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3 그레샴의 법칙 =========================================================================
“여보세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의 목소리는 대번에 딱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영철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도는 별로 없었던 탓이다. 김 대통령 시절 김영철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소통령이었다. 자체적인 비선 조직인 동숭동 팀을 꾸려서 문민정부의 최고 실세로 군림했기에 생긴 별명이었다.
재미있는 건 동숭동 팀의 시작은 유재원과 비슷했다.
김 대통령이 14대 대선에 열심히 뛰던 시절, 자체 여론조사 팀을 만들었다. 미국의 최신 기법을 도입하는 건 당연했고, 그래서 동숭동 팀이라고 특별히 이름까지 지어서 따로 불렀다. 대통령 당선 이후 김영철은 이 동숭동 팀을 해체하지 않고 문민정부의 싱크탱크로 전환했다.
싱크탱크라는 건 정책 결정에 앞서 여러 가지 조언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받은 직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를 통해 정부와 여당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비선이 된 것이다.
전명헌이 총리가 된 후, 미련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 자신과는 완벽히 반대되는 행보였으니, 유재원이 곱게 볼 수가 없다.
-아, 안녕하시오? 김영철이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영철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하긴, 요즘 문민정부가 워낙 잘나가니 세상 살맛 날 거 다.
“네, 반갑습니다. 김 대통령 님의 차남께서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요?”
인사말만 들고도 잘못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걸 바로 캐치한 유재원은 곧장 본론으로 직행하기 위해 돌직구를 던졌다.
-허허, 대통령 차남보다는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소장이니 소장으로 불러주시오.
“알겠습니다. 소장님.”
-다름이 아니라, 오늘 밤에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전화를 걸었소. 긴히 할 말이 하나 있어서요.
“오늘 밤이요? 음, 전화로 말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동부에 오긴 했는데, 지금 워싱턴 DC에 있는 게 아니라, 뉴욕에 있거든요. 여기서 몇 가지 일을 보고 내일 워싱턴 DC로 갈 예정이거든요.”
유재원은 명백한 거절의사를 보였다.
괜히 김영철을 만나면 부담스러운 부탁을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김영철이라는 인물에 대한 전체 평가로 낙제점을 매기는 건 아니었다. 김영철의 생애 전체를 보자면 소통령 시절엔 권력에 취해서 온갖 일을 벌이고 다녔지만,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는 사람이 확 달라졌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다만 소통령 시절 워낙 평이 안 좋다 보니 그렇게 긍정적으로 변했지만, 전체적인 평가가 낮아진 것이다.
-아 뉴욕이오? 나도 지금 뉴욕인데 잘 됐습니다.
유재원의 그 좋은 감이 지금 살짝 빗나갔다. 김영철이 아버지 따라서 워싱턴 DC에 있을 줄 알고 뉴욕에 있다는 핑계를 댄 것인데, 지금 뉴욕이라니.
하지만 뉴욕에 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재원은 마지막으로 미끼를 던졌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이거 어쩌죠. 저녁 시간은 이미 선약이 있거든요. 차라리 지금 보면 어떨까요? 지금은 잠깐 시간이 나거든요.”
워싱턴 DC에 있으면서 뉴욕에 있다고 했다면 응하지 못할 것이다.
-오! 잘 됐소. 나는 유 회장이 저녁 때 한가할 줄 알고 그리 말했던 건데, 지금 시간이 난다니 다행이오. 바로 만납시다. 어디가 좋겠소?
으아!
진짜 뉴욕에 있나보다.
“맨해튼입니다. 그러면 두 시간 후에 센트럴 파크 남쪽 끝에 있는 파크 하얏트 뉴욕 호텔 카페에서 보죠.”
-알겠소. 그럼 있다 봅시다.
김영철과의 통화는 약속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서 끝났다.
“한국의 정보팀에 연락해서 김영철의 최근 동향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하세요. 무리하지 말고 겉으로 드러난 것이나 들리는 풍문 정도만 알아봐도 돼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유재원은 김대석에게 말했다.
한국 정보팀의 수완은 아직 대통령의 아들인 김영철의 뒷조사를 완벽히 수행할 정도로 오르진 못했다. 그렇지만 업계의 동향 파악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더구나 여의도는 온갖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곳이니 금방 파악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예, 회장님.”
김대석은 곧장 카폰에 모뎀을 연결하고서 ID 톡으로 한국에 메시지를 보냈다. 카폰이라는 건 아날로그 전화라서 감청이 정말 쉽다. 대신 이렇게 모뎀을 연결해 암호화된 디지털 데이터로 바꿔 보내면 감청은 불가능하다.
“전달했습니다.”
김대석의 완료 보고를 받은 유재원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맨해튼에서의 원래 일정인 매입 예정 건물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트럼프 타워로 이동하시겠습니다.”
목적지는 맨해튼 트럼프 타워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과 통화하고 만나는 게 일인 모양이다.
“실리콘밸리의 신성인 유 회장을 만나 영광입니다!”
트럼프 타워 앞에 도착했을 때, 차에서 내리는 유재원을 격하게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트럼프 타워의 주인인 도널드 트럼프였다.
“반가워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 트럼프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했다.
ID 인베스트먼트 사옥으로 쓸 빌딩 후보 3개 중에 트럼프 타워는 꼴등이었다. 건물의 층수가 높고 주상복합형이라서 값도 비쌌다. 사옥으로만 쓰기엔 구조가 애매했다. 대신 입지는 무척이나 좋았다. 센트럴파크가 바로 옆에 있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더구나 주변 상권도 구찌, 티파니, 루이비통 등의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쉽 스토어가 즐비해서 최고였다.
유재원도 그냥 둘러나 보자는 식으로 스케줄을 정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트럼프타워의 주인인 도널드 트럼프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트럼프의 모습에 유재원은 땡잡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트럼프는 거대 부동산 재벌이자, 미스 유니버시티 대회를 주최하는 사람 정도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중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되는 입지전적인이다.
사실, 유재원도 트럼프 타워를 3순위에 놓을 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실사 결과 3순위로 밀리면서 기대를 접었다.
다만 이는 유재원의 입장이었고, 현재 트럼프의 입장에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트럼프는 벌써 두 번이나 파산했다. 가장 첫 번째 파산은 1991년 아틀란틱 시티의 타지마할 호텔&카지노로 무려 10억 달러의 빚잔치를 하고 파산했고, 두 번째 파산은 트럼프 플라자 호텔로 부채만 5억 5천만 달러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며 두 번이나 파산했지만, 아직도 건재한 건 개인 재산과 법인 재산을 철저히 분리해서 본인의 재산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투자자들의 공분을 샀고, 은행으로부터 신뢰를 일었다.
그렇게 지켜낸 자산 중에 맨해튼 트럼프 빌딩은 가장 커다란 덩어리였다. 매각은 못하더라도 공실이 난 층에 ID 인베스트먼트 본사라도 유치를 하면 현금흐름에 숨통이 트이는 것이라서 적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거 부담이 크네요.”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시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후보 중에 우리 트럼프 타워가 최고일 테니까요.”
역시 트럼프는 자신감 하나는 최고였다.
“알겠습니다. 안내 부탁할게요.”
유재원도 트럼프에 대해선 약간의 호감이 있었기에 호응을 해주었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나서 트럼프의 파격적인 행보는 전 지구적으로 문제가 되긴 했는데, 한국엔 실보다는 득이 컸다.
지금이야 유재원 본인의 등장으로 트럼프의 앞날이 전과 같을 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대로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으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평소 틈틈이 챙겨 보았던 거래의 기술이란 책이 없다는 거다. 그 거래의 기술이 바로 트럼프가 썼다는 책이니 이 대목에서 사인을 받으면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텐데 참 아쉬웠다…….
유재원이 아쉬움을 느껴질 때, 김대석이 눈으로 신호를 주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김대석의 손에 거래의 기술이란 책이 있었다. 수행비서인 김대석이 오늘 스케줄에 트럼프라는 이름을 보고 미리 챙겨놓은 것이었다.
“잠깐만요.”
김대석으로부터 바로 책을 넘겨받은 유재원은 안내를 시작하려고 막 몸을 돌린 트럼프를 급히 잡아 세웠다.
“사인 부탁해요.”
트럼프의 젊은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책을 내밀며 말했다.
“오! 유 회장이 이 책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열심히 보기도 했죠. 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제법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제가 유 회장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올해에 가장 놀라운 사건이로군요! 작년에 제가 파산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순간이 제 생에 가장 놀랄 순간이었을 겁니다!”
역시나 트럼프의 반응은 화끈했다. 화술도 얼마나 좋은 지, 자기의 흑역사까지도 말하면서 유재원을 띄워주었다.
곧이어 양복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더니 책 안에 자신의 사인을 크게 남겼다. 텔레비전 뉴스로 많이 보았던 뾰족한 톱날과 같은 바로 그 사인이었다.
“그런데 이거, 기분은 좋은데 앞은 깜깜해지는군요. 이 책을 통달했다면 제 밑천이 다 털렸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에이, 설마요. 책이 훌륭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비견하겠어요. 매일매일 발전하고 계실 거 아닌가요?”
“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요.”
유재원과 트럼프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맨해튼 트럼프 타워 투어를 시작했다.
다만 트럼프에 대한 정중한 태도와는 별개로 타워를 둘러보는 유재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친분은 친분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아니겠는가.
2시간 후.
유재원은 빌딩 투어를 모두 마치고 센트럴 파크 남쪽 끝에 있는 파크 하얏트 뉴욕 호텔 카페로 이동을 시작했다.
트럼프 타워는 물론 다른 2개 매물도 모두 둘러 보고난 후였다. 유재원의 평가도 ID 인베스트먼트 빈센트 그린힐 사장과 같았다. 트럼프 타워가 3등이고 1등은 맨해튼 남쪽 월 가의 15층짜리 빌딩이었다.
일본 기업의 소유였는데, 일본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매물로 나온 빌딩으로 가격은 제일 비쌌지만, ID 인베스트먼트 임직원들에게 제일 좋은 점수를 받았다. 입지나 건물도 좋았지만 미국 금융의 심장인 월가에 입성한다는 의미도 커서 유재원도 높은 점수를 주었다.
다만 오늘 새롭게 생긴 트럼프와의 인맥을 살리자면 트럼프 타워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았다. 주상복합이긴 해도 고쳐 쓰면 그만 아니겠는가. 게다가 건물 면적도 월 가의 것보다 훨씬 커서 상업적으로 쓰기에도 좋았다.
결국 유재원은 하나 늘어난 고민거리로 인해서 결정은 좀 더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실제 거래는 안드로이드 사의 상장이 끝난 다음에 이뤄질 수밖에 없다. 건물 가격이 기본 수천억 원씩 하고, 트럼프 타워 같은 건 조 단위를 조금 넘길 정도였다. 여기에 샌프란시스코와 서울 도곡동에 신축 사옥까지 동시에 올리니 상당히 거대한 자금이 일시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
ID 그룹에 이익잉여금이 제법 쌓여 있긴 한데, 여러 가지 돌발 변수에도 대응하고 신규 투자로 하려면 쥐고 있는 게 상책이다.
안드로이드 사의 상장 심사는 94년 봄이나 초여름에 마무리될 테니, 그때 결정이 될 것이다. 그전까지 트럼프와 종종 만나면서 친분을 다져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회장님, 파크 하얏트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현재의 가성비냐 미래의 강력한 인맥이냐를 두고 고민할 때, 김대석이 유재원을 일깨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소통령 김영철과의 약속장소인 호텔 정문 앞이었다.
유재원이 내리자 직원들도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김대석이 바로 유재원 옆에 섰고, 보통 때엔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 오던 경호원들도 가까이 섰다. 그것도 평소엔 둘 만 따라오던 것에서 이번엔 4명이 붙었다.
김영철이 무슨 위협을 하려고 유재원을 만나자고 한 건 아니겠지만, 본인의 안위에 관해선 단 한 점의 변수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유재원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지금 유재원이 누리는 현재라는 시간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고난을 넘기고서 받는 선물이었다. 방심 따위로 망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상대인 김영철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김영철은 멋대로 약속 장수를 바꾸었다.
유재원은 호텔의 카페에서 보자고 했고, 김영철도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해보니 프라이빗 미팅 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유재원이 탁 트인 카페에서 보자고 한 건 그냥 편해서 한 말이 아니라 사람들 많은 곳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대로 장소를 바꿔버린 것에서 그렇지 않아도 평가가 나쁜 김영철의 점수가 더욱 떨어졌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당신들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유재원을 따라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가려는 경호원들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제지했다.
이들이 누군가 봤더니 청와대 경호처 소속 경호원들이었다. 그렉과 피셔 등등 유재원의 경호원보단 덩치는 작아도 다부져 보이는 이들이다.
대통령의 직계 가족이고 이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국가적 비상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청와대 경호실의 삼엄한 경호를 받는 건 당연했고, 미국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대신 위압적인 태도로 유재원의 감정이 확 상했다.
“이들은 제 분신과 같습니다. 같이 갈 수 없으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안에 있는 분께 그렇게 전해주세요. 그럼!”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유재원은 헛걸음했다 치고 그냥 바로 돌아섰다. 그러자 거꾸로 당황한 건 그들이었다. 어쩔 줄 모르다가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원은 경쾌한 걸음으로 빠르게 호텔을 빠져 나갔다.
“회장님! 잠깐만요!”
아깝게도 발렛 파킹된 유재원의 롤스로이스가 돌아오는 것보다, 김영철의 경호원이 더 빨랐다. 그는 쩔쩔 메며 아까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그러면서 유재원을 돌리기 위해 사정까지 했다.
“그러면 괜히 경호원으로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는 카페에서 보죠? 원래 그게 약속 장소였잖아요.”
다행히 유재원의 두 번째 제안은 먹혀들었다.
이렇게 약간의 소동이 있은 후에야 파크 하얏트 호텔 카페에서 유재원과 김영철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유재원은 무슨 거창한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했나 궁금했다.
몇 십 분 전에 한국의 정보팀이 긴급히 조사해서 보내준 자료를 받긴 했는데, 중구난방이라 김영철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은 탓이다.
돈 관련은 아닐 것이다.
유재원은 냉정히 따져 정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선 때 전명헌을 강하게 지지했고, 전명헌이 대통령에는 역부족일 것 같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총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여의도에 파다했다.
현재도 연정을 꾸리고 있긴 했지만 김 대통령과 전명헌, 민자당 대 통일 국민당 사이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철이 유재원에게 돈을 뜯어내는 건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뭔가 비슷한 걸 주고받는 정치적인 부탁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부탁이 하나 있소. 전재준이를 그만 좀 용서해주시오.”
놀랍게도 김영철로부터 나온 말은 유재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여기서 전재준이라고?
전재준이라면 저번 대선에서 유재원을 아주 질리게 만든 작자였다. 유재원뿐만이 아니라 전명헌 총리까지도 실망이 매우 커서 현재 제주도에 거의 유배 상태로 지내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용서라니요? 제가 그분에게 딱히 감정을 품은 건 없는데요? 혹시 제주도 건이라면 총리님께 말씀해 보시는 게 빠를 텐데요?”
“바로 그겁니다. 전 총리의 마음을 움직일 분은 지금 전 세계에서 유재원 회장이 유일하지요. 게다가 유 회장이 전재준이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하니 부탁 좀 합시다.”
전재준과 김영철이 커넥션이 좀 있던가?
유재원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런 건 딱히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전재준이 정치인의 길을 걷다가 잠시 낙마했을 때, 전재준의 지역구에 김영철이 냅다 지원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소통령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다.
전재준과 김영철의 나이 차이는 꽤 된다. 당연히 김영철이 훨씬 어렸다. 그런데도 전재준을 그냥 막 불렀다.
“물론 그냥 해달라는 건 아니오. 저도 당연히 유 회장을 도와야겠지요. 이를테면 ID 재단이 후원 중인 일제 피해자를 위한 집단 소송 같은 바람직한 일이라면 적극 도와드리리다.”
김영철의 말에 유재원은 혹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유재원의 머릿속에 있던 수많은 저울추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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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파트에 불호가 많네요?
스토리 진행 상 앞으로도 완전히 빠질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짧게 잡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