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왕좌의 게임 =========================================================================
카리스마 풀풀 넘치며 가신들과 당 중진을 제압하셨던 그분은 어디 가고, 약장수에 홀라당 넘어간 시골 할아버지가 눈앞에 있다.
“아이고, 할아버지. 고정하세요.”
유재원의 탄식에 전명헌의 눈빛이 살짝 돌아왔다.
대통령 자리가 그렇게나 좋은 걸까? 지금 앉아 봐야 군사 독재의 후유증이 폭발해서 온갖 부작용이 터져 나가는 걸 고스란히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군인이었을 땐 별것도 아닌 놈들이 대통령직 하나로 정치와 경제계를 주물럭거리는 걸 보았고, 그로 인해 직접 큰 피해를 많이 봤던 전명헌에겐 피해의식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 여론조사를 통해 여지가 사라진 상황에서, 전재준의 제보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진짜 정보팀이 필요해!’
그렇기에 유재원은 전재준을 통제하기 위해서 민간인을 동원해 최대한 강력한 정보팀을 꾸렸던 것인데,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민간인은 민간인이었고, 잘 조직된 공권력은 능가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국을 넘어 미국 정보조직에 비견될 정보팀을 만들어버리겠다는 각오가 서렸다.
아니.
지금 당장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전명헌이 전재준의 제안에 홀딱 넘어가면, 유재원은 이제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을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음!”
전명헌은 극심한 고민에 빠진 듯 괴로워했다.
개인적 욕망을 자극하는 전재준의 제안과 유재원이 보여준 데이터 기반의 전략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 시간이 없습니다!
급한 건 전재준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기에 이 좋은 사안을 가지고 이렇게나 시간을 끄는 건 모두 유재원 때문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재준이 너 당장 서울로 올라와라. 내가 직접 대면보고를 들어야겠다.”
전명헌의 선택은 타협이었다.
당장 플랜B로 가기엔 미련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유재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전재준을 서울로 불러들임으로써 결정을 뒤로 미룬 것이다.
“미안하구나. 너무 큰 건이라 그냥 넘길 수가 없구나.”
그러고서는 유재원에게 계면쩍게 사과했다.
“알겠습니다.”
유재원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명헌의 표정이나 가신들, 당 중진을 보아하니 게임은 끝난 듯싶었다. 자기 죽는 독인 줄도 모르고 덥석 물어버리는 데 유재원은 방법이 없었다.
역시 정치는 어렵다는 생각뿐이다.
전생의 기억도 다 있었고, 돈도 부족하지 않았다. 조직도 제법 탄탄했다. 하지만 지지율 1위는 단 한 번도 찍지 못했다. 물론 이전보다 2배 가까운 지지율을 끌어낸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걸 누가 알아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럼 저녁에 다시 오마. 그때 확실히 결정하자꾸나.”
“알겠어요.”
전재준이 울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이니 저녁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앞으로 정치는 안 해야겠다.”
그렇게 전명헌을 비롯한 가신과 당 중진을 배웅한 유재원은 제 자리로 돌아와 푸념했다.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게 너무도 미미했다. 게다가 말귀도 못 알아먹는 사람들을 데리고 뭔가를 하려고 하니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잘 조직된 ID 그룹을 운영하다가 창당한 지 1년도 안 되는 통일 국민당을 맡았으니 그 차이는 너무도 극심했다.
“어휴.”
기운이 빠진 유재원이지만 그래도 본분은 잊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다시 앉은 유재원은 통일 국민당 전용 페이지에 접속해서 쌓였던 보고서와 질의에 대한 답변을 보내기 시작했다. ‘긴급’이니 ‘중요’니 하는 말머리를 단 것부터 처리했는데, 역시나 그다지 심각한 건 없었다.
경쟁 당의 불법 선거운동을 보고하는 것들인데, 초원 복국집 건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물론 21세기 기준에서 보자면 당선 무효형이 나올만한 사안들이지만, 지금은 법원에 가봐야 유죄가 나올 일은 없었다.
따르릉!
한참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위원장님! 여기 부산입니다.
부산이라고 하면 부산의 선거본부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바로 알았다. 원래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후 지역 당조직과 매일 같이 채팅과 전화 통화를 했기에 이젠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부산이라.
부산 본부도 초원 복집 건을 이제야 인지했던 것일까? 그런데 현실은 유재원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다름이 아니라요, 이상한 제보가 있어서 긴급 전화를 올렸습니다. 조금 전 자신을 초원 복국집 종업원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저희 쪽으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오늘 낮에 부산의 높으신 양반들이 복국을 먹으러 와서는 이상한 이야기를 잔뜩 했다는 겁니다. 서빙을 하면서 조금 엿듣게 됐는데, 현직들이 불법 선거 모의를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놈의 초원 복국집 사건이다.
하지만 전재준의 상황과는 180도 달랐다. 전화기를 대충 들고 있던 유재원은 바로 몸을 돌려 수화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손님들이 나가고 나서 느낌이 싸하더랍니다. 낯선 사람들이 가게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도 봤답니다. 그래서 냅다 도망쳤는데, 아 글쎄 그 낯선 놈들이 따라왔다는 거 아닙니까. 다행히 부산 달동네 쪽으로 도망을 쳐서 놈들을 따돌린 다음, 저희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자기네 복국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증언도 해줄 수 있으니, 도와달라고 합니다. 저희로는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 위원장님께 바로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지긋지긋한 초원 복국집 사건이다. 하지만 지금 유재원에게 다가온 건 전재준의 케이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전재준이 거머쥐고 있는 건 불법 녹취물이었고, 불법 도청이란 프레임으로 호도하면 180도 뒤집힐 수 있는 위험한 폭탄이었다.
그런데 증언자가 있다면? 양심선언까지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4월에 있던 총선에서 군 부재자 투표에 가해진 불법 투표를 양심선언 한 이지문 중위가 확실한 증거다. 양심선언으로 총선은 여당의 철저한 심판을 받았다.
통일 국민당이 40석이 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유재원이 서포트를 잘한 덕이기도 했지만,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도 분명 큰 영향을 미쳤다.
초원 복국집 사건이 도청을 통한 폭로가 아니라 양심선언이라면 필승 카드로 바뀌는 것이다. 유재원의 심장 박동이 확 높아졌다. 하지만 꼼꼼한 유재원은 냅다 받지 않았다.
“혹시 그분 이름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번 초원 복국집에 다녀왔을 때, 유재원은 주인아주머니는 물론이고 거기에서 일하던 종업원들 모두에게 사인을 해줬다. 그냥 이름만 써주고 만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에게’라고 쓰기 위해 이름도 다 물어봤었다.
-음, 잠깐만요. 메모가 있는데…. 네! 백강호라는 합니다.
백강호!
당연히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이제 막 군대를 다녀온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는데, 잘 발달한 턱과 도드라진 광대뼈가 아직도 선했다. 그렇게 선이 강한 인상과는 다르게 목소리나 태도는 무척이나 순박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기억났다. 사인해줄 때 의례적으로 주고받은 말이었지만, 상기된 목소리는 분명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떠오르는 목소리도 있다. 좀 전에 전재준이 전화연결로 재생한 녹취록이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주문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목소리는 분명 백강호와 비슷했다.
이 정도면 지금 상황을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만약 조작이라면 안기부의 능력이 미국의 CIA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인정해줄 수도 있다.
유재원은 빠르게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겠어요.”
부산에는 초원 복국집 사건을 컨트롤 해보려고 보냈던 스페셜 팀이 있다.
스페셜 팀보다 더 높이 날던 안기부 때문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지만, 이젠 이들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유재원은 부산 본부장에게서 제보자에 대한 신원과 현재 위치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았다. 그리곤 곧장 황재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라면 컴퓨터로 쪽지를 보냈을 텐데, 지금은 비상 상황이었기에 그들이 가진 이동전화기에 전화를 하는 게 빠르다. 다만 유재원 본인이 스페셜 팀의 이동전화기에 전화를 거는 건 위험했다. 쪽지는 발신자를 잘 숨길 수 있지만, 전화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황재홍이다.
스페셜 팀은 황재홍이 조직하고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게다가 황재홍도 안전장치를 만들어놓았기에 조금은 복잡해도 이렇게 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렇게 황재홍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린 유재원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것인지 다시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같은 시각.
짙게 선팅된 엑셀 자동차 안에 두 사람이 있다.
스페셜 팀 중에 전재준의 사조직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아서 말뚝 근무를 서는 중이었다. 동향을 어떻게 파악할지는 스페셜 팀의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수 있게 했다. 단지 정확한 정보를 황재홍에게 올려보내 주면 그만이다.
엑셀에 있는 둘은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하다 보니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한 상태였다.
이번 계약은 이제껏 체결했던 것과 무척이나 달랐지만, 두둑한 보수에 난이도도 쉬워서 무척이나 만족한 상태였다. 카폰까지 달린 자동차도 지급되었고, 활동비도 두둑했다. 게다가 자율성도 커서 일하는 방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딴죽을 거는 일도 없었다.
정작 일을 준 원청(?)에서 전재준을 커버하지 못한 탓에 실망이 매우 컸다는 걸 모르는 둘은 이런 임무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한창 수다를 떠는 중에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형님. 전홥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카폰이 벨 소리를 냈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사장님인가 보네요.”
한창 작업할 시간이라 팀원들은 아닐 거다. 그러면 전화해올 사람은 윗선의 사장님 한 분뿐이다. 조수석에 앉은 선 굵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예. 1팀입니다.”
전화를 받은 형님이란 사람은 ‘예?’하고 놀라다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덩달아 얼굴도 심각해졌고, 당연히 운전석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던 동생(?)도 얼굴이 굳었다.
통화는 1분도 되지 않았다.
대신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우리 망했다.”
형님이란 사람은 황재홍의 전화를 짧은 한 문장으로 줄였다.
전재준이 스페셜 팀의 감시를 뚫고 일이 터졌다는 것부터 황재홍이 계약을 파기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무려 1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는데, 전재준의 동향을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더욱 큰일은 이어진 두 번째 명령이었다.
백강호의 신병을 구해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은 언뜻 들어 보면 쉬운 일이었다. 사람 하나 잡아다가 데려오는 건 그들도 많이 해봤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 백강호는 쫓기는 신세였고, 백강호를 쫓는 주체는 안기부 혹은 기무사 그나마 운이 좋다면 경찰 보안과일 거라는 정보였다.
“헉. 안기부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동생이 펄쩍 뛰었다.
둘이서, 아니 스페셜 팀에서 하는 일도 좀 어두운 속성이긴 했지만, 안기부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이 없다.
공권력 중에서도 최정점에 선 게 안기부 아니던가. 그런데 안기부가 쫓는 사람을 가로채서 데려오라고?
차라리 이제껏 받은 돈을 토해내고 말지, 절대로 못 할 일이었다.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반병신이 되어 돌아온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형님, 하실 거예요?”
동생의 물음에 형님이란 사람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10배란다.”
“예? 데려오기만 하면 10배를 준대.”
전재준 감시 의뢰비로 받은 건 2천만 원이었다. 이것도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런데 2천만 원의 10배라니. 2억 원이다. 요즘 주택복권 1등이 1억5천만 원인데, 그보다 5천만 원이 더 많다.
계급이 달라질 만큼의 큰돈이었기에 한 번 목숨을 걸어볼 만했다.
따르릉.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는 중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딱 감이 왔다. 황 사장님은 1팀에만 연락하진 않았을 거다. 제안을 받은 2팀이나 3팀에서 논의를 하려고 전화를 했을 거다.
-형님, 형님도 황 사장의 그 황당무계한 제안을 받았수?
역시 촉은 정확했다.
말투가 촉새 같다고 촉새라는 별명이 붙은 2팀 팀장이었다.
“그래.”
제안이 온 걸 숨길 건 아니었기에 바로 답했다.
-할거요?
“너는?”
-형님, 우리 같은 피라미가 뭐라고 안기부에 덤빕니까. 우리 팀은 깔끔하게 접습니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신용이 있어야지!”
-신용은 무슨,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다.
그걸로 통화는 뚝 끊겼다.
살짝 허탈하기도 했다. 원래 모래알 조직력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끊길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비슷한 전화가 또 왔다는 것이다. 역시나 그만하겠다는 통보였다.
“형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옆에 앉은 동생도 잔뜩 긴장했다. 동료들이 두 팀이나 이탈하니 불안감이 잔뜩 피어오른 모양이다.
“우리는 한다. 정 불안하면 너는 그만 내려라.”
내리라는 말에 동생은 잠깐 놀란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형님 두고는 안 갑니다. 까짓거 해 봅시다.”
동생의 말에 형님이란 사람은 비로소 옅은 미소가 올라왔다.
황재홍 사장의 지시를 받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의뢰에서 숨기는 게 없었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내려온 명령에서 안기부 이야기는 숨겼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황재홍은 위험 요소에 대해 숨김없이 말해줬다.
더구나 황재홍 뒤에 있는 ID 그룹 회장 유재원은 국정원은 물론 청와대 이상 가는 파워를 가진 존재였다. 더구나 그 나이를 생각하면 이건 보통의 인연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하늘 위의 하늘과 이어질 인연이었으니, 의뢰를 수락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가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결정이 났는데, 뭉그적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둘이 탄 엑셀 자동차는 엔진 소리를 크게 내며 쏜 살처럼 나아갔다.
비슷한 시각.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랜저 한 대가 있었다.
울산에서 출발한 전재준의 자동차였다. 탑승자는 모두 3명으로 운전자와 수행비서 한 명, 그리고 전재준이 전부였다.
차 안은 조용했다.
전재준이 카폰으로 통화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나.”
몇 분이 지났을까. 전재준은 작은 투덜거림과 함께 전화기를 내렸다. 울산에서 부산까지 내려와서 이제 막 경부고속도로에 올랐던 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기분이 좋았다. 이 거대한 역사를 이뤄낸 것이 미래 그룹이고, 자신이 미래 그룹의 주인이 되는 걸 상상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좋은 기분이 조금 전 날아온 전화에 확 잡쳤다.
전화를 건 사람은 유재원이었다.
유재원의 전화는 그다지 반가운 건 아니었다. 전명헌에게서 유재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초라해지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전화의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초원 복국집 사건에 제보자가 나타났고, 안기부지 경찰인지 모를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구해서 같이 올라오라는 전화였다.
이후에도 무슨 말을 더 전하려고 한 것 같은데, 통화권 이탈로 인해서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제보자라니.”
김이 확 세는 전재준이다.
이번에 얻은 녹취록은 유재원에게 밀렸던 본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되찾아 올무기였다. 그런데 녹취록보다 더 강한 게 튀어나와 버렸다. 다만 완전히 수중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고, 쫓기는 신세라니 두고 볼 일이다.
“아, 이름도 못 물어봤네.”
“무슨 이름이신지?”
전재준의 혼잣말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가 반응했다.
“아, 아니야. 아버지가 기다리시니 속도 좀 더 높이게.”
말을 돌리는 전재준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통화권 이탈로 전화가 끊기면서 이름은 물론이고 위치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유재원의 요청에 협조할 생각으로 물어본다는 건 아니었다. 제보자란 놈의 정보를 알 수만 있었으면 바로 경찰에 제보해서 잡아가도록 했을 터인데, 너무나 아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결과만 기다리는 건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유재원의 피 말리는 대기는 해가 떨어지고 나서 극에 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강호 구출 작전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스페셜 팀은 반 이상이 포기를 선언했다.
선택의 결과였다.
백강호의 뒤를 안기부나 기무사가 뒤쫓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동참했을 테지만 유재원은 황재홍에게 사건의 전모를 스페셜 팀에 전하도록 했다. 사안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오히려 큰 손해이니 스페셜 팀이 진심으로 움직이길 바랐다.
역시나 급조된 팀인 탓에 반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지만 그만큼 남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커졌다.
물론 스페셜 팀만 믿기엔 부족한 것 같아서 전재준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국회의원 신분이고, 전명헌의 아들이기도 했다. 인물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존재감 자체는 안기부 요원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손만 거들어줘도 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에 전화가 끊어져 버렸고, 다시 전화해봐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설득이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부산 지역당 선거본부에 연락해서 스페셜 팀에 협조를 당부하는 조치를 했고, 이제는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후, 피가 타는구나.”
다행히 유재원 혼자서만 속을 태우진 않았다.
백강호의 존재를 곧장 전명헌에게 전했고, 평소처럼 서울에서 유세 중이던 전명헌은 곧장 스케줄을 조정하고 중앙당으로 복귀했다.
이후 유재원과 전명헌은 중앙당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심지어 민주당에도 연락해서 떠보기도 했다.
“재준이 이놈은 또 왜 연락을 안 받는 건지.”
전명헌 후보는 속이 타는지 냉수를 마시면서 푸념했다.
오늘 하루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타는 전명헌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대실망이었다가, 전재준의 연락에 흥분했고, 유재원의 냉철한 분석에 뼈가 시렸고, 마지막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제보자가 나타났다.
제보자를 무사히 확보만 한다면 게임은 끝인데,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따르릉.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사무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화기 하나로 모두 집중되었다. 누가 받을지 눈빛 교환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역시나 답은 유재원이었다.
“여보세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든 유재원이 최대한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 재원 군! 날 세.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깜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유재원은 황재홍의 목소리가 나올 걸 기대했다. 최악이라도 전재준이 전화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나온 목소리는 유재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던 탓이다.
“대통령 각하?”
작년 이후로 딱히 연락도 없었던 노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전화기에 귀를 기울이던 전명헌 후보까지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재원 군, 섭섭하네. 우리가 전화 한 통 못할 사이인가?
게다가 갑자기 친한 척까지 한다. 작년 말에 한 번 안부 전화를 한 것이 전부였고, 사적으로도 우의를 다진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네, 당연히 아니지요. 그래도 공사가 다망하신 대통령 각하께서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노 대통령도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던 모양인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흠흠, 다름이 아니라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려고 말일세. 그러니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좀 쉬는 게 어떻겠나? 재원 군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지 않은가?
대통령의 말은 무척이나 직설적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끝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일세. 자네 식대로 말대로 하자면 게임 오버라고 해야 하나?
백강호의 신변을 스페셜 팀이 확보하는 데 실패했음은 물론이고, 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청와대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이다. 게임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마 그 사람들, 죽였나요?”
유재원은 허탈하게 되물었다.
-헉! 민주정부 시대에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그들은 간단한 조사만 마치면 풀려날걸세.
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답했다.
백강호가 이번 일에 휘말려 죽었다면 마음에 큰 짐으로 남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동시에 크나큰 허탈감도 몰려왔다. 한 달 넘게 정신없이 달렸던 왕좌의 게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다.
전명헌은 너무도 허탈해서 입만 떡 벌리고 말았다. 그의 수행비서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왕좌의 게임에서 전명헌이 올라갈 경우의 수는 끝장이 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유재원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이제 진정한 최종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