피에르 오미다이어가 아니었다.

유재원은 마음 같아선 이것 까지도 퇴짜를 놓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마음 뿐이었고, 유재원은 FPS 게임과 인터넷 중고상품 쇼핑몰 두 개를 선정했다.

문턱이 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고, 복권을 긁어본다는 느낌으로 2개나 뽑았다. 또한, 사내 벤처팀을 운영하면서 실전에서 어떤 문제점이 생기는지 보고 대응하려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미리 대비를 해놓으면, 나중에 진짜 커다란 아이템이 들어왔을 때, 제대로 지원하고 운영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서라면 각 20만 달러의 초기 투자비는 회수할 수 없을 만큼 망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제일 궁금했던 직원들의 사업 계획서를 모두 확인한 유재원은 이번엔 출장 중에 사용했던 쉘북을 꺼냈다.

동기화와 백업을 위해서다.

“이것도 은근히 귀찮네.”

오프라인으로 봤던 업무를 온라인에도 갱신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혼란이 생길 수 있으니 미리미리 해두는 유재원이다.

또한, 쉘북에 저장되어 있던 중요한 문서들도 본인의 메인 컴퓨터로 옮겼다. 최근에 일이 많아서 백업을 깜빡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큰일이 생기는 법이다.

유재원은 살짝 풀어졌던 마음을 자책하면서 열심히 파일을 옮겼다.

한참 파일을 옮기던 유재원은 새로운 디렉터리를 발견하고 살짝 멈칫거렸다.

“어라? 이건 뭐지?”

파일 관리자로 디렉터리 안에 들어가 보고 나서야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최근 한국에 다녀왔을 때, 전명헌의 휴대폰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과정에서 생긴 백업파일이었던 것이다. 업그레이드를 선택하면 자동으로 백업 파일이 생성되는데, 그때 사용한 컴퓨터가 유재원의 쉘북이었다.

유재원은 백업파일을 삭제하려고 Del키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휴대폰에 관리자 암호가 걸려 있다면, 백업파일에도 그 암호가 걸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의 능력으로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일 관리자 화면을 보는 유재원의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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