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국민 PC =========================================================================
전생에 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던 유재원은 CBS의 눈 모양 로고가 매우 익숙했다.
CBS는 콜롬비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인데, 실제 본사는 뉴욕에 있다. 그렇다고 유재원이 인터뷰를 하러 뉴욕까지 갈 건 없다. LA에도 CBS의 방송국 지사가 있었기에 거기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데이비드 레터맨의 레이트 쇼다.
미국의 전설적인 쇼 호스트이자 코미디언이고 본인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1982년부터 진행 중이었고, 앞으로도 쭉 진행할 예정이다. 다만 중간에 방송국을 바꾸긴 했는데, NBC에서 CBS로 온 것이다.
NBC에 있을 때는 레이트 나이트쇼였고, CBS로 이직하면서는 나이트가 빠진 그냥 레이트 쇼가 되었다.
거대한 쇼의 MC가 방송국을 바꾸는 건 미국에서도 그다지 많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는 대부분 자리싸움에서 밀렸을 때였다. 레터맨도 마찬가지다. NBC에서 가장 유명한 쇼 프로그램은 투나잇 쇼였다. 동시에 미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토크쇼이기도 했다.
그런 투나잇 쇼의 초대 MC는 조니 카슨이란 양반인데 1992년 은퇴할 때, 그의 후계자로 일찌감치 낙점된 사람은 데이비드 레터맨이었다. 그런데 조니 카슨이 은퇴하고 나서 2대 MC로 지목된 사람은 제이 레노였던 것이다.
마음이 확 상한 데이비드 레터맨은 CBS로 왔고, 여기서 데이비드 레터맨의 레이트 쇼를 만들게 된 것이다.
사실 ID 그룹의 이미지에 맞게 1등만 골랐다면 유재원은 NBC의 나이트 쇼에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데이비드 레터맨 대신 나이스 쇼 MC를 꿰찬 제이 레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완전 비호감이다.
물론 유재원에게 비호감으로 찍힌 사건들은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은, 2000년대쯤에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전생에 다 보았고 머릿속에서 확실히 남아 있던 탓에 호감을 주긴 힘들었다.
일성의 자동차 진출을 보고 사적 감정을 비즈니스에 대입했다고 탓했던 유재원도 순간 머쓱해지긴 했다. 하지만 레이트 쇼도 투나잇 쇼에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프로그램이었다. 시청률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토크쇼에서 MC와의 캐미가 중요하니 본인과 잘 맞을 데이비드 레터맨을 고른 건 합리적이었다.
“유재원 회장님, 반갑습니다!”
LA에서 만난 데이비드 레터맨이 유재원을 반갑게 맞이해줬다. 유재원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보다 훨씬 젊었고, 덕분에 스마트한 모습이 훨씬 강렬해진 데이비드 레터맨이다. 188cm나 되는 큰 키였지만, 살짝 말랐다 싶은 체형이었다. 여기에 레터맨의 트레이드마크인 은테 안경도 여전했다.
“그리고 제 쇼를 선택해줘서 고맙습니다. 혹시나 나이트 쇼에 나갈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악수하면서 쾌활하게 말하는 모습도 기억과 비슷했다.
“고마워요. 데이비드 씨의 환대를 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예!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레이트 쇼는 최고가 될 거니까요. 물론 최고가 되는 데 유 회장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죠.”
자신만만한 레터맨의 모습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초 CBS로 이직했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레터맨의 레이트 쇼였다. NBC와의 충돌도 적잖은 이슈가 되었고, 레터맨의 이름값도 있고 해서 시청률은 어느 정도 나오고 있는데, 앞으로가 중요했다.
“네, 잘해 봐요. 그렇다고 너무 세게 물면 곤란하겠지만요.”
유재원은 살살 해달라고 당부했다. 레터맨이 신사적이긴 해도 분명 레드핵이니 파파라치 건이니 하는 떡밥을 물지 않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대본을 멋대로 수정해달라는 요구는 없었다.
애초에 대본을 보여달라고도 안 했다. 쇼의 진행은 전적으로 레터맨과 그가 거느린 작가진에게 달린 거지, 손님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은 아니니 말이다.
유재원의 선택은 탁월했다.
CBS로 이직하기 전부터 수년간 토크쇼를 했고, 이제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쇼를 진행하는 레터맨은 예술적인 진행을 선보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유머 감각은 별로인 자신을 가지고, 예술적인 밀고 당기기를 선보이면서 웃음을 끌어냈다. 그렇다고 인종차별 같은 자극적인 면을 끌어다 쓰지도 않았다. 레터맨이 물어보고 유재원은 답을 하다 보면 방청객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역시 수십 년간 인기 절정의 쇼를 진행한 건 그만한 내력이 출중했다는 걸 직접 증명한 레터맨이였다.
유재원도 이에 호응했다.
성공 스토리는 보통 어렵사리 아메리칸 드림 관련 에피스드나 이후에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돈 자랑을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타자 연습기에 게임을 결합한다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건 물론이고 직접 이를 현실로 옮겼고, 이걸 혼자만 즐긴 게 아니라 온라인에 올려서 많은 사람과 공유한 것을 특히 강조했다.
이는 아직도 통용될 수 있는 성공의 계단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인터넷이란 세계는 이제 겨우 대중화되는 단계라서 누구나 선점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있다.
“아, 인터넷은 진정 신대륙이군요. 게다가 신대륙에서 성공하신 산 증인이 앞에 있으니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게 꼭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최근 논란이 된 해킹 문제도 있고요. 게다가 회장님도 최근 레드핵이라는 해커 때문에 곤란해지셨지요?”
역시나 레드핵이 언급되었다.
“네, 하지만 걱정해주신 것만큼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엄연히 따지면 제가 겪은 건 해킹도 아니었죠.”
“그러면 일단 레드핵이 유 회장의 컴퓨터를 공격했다는 건 사실이군요?”
레터맨의 레이트 쇼가 독한 맛이 가득했다면 이 대목에서 파파라치의 사진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점잖은 레터맨은 요점을 집어 주기만 했다.
“민감한 개인 정보를 빼갔다거나, 컴퓨터의 보안성을 망가뜨리는 식의 공격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레드핵은 ID 톡이 그림 파일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에서 저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취약점 하나를 잘 포착해줬습니다. 덕분에 제가 대비할 사이도 없이 깜짝 놀라고 말았죠. 뭐, 제가 한 번 놀란 대신 모르고 있던 취약점을 고치게 되었으니 싸게 막았다고 치죠.”
“실질적으로 컴퓨터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생각해 보세요. 레드핵이 찾은 방식은 혐오스러운 그림을 갑자기 띄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게 최대치였다고요. 이제는 그 취약점도 사라졌고요. 제가 레드핵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진 않아요. 하지만 과대평가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제가 심장이 좀 약한 편인데, 갑자기 그런 사진을 봤다면 깜짝 놀라 죽을 수도 있었겠네요. 이 자리를 빌려 레드핵의 노고와 유 회장님의 살신성인에 감사드립니다!”
진지했던 분위기는 갑자기 터진 레터맨의 호들갑에 분위기가 다시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면 저도 이 자리에서 레드핵에 한마디 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하세요.”
“실력을 뽐내고 싶으면 잡지 인터뷰 같은 본인의 정체를 들킬 위험한 일은 접어두시고 시큐리티 챌린지에 도전하세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보안 시스템을 돌파한다면 1억 달러의 상금은 물론 지금과 비교가 안 될 만큼의 유명세가 이어질 거니까요.”
진심으로 레드핵을 위해 하는 조언이다.
전에 유재원이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아아! 시큐리티 챌린지가 있었지요? 아직 1억 달러는 무사한가요?”
레터맨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대로네요.”
1억 달러가 은행 금고에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본인과 함께 어울릴만한 특출난 천재가 아직 없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아, 그리고 레드핵 씨! 갑자기 제 변호사가 방문해도 놀라지 마세요. 피해보상을 받으려고 가는 건 아니니까요.”
“하하하, 누구라도 유 회장의 변호사가 찾아가면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진심인데, 농담으로 알아들은 데이비드 레터맨이다.
“참 아쉽게도 유 회장과의 인터뷰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다음에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좋았습니다. 제2회 시큐리티 챌린지나 해킹 소동 이상의 일을 터트려서 다음에도 부름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죠!”
한 시간 조금 넘었던 녹화 시간이 무척이나 빨리 지나간 듯싶었다. 레터맨이나 PD의 표정을 보니 녹화도 잘된 것 같았다.
“방송은 언제죠?”
“이번 주 금요일이죠!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틀 만에 편집을 다 해 방송하겠다는 패기 가득한 레터맨 쇼 PD의 대답이다.
보통은 일주일 후였는데, 아무래도 최근 유재원이 다시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대중의 관심이 높은 상태다. 이 바람을 제대로 타려고 총알처럼 찍고, 총알처럼 방송하려는 모양이다.
욕심만 크게 내다가 까딱 잘못하면 대차게 망할 것 같기도 한데, 거기까지 유재원이 책임질 일은 아니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레드핵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레터맨 쇼를 빌려 전한 자신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날.
-레드핵 수색 중간보고입니다.
유재원은 50개의 IP를 추출했고, 이에 대한 수색은 ID 그룹 미국 정보팀이 수행 중이었다. 이번 보고는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특정된 IP 18개의 조사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정보팀이 전국 조직이긴 해도, 기존에 수행하던 일이 있어서 모든 인력을 레드핵 추적에만 투입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역을 나눠서 인력을 투입했는데,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캘리포니아 지역이었다.
중간보고라는 단어에서 유재원은 캘리포니아 지역 수색의 성과는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제로 보고서 안에는 18개 아이피 주소의 주인들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는데, 레드핵으로 단정 지을 용의자는 없었다.
“다음은 뉴욕인가?”
이후 정보팀의 수색 계획서는 캘리포니아 지역 다음으로 많았던 뉴욕을 수색할 거라고 되어 있다. 12개나 되는데, 여기서도 꽝이면 이제는 미국 전역으로 흩어져야 한다.
“뉴욕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적중률 높기로 본인도 인정한 직감은 이번에도 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정보팀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조사를 해봐야 겨우 발견할 것 같다.
그렇다고 어느 지역이라도 딱히 감이 잡히는 것도 아니어서 유재원은 정보팀에 별도의 지시는 없이 확인 버튼만 눌러줬다.
“다음은?”
-코요테 시티, 데이터 센터 현황.
1만2천 대의 컴퓨터를 하나로 묶은 데이터 센터는 ID 그룹의 인터넷 서비스만을 위해 쓰이는 건 아니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하고 싶은데, 데이터 센터를 운영할 만큼 큰 설비를 놓는 건 부담스러운 업체나 학교의 인터넷 서비스를 대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유료 서비스였고, 회선과 하드디스크 사용량에 따라 요금도 비례한다.
“와, 드디어 1천 개 돌파네!”
1년 전만 해도 그런 식으로 서버를 빌려다 쓰는 업체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꾸준히 늘어나더니 현 시간을 기준으로 드디어 1천 개를 돌파했다.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건 역시나 대학교였다. 회선 속도가 잘 나오는 서부 대학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유치한 숫자는 수백 개였다. 아무래도 대학교는 서비스 비용을 할인해 주니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다음은 호텔이나 여행사의 예약 사이트였다.
ID 테크놀로지의 인터넷 예약과 결제 기능은 이미 정평이 난 상태다. 사용자나 관리자가 잘못으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있어도, 서버 프로그램이 잘못돼 서비스가 마비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회선이나 서버 문제로 영업에 문제가 된 일도 없었다. 아직 ID 그룹이 운영 중인 서버가 문제를 일으킨 건 딱 한 번, 대전 엑스포 테크노피아 전시관에 사람들이 몰렸을 때가 유일했다.
그러니 ID 데이터 센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한 번 쓰기 시작하면 그만두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는 운영비 빼면 남는 건 없네.”
유료 서비스였지만 원체 저렴한 가격인지라 1천 개의 업체가 들어와 있어도 수익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요금 구조는 사용량에 비례해 상승하도록 만들어져 있긴 했다. 그런데 원체 마진율이 낮게 책정된 덕에 실제 요금고지서에 들어가는 숫자는 매우 저렴했다. 그렇다고 마진율을 높이면 자체 서버를 만들 테니 쉽게 올릴 수는 없었다.
“이건 미래 먹거리라고 생각해야지. 뭐, 데이터 센터 운영비가 충당된다는 것만으로도 괜찮고.”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가 돈이 되는 시대는 한참 뒤였다.
인터넷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깊숙이 들어와서, 인터넷이 사라지면 기본적인 삶 자체가 굴러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 될 거다.
지금은 그저 자그마한 쇼핑몰, 호텔이나 여행상품 예약, 대학교 커뮤니티 정도만 운영하니 돈이 나올 구석은 없는 게 정상이다.
데이터 센터에 매출액이 작아도 괘념치 말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유재원은 다음 케이스를 열어보려다 멈칫했다.
“나,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니야?”
유재원은 어제는 로스앤젤레스에 다녀왔지만, 오늘은 외출이란 게 전혀 없었다. 이사가 완료될 때까지 숙소로 잡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일만 했다는 걸 자각했다.
좀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유재원은 기지개를 켰고, 곧이어 커피도 주문했다.
집이었다면 옆방에 있는 김대석에게 말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전화기를 드는 것으로 끝이다.
“아이스커피 한 잔 부탁해요. 시럽은 빼고요.”
이런 전화 한 통이면 호텔 측에서 콜롬비아산 최상급 원두에서 뽑은 에스프레소에 시원한 물과 투명한 얼음을 동동 띄운 맛있는 아메리카노를 척 가져다주니 참 편리했다.
그렇게 몸을 푼 유재원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몇 분 쉬었다고 바로 일로 복귀하는 건 아니다. 업무용 프로그램은 최소화를 시켜놓고, 인터넷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유재원에게는 넥스트컴의 게시판과 뉴스 페이지를 돌아보는 게 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국 뉴스를 먼저 훑어본 유재원은 곧이어 한국 페이지로 넘어갔다.
현재 넥스트컴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나라는 미국과 한국뿐이어서 유럽이나 일본의 뉴스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일성 그룹, 자동차 산업 진출 타진!
-자동차 업체 극렬 반대!
-전재구 미래 그룹 사장, 국산 자동차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
한국 페이지에 들어가니 가장 큰 뉴스로 일성 자동차 뉴스가 나왔다. 언론에서도 냄새를 맡은 것인지, 아니면 일성 그룹 차원에서 여론몰이를 시작한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 기존 자동차 업계의 반발이 무척이나 심했다.
특히 미래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낙점된 전재구가 오랜만에 침묵을 깨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1세기 감성으로 보면 남들이 사업을 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한국은 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는 나라였다. 그런 독재 정권은 시장경제를 표방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중 하나가 재벌들끼리 충돌이 없도록 주력 사업을 나눠준 것이었다. 괜히 국내 재벌들끼리 경쟁을 하면 나라 성장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식의 이상한 사고방식이 있었다.
군부 정권은 이제 끝났지만,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재벌들의 인식에는 그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성 그룹이 불문율을 깨고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다고 하니 난리가 났다.
물론 유재원이 보기에 한국 재벌이라는 조그만 이너서클 안에서의 난리에 불과했지만, 워낙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의 소리가 마치 국민 여론처럼 들렸다. 하지만 일성도 나름 따르는 언론이 있어서 타당성을 설파 중이었고, 공장이 올라갈 부산지역에서도 환영 일색이니 불만은 무시되고 계획대로 진행될 거다.
남들이 아무리 말려도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저쪽 사람들의 기본 패턴이니 말이다.
따르릉!
다음 기사로 넘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밖에서 온 전화는 아니고, 룸끼리 연결되는 인터폰이었다. 당연히 전화를 건 사람은 김대석이다.
-회장님, 업무 중이실 텐데 죄송합니다.
김대석은 유재원이 전화를 받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네, 다름이 아니라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여기 호텔까지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평소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다.
사업계획서나 기가 찬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만나 달라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그렇게 억지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준 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다 만나주면 유재원이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되니 말이다.
당연히 그룹 차원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절차는 다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대석이 이번만큼은 그런 절차를 따르지 않고 전화 보고를 한 건 특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재원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날아왔다는 거다.
“그 사람 이름이 이성수라고요?”
-네! 이성수란 사람인데 컴퓨터 유통에 관해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다고 합니다.
이성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아! 세진 전자랜드!”
잠깐 고민 중이었던 유재원에게 번뜩 세진 전자랜드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진돗개 PC, 세종대왕 PC라고 해서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돌풍을 일으킨 세진 전자랜드의 창업자가 이성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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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한국 컴퓨터 사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세진이죠.
세종대왕이 고급형, 진돗개가 보급형이었지요. 둘 다 케이스가 제법 크고 엄청나게 튼튼했던 게 장점이었습니다. 덕분에 세종대왕 케이스를 구해다가 최신 보드를 넣어서 사용한 사람도 제법 있던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