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35화 (235/1,007)

[235] New Experience =========================

너무 당황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경험치의 양이 남다른 유재원이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몇 초간 말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 피지컬이 남다른 피셔가 무거운 전기 자전거를 끌고 순식간에 유재원에게 다가왔고, 금발의 미녀는 아예 자전거를 옆에 세워놓고 유재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헉.”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긴 금발을 보고 도둑이 여자라는 예상은 했는데, 앞모습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인지라 나이를 가늠하는 게 정확하진 않았는데, 적어도 19, 20살은 되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죄송해요. 내 자전거랑 완전히 똑같아서 착각했어요.”

다행히 유재원의 얼었던 입도 약간의 시간이 돌아오자 풀렸다. 게다가 금발의 미녀도 완전히 몸을 돌려 유재원을 보고는 살짝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어? 빅보스잖아! 언제 학교에 온 거니?”

그러더니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빅보스라니? 분명 자신의 얼굴을 보고 빅보스라 했으니,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빅보스라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 나는 티파니라고 해. 컴퓨터공학 2학년이야.”

티파니는 무척이나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모양인지, 제 소개를 먼저 하면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유재원, 전기공학부 1학년입니다.”

유재원도 티파니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호호, 그거 말고 더 수식할 말이 있지 않아? ID 그룹 회장이라던가, 아니면 푸앵카레 정리의 증명자 같은 거!”

티파니는 유재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재원이 따로 소개하지 않았던 ID 그룹 회장이나 푸앵카레 정리까지 언급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더 풀렸다.

“헤헤, 그건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니기 부끄럽잖아요.”

“나 같으면 매일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부끄럽다니.”

유재원과 티파니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피셔가 조용히 다가와서 자전거를 옆에다 주차했다. 그리곤 다시 뒤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원래 학교에서 유재원의 경호 방식은 자동차를 탄 후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방식이라서, 차를 가지러 가는 것이었다.

“도둑이라 부른 거 사과할게요.”

“괜찮아.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걸.”

다행히도 티파니는 유재원의 사과를 호쾌하게 받아주었다. 빈말이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딱 보면 공주님 같은 모습에 성격도 호리호리할 것 같았는데, 화통하기가 부산 사나이 이상이다.

“그 자전거는 언제 사신 거예요. 제거랑 완전 똑같아서 착각했어요.”

“아, 이거 아빠가 사신 거야. 자전거 마니아시거든. 그런데 사 놓기만 하고 안 타시니까 내가 타기 시작했지. 엄청나게 편하더라. 그래서 저번 주부터는 내가 매일 타고 다니고 있지.”

티파니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10만 달러짜리 전기 자전거를 학생 신분이 사기엔 무리다. 하지만 어른이 사기에도 만만찮은 가격이라는 건 틀림 없다. 10만 달러에 전기 자전거를 사느니 차라리 벤츠를 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는 건 라이트닝 볼트 사를 소유한 유재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다고 효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델1이 초기작이긴 해도 유재원의 지식이 전해지면서 완성도는 상당히 높았다. 배터리도 리튬에 대용량이라서 한 번 충전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달릴 수 있다. 게다가 LED 램프로 배터리 잔량도 보여주니 충전 타이밍을 잡기도 쉬웠다.

“덕분에 해프닝이 많았어. 네 자전거를 훔쳤다는 소리부터 너랑 애인 사이라고 선물로 받았다는 말까지.”

티파니가 도둑 소리를 듣고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가 드러났다.

“그냥 아버지가 네 팬이라서 네가 타고 다니는 거랑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것뿐인데, 네걸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그런데 너도 착각했으니 말 다했네.”

어쩐지.

모델1이라고 다 똑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카본 프레임과 모터는 같아도 디테일은 저마다 다르게 만들 수 있는데, 티파니의 자전거는 그 사소한 디테일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착각을 일으켰다. 마이클 볼튼 사장의 장인 정신이 엉뚱한 곳에서 해프닝을 일으킨 것이다.

“아버님이 제 팬이시라고요? 사인해드려요?”

“오! 진짜?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티파니는 반색하며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빅보스가 무슨 말이에요?”

유재원은 티파니가 팬과 종이를 찾는 동안 질문을 하나 더 날렸다. 자길 보고 빅보스라고 했던 이유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하하! 그거? 재원이 네가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잖아. 그런데 경호원이 너를 뭐라고 부르지?”

“보스?”

“꼬맹이가 보스라고 불리니 얼마나 재미있니. 더 재미있으라고 반어법으로 ‘빅’을 붙인 거지. 그래서 빅보스!”

그러면서 티파니는 뭐가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었다.

하여튼, 레밍턴이 장난으로 부를 때 바로 잡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몇 년을 그렇게 부른 호칭을 바로 잡기도 어려웠다. 어차피 남들이 뭐라 하는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유재원이니, 괘념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 티파니는 가방에서 깨끗한 A4용지와 만년필을 꺼냈다. 만년필? 학생이 웬 만년필일까? 게다가 만년필 브랜드도 몽블랑이란 고가의 제품이었다.

만년필을 받아서 크게 사인을 날린 유재원은 날짜도 세심하게 써넣었다.

“아버지 성함이?”

마지막으로 사인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넣어주려는데, 티파니는 고개를 저었다.

“헤헤, 그냥 티파니 아빠께라고 해줘.”

흠, 아버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한 유재원은 더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맨 윗줄에 그녀의 요구에 따라 ‘To Tiffany's father’라고 멋들어진 필기체로 써넣었다.

“내 것도 해줄래?”

티파니는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그럼요.”

이미 만년필도 들었는데, 못 해줄 것도 없다.

“이걸로 제 사과는 완료된 거죠?”

“그럼! 고마워. 아빠 덕에 빅보스랑 이야기도 하고, 사인도 받았네. 시험은 망쳤지만, 운수 대통한 날이었어.”

티파니는 유쾌했고, 꼼꼼했다. 만년필 잉크가 마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종이를 구겨지지 않도록 파일에 넣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유재원이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걸 빼먹은 듯한 느낌이다.

연락처!

바로 그거다.

“아! 혹시 자전거 타다가 문제가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재원은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티파니에게 전해줬다. 그러면서 이게 뭐냐는 듯 보는 티파니를 향해 부연설명도 이었다.

“이 자전거를 만든 라이트닝 볼트도 제 회사거든요. 사후 관리는 철저하게 해드릴게요.”

“진짜? 후아, 대단하네. OS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언제 자전거까지 만들 게 된 거야?”

“좀 됐죠.”

티파니는 유재원의 명함을 받았다. 그러더니 자기도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더니 유재원에게 줬다.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다시 가방을 멘 티파니는 전기 자전거에 올랐고, 유재원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자리를 떴다.

유재원은 티파니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약간의 해프닝이긴 해도 스탠퍼드에 입학한 이후 이성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전화번호까지 교환하는 쾌거를 이뤘다.

기억의 궁전에 빈방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오늘의 상황은 기꺼이 저장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안전하게 저장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전거를 탔다.

다음 날.

유재원은 오랜만에 실리콘밸리의 ID 테크놀로지 본사를 찾았다.

본사를 얼마 만에 찾는지는 이제 기억을 더듬어 봐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덕분에 사무실의 분위기에서 낯섦이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엔 막 시작한 신생 기업답게 정돈되지 않았던 모습이 역력했다. 오죽하면 유재원의 책상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젠 확실히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났다. 팀별로 파티션이 나뉘었고, 고급스러운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보급되면서 잘 나가는 IT 기업다운 분위기가 났다.

“보스! 드디어 보는군요!”

가장 격하게 반기는 건 역시나 레밍턴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 예전부터 그랬지만, 매우 오해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드디어 본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도 봤으면서.”

“허허, 그때는 개인적 용무였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보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죠.”

어제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 유재원은 레밍턴의 집을 찾았다.

레밍턴과 만남도 즐거웠지만, 레밍턴 주니어를 보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래서 집 방문 기념으로 준비한 선물도 아기용품이 전부였다.

레밍턴 주니어는 유재원에게 다양한 의미를 주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였기에 낯설기도 했지만, 그만큼 회귀하기를 잘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보니 또 감회가 새롭습니다.”

사무실에는 최강욱도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밍턴이 출산휴가를 보내는 동안 ID 테크놀로지를 총괄했고, 유재원이 선거운동을 한다고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엔 ID 그룹 전체를 대리하기도 했던 최강욱이었다. 유재원과 레밍턴이 할 일을 다 대신하면서 격무에 시달린 최강욱이었다. 덕분에 무척이나 홀쭉해진 모습이었는데, 눈빛만큼은 아직도 형형히 살아 있었다.

이제는 유재원과 레밍턴도 복귀했으니, 최강욱에겐 약간의 휴가가 주어질 것이다. 인수인계가 끝나는 즉시 휴가인지라,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최강욱과 레밍턴을 시작으로 ID 테크놀로지에 새롭게 뽑힌 임원들과도 쭉 악수했다. 대부분 내부승진이어서 유재원과 안면이 있던 이들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유재원 일행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로 ID 그룹의 현황에 대한 보고, 그리고 93년도 비즈니스 전략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회의실에 프로젝터를 켜고 ID 프레젠테이션을 띄웠다.

프로젝터의 화면 밝기는 아직도 미진한 수준이었기에, 형광등을 끄고 스크린과 가까운 창문은 두꺼운 커튼을 쳐야 색이 구분될 정도였다.

레이저를 사용하는 프로젝터가 나오면 실내조명 조절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신제품이 나올 때까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 한국에서 몇 가지 변동사항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준비가 끝나고 막 시작하려는데, 최강욱이 잠깐 옆길로 빠졌다.

한국의 일이라니.

유재원은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후의 후폭풍은 막 현재 진행형이었고, 그중에 몇 가지는 유재원과도 관련이 있었기에 최강욱은 보고 사항으로 채택했다.

“전재준이 국회의원을 사퇴했습니다.”

역시나 그 트롤 녀석, 정치인은 하기 싫은 티를 그렇게 내더니 소원을 성취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어진 최강욱의 말은 유재원의 예측과는 좀 달랐다.

“그렇다고 미래 그룹에 복귀한 것도 아닙니다. 제주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정치인을 그만둔 건, 당연히 미래 그룹에 복귀하기 위한 절차로 보았다. 그런데 미래 그룹에 들어가지도 못했다니.

“질책성 경질인 것으로 보입니다. 회장님과 충돌했던 건 정치권에서 공공연히 돌던 이야기였는데, 그게 전명헌 의원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입니다.”

전명헌이 본인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유재원이었다. 그런데 본인의 자식을 쳐낼 정도라는 건 몰랐다.

의원직도 사퇴시킨다는 것도 참 대단했다.

그걸 그냥 날려버리다니. 현재 통일 국민당이 의원 한 석 아까워서 벌벌 떠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국회의원이란 그 지역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걸 그렇게 날려버렸다. 아무래도 전명헌 의원의 머릿속에는 전재준의 지역구는 본인이 언제든 내주고 거둘 수 있는 영지처럼 각인된 모양이다.

‘그게 틀린 것도 아니지.’

통일 국민당, 정확하게는 전명헌의 도장이 찍힌 공천장만 받으면 누구라도 국회의원이 되는 상황이니 말이다.

어쨌든, 전재준의 트롤짓에 고생을 좀 했던 유재원에겐 쌤통이긴 했다.

전재준 그 양반은 그냥 제주도에서 유유자적 사는 게 본인 그리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아, 월드컵이 문제려나?’

그 양반이 이룬 업적을 잠깐 돌아보던 유재원에게 2002 월드컵이 떠올랐다. 일본에 확정적이었다가 전재준 이 양반이 적극적으로 힘을 쓰면서 한국 일본의 공동 개최로 틀었다고 했다.

‘뭐, 내가 유치하면 되지.’

월드컵 같은 빅 이벤트를 놓칠 수야 없다. 전재준이 없으면 자신이 나서면 된다. 아예 준비를 먼저 시작해서 일본이랑 나눠 갖는 게 아니라, 한국 단독 개최 쪽으로 틀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ID 인베스트먼트 제3차 투자상품은 언제 오픈되는지 문의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문의하시는 분 중엔 제법 높으신 양반이 많습니다. 여야 가릴 것도 없고, 재벌들도 제법 있습니다.”

역시 돈이다.

ID 인베스트먼트의 1차, 2차 투자는 월스트리트 역사를 다시 쓸 만큼 엄청난 성과를 거둔 쾌거였다. 특히 일반인까지도 대박의 맛을 본 2차 투자는 아직도 한국에서 화제였다.

한 번 맛을 본 사람들은 대박의 꿈을 쉽게 끊을 수가 없다. 이를 노리고 한국의 투자은행들도 많은 상품을 내놓았다. 심지어 일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대기업의 이름을 대놓고 쓰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금산분리의 원칙으로 대기업들은 투자은행을 설립하는 게 어려웠지만, 한국에선 안 되는 게 없다. 편법으로 이름을 가져다 쓰면서 투자자를 모집 중이지만, 다들 시원찮은 성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투자상품은 어떤 분칠을 해도 결과 자체는 숨길 수 없다.

투자한 돈을 찾을 때가 되면 성적표는 명확히 드러난다. 기껏해야 은행 이자보다 한 톨 정도 더 많은 수익이거나 아니면 은행 이자보다 작은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원금을 까먹은 상품도 제법 나왔다.

2차 투자에서 원금의 3배 이상을 불린 ID 인베스트먼트와는 너무도 비교되는 성적표였다. 덕분에 한국의 다른 투자은행들이 아무리 광고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ID 인베스트먼트의 인지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애가 타는 건 돈을 쥐고 있는 투자자들이었다. 얼마나 조바심이 났으면 미국 맨해튼에 있는 사무실까지 찾아온 사람이 있을 정도다.

물론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맨해튼 사무실에 빈센트 그린힐이 있긴 했지만, ID 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인 투자는 유재원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흠, 슬슬 시작해야죠.”

유재원도 3차 투자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가 폭등이나 닛케이지수 대폭락과 같이 굵직한 이벤트는 당분간 없다. 대신 93년부터 98년까지 주식들은 꾸준히 상승할 테니, 인덱스 지수에만 투자해도 적잖은 수익률이 나온다.

심지어 특정 주식들은 폭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크게 상승한다. 여기에 영화와 음반 투자도 제법 쏠쏠한 상품이었다.

그렇게 5년간 버티다 보면 드디어 대폭등이 시작된다. 이른바 IT 버블의 시작이다.

IT버블은 2000년대에 절정을 찍는데 이때 찍은 고점은 무려 15년 뒤인 2015년에야 회복할 정도로 엄청난 상승을 보여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ID 인베스트먼트를 다룰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테크놀로지부터 보고를 받아 볼까요?”

ID 인베스트먼트의 일은 빈센트와 이야기하고 오늘 자리는 ID 테크놀로지의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였다.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최강욱이 나섰다.

본래 ID 테크놀로지의 사장은 레밍턴이지만, 긴 휴가로 현업에서 잠깐 손을 놓고 있던 탓에 유재원과 같은 깜깜이 상태였다. 유재원과 함께 브리핑을 듣고 나서 본격적인 인수인계를 받아 본업에 복귀해야 한다.

-둠 2, 12월 22일 발매.

-안드로이드 2.0 93년 1월 초 발매 예정.

-ID 오피스 3.0 93년 1분기 예정.

-3D 그래픽 스튜디오 1.0 93년 1분기 예정.

-프라임 컷 1.0 93년 2분기 예정.

극비인 ID 테크놀로지의 신규 소프트웨어 발표 스케줄이 스크린에 줄줄이 떠올랐다.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소프트웨어부터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발매 일이 코앞으로 온 둠 2부터 시작되었다.

게이머들의 둠 2에 대한 기대함은 이미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했던 둠의 진정한 후속작이었고, 모든 지형과 오브젝트가 풀 3D로 만들어진 최초의 게임이기도 했다.

덕분에 최소 486 이상의 PC와 3D 가속카드를 기본으로 요구하는 게임이었다.

486은 대중화된 상태였지만, 3D 가속카드는 아직 보급 중이었다. 가속카드가 없으면 실행조차 되지 않는 탓에, 판매량은 전작을 넘기는 쉽지 않다고 보았다. 게다가 게임을 제대로 즐기려면 CD롬 버전을 구매해야 하는데, CD롬은 더더욱 보급률이 낮은 장치였다.

덕분에 둠 2 발매 후 6개월까지의 판매량을 디스켓 버전으로는 150만 장, CD롬 버전으로는 30만 장 정도로 예측했다.

이번에 새로운 유통사로 선정된 된 액티비전은 진정 무리했다. ID 소프트웨어에 준 계약금과 분비 비율을 보면 디스켓 버전으로 300만 장은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는다. 미국만 팔아선 손해만 보고 전 월드와이드 매출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유재원은 걱정하지 않았다.

“3D 가속카드와 CD롬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컴퓨터의 기본 사양이 될 겁니다.”

본인의 장담대로 두 가지 부품의 대중화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둠이라는 게임도 원래는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린 후에 메가 히트작으로 등극한 게임이었다.

안드로이드 1.0의 차기작인 2.0의 개발도 순조롭다는 보고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1.0 완성 이후 유재원이 직접 소스코드를 다루는 분량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지만, 손을 완전히 뗀 건 아니었다. 지금도 발전 방향에 대해 일일이 설정하고 있었고, 안드로이드 사업부의 개발 진척 속도나 최적화 상태가 시원찮으면 유재원 본인이 직접 수정했다.

이번 베타 버전도 선거운동을 할 때 사용한 컴퓨터에 설치해놓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개발을 총지휘했다.

2.0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인터넷과 파일 시스템이다.

더욱 쾌적하고 적극적인 인터넷 환경을 위한 각종 플러그인을 적극적으로 포함했고, 인터넷 서버를 운영할 수 있도록 최적화를 병행했다. 특히 파일 시스템의 경우 32bit 체제를 사용해서 무제한으로 긴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 단일로 최대 4기가 바이트짜리 파일을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보안성을 강화해서 사용자별로 파일에 대한 접속이나 편집 권한을 제어할 수도 있다.

1.0 패치 버전에선 맛보기였다면 이번엔 제대로 적용하는 파일 시스템으로 안드로이드 파일 시스템 32bit 버전이라 명명되었고 보통은 줄여서 AFS32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기능 강화 덕분에 1.0 버전에서 일반 개인용 버전과 기업용 엔터프라이즈 버전의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용량의 차이도 확실해졌다.

일반용은 3D 게임 지원 강화와 리본 인터페이스 개선 집중해서 2.0 게이밍 에디션으로 이름 붙였다.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3.5인치 디스켓 40장에 이르는 대용량을 자랑했으며 최초로 CD롬 버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3D 그래픽 스튜디오는 둠 2 개발의 부산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일종의 3D 게임 엔진과 같은 것으로, 3D 모델링 데이터를 불러와서 게임의 스크립트를 만들고, 레벨 디자인도 할 수 있는 툴이었다.

존 카멕의 의지에 따라 따로 돈을 받고 팔 계획은 없다. 덕분에 ID 테크놀로지의 임원들은 아쉬워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돈을 받아도 팔아도 될 만큼 포함된 리소스나 에디터의 수준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존 카멕의 의지를 존중했고, 이러한 툴이 널리 퍼질수록 3D 게이밍 환경도 빠르게 조성된다는 생각에 공개하기로 했다.

프라임 컷은 안드로이드 사업부에서 제안했던 새로운 소프트웨어로 동영상 편집용 도구였다. 방송용 프로그램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개인이 사용하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이 프로그램 또한 10달러 수준의 가격으로 책정되었는데, 이유는 안드로이드에 기본 포함된 코덱이 PC 표준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도구였기 때문이다.

표준화가 되기만 하면 다른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에, 개발 원가에 한참 모자라는 저렴한 가격이 되었다.

이 밖에도 유재원은 ID 테크놀로지와 산하 기업들이 진행 중인 여러 사업 현황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 시간이 무려 2시간이 넘었다. ID 테크놀로지 밑으로 하이테크도 있었고, 넥스트컴캐스트도 있었다. 게다가 라이트닝 볼트처럼 지분을 사들인 벤처 기업도 상당했다. 이들이 현재 무슨 일에 집중하고 있는지, 간략한 보고만 듣는 데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만 많은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 귀에 담을 만한 보고는 딱히 없었다. 기술이라는 게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하고 나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하이테크 연구소에서 쿼드콥터 형태의 드론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나 넥스트컴캐스트의 지상파 재전송 협상, 메이저리그 중계권 협상은 순조롭게 되고 있다는 보고 정도가 유의미했다. 다만 NFL이나 NBA 중계권료는 거품이 너무 낀 탓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보충이 살짝 신경을 쓰이게 했다.

“좋습니다. 따로 지적할 게 없을 만큼 아주 만족스럽네요.”

그렇게 보고를 모두 들은 유재원이 만족스러운 박수를 쳤고, 덕분에 조금 긴장했던 임원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곧이어 유재원의 93년도 비전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내년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습니다. 컴퓨터로도 이런 걸 할 수 있어? 라는 탄성이 나오도록 말입니다. 살짝 힌트를 드린다면 손바닥만 한 휴대용 컴퓨터 같은 기기도 있겠지요.”

비전이었기에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유재원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손바닥만 한 휴대용 컴퓨터라는 큼지막한 힌트를 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비전을 현실로 만들만한 기술은 아직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ID 그룹이 먼저 나서기로 했습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라 확정된 LCD 분야에 직접 투자할 것이고, 고성능, 저전력 반도체 개발에도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하겠습니다.”

유재원이 선언에 임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뭔가 대단한 비전을 보여줄 거라는 말은 있었지만, 이건 너무나도 큰 건이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앞으로 재원이의 청춘 사업이 순탄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연애라는 건 글쟁이에게도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죠. 다만 글의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연애 쪽은 곁가지 정도로만 나올터라 기대하셨다면 실망이 좀 크실 겁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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