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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피아 1993
-끄아아악!
메일을 클릭하자마자 유재원의 컴퓨터에서 비명을 터트렸다. 심지어 모니터 위에는 피칠갑이 된 미국식 귀신이 확 떴다.
“우왓! 깜짝이야!”
무방비 상태였던 유재원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일어섰다. 얼마나 놀랐으면 의자까지 뒤로 넘어지면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오죽 소리가 컸으면 밖에서 일을 보던 김대석까지 깜짝 놀라 유재원의 서재로 달려왔을 정도다.
“헉!”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란 유재원과 달리 김대석은 모니터 위에 나타난 혐오스러운 그림에 ‘헉’하는 반응이 전부였다. 그리곤 곧장 컴퓨터 앞으로 가서 ‘ESC’키를 눌렀다. 그러자 그림도 사라졌고, 비명도 끝나버렸다.
“괜찮으십니까?”
김대석의 물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마음에 안정을 찾고 자리에 앉은 유재원은 얼른 컴퓨터의 상태를 점검했다. 혹시나 데이터가 유실되거나 망가진 게 없는지 보는 것이다.
“휴, 무사하네요.”
다행히 삭제되거나 망가진 건 없었다.
이제 와서 보니 무심코 이메일을 연 사람을 깜짝 놀래는 악성코드가 작동한 모양이다.
혐오스런 화면만 크게 띄우고 데이터를 파괴한다거나 시스템 설정을 조작하는 건 하지 않으니 백신과 방화벽이 작동해 차단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놈이 이딴 걸 만든 거야?”
유재원은 곧장 이메일의 발신자나 IP 등의 정보가 담긴 헤더를 열어 보았다.
역시나 발신자 항목은 익명 처리가 되어 있었고, IP의 경우 뉴욕의 공공도서관이 나왔다. 대신 참조되는 이메일 주소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이걸 보니 아주 대량으로 발송한 스팸 메일이었던 모양이다.
스팸 메일은 보통 쓸데없는 광고가 주를 이루는데, 지금은 광고할 것도 없으니 이렇게 사람 놀리는 혐짤을 담았던 것 같다.
이어서 유재원은 다양한 이메일 프로그램으로 해당 이메일을 열람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혐짤이 재생이 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반반이네.”
웹브라우저에서 이메일 페이지로 가서 열었을 때는 자동재생되지 않았다. 반면 ID 톡에서 열었을 때는 다시 한번 혐짤과 비명이 터졌다. 또한, ID 톡의 라이브러리를 활용하는 서드파티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ID 톡은 이메일에 첨부된 이미지 파일을 자동으로 로딩하는 기능이 있다. 고속 인터넷 사용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러니 이미지 파일만 로딩해야 하고, 표시되는 것도 이메일용 메시지 박스 안에서만 나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미지 파일뿐만이 아니라,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미디어 파일은 죄다 자동재생이 될 수 있었다. 파일의 확장자만 이미지 파일이면 알아서 로딩이 돼버리는 것이다.
“으, ID 톡에 이런 취약점이 있을 줄은 몰랐네.”
유재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겨우 저런 저질 코드에 당했다는 게 화도 나고 부끄러웠던 탓이다.
이번에 사용된 ID 톡의 취약점은 그저 간단한 패치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유재원이나 회사의 개발자들이 먼저 알아차리기 전에 해커가 알아냈다는 점이다. 그나마 지금은 이걸 가지고 사람 놀라게 하는 악성코드 따위를 만들어서 다행이다.
“하여간 세상엔 마음이 꼬인 사람들도 많다니까.”
차라리 ID 톡 홈페이지에 제보를 먼저 했으면 제법 두둑한 보상을 받았을 텐데, 그걸 악용했다는 것 자체가 해커의 꼬인 심보를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만약 나쁜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면 금전적인 이득을 챙기려고 했을 것이고, 분명 사용자 중 몇은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다.
“이제는 스팸 메일과 악성코드도 경계해야 할 때가 된 모양이야.”
조금 진정된 유재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문제는 인터넷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 곧 생겨날 일이었다. 마음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지금 좀 놀래고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된 것이 훨씬 나았다.
유재원은 곧장 자신에게 악성코드가 담긴 이메일을 레드먼드의 ID 톡 개발팀에게 보냈다. 최고의 개발진을 모아놓은 레드먼드인 만큼 분석과 함께 취약점 패치도 곧장 만들어줄 것이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이제껏 잘 맞았던 예감이 크게 빗나갔다는 점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유재원에겐 그렇게 잘 맞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CIA가 언제 성의를 보여줄까 생각했을 때, 마침 이메일이 날아왔다. 그러니 CIA의 이야기가 담긴 줄 알고 바로 열어봤는데 이 봉변을 당했다.
“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유재원은 CIA 건은 기대를 접었다.
어차피 이번 개인정보 이슈는 본인과 ID 테크놀로지가 뚫고 나가야 할 난관이었다. 준비도 철저히 하고 있으니, 계획대로 잘 수행만 하면 된다.
-가트너 그룹,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보안성 유닉스보다 높다.
-시만텍 시큐리티, 개인용 운영체제 중 안드로이드 개인정보 보호 기능 최상.
-ID 그룹, 제2회 시큐리티 챌린지 준비 중!
-총상금 1천만 달러 규모의 대회, 도전 대상은 안드로이드 2.0!
“이게 무슨 일이죠?”
악성코드로 눈을 버린 다음 날, 유재원은 김대석이 스크랩해준 아침 기사를 보며 되물었다.
웬일로 신문에서 ID 그룹에 우호적인 기사들이 많았다. 특히 가트너와 시만텍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기사였다.
가트너 그룹은 정보 기술 연구 및 자문 회사였고, 미국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이곳에서 나온 보고서는 연방 정부도 중요하게 참고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시만텍은 80년대부터 생겨난 전통의 보안 전문회사로 피터 노턴이라는 전설적 프로그래머가 만든 유틸리티를 넘겨받아 성장한 회사였다.
한국에 V6가 있다면 미국에는 노턴 시큐리티가 있다. 여기서도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보안성을 검증해줬다는 기사가 뜨는 건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보안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본인들이 파는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더 잘 나갈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개인정보 보호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자세히 보면 결이 다르긴 하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 공중파 뉴스의 논조도 조금 달라졌다.
개인정보 보호를 단지 기업의 양심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니 국회가 나서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늘어나는 중이다.
“이게 맥마흔 부장이 말한 성의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다 싶었던 탓이다. 하지만 CIA의 성의에 기대지 않기로 했기에 유재원은 스크랩을 접고 곧 업무를 시작했다.
보통은 서재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는 게 업무의 시작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쩜, 피부가 너무 좋아요. 여드름이 하나도 없네.”
“체형은 또 어떻고요. 체형이 좋으니 뭘 입어도 태가 나네요. 매일 운동하시죠?”
양쪽에서 떠드는 소리에 유재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여러 벌을 가져온 스타일리스트와 3단짜리 거대 공구함 같은 걸 가져온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가 떠드는 소리였다.
오랜만에 출장이 잡혀 멋을 내기 위해 부른 분들로 능력은 업계 최고지만 귀가 좀 어지러운 게 문제였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키도 많이 크신 거 같은데, 맞죠?”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 유재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단부터 운동까지 부단한 노력 끝에 유재원의 최근 키는 178cm에 이르렀다. 전생보다 10cm는 더 자랐으니, 자부심을 품어도 될 것이다. 여기에 운동도 열심히 해서 가슴도 떡 벌어졌고 팔이나 다리에 근육도 제법 잡혔다.
덕분에 클래식한 정장부터 하이패션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어도 그럴듯한 모양이 잡혔다. 반면 피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쓴 적은 없는데, 아직 트러블로 고생한 적은 없다.
심지어 유재원의 나이대에 제일 많이 겪는 여드름도 아직 올라오지 못했다. 덕분에 부모님이나 지인들은 2차 성장이 늦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건 아니었다.
코밑이나 턱에 검은 수염이 하나둘씩 나기 시작했고, 혈기가 불끈하고 솟을 때도 있으니 육체적으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렇게 패션 전문가들의 손길을 1시간 정도 받고 나니 유재원은 완전히 달라졌다.
평소 집에 있던 모양만 보면 완벽한 건어물남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10대 후반의 나이에 초거대 기업을 물려받은 유일한 후계자 같은 모습이었다.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네요.”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전문가 역시 자신의 솜씨로 재탄생한 유재원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무리 전문가의 솜씨가 좋아도 스타일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유재원은 조금만 만져도 확 달라지니 정성을 들일 맛이 났다.
“얼마든지 찍으세요.”
팬서비스가 훌륭한 유재원은 얼마든지 찍게 했다. 그러자 진짜로 각자의 가방 속에서 사진기가 나왔다. 둘은 유재원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안타까운 점은 그 사진기들이 필름 카메라인지라 잘 찍혔는지 제 자리에서 확인은 해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천만에요. 언제든 불러주세요!”
전문가들을 배웅한 유재원은 곧장 출장 스케줄을 시작했다.
오늘은 할 일이 참 많은 날이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남쪽 코요테 시티.
주변은 밀 농경지가 대부분이었고, 최근에 열린 골프장이 유명했다. 그나마 실리콘밸리 근처 도시라는 걸 상시시켜주는 IBM의 리서치 센터가 덩그러니 있던 코요테 시티는 최근 그 이름이 급부상했다.
ID 테크놀로지의 데이터센터가 그 주인공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데이터센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이름이 알려주는 뜻으로 컴퓨터 데이터를 저장하는 곳인가 보다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데이터센터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유나바머 검거에 결정적 기여를 한 빅데이터 검색기 덕이었다.
클라우드 시스템이나 지능형 데이터 검색이란 이슈가 실리콘벨리에 큰 붐이 일어났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런 코요테 시티가 오늘 다시 한 번 떠들썩해졌다.
-대륙횡단정보고속도로 서부 출발점 기공식
행사장에 크게 걸린 플랜카드가 오늘 행사의 주제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말 그대로 오늘 드디어 미국대륙을 횡단하는 광케이블 공사의 기공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서부의 출발점은 코요테 시티 데이터센터였고, 동부의 출발점은 맨해튼의 ID 플래그쉽 스토어였다.
동서로 코요테 시티부터 맨해튼의 ID 플레그쉽 스토어를 잇고 동시에 남북으로 뻗어가는 지류 노선도 있다. 시애틀과 LA를 잇는 노드, 시카고와 휴스턴을 잇는 노드 마지막으로 보스턴과 마이애미를 잇는 노드가 있다.
마치 왕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듯한 모양새인데, 이러한 기간망을 타고 모세혈관처럼 세부적인 인터넷 라인들이 뻗어나가면서 미국 전역을 커버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설치되는 광케이블도 상당히 두껍다.
다우코닝에 특별 주문한 케이블인데 수백다발의 광케이블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케이블 가장 안쪽에 광케이블 다발이 있고, 이를 섬유와 알루미늄 피복으로 1차로 감싼 다음 질기고 튼튼한 합성피복을 다시 한 번 감싼 형태다.
현재 기술로 초당 100기가비트를 전송할 수 있는 용량이었고, 광케이블과 광케이블을 연결하는 전송장비를 업그레이드한다면 기가 단위를 넘어서 수백 테라비트까지 감당이 가능한 스펙이었다.
덕분에 넥스트컴캐스트의 헨리 사장은 너무 오버스펙 제품을 주문한 거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다. 하지만 유재원은 이번에 돈이 좀 들더라도 무리해서 최고의 스펙을 주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싸니까.
93년은 모든 게 저렴한 시대였다. 인건비도 싸고, 땅값이나 임대료도 싸다. 심지어 제품 가격도 저렴하다. 이런 상황에서 몇 년만 지나면 인플레이션이 와서 단위 자체를 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특히 IT 버블이 터진 다음엔 답이 없으니 일찌감치 시작하는 게 남는 장사다. 그러니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면 케이블의 성능을 최대한 높이는 게 좋다.
기간망 케이블은 한 번 설치하면 거의 뜯어내는 일 없이 끝까지 사용하기에, 유재원은 100년 후의 미래까지 보고 최고 스펙을 골랐다.
심지어 케이블을 설치하는 작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게 했다.
코요테 시티의 데이터센터로부터 시작되는 공사도 마찬가지다. 북쪽으로는 시애틀, 남쪽으로는 LA, 동쪽 맨해튼까지, 3갈래 방향으로 동시에 매설 작업이 시작된다.
맨해튼의 ID 플래그쉽 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래 유재원은 동부 지역을 담당할 데이터센터를 뉴욕 외곽에 지을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은 예정일 뿐이고, 현재 동부 지역을 담당하는 서버는 맨해튼 플래그쉽 센터에 있다.
원래 플래그쉽 센터는 ID 테크놀로지의 소프트웨어와 TG의 컴퓨터를 파는 소매점이었다. 여기에 고객 관리를 위해 전용 서버를 들여 놓았고, 서버의 용량이 점차 커나가면서 지금은 동부에서 가장 큰 용량을 자랑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데이터센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무척이나 쓸만한 성능이니 일단 맨해튼을 동부의 시작점으로 잡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부에도 작업 시작점이 계획되어 있다. 콜로라도 덴버인데, 여기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케이블 매설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하진 못한다.
케이블부터 매설 장비나 행정적인 처리 절차까지 미비된 것이 많아서 지금은 당장 코요테 시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코닝 사가 공장을 최대한 가동 중에 있고, 다른 주 정부에서도 속속 허가가 나고 있으니 적어도 가을이 되기 전에 동시다발적인 착공을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행사장은 화려하게 꾸며졌다.
기공식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삽뜨기 행사는 물론이고, 행사장 한쪽엔 커다란 멀티비전이 설치되어 참석자들이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했고, 한켠에는 뉴 에그 2 PC들도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유재원이 도착했을 때는 행사가 시작되기 1시간 전이었다. ID 테크놀로지 주관 행사였으니 호스트 역할을 위해서 일찍 움직인 것이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레밍턴의 경우는 며칠 전부터 이곳으로 출근하면서 행사를 준비했다.
정보고속도로 기공식이라고 행사의 이름은 거창해도, 본질은 케이블 매설 공사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니 레밍턴까지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몇몇 방송국과 여론전을 치르는 ID 그룹과 유재원은 이번 행사를 반격의 신호탄으로 삼을 계획으로 사장과 회장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덕분에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손님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네트워크나 방송장비를 만드는 회사들의 사장들이 다 모였고, 샌프란시스코의 정치인들도 대거 모여들었다.
“오랜만이야.”
“어서오세요, 앨 고어 부통령님.”
여기에 유재원과 깊은 인연이 있는 앨 고어 부통령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정보고속도로의 필요성에 대해 대선때부터 설파하고 다녔던 앨 고어가 실제 첫 삽을 뜨는 행사에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불과 5일 전에 전달되어 매우 빠듯했지만, 앨 고어는 원래의 스케줄을 조금 일찍처리하고 기꺼이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날아와 주었다.
유재원과 앨 고어가 악수할 때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이번 행사를 취해하러 나온 매스컴도 상당했기에 한동안 손을 맞잡고 미소를 띄고 있어줘야 했다.
그렇게 VIP들을 모두 맞이한 유재원은 곧 행사의 시작을 선언했다.
시작은 멀티비전이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짧은 영상이 재생되었다. 내용은 정보고속도로가 일상을 어떻게 바꿀지 확실한 예로서 보여주었다. 미국에서 유럽이나 아시아로 고화질의 영상과 대량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주고 받는다거나, 도시의 교통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내비게이션에 적용하는 등, 빨라진 통신망을 통해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는 예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담았다.
준비된 뉴에그2 컴퓨터로는 아예 직접 브로드밴드 인터넷의 시연 해볼 수 있었다.
이름하여 넥스트컴 2.0!
현재 서비스 중인 넥스트컴 포털은 텍스트 위주였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접속속도가 느리니 어쩔 수 없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 인터넷의 속도 제약을 떨쳐버리고 이미지와 동영상 등으로 비주얼의 극한까지 끌어 올린 것이 바로 넥스트컴 2.0이다.
포털 페이지에서 뉴스를 클릭하면 사진은 기본으로 뜬다. 93년 기준으로 고화질인 SD 수준의 영상이 뜨는 것까지 있었다.
서비스를 체험해보는 업계 사람들은 그저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진이나 동영상이 첨부된 기사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디스켓 수십장 분량의 소프트웨어를 클릭 한 번에 다운로드 받아서 컴퓨터에 설치하는 모습이나,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 받는 모습도 나왔다.
이러한 일이 이게 가능한 건 여기 있는 뉴에그2 컴퓨터는 죄다 광케이블로 데이터센터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전송속도 걱정은 필요 없다. 컴퓨터의 성능이 받쳐주는 한 무제한적인 비주얼 쇼크를 선보이는 것이 가능했다.
기공식의 필수 요소인 삽질 행사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뜨는 건 한 삽의 모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이룩할 정보문명의 근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너무도 오글거리지만 비서실에서 열심히 준비한 선언문을 유재원이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VIP들이 한 삽씩 떠서 뿌렸다.
타이밍에 맞춰 폭죽도 터졌고, 굴착기가 미리 파놓은 라인을 따라 케이블 매설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현장 행사는 모두 끝이고, 이후 식순은 산호세로 이동해 만찬을 즐기는 것이었다.
“고맙네. 유 회장 덕에 정보고속도로 사업이 순조롭게 시작될 수 있겠어.”
이동을 시작하기 전 앨 고어는 유재원에게 다가와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정부가 돈을 들여 건설해야 할 기간망인데, 유재원 덕에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생색을 다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별 말씀을요. 다 제 사업을 위해서 하는 건데요.”
당연히 유재원도 자선사업을 위해서 하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사용자들은 물론 기업이나 정부에도 꼬박꼬박 사용료를 받을 것이다. 참고로 유재원이 생각한 요금제는 일반 사용자에겐 정액제를, 영리를 위한 기업 등에는 종량제였다.
단적으로 전생에 크게 흥행했던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는 한 때 인터넷 사용량 점유율이 30%에 이를 만큼 압박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런데도 통신업체들은 미리 계약했던 요금 이상을 받지 못했다.
유재원은 기업에 한해서는 철저히 사용량을 계산해서 1원까지 받아낼 것이다. 넷플릭스가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분들은 누구신가?”
앨 고어의 물음은 유재원을 한 걸음 뒤에서 찍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어깨에 커다란 ENG카메라를 걸치고 있는 카메라맨 한 명, 카메라맨 바로 곁에 붙어서 여러 지시를 내리는 PD와 작가 이렇게 총 3명이 있었다.
“아, KBS라고 한국의 방송국에서 나오신 취재진이에요.”
아침부터 유재원을 스타일리스트 앞에 서게 만든 원인은 지금 끝난 기공식이었지만, KBS도 약간의 지분은 있다. 이들이 만든 프로그램은 분명 엑스포 영상 자료로 남게 될 테니, 기왕이면 최대한 세련된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기에 귀찮음을 감수했던 것이다.
“대전 엑스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오셨죠.”
“엑스포?”
유재원의 말에 앨 고어가 관심을 보였다.
“네, 우리 ID 그룹도 대전 엑스포에 정보 통신을 주제로 초대형 전시관을 열었거든요. 8월 7일 개장이에요. 혹시 관심있으시면 VIP로 초대해드릴까요?”
“그래도 되겠나? 실례가 아닌가.”
“앨 고어 부통령이 와주시면 제가 더 영광이죠.”
그나마 영어 듣기가 되어 유재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PD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의 부통령이 이렇게도 쉽게 초대되는 존재였나 싶었기 때문이다.
“고맙네. 그런데 나 혼자 초대되면 빌도 아쉬워 하지 않을까? 빌도 정보통신에 대해 관심이 매우 지대하니 말일세.”
“그러면 클린턴 대통령도 같이 초대할게요.”
헉 하는 소리가 났다.
KBS카메라맨 근처에 있던 PD가 범인이었다.
앨 고어가 빌이라고 했을 때 설마 했는데, 유재원의 입에서 클린턴 대통령이란 말이 나오자 PD는 이젠 아예 뒤로 넘어갈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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