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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y, No Gain.
#308 No Pay, No Gain.(4)
“들어가도 돼?”
“그럼!”
짐을 푸는 일은 끝났기에, 흔쾌히 문을 열어줬다. 티파니도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외할아버지의 집이라서 그런지 티파니의 움직임에선 자연스러움이 넘쳤다.
둘은 곧 티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역시 티파니였다. 방문이 열릴 때부터 유재원의 안색을 집중해서 살폈고, 담담한 표정의 유재원을 보고는 적잖이 안심한 듯 보였다.
“자기가 많이 놀란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
“평소 모습을 보고 잘 사는 집안이라는 건 대충 짐작하곤 있어서 그런 모양이야. 생각보다 훨씬 엄하고 무서운 분인 거 같긴 한데, 자기 같은 미인을 얻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유재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같은 너스레는 덤이다.
“헤헤, 진짜? 사실 오늘 행사에 자기를 초대하면서 살짝 걱정이 되긴 했는데.”
“뭐가?”
“너무 부담된다고 할까봐. 사실 외할아버지가 부자인거지,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잖아.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건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자기를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해.”
“아니야. 내 생각도 그래. 자기의 외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던 내 마음은 변함이 없을 거야.”
“진짜? 자기도 그렇지? 그런데 이걸 착각하는 사람이 참 많더라고. 자기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눈이 정확했어.”
유재원의 말에 티파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티파니의 외할아버지가 셰브롱 오너라고는 해도 그게 티파니를 향한 애정에 변화를 주는 요소는 아니었다.
물론 유재원이 화들짝 놀라서 절대적인 존재와 했던 거래에서 3가지 소원 말고도 뭔가 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자아내게 만들 만큼 셰브롱이라는 석유화학 기업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런데 이방에 들어와 차분히 생각을 좀 하고 나니 ID 그룹의 규모나 사업 영역이 웬만큼 성장하지 않는 한은 셰브롱과 합작할 일도 없고, 서로의 분야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일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걸 인지했다.
아니, 오히려 셰브롱 때문에 유재원에게 안 좋은 요소가 더해질 가능성이 더 많았다.
셰브롱의 주요 사업은 석유와 가스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새로운 유정을 찾는 일이었다. 특히 2000년대 초에 들면 셰브롱은 텍사코라는 석유 기업을 합병하는 데, 텍사코는 대표적인 블랙 기업이어서 여기저기 사고 친 게 무척이나 많았다.
결정적으로 유재원은 2010년 즈음해서 차세대 에너지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바로 상온핵융합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시작해서 20년 내에 상온핵융합 발전소를 상용화하는 게 유재원의 큰 그림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화석연료의 종말이 도래할 것인데, 이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회사들이 바로 석유업체 아니겠는가.
수십 년 뒤를 예측하는 건 다들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미 유재원의 기억의 궁전 속에는 직접 보고 듣고, 체험까지 해본 미래 기술의 개념부터 설계까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장 핵융합이론은 물론 설계도를 뽑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다만 상온핵융합기술을 실현하기 전에, 먼저 개발해야 하는 기술이 있기에 지금 발표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된 유재원은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혹시나 절대적 존재와의 거래에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덤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거라면, 티파니의 배경이 엄청나다는 것 대신 다른 걸로 터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죽을 때까지 건강하던지, 전생에는 없었던 탁월한 운동 능력, 그것도 아니라면 성공적인 결혼과 화목한 가정 같은 걸로 말이다.
티파니도 내심 걱정과 고민이 유재원의 말 한 마디에 사르르 풀렸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더니 뭔가 다른 생각이 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기야! 집 구경 시켜줄까? 외할아버지가 모아놓은 컬렉션 중에 재미있는 게 참 많아.”
“응! 부탁해.”
유재원도 바로 수락했다.
뜬금없이 집 구경인가 싶었지만, 티파니의 목소리에 담긴 은근한 열기를 못 느낄 유재원은 아니었다.
티파니와의 대저택 데이트는 즐거웠다.
진짜 상위 0.001%의 부잣집은 처음 둘러보는 터라 눈과 귀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에서만 보던 진귀한 그림이나 조각상은 물론이고 볼링장부터 수영장까지 다양한 체육시설이나, 극장이나 음악 감상실도 상상이상이었다. 특히나 인상적인 건 마구간에 있는 혈통 좋은 말들이었다.
화이트골드색으로 윤기가 잘잘한 아할 테케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칭호가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삼국지에 나온 한혈마가 바로 이 말이다. 아름다운 모습은 물론이고 운동능력도 탁월해서 수많은 전설을 쓰기도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품종이 어떻게 티파니의 외할아버지 마구간에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은 간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게 한혈마보다 좋은 건 옆에 있던 티파니였다.
마구간 한편에 쌓인 건초더미에서의 키스나 포옹은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데이트였다.
이어진 점심식사 시간도 특별했다.
티파니의 이모들과 삼촌,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의 다른 자녀 식구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프레더릭과 티파니네 식구 그리고 유재원 이렇게 다섯이서 도란도란하게 모인 작은 식당에서 이뤄졌다.
중요한 건 점심식사 메뉴로 나온 건 100% 완벽한 한식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궁중요리였다.
쌀밥과 소고기국을 기본으로 구절판과 신선로, 소갈비 찜과 같은 유재원도 평소에 구경도 못해본 메뉴가 줄줄이 나왔다. 게다가 음식이 담긴 그릇도 노란색 광이 번쩍번쩍 나는 놋쇠그릇으로 기품이 철철 넘쳤다. 심지어 김치도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이 자리가 매우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식사라도 편히 하라고 수석 셰프에게 한식을 부탁했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 때문에 어르신이 더 불편해지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맛을 보니 내 입맛에도 적당하더군. 자, 들지.”
프레더릭 테일러 2세가 먼저 숟가락을 들었고, 유재원도 식사를 시작했다.
밥 한 술이었지만, 유재원은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온 경의를 수석 셰프라는 분에게 표했다. 밥맛이 매우 좋았다. 밥에 윤기가 잘잘 흐를 때부터 이건 맛이 없을 수가 없구나 싶었는데, 상상 그 이상의 맛이었다.
적당한 찰기에 쫀득한 식감은 완벽하게 지은 밥맛이었다. 소고기국의 경우엔 유재원의 입맛에 비해 간이 세긴 해도 소고기에서 나온 감칠맛은 제대로 우러난 국이다. 게다가 미국 사람들이 원래 좀 짜게 먹으니 이를 감안하면 제대로 나온 국이었다.
다른 반찬이야 말 할 것도 없었다.
아직 한식은커녕 한류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1994년의 캘리포니아에서 어떻게 한식 요리사와 재료를 구한 건 지 모르겠다. 그러나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미국이니 프레더릭 테일러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중요한 건 만나기도 전에 미리 이걸 준비했다는 것이었고, 유재원에 대한 프레더릭의 호감은 확실했다는 이야기였다.
호감의 근원은 티파니의 지분이 최소 반 이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재원이 세상에 보여준 능력도 적잖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유재원의 이야기가 밥상머리에 오르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티파니에게서 처음 자네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해도 웬 놈팡이였나 싶었는데, 자세히 알아볼수록 놀라웠지. 세상에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을거야. 13살에 창업을 하고, 17살에 상장을 해서 수백억 달러짜리 대박을 터트렸으니 말일세.”
프레더릭 테일러, 이 할아버지는 세상 돌아가는 소문에 좀 느렸던 모양이다. 유재원이 일으킨 센세이션도 하루 이틀이었지, 이제는 다들 그런 모양이다 인정을 했다. 유재원에게 있어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프레더릭은 유재원의 이야기를 이제 처음 접한 사람처럼 놀라움이 가득했다. 하긴 석유 기업은 전통의 굴뚝기업이었고, IT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정 탐사에서 컴퓨터 분석기술이 도입된 건 오래되었지만, 그 분야는 완전히 폐쇄적인 분야라서 IBM과 같은 전통 업체와만 거래했다.
“IT라는 분야가 이제 막 시작한 블루오션이라, 저 같은 신참에게도 문턱이 열려 있어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블루오션이라. 이미 그 곳에는 MS가 있지 않았나? 게다가 몇몇 중요한 대목에서 상상 이상의 결정도 과감하게 하더군. 이를 테면 애드웨어 정책이나 초저가 공세 말이야.”
뭐야?
프레더릭 테일러는 분명 자신에 대해 벼락치기로 알아본 것 같은데, 중요한 대목은 잘 집었다.
“MS가 대단하긴 했는데, 제가 봤을 땐 종이호랑이였어요. 컴퓨터의 성능은 날로 고도화되고 있었고, 사용자의 요구도 이에 맞춰 높아지고 있었는데, MS는 저를 만나고도 구식의 DOS를 고수했었죠. 게다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다가 들키기까지 했고요. 이 정도 되면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지요.”
유재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MS를 그렇게나 빨리 인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유재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약점을 잘 찌르기도 했고, 운도 좋았다.
게이츠가 MS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차세대 GUI인터페이스 운영체제 시장을 안드로이드에 놓친 것도 있었지만, 불법적인 일이 외부로 노출된 탓이기도 했다. ID 오피스의 보안 기능을 선전하기 위해 열었던 시큐리티 챌린지라는 날갯짓이 그렇게 큰 폭풍을 만들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도 있네.”
“말씀해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참 겸손하구만. 물건이나 서비스는 부여된 가치만큼 제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저렴한 가격이 계속되다 보면 본래의 가치마저 평가 절하되는 게 이 세상이란 말일세.”
안드로이드나 ID 오피스의 저가 전략에 대해 프레더릭 테일러의 우려가 제법 큰 모양이다. 하긴 지금이야 신선함이 많이 줄었지만, ID 테크놀로지에서 안드로이드와 ID 오피스의 가격을 처음 공지했을 때의 파격은 대단했다.
안드로이드 게이밍에디션의 경우 애드웨어 버전은 무료, 광고버전은 10달러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DOS 4.0의 소비자가격이 120달러였던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ID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프레젠테이션, 데이터베이스 이렇게 4개 세트로 120달러밖에 하지 않는다. ID 오피스 이전에 있었던 워드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은 개별적으로 사도 300달러를 기본적으로 상회했고, 데이터베이스 같은 경우엔 수천 달러가 기본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게이밍 에디션은 앞으로도 무료 정책이 쭉 이어질 거다. 대신 기업용이나 전문가용으로 특수한 기능이 많이 적용된 엔터프라이즈 버전이 나왔다. 가격도 그만큼 높게 책정되었다.
지금 준비 중인 안드로이드 차기작의 경우엔 엔터프라이즈 말고도 소규모 기업이나 전문가를 위한 프로페셔널 버전도 낼 계획이 있다. 계층을 세분화해서 수익률을 높이는 방식이다.
“흠, 과연, 그나마 그 방법이 가격 저항을 이겨낼 효과적인 선택인 것 같군.”
유재원의 대답에 프레더릭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이건 그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 안드로이드 사를 이번에 상장을 했다지?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나라에 벌써 로봇 제조회사가 생긴 줄 알았지 뭔가.”
안드로이드사 상장 이야기 역시 빠질 수 없는 주제 아니겠는가. 다만 상장 과정이나 안드로이드사의 비전에 대해서 궁금증을 드러내신 게 아니라, 상장 후 지분매각으로 생긴 목돈의 씀씀이에 대한 것이 주제였다.
그런데, 이거 농담 치신 건가? 웃어드려야 하나?
"장인어른, 재미 없습니다."
유재원이 고민할 때, 스티븐이 한 발 빨랐다. 대단히 직설적인 말을 주고 받을 만큼 프레더릭과 스티븐은 제법 큰 유대감이 쌓인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재원이 자네가 다른 IT 기업을 합병하거나 새로운 아이템에 투자할 줄 알았어. 그런데 최근 행보를 보니 부동산 투자가 주를 이루던데 뭔가 특별한 사인이라도 감지한 건가?”
안드로이드 사 상장으로 유재원이 얻은 천문학적인 금액의 향방에 대해서 월스트리트는 무척이나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다른 시야를 가진 유재원이 대규모로 투자하는 분야라면 한 번 진지하게 연구해볼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모습이 없었다.
세금을 착실하게 냈다는 것, 마블과 DC의 코믹스 판권을 사들인 것이 제일 특이한 일이었다. 다른 지출은 대부분 부동산에 투입이었다.
서울의 ID 그룹 본사 빌딩, 샌프란스시코의 ID 테크놀로지 센터, 뉴욕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를 매입해 ID 인베스트먼트 본사로 삼았다.
조만간 제주도에 대한 투자로 10억 달러가 발표될 것이니, 부동산에 대한 투자 비중은 더더욱 높아진다.
“음, 아직 눈에 확 들어오는 기술은 없었어요. 반면 우리 그룹의 몇몇 계열사들의 사무실은 이미 포화상태인지라 본사 건설은 전부터 예정해 놓은 일이었고요. 이를 위해 미국이나 한국의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니 생각보다 저평가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알아보고 있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부동산 투자는 제주도까지만 하고, 더 사들일 생각은 없었다.
나머지 자금으로도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제 슬슬 특이기술이 쏟아져 나올 시기였기 때문이다.
눈여겨보고 있는 건 자동차용 하이브리드 기술이나 LCD의 시야각을 개선하는 IPS 기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이 출연할 것이고, ID 그룹도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준비 중인 기술이 많았다.
“다들 너무해요! 어떻게 내 남자친구 데려다 놓고 무슨 돈 이야기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으세요? 다른 소재로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프레더릭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할 때, 밥만 묵묵히 먹고 있던 티파니가 참다못해 불만을 터트리고 말았다. 티파니뿐만이 아니라 마니라까지도 똑같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유재원은 그리 문제는 아니었는데, 줄곧 회사 이야기나 돈 이야기만 하니 티파니나 마리나는 끼어들 여지도 없어 소외감을 느낀 모양이다. 게다가 유재원을 해부하려 드는 듯한 프레더릭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장차 자신의 손녀사위가 될지 모를 녀석의 능력이나 판단력이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유재원이 몸담은 일이 기업 경영이니 그에 대해 좀 물어본 것인데, 손녀와 딸에게 미움만 사버린 모양새였다.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스티븐도 마리나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움찔했다.
살짝 이야기가 끊겼지만, 티파니나 마리나가 감정 조절에 서투른 사람은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곧 풀렸다. 프레더릭과 스티븐도 사업이라는 주제는 내려놓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화제로 돌렸다.
상에 차려진 한식에 대한 이야기로 무난하게 전환되었다.
유재원이야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든, 서로의 입맛에 대해 이야기하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좋겠지만, 오후가 되면서 대저택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마리나의 두 여동생과 그녀들의 가족이 도착하면서부터다.
경계심.
테레사와 레이첼이라는 두 여성과 그녀의 남편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유재원에게 보인 건 옅은 호감 뒤에 감춰진 경계심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깊은 자리에는 우월감도 살짝 엿보이기도 했다.
의외로 유재원은 이런 느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생에 절대적 존재와의 계약 후, 정신을 차리고 사회에 진출해 성공했을 때 많이 보고 겪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고, 덕분에 애플이나 아마존에서 유재원이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애플은 물론이고 아마존에서도 모셔가려고 하니 유재원은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어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였고, 여러 행사와 모임에도 초청되었다. 그러다가 신세대경영자 모임이라는 이름의, 실상은 재벌3세들의 모임에도 가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받은 눈빛이 저들의 것과 비슷했다.
하긴, 마리나나 티파니가 특이한 것이지,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테레사나 레이첼은 그야말로 미국 최고의 재벌 가문의 직계 아니겠는가. 혹시라도 자신들의 이너서클에 웬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출신 남자애가 들어올 수도 있다고 하면 잔뜩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한편으로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자신이 티파니랑 결혼을 해봐야 셰브롱의 후계 구도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을 거다.
집에 돌아가면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 확인해보겠지만, 미국도 상속에 대해선 남자가 우선이고 셰브롱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딸들이라고 상속분이 없는 건 아니다.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셰브롱의 경영권은 이번 행사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제이콥이라는 녀석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저리 강한 경계심을 보이는 건, 자신이 이뤄낸 성과가 저들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으니 그러는 것이다.
아마, 이런 상태에서 유재원이 프레더릭의 호감을 크게 사 금전적인 호의를 받는다면, 그게 저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것이라면 숨기고 있던 가시가 확 드러날 거다. 전생에는 그런 가시가 상당히 치명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당할 유재원이 아니다.
안타까운 점은 가식에는 돌직구를 날려주는 게 최고인데, 티파니의 가족들이라 차마 그러진 못했다는 거다. 이어진 저녁 만찬과 다음날 있던 몇 가지 야외 활동에서도 유재원은 본인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수준에서 어울려주었다.
정신적 피로도가 확 올라가긴 했지만, 티파니의 집안 내력도 확인했고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눈도장을 받은 것으로 이번 출장은 확실히 남는 일이었다.
더구나 유재원에겐 스트레스를 풀 확실한 수단이 있다.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 퀘이크, 워크래프트 등등.
ID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여러 네임드 개발사에서 개발 중이었던 게임들의 비공개 베타 버전이 유재원의 메일함으로 날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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