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4 High Performance Computer =========================================================================
ID 소프트웨어 본사에 도착한 유재원은 곧장 12층 대회의실로 안내되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회의실이었고, 전체 형태는 반원으로 중심 무대를 향해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무대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의자와 책상도 고급스러웠다.
평소 자주 사용되는 시설은 아니다. ID 그룹은 최대 8인의 팀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고 ID 소프트웨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평시라면 팀 안에서 간단히 모여 이야기를 하면 끝이니 말이다.
대회의실은 조직원 전체가 공유해야 할 공지나 콘셉트 혹은 중요한 정보를 전할 때 사용된다. 그런 대회의실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조그만 차고에서 시작했던 ID 소프트웨어의 창립 멤버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오늘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유재원이 온다고 오늘 ID 소프트웨어의 직원들 모두가 여기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 ID 소프트웨어는 훨씬 규모가 큰 회사로 고용인이 300명이 조금 넘으니 전 직원이 모인 건 아니다. 그렇지만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련된 기획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들은 모두 모였다.
당연히 그 이유는 유재원의 방문 때문이다.
“ID 소프트웨어의 오너이자 ID 그룹의 위대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유재원 회장님 입장하오니,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이 분위기 뭐지?
유재원이 대회의실에 들어설 때, 웬 북한에서나 들릴 법한 호칭과 함께 우렁찬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심지어 전면 스크린에는 유재원의 입장 모습이 커다랗게 비춰지고 있었다.
존 카멕도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놀랐다.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차세대 게임 개발을 위해서 회사 차원에서 동양 철학과 문화를 공부 중인데, 어제 좀 이상한 걸 봤나 봅니다!”
아무래도 자료화면을 땡전뉴스나 70년대 대한뉴스로 봤나보다. 존 카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재원은 일단 손을 들어 환대에 화답해줬다. 그러자 박수와 함성이 더욱 우렁차졌다.
“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회자가 되어 광적인 분위기를 이끌던 ID 소프트웨어의 원년 멤버이자 현재는 부사장인 존 로메로가 공손이 마이크를 넘겼다.
원래 유재원은 ID 소프트웨어 내의 의견 충돌과 글라이드 X의 차세대 버전에 들어갈 라이브러리를 확정하는 일로 댈러스에 왔다.
직원들을 모아놓고 한바탕 연설을 하는 건 예정엔 없던 일이었지만,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넥스트컴캐스트의 출범으로 인터넷 빅뱅이 일어났고, 유재원이 보기엔 느리지만 원래의 역사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인터넷은 보급 중이었다.
여기에 한국에서 국민 PC 사업이 시작되면 인터넷은 순식간에 컴퓨터 업계의 제일 큰 화두로 자리 잡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인터넷을 위한 킬러 타이틀에 대해 고민하던 유재원이었으니, ID 소프트웨어와 함께 고민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존 로메로에게서 마이크를 받은 유재원은 무대로 섰다.
“인터넷과 게임의 미래에 대해 살짝 이야기를 해 볼까요?”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의 환호와 함께 유재원의 짧은 강의가 시작되었다.
30분.
대회의실에서 인터넷과 게임에 대해 유재원이 썰을 풀었던 시간이었다.
직원들 모두가 짧다고 느낄 만큼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었다. 게임 경력만 수십 년이고 인터넷의 발전상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유재원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강연의 핵심은 기존의 게임이 컴퓨터와 사람의 대면이었다면, 인터넷 시대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대면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컴퓨터와 대결하는 싱글게임은 패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특이점을 뛰어 넘게 되면 컴퓨터도 사람만큼이나 기상천외한 변수를 만들어낼 테지만, 현재 기술로는 무리다. 제법 잘 만든 게임용 스크립트라도 많이 즐기다 보면 패턴은 고착화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P2P 게임은 그런 패턴을 완전히 뛰어넘는다. 게임 속에서 동료 혹은 적으로 매칭이 되기만 하면 변수는 크게 발생한다.
둠 2의 멀티플레이가 아직도 뜨거운 인기를 자아내는 것도 이에 기반한다. 게다가 경쟁을 한층 가속화하는 ELO 레이팅 기반의 랭커 시스템은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하는 무한의 발전소와도 같았다.
물론 치열한 경쟁이 싫은 사람은 ELO 포인트가 걸리지 않는 프리 매치를 하면 그만이고, 실제로 둠 2의 멀티 플레이어 중 10% 정도는 프리 매치만 하는 사람도 있다.
유재원은 둠 2 이상으로 멀티플레이에 충실해야 게이머들로부터 오래 사랑받는 게임이 될 거라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의 게이머들이 하나의 서버에 동시에 접속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 플레이 게임에 대해서도 말했다.
존 카멕을 비롯한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이 깜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둠 2의 경우 초고성능 컴퓨터에 한정해 16인 멀티 플레이어 서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진 않았다.
인터넷 회선의 응답속도도 문제였고, 넷코드의 최적화 문제, 서버의 레시턴시 문제로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었다.
예전 코퍼마인 행사에서처럼 아예 대형 서버와 직렬로 연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단일 서버에 돌린다는 발상이라니.
대회의실 한구석에서 유재원의 강의를 듣던 존 카멕은 혀를 내둘렀고, 동시에 도전의 욕구도 샘솟았다.
일종의 호승심이었다.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자 중 누군가가 HPC 포함해 현존하는 컴퓨터로는 구현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하자, 유재원은 본인이 만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가볍게 말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이라면 뒤처지지 않는 다는 자부심이 있는 존 카멕에게 이는 큰 자극이었다.
물론 존 카멕의 특기는 게임 엔진 쪽이었다. 게다가 실사와 같은 3D 그래픽 게임을 구현하는 게 그의 원대한 목표였지만, 조만간 나올 HPC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개발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할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수백 명이 접속하는 서버 프로그램과 넷코드를 짜는 건 당장 해볼 만한 과제였다. 게다가 점차 고도화되는 게임 엔진은 이제 멀티플레이 기능까지도 넣어야 할 때이니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광적인 강의를 마친 유재원은 존 카멕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게임으로 수억 달러씩 벌어들인 회사의 사장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평범했다. 26제곱미터를 조금 넘는 공간에 사무용 책상과 개발용 컴퓨터 몇 대가 놓여 있었고, 양쪽 벽면은 라이브러리 문서와 최신 컴퓨터 기술 동양을 보여주는 잡지들로 빼곡했다.
그나마 책상 뒤쪽으로 댈러스의 번화가가 그대로 보이는 전면 유리창이 볼만했다. 좁은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장의 특권이다.
“한때, 잡지에나 나오는 펜트하우스 사무실로 꾸며봤는데 영 정신 사나워서 작업을 못하겠더군요.”
존의 변명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확실히 사무실이 보기엔 좋아도 실제 사용해보면 능률은 별로인 것 같다. 그래도 로망은 로망인지라 유재원의 마음에 쏙 들어온 거대한 빌딩은 사라지지 않았다.
곧이어 존 카멕은 책상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두꺼운 암막커튼이 내려와 통유리를 가렸다. 하얀색 진주 느낌이 나는 걸 보니 암막과 함께 스크린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곧이어 자동으로 조명이 어두워졌고, 프로젝터가 켜졌다.
리모컨 버튼 하나로 완벽한 프로젝터 시스템이 전자동으로 세팅되었다.
“와, 보스가 왔다고 한 방에 세팅되네요?”
역시 돈이 좋구나 싶었는데, 잔고장이 좀 있던 모양이다.
곧이어 보조용으로 놓여 있던 쉘 북도 부팅이 끝났고 프로젝터와 연결이 되어 큰 화면으로 나타났다.
“이제까지 모아진 기획안입니다.”
존 카멕은 마우스를 조작해 디렉토리 하나를 열어 보였다. 수십 개의 IDW, IDP 문서들이 가득했다. 파일 하나하나가 모두 기획안인 모양이다.
“보스에게 보여드리기 민망한 기획안은 처내고 남은 것이지요.”
이것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았고, 존이 열심히 검토를 하면서 수준 미달은 다 쳐내고 남은 게 이거라는 이야기다.
“존은 뭘 만들고 싶으세요?”
유재원은 기획서를 보기 전에 존 카멕의 의향부터 물었다.
애초에 ID 소프트웨어에 거금을 투자한 건 모두 존 카멕 한 사람만 보고 결정한 일이었다. 덕분에 울펜슈타인부터 둠 2까지 ID 소프트웨어는 크게 성공했고, 유재원도 투자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았다.
덕분에 존 카멕의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고, ID 소프트웨어의 원년 멤버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원년 멤버들 사이에 게임 개발에서 의견차이로 내분이 생겨 갈라서는 일도 없었고, 사이좋게 억만 장자가 되었다.
이렇게 큰 변화가 생겼으니,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않겠나. 혹시 이전 생에서처럼 로켓을 만들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둠 2의 상업적 성공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웬만한 3D 가속카드의 번들 게임으로 채택되었고 소매시장에서도 계속 팔리는 중이었다.
유재원이 만들었던 불법복제 방지 프로그램인 이지스쉴드가 깨진지 오래였지만, 둠 2는 상관없다. 둠 2의 핵심은 멀티플레이였고, 서버에 접속하면 사용자의 키를 검증했기에 정품이 꼭 필요했다.
“음, 저는 이게 마음에 듭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던 존 카멕이 멈춘 건 프로젝트 KW 2라는 이름의 문서였다. 존 카멕은 더블클릭으로 문서를 열었고, 프로젝터를 통해 유재원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
유재원은 작은 감탄이 나왔다.
그것은 유재원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키보드 워리어의 정식 후속작에 대한 기획이었다. 키보드 자판 연습과 좀비 크러쉬 게임의 결합이라는 참신함으로 286이 절정이던 시절 전 세계를 휘어잡았던 그것이다.
한글판과 영문판은 물론,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팔려나갔다. 심지어 중국어판까지 나왔을 정도였고, 소설과 영화 판권도 팔렸었다.
좀비 크러쉬 게임에 어울리지 않는 심오한 스토리를 담고 있었기에, 소설책도 제법 팔린 걸로 기억한다. 물론 영화화에 대한 건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픽이나 게임 시스템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안드로이드 2.0 버전에 맞게 포팅해주는 패치도 배포되어서 지금도 학교나 가정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둠 2 확장팩 수준의 그래픽으로 키보드 워리어를 만들면 재미있을 거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멀티플레이도 가능할 것 같고요.”
존 카멕의 말에 유재원도 동의했다.
키보드 워리어가 나온 지 몇 년은 지났다. 당시에는 좋은 그래픽이었지만, 지금 보면 너무도 구식이었다.
“좋네요! 그런데 이건 크기가 너무 단출하잖아요. AAA급 기획서도 보여주세요.”
다만 이건 8명 단위 팀 하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진 전체가 투입되어 만드는 AAA게임을 고르기 위해서 오늘 유재원이 여기에 온 것이다.
3D 게임 시대가 되고나서 게임 개발에 대한 리스크는 한층 커졌다. 모델링은 기본이고 일부는 시메마틱 컷신을 넣기도 했다. 오리진 같은 회사는 윙커맨더라는 스페이스오페라 게임의 경우 스타워즈에 나왔던 유명 배우를 출연해 CG와 합성하는 영상을 담기도 했다.
둠 2를 놓친 일렉트로닉아츠의 경우엔 스포츠 게임으로 활로를 뚫었다.
피파, NFL, NBA등 메이저 스포츠 라이선스를 정식으로 취득해서 게임 속에 진짜 선수의 이름을 넣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는 없었던 멀티 플레이 기능도 추가하니 게임의 완성도가 한층 올랐다. 물론 게임 제작비에 라이선스 비용까지 더해지니 전체 개발 비용이 한층 높아졌다.
이렇게 공을 들인 게임이 망하면 손실도 엄청나다. 하지만 도전하는 게임 개발사는 많았다. 북미는 물론 세계의 게임 시장은 날로 팽창 중이었고, 그만큼 산업의 규모도 커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100원 들여 200원을 벌어들이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1만 원을 투자해 3만원 5만원 어쩌면 10만원 도 벌어갈 수 있는 시대였다.
존 카멕은 씩 웃으며 3개의 문서를 동시에 띄웠다. 그리곤 먼저 열린 문서부터 설명에 들어갔다.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입니다. 울펜슈타인의 후속작이지요. 싱글 플레이가 강화되었고 중세풍 배경에 나치와 좀비가 주요 적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대세인 멀티 플레이를 빼놓진 않았습니다.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의 다양한 배경맵을 활용해서 데스매치와 팀데스매치 등의 멀티플레이를 즐길 수 있고, 유즈맵도 지원할 예정입니다.”
“아, 전에도 한 번 올라왔던 거죠? 그때보다 훨씬 보강됐네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자리가 있었다. 둠 다음으로 만들 작품을 두고 울펜슈타인과 둠 2를 놓고 팽팽히 의견이 갈렸었고, 유재원이 둠 2의 손을 들어주면서 뒤로 밀려났다.
“예, 로메로가 물을 먹고 절치부심을 했지요.”
존은 기획서에 포함된 콘셉트 아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틈틈이 작업을 했던 모양인지 몇 년 전에 보았던 때와는 퀼리티가 차원이 달랐다. 분량도 엄청났다. 일반 난이도로 싱글 플레이를 클리어 하는 데 최소 8시간이나 되고, 멀티 플레이용 맵으로 12개나 준비할거라고 한다.
이 정도면 4시간, 6개 맵으로 잘라서 확장팩을 따로 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93년도에는 완전한 게임을 조각내 파는 문화는 없었다. 유재원도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잘 성장하고 있는 게임 산업에 구정물을 뿌릴 생각은 전혀 없다.
“다른 건요?”
“이건 로메로의 것처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
존의 부연설명과 함께 띄워졌던 문서가 바뀌었다.
확실히 시간과 정성이 듬뿍 들어간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과는 다르게 분량이 매우 얄팍했다. 첨부된 이미지 역시 연필로 그린 그림을 스캔한 이미지였다. 대신 임팩트 하나는 확실했다.
“퀘이크?”
제목을 읽으면서도 유재원은 속으로 깜짝 놀란 걸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게 벌써 나올 건가 싶었던 탓이다.
“팀 윌릿츠의 기획안입니다. 둠 2의 멀티플레이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팀 윌릿츠 역시 ID 소프트웨어의 원년 멤버였고 개발팀에서 리드 게임 디자이너란 직책을 맡고 있었다.
“좀 특이한 게임입니다. 싱글 플레이가 없는 건 아닌데, 멀티용 맵에서 봇(BOT)과 전투로 연습을 하는 정도입니다. 핵심은 멀티 플레이 게임이거든요. 그러니 캐릭터 성장이라는 요소도 없지요.”
존 카멕의 설명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더더욱 놀랐다. 원래 퀘이크에도 싱글 미션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처음부터 싱글 미션을 싹둑 제거해버린 퀘이크가 먼저 제안되었다.
멀티플레이 전용 퀘이크는 1999년에나 나올 물건이었는데, 93년도에 나왔으니 6년이나 앞서버렸다.
유재원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아직은 실제 타이틀이 아니라 기획서만 나온 상태이니 겁먹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팀 윌릿츠의 성향을 고려하면 멀티 전용 퀘이크가 벌써 튀어나올 여지는 충분했다.
팀 윌릿츠와 로메로의 게임 성향 차이는 지금 띄워진 2개의 기획서로 충분히 드러난다.
로메로의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의 경우엔 RPG적인 요소가 가득했다. 캐릭터도 성장하고, 무기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반면 팀 윌릿츠의 퀘이크는 오로지 전투뿐이다. 게이머의 실력만으로 승패가 정해져야 하니 맵에서 제공되는 무기나 방어구의 성능 차이도 없다.
“한 게임이 5분 길어야 10분이고, 무척이나 스피디한 전투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대신 멀티플레이와 그래픽은 최고를 지향할 거라더군요.”
기획서의 외적인 완성도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이가 처음으로 제출한 리포트처럼 부실했다. 대신 기획서 안에 담긴 아이디어만큼은 ID 소프트웨어 그리고 ID 그룹의 이름에 걸맞은 수준이다.
“이것도 좋네요!”
유재원은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고, 존은 조금 곤란한 표정이었다.
존 카멕도 둘 중에 뭐가 되었든 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게임엔진 프로그래밍이 전문인 존은 게임 기획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원년 멤버를 구할 때, 레벨 디자이너와 기획자를 구해온 것이고, 그들이 로메로와 팀 윌릿츠 같은 이들이었다.
덕분에 이번 양자택일에도 큰 고민이 빠졌다.
전에 한 번 물을 먹은 로메로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아니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온 팀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몰랐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결론은 간단했다.
“둘 다 하죠.”
“둘 다 말입니까?”
“네, 대신 인원 배분에 있어 조정을 해야겠죠. ID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이 10이라고 치면 아무래도 볼륨이 큰 울펜슈타인에 8을 배정하고, 퀘이크는 2정도를 배정하는 게 좋겠네요. 대신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모델링 같은 리소스 제작에 아웃소싱을 적극 사용하는 거죠.”
“그래도 게임 엔진을 두 개나 동시에 제작하는 건…….”
“하나로 충분할 거 같은데요. 두 게임의 성격이 판이한 것처럼 보여도 공통점이 많아요. 이를테면 멀티 플레이 부문은 공통 분모가 무척이나 많겠죠?”
두 개를 동시에 개발하는 걸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상이한 성격의 게임엔진을 두 개나 동시에 개발하는 건 존 카멕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멀티 플레이 부분만 한정한다면 공통적으로 사용할 부분이 충분할 것 같다.
차기작을 두고 사내정치까지 신경을 써야 했던 존 카멕은 순식간에 고민이 풀렸음을 느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긴, 콜럼버스의 달걀도 직접 보고 난 후에야 쉬운 일이지, 처음엔 난제나 같았다.
“그나저나 글라이드 X 차기 버전 문제는 뭐에요?”
간단히 문제를 푼 유재원은 바로 다음 과제로 넘어갔다.
“아, 그건 신참자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한결 편해진 얼굴의 존 카멕은 설명을 시작했다.
3D 가속 카드가 이제는 PC의 필수 부품이 되었고, 그만큼 돈이 잘 벌리는 사업으로 탈바꿈했다. 돈이 몰리면 자연스레 뛰어드는 사업체들도 많아지는 법이고, 3D 가속 카드 시장 역시나 마찬가지다.
“3DFX, 엔비디아 같은 신생업체도 글라이드 X 표준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데, 기존의 업체들이 막아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3DFX? 엔비디아?
갑자기 추억의 이름들이 튀어 나왔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엔비디아를 모르는 분은 없을 거 같은데, 3DFX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은 얼마나 될지 모르겠네요. 3D 시대 태동기에 허접한 가속기들이 하도 많아 3D 감속기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었는데, 3DFX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3D 가속 카드를 출시했지요. 그 임팩트가 참 대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