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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261화 (26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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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피아 1993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선 티파니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 일정을 물어보았다.

“음, 이제 집에 가야지.”

이에 대해 유재원은 간단히 공항을 가리키며 말했다.

며칠간 본인이 열심히 설계했던 데이트 코스는 목표 달성률 80% 정도 수준에서 끝났다. 약간 미진한 게 있긴 했어도 첫 데이트에 이 정도라면 합격점을 줄 만했다. 이제 남은 건 예약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서 티파니를 집에 무사히 데려다주는 것뿐이다.

“아.”

티파니는 뭔가를 더 기대했던 모양인지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그래, 여긴 LA였지. 얼른 가자.”

곧이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게 본인도 당황스러웠던 모양인지, 얼버무리는 것처럼 얼른 말을 이었다.

저녁 9시 30분 LA에서 출발했던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11시 20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티파니의 집까지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밤이 되면 도로에 차들이 거의 사라지는 덕에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데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에 왔었던 티파니의 집에 다시 도착한 건 11시 50분에서 2, 3분 모자란 시각이었다. 유재원이 장담했던 당일치기 일정이 완벽히 성공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일정을 맞춘다고 무리하게 움직인 것도 없었다.

“세상에. 진짜 당일치기로 다녀온 거니? 아이고, 혹시 티파니가 큰 실례라도 했니? 빅보스가 이해해 주렴. 남자랑 이렇게 정식으로 데이트하는 건 처음이니 말이야.”

다만 주무시다가 다시 나오신 건지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나오신 마리나 부인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억지로 일정을 지킨 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엄마! 재원이 앞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제 딴엔 무리수라고 만지작거리다가 날렸던 호텔 카드가 알고 봤더니 유효했던 것 같다. 하지만 데이트가 이번 한 번만 하고 말 것은 아니지 않은가.

티파니는 당황하면서 마리나 부인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오늘 덕분에 재미있었어!”

그렇게 마리나 부인을 먼저 집안으로 들여보낸 티파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작별인사를 확실히 해주었다. 가까이 다가와 포옹을 하더니 가벼운 키스까지 해주고는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작별 선물에 유재원은 순간 머리가 굳어서 문 앞에 멍하니 있었다. 1분 정도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혹시 이거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보스, 축하합니다.”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그렉과 피셔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모든 걸 다 지켜보았다. 본래는 경호를 위해서 유재원에게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던 것이지만, 철저한 직업 정신 덕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된 거다.

하여튼 오늘부터 티파니와 ‘연인’이라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993년 7월 7일.

유재원의 두 번째 인생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될 날짜다.

다음 날.

유재원은 다시 한번 비행기에 탑승했다. LA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였다.

티파니와의 데이트로 미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친 유재원은 예고했던 것처럼 한 달짜리 일정으로 한국행을 시작한 것이다.

오전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급한 일은 물론이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지침도 확실히 내려주고 왔다.

ID 테크놀로지에 당면한 가장 큰 일은 역시 제2회 시큐리티 챌린지였기에 이와 관련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실행될 건 몇 가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내린 지침은 만에 하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뚫렸을 경우를 대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금고에 있던 현금 1억 달러가 사라지는 것도 뼈아픈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걱정해야 할 건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해커가 사용한 취약점을 최대한 빨리 차단하는 패치를 배포하고, 성공한 해커와 최대한 빨리 접촉해서 ID 테크놀로지 딱지를 붙이는 게 중요했다. 개발팀으로 스카우트하면 최상이고, 못해도 보안부문 고문으로 데려온다면 해킹에 대한 우려는 가뿐하게 불식시킬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대책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해킹되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매일매일 수만 개의 스레드가 업데이트되는 2ch.com의 동향을 살피면 현시대의 해커들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해킹하는 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이 밖에도 ID 인베스트먼트의 운용에도 몇 가지 지침을 주었다. 빈센트 그린힐 사장은 본인의 일을 잘 수행하고 있지만, 그가 거느리고 있는 월스트리트 출신 투자분석가들은 자기 능력을 보여준답시고 엉뚱한 회사를 추천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회계 서류의 수치나 개발한다는 아이템은 그럴듯했다. 그러니 결과가 좋으면 다행인데 유재원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은 회사들이라는 게 대부분이었다.

지금이야 이런 추천은 유재원이 알아서 차단했지만, 회사의 규모가 더 커지면 분명 등잔 밑이 어두워질 테니 미리미리 조치해놓는 것이다.

이번엔 제법 강력한 지시를 했다. 회사 방침과 어긋난 개인플레이를 계속하는 녀석은 해고해도 무방하다고 말이다.

보통 이렇게 하면 대단히 경직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조직 내 혁신이 힘들어진다. 그로 인해서 회사는 경직되고 위기에 대응하지 못해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재원에게는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보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배짱으로 나가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강력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이테크 연구소를 특별히 챙겼다.

이번 대전 엑스포를 준비하는 데 가장 활약하는 부서가 바로 하이테크였다. 대부분 아이템은 이제 다 완성했고 한국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배송은 세계 유통망을 갖춘 플래그쉽 스토어 물류 팀이 담당하기로 했기에 하이테크 연구소의 박사님들에게 두둑한 보너스와 함께 휴가를 내주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은 휴가를 받으면 동남아시아 혹은 카리브해의 휴양지에서 잘들 놀다가 온다. 그런데 샌님만 가득한 하이테크 연구소 박사님들은 과연 휴가를 잘 즐길지 걱정이긴 했다.

그렇다고 보모가 된 것처럼 어디로 가서 저렇게 쉬라고 강권하는 것도 이상했다. 하여튼, 휴가는 확실히 주었으니 악덕 업주라는 소리를 듣진 않을 것이다.

아쉬운 건 개인적인 일 하나를 뒤로 미뤘다는 점이다.

바로 레드핵을 찾는 일이었다.

해커라면 익명성을 최대한 유지해야 함에도 대놓고 잡지사와 인터뷰까지 했던 레드핵은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무척이나 많이 남겨주었다. 그러니 작정하고 찾기 시작하면 며칠 내로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텐데, 한국행을 시작하면서 레드핵 추적은 뒤로 미뤄야 했다.

그렇다고 한 달 후로 미뤄진 건 아니다.

정보 고속도로를 미국보다 훨씬 일찍 깔기 시작한 한국은 이미 ADSL 상용화를 시작한 상태였다. 단지 고성능 PC의 보급보다 ADSL 보급이 더 일찍 시작된 탓에 사용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유재원에게는 확실했다.

미국과의 통신 속도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반응 속도도 놀라울 만큼 좋아졌다. 예전처럼 답답해질 일이 없으니, 레드핵을 추적하는 건 문제 없다.

“어서 오세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에 들어서자 최강욱 비서실장을 비롯해 감사실장, 기획실장 등의 그룹 임원들이 유재원을 반갑게 맞이했다.

원래 유재원은 임원들이 이렇게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전을 그다지 챙기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인력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게다가 이렇게 우르르 모여서 인사를 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어 귀찮은 일도 생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유재원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렇게 일일이 악수한 유재원은 최강욱 비서실장이 준비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따로 서울 사무실로 갈 건 없고, 곧장 덕진리 집으로 가는 것이다.

예전엔 통신이 미비해서 직접 보고를 받아야 할 일도 있었기에 사무실을 들렀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서재 책상에서 ID 톡이나 이메일 혹은 화상 통신을 이용해 대면 보고를 받은 것처럼 즉각 처리할 수 있었다.

중요한 일은 그런 식으로 다 처리했으니, 중요한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일을 빼면 따로 해야 할 것이 없다.

“이게 뭔가요?”

유재원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최강욱 비서실장은 웬 서류철 하나를 유재원에게 내밀었다.

“김&정 법무법인이 진행한 일본군 강제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 배상 소송 진행 기록입니다. 조만간 1심 판결이 날 것 같습니다.”

최강욱의 말에 유재원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유재원은 믿지 못할 자선 단체에 기부하느니 차라리 직접 나눔을 펼치겠다고 ID 파운데이션이라는 사회공헌 재단을 세웠고, 아버지인 유봉만을 재단 이사장으로 올려드렸다. 이후 ID 그룹의 순수익 중에 1% 정도를 재단에 납부 중이었다.

ID 파운데이션의 활동자금은 그게 전부다. 하지만 ID 그룹이 내는 돈이 워낙 커서 따로 기부금을 모집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기부금만으로 활동해야 하는 다른 자선 단체와 달리 매년 엄청난 자금이 들어오는 터라, 운영 방식도 화끈했다. 일반적인 재단을 예로 든다면, 재단 자산은 은행에 장기 예치하고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바탕으로 활동한다.

영속적인 자선이나 장학 활동을 위해서 만들어진 설계였다. 반면 ID 파운데이션은 활동자금을 그해 다 소모하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ID 파운데이션은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ID 그룹이 영업 활동을 하는 모든 나라를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다.

미국 LA 지역에서 피부색과 관계없이 장학금을 주는 것은 이미 유명한 활동이었고, 아프리카에 식량 공급과 현대적 우물을 파주는 것도 매스컴에 오르내렸던 활동이었다.

한국의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소리만 요란하지 실제 체감은 못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ID 파운데이션과 접점이 있던 사람에겐 그 어떤 자선 단체보다 호응도가 좋았다.

바로 김&정 법무법인의 무료 법률 서비스를 받은 사람들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돈이 없어서 변호사 사무실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김&정 법무법인의 무료 법률 서비스는 제법 큰 반향이 있었다.

밀린 임금 떼어먹던 사업체 사장에게 형사, 민사를 걸어서 떼인 돈을 받아주는 건 물론, 악덕 사장을 구속한 건 유명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김&정 법무법인에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결국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서 전국 주요 대도시에 파견 사무소까지 만들게 되었다.

사무소를 만들고 변호사를 대거 고용하면서 돈이 엄청나게 들었지만, ID 파운데이션이 뒤에 있었기에 예산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아직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은 없다.

이러한 김&정 법무법인이 탄생할 때부터 맡은 사건이 있으니, 지금 유재원의 손에 들린 일본군 강제위안부 피해자 배상 소송이었다.

강재징용과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아 일본의 기업과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에도 배상 소송을 걸었다. 일본은 그렇다 치고 한국 정부까지 고소한 건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보상금을 피해자들에게 분배해주지 않고, 국가가 임의로 처분한 것에 대한 고소였다.

“생각해 보니 그 일을 시작한 지 2년은 넘었네요? 그런데 이제 겨우 1심 판결이 나오는 거예요?”

일을 지시해놓고 깜빡 잊고 있던 것에 대한 자책이 있는 유재원이였다. 그렇지만 애초에 판결이 일찍 내려져서 배상 판결이든 기각이 되든 결과가 나왔다면 본인의 반응도 즉각 나왔을 거였다.

“민감한 사안이지 않습니까. 피고 측뿐만이 아니라 법원도 마찬가지였죠. 피고들은 억지로 재판을 지연시켰고, 재판부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다행히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역사 청산을 강하게 지시한 덕에 재판 속도가 빨라졌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김 대통령은 민주화 인사답게 이런 쪽에 있어서는 인정을 할 만했다. 하지만 아직 불안 요소는 많이 남아 있다. 현재 대법원장은 김덕주라는 사람인데 노 대통령 때 임명되어 임기가 9월까지였다.

이 사람의 정치성향이나 친일 여부는 미확인 상태였다 유재원이 가진 기억의 궁전 속 뉴스 라이브러리에도 그다지 많은 분량이 있진 않았다. 당연히 마스터플랜을 짤 때 고려할 만큼 중요하게 취급된 인사도 아니었다.

다만 뉴스 라이브러리에 남은 몇 개의 기사를 보면 우려할 만한 게 몇 개 보였다.

대법관 시절 전 전 대통령 처남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보석으로 석방한 전력, 79년 YH 사태 때 지금 김영삼 대통령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80년에는 국보위에 참여한 전력도 있었다.

한 마디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충성한 평범한 정치 판사라고도 볼 수 있다. 재판의 공정성의 우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다르게 보면 최악이라고 볼 것도 아니다. 힘에 순응하는 성향이니 현재 김 대통령의 의중을 따른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재판관들이 법전만 보고 공정하게 판결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런 적이 없으니 고려해야 할 게 많아졌다.

“알겠어요. 그러면 내일모레 서울에 올라올 때 김&정 법무법인도 방문해서 김창환, 정병우 변호사 두 분과도 만나 볼게요.”

“예, 미리 말해 놓겠습니다. 최근 두 분 다 무척이나 무리하고 있던 거 같은데, 회장님이 찾아주시면 꽤 큰 응원이 될 겁니다.”

최강욱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문과 최강인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들이 직접 작성한 거라 그런지, 회사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A4용지를 한가득 채우고 있는 깨알 같은 글씨를 보니 눈알이 절로 어지러워지는 것 같다.

특히나 달리는 차 안에서 보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니, 집에 가서 차근차근 검토해봐야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각오도 쉽게 이뤄지진 못했다.

덕진리 집에서 유재원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떠들썩한 잔치 준비를 끝내놨기 때문이다. 잔치의 시작은 유재원이 차에서 내릴 때부터였으니 서류 검토는 며칠은 더 걸릴 일이었다.

이틀 후.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과 회포를 거하게 푼 유재원은 다시 서울로 상경하는 중이다.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 연속 잔치를 치르면서 이곳저곳 많이 불려 다녔던 탓이다.

은사님들도 찾아뵙고, 주민이 수경이 영식이 등등의 죽마고우와도 만났다. 꼬맹이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좋은 게,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가끔 ID 톡으로 채팅을 하기도 했으니, 그냥 며칠 떨어졌다가 만난 느낌이다.

다만 영 적응이 안 되는 건 여드름이 오른 얼굴이었다. 남자 여자 예외는 없었다. 수경이도 이마에 여드름 하나가 나서 울상이었고, 주민이는 볼에 가득했다. 그러게 성장호르몬이 한창 분비될 때는 기름기 많은 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사춘기가 한창인지라 툴툴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동네 스케줄 덕에 피곤하긴 했지만, 미국에서 숨 가쁜 비즈니스를 치르며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쌓였던 스트레스는 확실히 풀렸다.

덕분에 차 안에 있는 유재원의 표정은 무척이나 좋았다.

“어서 오너라.”

표정이 좋은 건 유재원뿐만은 아니었다.

국무총리 관저 앞에서 유재원을 반갑게 맞이하는 전명헌의 얼굴도 신수가 훤했다.

한국에 들어온 유재원의 외부 스케줄에서 첫 번째 미팅이 전명헌이 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환대 고마워요. 건강하신 것 같아서 기쁘네요.”

“흐흐, 다 네 덕이란다.”

전명헌이 말하는 유재원 덕이란 총리 타이틀이었다.

책임질 일은 그다지 없지만, 누릴 건 무척이나 많은 총리라는 자리는 전명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본인과 잘 맞았다.

보통이라면 대통령이 욕먹기 전 방패막이를 해야 했을 텐데, 지금 김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을 뚫을 정도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군부 최악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역사 청산도 제대로 시작하니 높아진 지지율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더욱이 전명헌의 존재감도 역대의 총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국회에 50석이나 입성한 통일 국민당이 건재했고, 중요한 법안 마다 캐스팅보트를 자처하면서 막강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통일국민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전명헌이다. 김 대통령부터 전명헌을 국정 파트너로 대하고 있으니, 실세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감히 전명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전명헌은 손수 유재원을 관저 안으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다과가 미리 세팅되었기에,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서 그간 있었던 이야기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주로 전명헌이 말하는 걸 유재원이 경청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로는 말하지 못했던 중요한 사안들은 전명헌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방북 준비는 잘 되고 있단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명헌의 방북이었다.

작년에 선거 운동을 하면서 소떼 방북 아이디어를 준 적이 있는데, 전명헌 총리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새만금의 방목장에 대규모로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더구나 노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남북의 화해기류가 김 대통령으로 와서 더욱 강해졌기에, 소떼 방북이 조만간 성사될 거라는 이야기다.

전생에선 그저 성공한 사업가란 타이틀 하나였지만, 이제 대통령 특사 겸 대한민국 총리라는 직책까지 가진 전명헌이니 유재원도 나름 기대가 컸다.

전명헌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재원이 너니까 알려주는 건데, 사실 남북정상회담도 추진될 거란다.”

유재원은 이럴 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영화 매니아들이 스포일러를 그렇게나 혐오하는 지는 확실히 이해했다.

“우와! 진짜요?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건 물론, 남북의 정상이 만나기 직전 김일성이 사망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것도 잘 아는 유재원이지만, 최선을 다해 반응해주었다.

전명헌이 유재원을 위한 것처럼, 유재원도 전명헌을 위해 깜짝 놀랐다는 표정과 목소리에 정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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