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41화 (241/1,007)
  • [241] New Experience =========================

    메인 스테이지에 들어선 유재원은 딱 보자마자 이번 쇼케이스가 반쯤은 성공했다는 걸 직감했다. ID 그룹의 이름으로 오랜만에 열린 행사였지만,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이란 너무도 뜨거웠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발표뿐이다. 자신과 함께 열심히 노력한 반도체 사업부의 성과를 그저 보여주기만 해도 성공이다.

    ‘후웁!’

    짧은 심호흡과 함께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한 유재원은 이내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무대는 간소함 그 자체였다. 연단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그저 중앙에 내려오는 조명 하나가 전부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마이크도 직접 들고 나서야 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존재감에 더해 메인 스테이지 중앙의 거대한 스크린과 양 끝에 더해진 보조 스크린 덕에 무대는 전혀 비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객석에 자리한 이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가 더해지니 드넓은 컨밴션 센터의 메인 행사장은 그야말로 가득 차 보였다.

    다들 유재원이 얼마나 놀라운 걸 발표할지 기대하는 표정이다. 이제 그걸 충족해줄 시간이었다.

    “HPC 엑스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작은 평범했다. 그래도 환호성은 컸다. 관객들은 마치 유재원을 록스타로 생각하는 모양인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환호성이다. 유재원이 진정하라는 뜻으로 워워 하는 제스처를 몇 번 취하고 나서야 진정이 될 정도였다.

    “여기서 HPC의 뜻이란 고성능 컴퓨터를 이야기합니다. 고성능? 그렇게 말해선 애매하죠. 높고 낮음이란 기준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유재원의 말에 메인 스테이지 스크린이 떠올랐다. 작년에 출시되었던 뉴 에그였다.

    펜티엄 66MHz CPU에 8메가바이트에 이르는 주메모리. 4메가바이트 비디오램을 가진 고성능 3D 가속카드.

    뉴 에그의 고화질 사진과 함께 스펙도 나열되었다. 스펙 역시 글자만 보여준 게 아니라 해당 부품의 이미지를 직접 띄워 주었다.

    작년에 출시된 PC였지만, 그 성능은 지금도 최상위다. 오죽하면 뉴 에그 하나면 추가 부품을 더할 수도 없었고, 현존 최고 사양 게임인 둠 2도 최고 설정으로 부드럽게 돌아간다.

    “HPC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이 최신 뉴 에그보다 100% 더 빠른 성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유재원의 설명은 그대로 메인스크린에 이미지화되었다.

    덕분에 객석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컴퓨터를 잘 아는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서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반면 ID 그룹과 유재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은 그저 환호했다.

    놀라운 건 길버트의 반응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유재원을 맹목적으로 추종했지만, 그렇다고 컴퓨터에 대한 상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전자공학과 전공이었기에, 컴퓨터의 핵심 원리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이 말하는 게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바로 인지했다.

    현실에서 뉴 에그 이상으로 성능을 내는 PC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컴퓨터에서 제일 중요한 CPU를 펜티엄 이상 올리는 것부터가 문제다. 물론 펜티엄보다 성능이 나은 CPU가 없는 건 아니다. IBM의 파워CPU라던가 SUN의 울트라스팍과 같은 서버용 CPU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비싸기도 하고, 이를 지원하는 메인보드나 운영체제를 독자적인 것을 사용해야 한다.

    메모리도 무작정 늘린다고 빨라지는 건 아니다. 메모리 용량이 필수 용량보다 작으면 프로그램이 실행조차 되지 않는다. 적정 용량만 채우면 속도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멀티테스킹을 하기엔 좋을 뿐이다.

    3D 가속카드 역시 마찬가지다. 뉴 에그에 장착된 3D 가속카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델이니 이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저는 항상 100마디의 말보다 한 번을 직접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설명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오오!

    저도 모르게 얼굴에 걱정이 서렸던 길버트였다. 하지만 직접 보여준다는 말에 역시 유재원이라고 하며 걱정을 떨쳤다.

    “준비물이 하나 있습니다.”

    유재원의 말과 함께 이번에도 레밍턴이 나타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 같은 카트를 밀면서 말이다.

    카트에 실린 건 쉘 북이었다. 유재원은 마치 마술사가 하는 것처럼 쉘 북을 들어 요리조리 보여주었다. 어뎁터도 연결되지 않은 스탠드얼론 상태의 쉘 북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메인 카메라가 크게 잡았다.

    바스트샷으로 들어와서 쉘 북이 수백 인치의 스크린에 크게 비췄다. 길버트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들어 보이는 쉘 북은 자신이 가진 것과 똑같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쉘 북의 성능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웬만한 PC보단 좋지만 그렇다고 일체형 데스크톱인 뉴 에그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유재원이 무슨 마술을 보여줄지 길버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쉘 북을 다시 카트 위에 올려놓은 유재원은 전원을 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메인 카메라가 잡았다. 쉘 북의 LCD 화면을 크롭해서 크게 띄웠기에 메인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띄워졌다.

    부팅이 시작되면서 나온 바이오스 글자 하나가 어른 손바닥 크기였으니 눈을 크게 뜰 필요는 없었다.

    어라?

    부팅 모습을 자세히 보고 있던 길버트는 바로 뭔가 다른 점을 포착했다.

    그것은 바로 메모리 체크 속도였다. 컴퓨터의 바이오스는 전원이 들어오면 컴퓨터 부품 상태를 체크한다. CPU부터 메모리, 하드 디스크까지 모두 다 점검한 후에 결과를 운영체제 부트로더에 넘겨서 부팅을 도와준다.

    그런데 카트에 올려진 쉘 북의 메모리 체크 속도가 자신이 알던 것 이상이었다. 메모리 블록을 차근차근 점검하는 터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유재원이 전원을 올린 쉘 북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다고 메모리 체크를 건너뛰게 한 것도 아니다. 분명 메모리 체크는 되었는데, 그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그래서일까?

    부팅도 길버트가 체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캘리포니아의 포도 농장을 배경화면으로 삼은 안드로이드 2.0 기본 바탕화면이 나오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후후, 빠르죠?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재원은 카트 옆에 쉘 북과 연결된 마우스를 조종했다. 처음 실행한 프로그램은 ID 오피스다. 이제는 대기업이든 작은 중소기업이든 사무작업에 표준이 된 프로그램으로 매달 수십만 장이 팔려나가는 ID 테크놀로지의 효자 상품이다.

    ID 오피스를 구성하고 있는 4개의 프로그램 중에 유재원이 실행한 것은 스프레드시트였다. 프로그램도 즉각 실행되었고, 유재원은 곧장 하나의 IDS 파일을 불러왔다.

    “무작위로 생성된 16자리 난수 1만 개가 저장된 파일입니다. 이 파일로 그럼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 바로 정렬이죠. IDS를 사용하면서 오름차순이든 내림차순이든 정렬하기 기능을 사용하신 분 많으시죠? 일반 상황에서 정렬하기 기능을 쓴다고 컴퓨터가 버벅거리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정렬해야 할 항목이 수백 개 수준을 넘어 수천 개, 1만 개에 이르렀을 경우를 겪어보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그러면서 화면에는 새로운 영상이 나타났다.

    어디 제조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펜티엄 마크가 선명한 PC가 띄워져 있었다. 그리곤 조금 전 유재원이 로딩한 IDS 파일을 열어서 정렬하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마우스 커서가 명령을 실행 중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의 시계 모양으로 바뀌었고, 그르륵 거리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정렬하기 알고리즘은 새로운 ID 오피스를 낼 때마다 계속 갱신 중입니다. 1.0부터 최신판인 3.0까지 버전업이 될 때마다 10에서 20%의 향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알고리즘을 만들어도 컴퓨터의 성능에 한계가 있어서, 절대적인 시간은 오래 걸리는 법이죠.”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에 띄워진 영상에 X3이란 커다란 글자가 띄워졌고, 그만큼 빠르게 재생되었다.

    덕분에 1만 개의 난수 정렬은 빠르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쪽 구석에 표시된 시계를 보니 1분이 넘게 걸렸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자, 그러면 이제 마술을 볼 시간입니다.”

    유재원은 똑같은 작업을 쉘 북에서 수행했다.

    정렬하기 버튼을 누르자 마우스 커서가 아날로그 시계로 바뀌면서 초침이 빠르게 돌았다. 째깍거리는 효과음까지 넣어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심지어 디지털 초시계도 띄워 놓고 시간을 쟀다. 그렇게 10초가 지나고, 거기서 몇 초가 더 지났을까.

    아날로그 시계로 변했던 커서가 원래로 돌아옴과 동시에 ID 스프레드시트의 화면도 바뀌었다.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던 난수 1만 개가 오름차순으로 말끔하게 정리된 것이다.

    작업에 걸린 시간은 총 17초.

    1분이 넘게 걸렸던 PC와 비교해서 3배 이상 빨라진 속도를 자랑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HPC라는 마크를 달 수 있죠.”

    유재원은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행사장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상식적으로 3배에 이르는 성능 차이를 발휘한 건 엄청난 일이었다.

    컴퓨터 업계에서는 보통 30% 수준의 향상이면 아예 다음 세대 제품이라고 광고한다. 이 정도 향상이 있으면 기존에 사용하던 부품을 떼고 새 제품을 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다.

    객석의 사람들은 유재원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유재원도 역시나 궁금증과 긴장감을 길게 끄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게 가능한 건 바로 이 쉘 북에는 초고속 캐시 메모리와 초고속 메모리가 탑재되었기 때문입니다.”

    설명이 이어지자 메인 스크린에 두 종류의 메모리칩이 떠올랐다. 미래 전자 마크가 선명한 제품으로 하나는 S램, 다른 하나는 D램이다.

    사실 정렬하기 기능은 CPU보다는 메모리 대역폭과 캐시 메모리의 성능에 크게 좌우되는 기능이었다. 카트에 올려진 쉘 북에 바로 이 차세대 메모리들이 장착되었고, 덕분에 기존 PC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성능을 냈다.

    이어서 유재원은 ID 오피스를 이용해 메모리 대역폭을 많이 사용하는 기술 위주로 빨라진 성능을 보여주었다. CPU까지 개선했으면 어떤 작업이든 빨라졌겠지만, CPU는 반도체 사업부의 조그만 실험실에서 다뤄 볼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제일 궁금해하실 HPC 클래스 인증을 받은 3D 가속카드에 대한 데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길버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쉘 북으로 3D 가속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기술의 발전이 그 정도로 일어난 건 아니었다. 노트북 메인보드 크기인 3D 가속카드였기에 노트북에 장착하기엔 불가능했다. 전기도 엄청나게 소모한다는 것도 문제다.

    덕분에 이번에도 레밍턴이 카트를 끌고 새로운 PC를 가져왔다.

    카트 위에 올려진 PC를 보고 객석에서 커다란 탄성과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나타난 PC는 뉴 에그가 아니었다.

    “뉴 에그 2입니다.”

    뉴 에그가 나온 지도 이제 꽤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뉴 에그에 적용된 폴리카보네이트의 색을 바꿔 가면서, 혹은 크롬과 같은 소재를 쓰면서 새바람을 넣긴 했지만, 슬슬 새로운 제품을 낼 때가 되었다.

    당연히 TG와 ID 그룹은 이번에도 긴밀한 협력을 통해 새로운 PC를 만들었다.

    이러한 협동 작업은 예전과 약간 달라진 게 있다. 바로 ID 그룹과 TG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TG 모바일을 통해 정식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유재원이 디자인을 주고, TG의 개발팀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만들었다. 모두 유재원의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UFO PC는 모두 TG 모바일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작업도 공문을 주고받으면서 이뤄졌다.

    덕분에 순발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법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말끔히 해결되어 완벽한 합작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카트에 올려진 뉴 에그 2는 기존의 뉴 에그와 확 달라졌다.

    브라운관 모니터 중에서 가장 좋은 화질을 자랑하는 소니의 트리니트론 14인치 모니터가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모니터 위쪽과 본체 사이를 아치형 알루미늄 합금 프레임이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사용된 아치형 알루미늄 합금 프레임은 유재원이 신 일본투자은행을 통해 인수한 특수금속을 전문으로 하는 공작소가 만든 작품으로 속이 비어서 가볍지만, 일반 모니터보다 무거운 트리니트론 모니터를 지탱할 만큼 내구성이 좋았다.

    허공에 띄워진 덕에 모니터의 방향도 좌우상하로 편하게 바꿀 수도 있다. 일체형 컴퓨터의 단점이 모니터 방향 조절이었는데,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에그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은 폴리카보네이트도 소재도 당연히 계승되어서,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워워, 진정하세요. 진짜 놀랄 일은 바로 지금부터니까요.”

    보기에 좋은 떡으로만 끝나면 아무 의미 없다. 최고가 되려면 보기에도 좋을 뿐만이 아니라 맛도 있어야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유재원은 당당히 뉴 에그 2 바탕화면에 뜬 둠 2의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더블 킬!

    -트리플 킬!

    호쾌한 효과음이 연이어 터졌다.

    더블 킬을 올린 상태에서 한 명을 더 죽이니 트리플 킬이 떴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 2:1로 공격을 주고받느라 HP가 뚝 떨어진 유재원을 우습게 보고 들어온 두 명을 또다시 스타팅 포인트로 돌려보내면서 펜타킬이 떴다.

    헤드 샷을 정확히 때려 주는 에이밍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와 함께 메인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그래픽의 향연에 객석의 사람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뉴 에그 2에는 HPC를 위한 기술이 총집결되었다.

    초고속 캐시 메모리와 초고속 메모리, 여기에 새로운 공정으로 만든 3D 가속카드까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뉴 에그2에 장착된 3D 가속카드는 GPU뿐만이 아니라 비디오 메모리도 미래 전자의 차세대 메모리가 장착된 물건이었다.

    CPU가 일반 펜티엄 66MHz 모델이라는 게 흠이었지만, 게임은 원래 3D 가속카드의 성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덕분에 원래 존 카멕이 만들고 싶어 했다가 기술의 한계로 넣지 못한 요소들을 마음껏 넣을 수 있었다.

    싱글 플레이는 더욱 화려해졌다. 폴리곤의 숫자도 늘어났고, 세밀한 텍스처를 통해 질감을 향상했고, 원래 없었던 오브젝트도 늘어났다. 비록 합판 스타일이긴 해도 나무나 잔디가 심어졌고, 터지고 깨지는 효과도 생겼다. 게다가 사운드도 향상되어서 여러 가지 효과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호쾌한 타격감을 더했다.

    멀티플레이는 최대 10명에서 16명까지 늘어났고, 플레이어가 늘어난 만큼 게임도 훨씬 더 격렬해졌다. 그러면서도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오히려 그래픽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수에게 좋은 장비를 주면 금상첨화라는 걸 유재원이 직접 보여주었다.

    본인이 한 번 죽을 때 최소 4명 이상을 죽였다. 킬 데스 비율이 무려 4.6으로 나왔으니 리스폰 시간이 짧은 FPS에서는 엄청난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형 스크린 위에는 패배라는 글자가 떴다.

    유재원이 적을 대량 학살할 때, 팀원들은 유재원이 죽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죽어 나갔던 탓이다.

    “역시 게임은 쉽지 않네요.”

    유재원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게임을 종료했다.

    애초에 제대로 게임을 했다면 등급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매칭되는 빠른 게임이 아니라, 랭킹 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단지 HPC 클래스 3D 가속카드의 실제 성능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빠른 매칭을 잡았던 것뿐이다.

    “HPC 클래스는 단순한 페이퍼 플랜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제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품을 만들 수 있는 건 바로 코퍼마인으로 명명한 ‘반도체의 구리 배선 공정’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코퍼마인 기술로 만들어진 D램의 웨이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재원 손바닥 크기의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였다.

    21세기 초만 되어도 지름이 30cm 정도 나가는 웨이퍼를 사용했다. 웨이퍼의 면적이 곧 생산성과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웨이퍼의 크기가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반면 93년인 지금은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유재원의 손이 클로즈업되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변하는 웨이퍼는 IT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하게 만들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구리 공정이 적용되었다고 해서 그냥 눈으로 보기에 뭔가 달라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후후, 이렇게 봐서는 모르시겠죠? 그래서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전문가의 영역이니 저보다 훨씬 더 반도체 공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모시겠습니다. 이번 코퍼마인 프로젝트를 총괄해 지휘한 리사 슈 박사님입니다! 열화와 같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이 참 착했다.

    리사 슈의 명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낯설 텐데도 사람들은 우렁찬 박수를 치면서 무대 위로 걸어오는 리사 슈 박사를 환영했다.

    리사 슈는 베이지색으로 된 여름용 투피스 정장에 화장도 해서 평소와는 확 달랐다. 전문가적인 모습이 확실히 풍겼다. 그렇지만 표정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 선 적은 없던 터라 잔뜩 긴장한 것이다.

    그럴 줄 알고 유재원은 완전히 무대 밖으로 빠지지 않았다. 리사 슈의 보조 역할로 그녀의 옆에서 끝까지 도왔다.

    리사 슈는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유재원도 옆에서 도우니 곧 목소리의 떨림은 사라졌고, 나 전문가라는 포스를 온몸으로 내뿜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