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2 국민 PC =========================================================================
“응?”
깜짝 놀란 유재원은 이성수 사장의 사업계획서를 자세히 보았다.
ID 프레젠테이션으로 작성한 문서를 그대로 출력한 듯, 글자가 큼직큼직하고 그림과 도표도 적절히 사용되어 가독성이 좋았다. 덕분에 장수는 많아졌지만, 포인트를 잡기에도 좋았다.
국민 PC라는 의미에 대한 풀이도 초반에 바로 언급되었다. 이 분량을 꼼꼼히 읽어 보니 유재원이 알고 있던 국민 PC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 말이었다.
ID 그룹과 세진 전자랜드가 힘을 합쳐 엄청나게 저렴한 PC를 대량으로 수백만 단위로 보급한다는 것이다.
국민 PC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도 이 대목이다. 국민 가수나 국민 배우처럼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PC 하면 곧장 세진의 모델이 언급될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를 팔아치우겠다는 것이 이성수 사장이 낸 사업계획서의 목표였다.
여기까지 보면 실현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은 사업계획서다.
어떻게 단일 모델로 수백만 대를 팔아 치운단 말인가. 그건 유재원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성수도 컴퓨터 유통에 대해 한가락이 있는 사람이었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서 나온 분명한 데이터가 있었다.
“어떻게 차원이 다른 저렴한 PC를 만들 것인지는 직접 설명해주시겠어요?”
유재원은 사업계획서에 함축된 문장 읽는 것보다 아예 당사자로부터 직접 방법을 듣기로 했다.
“예? 아! 네 회장님!”
본인의 서류 가방에서 나온 사업계획서를 읽는 유재원을 보며 마음을 졸이던 이성수 사장이 신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 컴퓨터 부품 시장에 거대한 격변이 일어나는 중입니다. 이 부분에서 유 회장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격변의 원인은 바로 HPC 부품 때문이지요.”
시작부터 이성수 사장은 유재원을 칭찬했다. 하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기존의 부품과 차원이 다른 성능을 자랑하는 HPC 부품들로 인해서 PC 시장에 일시적인 찬바람이 부는 중이었다.
지금 컴퓨터를 사면 좋을지 몰라도 불과 한두 달 뒤에 HPC 인증 부품으로 무장한 신제품이 나오게 되면 순식간에 구식으로 전락한다. 그만큼 성능의 차이가 크니 조금 기다렸다가 신품을 사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컴퓨터 제조업체도 HPC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HPC 시장 선점을 위해 최대한 빨리 출시한다고 난리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CPU의 물량 확보인데, 소규모 업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텔이나 AMD 모두 대량 물량을 우선으로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펜티엄 때라면 1천 개 단위로 주문을 받았는데, 지금은 1만 개로 훌쩍 뛰었을 정도다. 최소 1만 개 이하로는 주문할 수 없다. 설사 1만 개를 맞췄다고 해도 수십만 개씩 주문한 거대 업체에 먼저 물량이 나가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다.
물론 ID 테크놀로지처럼 특별한 관계라면 주문하는 물량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다. 이번에 CIA에 납품한 빅데이터 검색기에 들어간 HPC CPU는 1천 개로 소량인데 인텔로부터 특급 배송을 받았다.
ID 테크놀로지와의 협력 관계에 CIA 납품이라는 옵션까지 붙어 있으니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총알 배송을 받았다.
물론 긴급 배송 말고도 뉴에그 2 출시를 위한 물량 100만 개를 따로 주문해 놨다. TG의 이름이긴 했지만, 컴퓨터 업계에서는 TG를 ID 테크놀로지의 세컨드 브랜드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인텔의 특별대우를 가지고 딴죽을 거는 회사는 없었다.
“제가 노리는 건 HPC 부품이 아니라 펜티엄급 부품을 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악성 재고 취급이지만 처음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제품 아니겠습니까.”
이서우 사장이 생각하는 초저가 PC라는 건 악성 재고로 전락한 펜티엄급 컴퓨터를 말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첫 출시가 되었을 때는 999달러로 시작했던 펜티엄 CPU의 가격은 하락에 하락을 거듭해서 300달러 중반까지 내려온 상태다.
물론 300달러도 싸지만은 않은 가격이지만, 기존의 메모리와 비디오 카드 가격도 내려오면서 펜티엄 PC 본체 가격은 1,000달러 안쪽에서 맞출 수 있을 정도다. 모니터, 키보드, 스피커 등의 보조기기까지 다 합한 완제품 가격은 2,000달러 선에서 끊을 수 있다.
갑자기 가격이 크게 뛴 건 HPC 시대에도 가격이 꺾이지 않은 구시대 제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하드 디스크다.
반도체가 그다지 쓰이지 않는 하드 디스크는 HPC 반도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게다가 일부 업체들의 담합이 있다고 강력하게 의심할 수 있는 정황도 있었다. 640메가바이트짜리 하드 디스크 가격이 아직도 500달러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구식 CPU라도 제3세계에서는 수요가 꾸준해서 그렇게 싸게 조달할 수 없을 걸요.”
펜티엄 컴퓨터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나 구식이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 가면 최신식이다. 심지어 한국도 486이 대세인지라 이보다 2, 3배는 빠른 펜티엄급 컴퓨터라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그래서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솔직한 말로 제가 세진의 이름을 들고 인텔이나 AMD와 협상하는 것보다, 회장님이 추천장 하나 써 주시는 게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거 아니겠습니까.”
이성수 사장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고로 남은 펜티엄급 CPU와 부품들을 모아 엄청나게 저렴한 PC를 출시한다는 건 분면 괜찮은 생각이었다. 486정도라면 그냥 제3세계로 흘러가도 상관없겠지만, 펜티엄 컴퓨터라면 한국에서도 1, 2년간은 쓸만한 컴퓨터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펜티엄급 컴퓨터 한 대 가격이 얼마나 할까요?”
“예, 최대한 쥐어짜면 풀세트 원가를 140만원까지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마진을 더해 150만 원 선에서 출시하고자 합니다.”
괜찮은 가격이다.
HPC 컴퓨터가 출시되면 완전한 구식으로 전락할 테지만, 가격 면에서는 제법 경쟁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HPC 컴퓨터는 최소 300만 원 이상으로 시작한다고 하니 말이다.
뉴에그 2 역시나 가장 저렴한 기본형은 300만 원 대 후반이었고, 최고급형 부품과 커다란 트리니트론 모니터가 들어가는 모델의 경우엔 400만 원 후반의 가격이 책정됐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성수 사장의 국민 PC는 유재원은 큰 틀에서는 생각하는 국민 PC와는 조금 달랐다.
국민 PC로 치기엔 150만 원이란 가격은 그대로 비싸니 말이다.
현재 한국에서 대기업에 갓 입사한 회사원이 받는 초봉이 120만 원 정도였다.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의 경우엔 8, 90만원 수준이었다.
할부라는 구매 의욕을 증폭시키는 정책이 있다고는 해도, 일반인 가정에서 컴퓨터를 사는 건 큰 부담이었다.
물론 교육열을 자극한다면 허리끈을 졸라매고 비싼 컴퓨터를 사주실 부모님이 제법 많을 거다. 유재원의 집도 값비싼 컴퓨터가 그렇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부담을 완전히 덜어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2년 전부터 열심히 추진한 정보고속도로 사업이 있다.
광케이블을 방방곡곡 깔아서 초고속 인터넷을 보급하겠다고 야심차게 발표한 사업이었다. 사업을 위해서 수조원의 예산이 결정되었고, 실제 집행이 이뤄지면서 데이콤을 통해 시단위까지 광케이블이 매설되는 중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망은 이미 가동 중이어서 일부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일반인이 체감할 단계는 아니었다.
도시끼리 연결이 된 것이지,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집집마다 광케이블이 들어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종 사용자와 연결되는 건 역시나 미국과 같이 당분간은 ADSL 서비스로 제공되는데, PC보급률이 높지 않아서 서비스 가능 지역이라도 신청자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정보고속도로 사업에 PC 보급까지 추가하는 거예요”
정보고속도로는 기간망을 설치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집집마다 고속 인터넷이 들어가야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보고속도로 사업에 가정의 PC 보급도 추가할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PC를 구매하면 정보고속도로 사업단에서 일정한 보조금을 주는 거죠.”
정보고속도로 사업을 위해 편성한 예산이 수조 원이었다. 최고급 광케이블로 전국을 도배하더라도 몇 조원이 남는다. 그냥 두면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돈이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컴퓨터를 살 때 약간의 보조금만 주어져도 부모님이 지는 부담감이 확 줄어든다.
“30~40만 원 정도의 보조금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겠죠?”
대당 30만원의 보조금을 줄 때, 지금 남아 있는 정보고속도로 사업의 예산이라면 대략 300만 대까지는 지원할 수 있을 거 같다.
“아, 그리고 여기에서 저도 도와줄 수 있을 거 같네요. 국민 PC를 사는 분이 ADSL 서비스도 함께 신청한다면 일정 금액을 데이콤에서도 보조해주는 거죠.”
21세기에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하면 인터넷 업체에서 사은품이라고 현금을 20만원씩 턱턱 내줬다. 인터넷 TV와 인터넷 전화기 같은 부가 서비스를 추가로 신청하면 사은품 액수가 더 올라가서 50만원 씩 내줄 때도 있었다.
이게 가능한 건 사용기간을 약정하기 때문이다. 3년간 서비스 업체를 바꾸지 않고 계속 사용한다는 약정을 통해 미래의 수익을 확정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현금 사은품이라고 미리 줬던 돈 이상으로 서비스 요금을 받아가니 통신사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다.
유재원은 이것을 국민 PC에 결합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ADSL 사업을 진행하는 건 데이콤이다. 공기업이긴 했지만, 전 정부와의 인연 덕에 유재원도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기업이라면 30% 지분으로 경영에 참견을 하는 건 어렵겠지만, 데이콤은 다르다.
정보고속도로 사업부터 해서 ADSL까지 데이콤이 진행하는 모든 사업은 유재원과 매우 관련이 있었다. ADSL 신청자에게 보조금을 주기로 하는 건 일도 아니다.
“3년 약정이면 25만원, 5년 약정이면 50만 원 정도면 큰 도움이 되겠죠?”
사실 현금 사은품은 시장이 극심한 레드오션에 도달했을 때나 나왔던 정책이었다. 신규 가입자는 없고, 서로의 가입자를 빼앗아야 하는 상황이니 돈으로 유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반대지만, 사은품은 분명 유효한 방법이다.
가입자 숫자가 너무 적으니 직접적인 지원금은 분명 효과를 볼 거다. 게다가 장기 약정으로 묶어두면 곧 우후죽순 생겨날 인터넷 업체의 견제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소비자도 이득이다. 두 가지 보조금을 더해 최대 80만 원이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성수 사장이 기획하는 PC를 산다면 150만 원짜리 PC가 대번에 70만원으로 살 수 있다.
여기에 할부가 더해지면 집안 형편이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컴퓨터를 들일 수 있다.
그야말로 국민 PC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업이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 PC의 보급과 발 맞춰 ADSL 사용자도 크게 늘어날 테고, 그러면 인터넷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을 시작할 동력원이 된다.
문제는 데이콤의 경우 자본금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인데, 이는 유재원의 주머니를 여는 것으로 간단히 해소된다. ADSL 보급 사업을 위한 명목으로 유재원이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지원금을 조성하면 된다.
문민정부의 역사를 보자면 데이콤과 같이 돈은 그다지 못 벌면서 큰 사업을 해야 하는 기업을 주로 민영화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헉! 50만원이나 지원하신다는 겁니까?”
이야기를 듣던 이성수 사장이 펄쩍 뛰었다.
“예, 지원금을 준다고 딱히 손해도 아니거든요. ADSL 월 사용료로는 대략 2만 원을 잡고 있으니 중간쯤에 지원금을 회수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은 수익으로 되는 거잖아요.”
덤으로 ADSL의 대량 보급과 함께 인터넷도 대중화되면 ID 그룹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이성수 회장은 차원이 다른 발상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기껏해야 이제 구식이 된 펜티엄급 부품을 모아 싸게 출시할 생각만 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기업 제품을 능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서서 비싼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유재원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사업계획서를 잠깐 보던 유재원은 이성수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좀 더 시간을 들여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면, 자신도 가능했을까? 이에 대해 잠깐 고민해 본 이성수였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애초에 정부로부터 PC 보급에 대한 보조금을 받아낼 생각 자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한다고 수십만 원의 보조금을 준다는 것은 파격적인 마케팅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성수는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그, 그러면 저희 세진과의 협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업의 규모가 차원이 달라졌다.
정부에 큰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유재원이라면 분명 정부와의 담판으로 정부 고속도로 사업에 국민 PC 보급도 추가할 수 있을 거다. ADSL 보조금도 유재원 혼자서 집행하는 게 가능하다. 여기서 이성수는 본인의 세진 전자랜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래요. 이성수 사장님의 생각처럼 이건 혼자서 하기엔 너무 큰 건이죠.”
유재원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이성수 사장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번 사업에 있어 세진 전자랜드를 제외해도 상관없다. 그가 한국 컴퓨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지만, 그 부작용도 상당했다. 군대식 운영으로 인한 세진 직원들의 피해도 컸고, 부품 대금 지연과 무분별한 확장으로 인한 IT 업계의 부실화도 심각했다.
전생에는 분명 빛보다 어둠이 더 큰 양반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다. 전명헌이 달라진 것처럼 이성수도 달라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대신 여기까지 날아와 국민 PC라는 아이디어를 일깨워준 것에 대한 대가는 주기로 했다.
“PC 한 대당 적어도 55만 원 많으면 80만 원의 보조금이 나오는 사업이죠. 그만큼 잠재적 구매자들도 엄청나게 많아질 거고요. 아마 수백만 대가 팔리는 건 일도 아니지요. 그러니 업체 하나에서 이 물량을 다 감당하는 것도 불가능할 거예요. 게다가 하나에 몰아주면 특혜 시비도 나올 것이고요.”
유재원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이성수 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반박을 하려 해도 다 맞는 말이라서 틈이 없었다.
“아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물량 배분을 하겠죠. 여기까지 찾아오셨으니 세진도 중소기업 쪽으로 선정이 되도록 힘을 써 볼게요.”
“헉! 진정입니까? 고맙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죽었다 살아난 표정의 이성수가 고맙다는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아직 유재원의 말이 끝난 건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원래 한국말이란 끝까지 다 들어봐야 한다.
“ID 그룹의 전통이 탄탄한 내실입니다. 아무리 협력사라도 부실이라는 단어가 붙는 건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거든요. 우리와 함께한다면 내실에 집중하셔야 할 겁니다.”
“예? 예에?”
“무차별적인 확장은 금지라는 말이죠. 이 사장님은 세진의 직영점을 전국에 수십 개씩 만드실 계획이시죠? 저는 4, 5층짜리 초대형 직영점은 전국에 10개 미만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나머지 지역은 대리점이나 적당한 크기의 점포로 입주하는 것이 효과적이죠.”
이성수 사장은 유재원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폭력과 군대식 문화도 때려치우세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폭력을 쓰나요? 6, 70년대에도 그러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폭력이라는 소리에 헉하고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영점을 운영하다가 부하직원의 실수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나간 적이 몇 번 있었던 탓이다.
주먹질한 후에 잘 어르고 달래어 무마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유재원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저번 대선 때 ID 그룹의 정보팀이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이 돌긴 했는데, 그걸 직접 겪어보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혁신을 제대로 하신다면 제가 50억 원 정도 투자할게요. 인텔이나 AMD에 연락도 해드리죠.”
50억이라는 소리에 이성수 사장의 눈이 확 돌아갔다.
지금 세진에 가장 부족한 게 바로 돈이었다. 백화점식으로 단장한 1호점은 그야말로 인기의 절정이다. 이와 똑같은 직영점을 전국에 내기만 하면 돈을 갈퀴로 긁어 들이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오직 문제가 있다면 자본금이다.
컴퓨터가 잘 팔리는 만큼 들어오는 돈은 그럭저럭 벌리고 있는데, 부품업체에 정산을 해주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하면 남은 돈이 얼마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이 돈 냄새를 맡고 참전할까 봐 조바심이 극에 달했고, 덕분에 한 방을 노리고 국민 PC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미국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맙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수가 허리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유재원식 국민 PC도 엄청난 사업이다. 여기에 ID 그룹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한국에 알려지면 세진의 이름값은 한 차원 더 높아지고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다.
“제가 당부한 거, 절대 지켜서야 해요. 저는 빈말 하지 않거든요. 일성 계열사들이 지금 어떤지 잘 아시죠?”
혹시나 유재원은 이성수가 나중에 딴 소리할까 봐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만에 하나 예전 버릇이 그대로 나오면 투자자로서 고소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럼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성수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으론 무슨 말이든 못할까 싶다. 게다가 이성수 이 사람은 전생에 사고 친 전력도 있지 않은가. 번드르르한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에 가셔서 최강욱 비서실장과 하세요.”
ID 테크놀로지에서 투자의 법률적 문제는 법무실장인 앨런이 주된 일이었다. 한데 이성수는 영어를 완전히 못 하니 앨런을 붙여줬다간 전전긍긍할 게 분명했다.
최강욱의 직책이 비서실장이긴 해도 ID 그룹의 한국 사업장 운영을 대리하고 있으니 세진 전자랜드 건을 처리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몇 번이나 굽실거린 이성수를 내보낸 유재원은 짧은 상념에 잠겼다.
전생에 세진 전자랜드의 매장에 가서 게임도 하고 컴퓨터 강의도 들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게임을 한다고 강의도 잘 듣지 않았지만, 강사 역할을 했던 직원들은 참 열심이었던 게 기억이 났다.
지금 이성수 사장에게 보여준 배려와 투자는 그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전생에 좋은 기억을 만들어준 세진의 이름 모를 직원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그래도 전과 달라지는 게 없다면? 국민 PC 사업에서 배제시키는 것으로 끝장을 내버릴 수 있다.
“지금 한국은 몇 시지?”
시계를 본 유재원은 아직 업무 시간인 걸 확인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정보고속도로 사업에 국민 PC를 넣는 건 정치권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니 유재원 입력한 전화번호의 주인은 당연히 전명헌 총리였다.
정보고속도로 사업을 담당하는 부서는 체신부였지만, 전명헌이 움직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국민 PC로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면,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할 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는 동안, 유재원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컴퓨터가 있고, 인터넷이 있어도 정작 온라인으로 즐길 뭔가가 없으면 국민 PC의 폭발력이 약해질 것이다. 제대로 터트리기 위해선 전 국민의 킬러 타이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이번 챕터부터 챕터당 분량을 짧게 잡아가 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속도감을 위해서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