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왕좌의 게임 ==============================
“진짜로요? 그러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가슴을 탕탕 치며 뭐든 하겠다고 했던 전명헌이 유재원의 되물음에 흠칫했다.
전명헌은 89년부터 유재원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렇게 되물어보는 유재원이 상당히 곤란한 걸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클 거라는 느낌이 딱 들었다.
“그럼! 뭐든지 물어보아라!”
느낌은 좋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전명헌이다.
질문의 전제에 대통령직이 놓였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선 안 되는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면, 하실 수 있어요?”
그렇게 전명헌을 코너로 몰아넣은 유재원은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헙!
반응은 전명헌 의원의 수행원들이 더 빨랐다.
무슨 질문을 하려나 유재원에게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던 그들은 전 재산 사회 환원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헛바람을 집어 먹었다. 그만큼 유재원의 질문이 이들에겐 황당하고 충격적이었다.
전명헌 의원의 반응은 이들보다 한 박자 늦었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너그러운 표정이었던 전명헌 의원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한발 늦게 찾아왔다.
전 재산이라니!
보통 수준의 부자였다면 고민도 없이 ‘하겠다’라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전명헌은 보통 수준의 부자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그룹인 미래를 바닥부터 일군 사람이다. 지금이야 유재원에게 뒤진 상태였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최고의 부자를 꼽기에 전명헌과 최현희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수준이었다.
언론에 알려지기로 전명헌의 재산은 5, 6조 원 수준이라고 했지만, 그건 세금 꼬박꼬박 내는 양성적인 재산을 말하는 것뿐이다. 가명, 차명은 물론 은닉된 재산을 다 합치면 알려진 것에 몇 배, 혹은 몇십 배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전 재산? 혹시 재단 같은 걸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냐?”
전명헌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 재산을 겨우 5년짜리 대통령을 하기 위해 내놓는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재산 환원은 보통 재계 인물이 정계로 자리를 옮길 때 했던, 재산 만들기로 이해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진짜 재산을 다 던지는 거예요.”
유재원은 꼼수를 차단했다.
덕분에 더욱 곤란해지는 전명헌이었다.
“역시 좀 어려우시죠?”
유재원은 다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조금은 실망했다는 표정을 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정식 선거운동 시작 전에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나 통일 국민당 수뇌부가 대통령 선거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보였거든요.”
전명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열심히 준비했다고 반박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했기에 그의 입이 선뜻 열리지 않았다.
“커다란 선거, 그러니까 총선, 대선 그리고 개헌 투표 같은 선거는 엄청나게 치열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목숨까지도 거는 승부에요. 할아버지께는 목숨을 걸라고는 못 하니 재산을 말해본 거고요.”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은 살짝 화가 나려고 했다.
종이 쪼가리에 도장 한 번 찍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유재원이 아니라, 자신의 못난 자식들이었다면 불호령이 터졌을 것이다.
유재원이라 참는 것이다. 그런데 크게 숨을 쉬면서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과장은 아니었다. 사람들 몇몇이 선거와 관련된 이유로 죽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이기려면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야 해요. 특히 우리 같은 언더독들은 기득권들의 온갖 음해와 박해가 쏟아질 테니까요.”
전명헌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기득권의 음해라는 소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통일국민당과 전명현을 향하는 공작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걸 이들이 몸소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갱이 같은 단순한 비난 정도가 아니다. 감시가 붙기도 하고, 도청을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국정원이 움직인다는 제보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심지어 그런 제보에도 공작이 들어와서 오히려 역으로 당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정치 초년생인 전명헌 의원보다, 70년대 엄혹한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던 두 거물이 훨씬 심했을 거다.
동시에 두 거물의 대통령 욕심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전명헌이다. 한 사람은 대통령 욕심에 갑자기 여당과 야합해 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87년 대선에서 단일화 합의를 무산시키고 3자 구도를 만들었다.
“국민 대다수도 우리 편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유재원의 말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전명헌이다.
통일 국민당은 전국 정당이었다. 수도권부터 호남과 영남까지 고르게 후보를 냈고, 당선자도 나왔다. 무소속 의원들까지 적잖게 흡수해서 지금은 50석 이상을 보유한 원내 제2 야당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양 김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 하는 만큼, 그분들을 지지하는 국민도 그 두 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무거운 한숨 내는 전명헌이다.
총선에서 통일 국민당이 당선된 지역이라면 당연히 전명헌의 지지가 높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다. 경상도에선 김영삼에게, 전라도에선 김대중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심지어 수도권도 마찬가지였다. 1등과 2등이 조사 때마다 바뀌기는 하지만, 전명헌이 1등이 된 적은 없었다.
여론조사로 전국 8도를 종합해보면 아직도 전명헌이 1등을 하는 지역이 없었다. 지지율 차이는 손에 잡힐 듯한 수준인데, 가상의 선거 결과를 보면 늘 3등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청와대에 입성하고자 한다면 진짜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전력을 다해야 해요. 사실 그것도 모자라고, 그렇게 전력을 다한 다음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은 안일했던 자세에 반성했다.
준비 기간도 짧은 통일 국민당이 50석 이상을 얻으니 정치가 좀 만만하게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기존 정당의 저항과 공권력이 좀 세게 나오지만, 총선에서 파란을 선택한 국민이라면 대선에서도 통일 국민당 전명헌을 선택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에 ‘유재원이라면’이라는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유재원이란 이름 석 자는 전명헌에겐 ‘천재’라고 각인된 지 오래였다.
동양이 말하는 천재라는 뜻은 하늘이 내린 인재였고, 더 나아가서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규칙을 꿰뚫어보는 자였다.
이제껏 유재원은 그 믿음에 십분 부응했다.
초등학교 때도 영특함을 마음껏 발휘했고,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내주었다. 총선은 두말할 것도 없고, 세계에서 수학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한 7대 난제 중 하나를 풀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유재원이 이번 대선을 두고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에 붉은 경고등이 확 켜지는 전명헌 의원이었다. 수행원과 보좌진 역시나 마찬가지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밑밥은 이쯤 하면 됐나?’
엄한 표정인 유재원은 전명헌과 그의 수행원들의 표정 변화에 어느 정도 만족했다.
마치 자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이번 대선에서도 다 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무거운 짐은 다 떠넘긴 것에 대한 질책은 이쯤 하면 된 것 같았다.
회귀한 유재원은 전지는 할 수 있어도, 전능은 불가능했다.
한국에 들어온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전명헌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머릴 굴려봐도 이거라는 건 없었다.
여기 초원 복국집 사건도 최대한 잘 처리한다고 해봐야 부산의 김영삼 후보로 확 쏠리는 걸 막을 뿐이지, 전세를 단번에 역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더욱이 유재원은 14대 대통령 자리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기에, 책임도 무한했다.
군부 정권하에 수많은 무리수를 둬가면서 이뤄낸 초고속 성장의 부작용이 터질 시기인데, 아무리 정신 똑바로 박힌 대통령이라도 그걸 막기엔 무리였다.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은 아무리 보강을 해도 무너질 것이고, 초반엔 효율적이었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무사안일주의와 보신주의로 변질한 관료주의도 부작용이 터질 것이다.
유재원은 전명헌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해도 IMF를 막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몇 년 전부터 ID 그룹이 천문학적인 세금을 내고 있지만, 그 많은 돈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뭔가 좀 나아진다고 느끼는 건 정보의 고속도로사업으로 도시마다 광케이블이 깔리는 중이었고, 일부 도시에서는 ADSL 시범서비스를 하는 중이라는 정도였다.
운 좋게 전명헌 의원이 대통령이 된다더라도, 그 후폭풍을 죄다 뒤집어쓸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예전이라면 전명헌이 불행해지더라도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별한 사이가 된 지금에는 다르다. 미래전자를 통한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했고, 사적으로도 남다른 사이가 되었으니 전명헌과 통일 국민당의 몰락은 막아야 한다.
‘어렵네.’
유재원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 문제라면 자신 있다. 암기하고 있는 공식이나 다양하게 익힌 접근법으로 풀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정치라는 건 수학으로는 풀 수 없었다. 인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유재원에겐 수학의 7대 난제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결국, 가장 간단한 답은 전명헌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다. 이후 붉어질 한국병 문제는 대통령의 힘으로 풀어 나는 게 좋다.
대신 유재원은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하기로 했다. 전생처럼 3위로 낙선한다면 미래 그룹에 심각한 타격이 되는 건 물론이고,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이 없는 통일 국민당도 해체될 것이 뻔했다.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선거판에서 낙선자가 뭔가를 챙기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분위기 반전은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난감한 표정이었던 전명헌 의원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런 전명헌 의원보다 더 반색하는 사람들은 보좌관과 수행원들이었다. 유재원이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고 돌아가면 불호령이 쏟아질 텐데 겨우 살았다.
다만 유재원이 해놓은 말이 있어 아주 마음을 놓친 못했다. 전 재산을 기부하자고 하면 그것 그대로 난리였으니 말이다.
“공격이 최고의 수비죠. 저들이 치고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고 달려야 합니다.”
“치고 달린다? 뭘 치고 달린다는 거냐?”
“정치인이 치고 달릴 게 뭐가 있었어요. 공약이죠.”
유재원의 말이라면 항상 큰 반응을 보였던 전명헌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약이라면 이미 엄청나게 쏟아낸 상태였다. 총선 때부터 파격적인 걸 내놓았던 통일 국민당이었고,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지금 대선에서는 딱히 내놓을만한 게 없었다.
대선 공약집이 약해 보이는 것도, 선거대책본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총선에서 워낙 크게 질러 놓아서 담아낼 게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과연 그럴까요? 만약 민정당 쪽에서 금융실명제 같은 걸 공약으로 내면 어떻겠어요?”
금융실명제는 전생에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불쑥 실행되었다. 덕분에 검은돈을 굴리던 큰손들이 많이 적발되었다. 기업이나 재벌들도 무척이나 난감했었다.
보통은 김영삼 대통령의 행동력을 말할 때 언급되는 일이었지만, 아주 뜬금없이 실행된 건 아니었다. 금융실명제는 민자당 쪽에서 내놓을 공약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전명헌 의원의 반응만 보더라도 누굴 겨냥했는지 바로 각이 나온다.
차명은 물론 가명으로 증권이나 예금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명헌이었으니 말이다. 통일 국민당이 파격적인 공약을 많이 내놓긴 했지만, 잘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전명헌 의원과의 이해관계가 깊다는 점이다.
반값 아파트 정도면 수용할 만한데, 금융실명제는 직접적 타격이니 불가했다. 게다가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에 논의는 되었지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통일 국민당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민자당에서 금융실명제를 공약으로 낸다?
의문이다.
“더 나가서 대호 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대선에 출마하려고 할 거고요.”
“뭐라? 우중이를?”
대호 그룹도 한국의 대재벌 중 한 자리에 당당히 껴 있었다.
전명헌과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타입이었고, 사업 분야도 미래와 상당히 겹쳐진 상태다. 대호 그룹도 자동차, 중공업, 조선업 심지어 전자회사까지 있었다. 일종의 라이벌 관계다. 물론 전명헌 의원은 김우중을 단 한 번도 라이벌로 생각한 적은 없다.
거의 모든 사업에서 미래와 겹친 상태이긴 한데, 대호가 미래의 아성을 넘은 사업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전자회사가 좀 밀린 건 사실이지만, 대대적 투자가 이뤄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런 김우중이 대선에 나오면 당연히 전명헌과 비교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전명헌이 보유한 창업자 프리미엄도 희석될 수밖에 없다.
금융실명제에 대해선 물음표였던 전명헌도 김우중의 대선 출마 카드에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는 김우중이라면 분명 따라 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민주당에선 통일 개헌안을 내놓을 거고요.”
“통일이라. 그것도 중요하지!”
전명헌 의원은 통일이라는 단어에도 반응을 보였다.
유재원이 보기에 이건 아니다 싶지만, 21세기와 달리 지금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특히나 이북 출신의 실향민인 전명헌 의원에게 북한의 일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네, 현재 한국에 제일 중요한 이슈 두 개를 뽑자면, 경제와 통일이죠. 그러니 이번 대선의 구호는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이라고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좋구나!”
단순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구호였다.
다른 후보들이 뭘 들고나오던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계속된 불안감 조성에 살짝 답답해지던 전명헌은 ‘역시 유재원이다’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제 중요한 대목이다.
“할아버지, 아니 후보님!”
그렇기에 유재원은 호칭부터 달리했다.
“조금전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면 제가 시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셨죠?”
유재원의 자세가 무겁게 달라지니 전명헌 의원도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전 재산 사회 환원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다. 하지만 지금 와서 무르기는 글렀다. 평소의 전명헌답게 눈을 질끈 감고 내질렀다.
“그래! 하겠다!”
역시 승부사 전명헌이다.
유재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진 않아요. 대신 이번 선거에서 후보님이나 통일 국민당 선거대책본부가 제가 지시하는 것들을 바로 실행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주세요.”
“응? 그거라면 지금도 하고 있잖느냐?”
“아뇨. 지금은 그저 후보님의 후광을 뒤에 업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 정도로는 안 돼요. 이번만큼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해요.”
이번 대선은 너무도 큰 판이다.
들여야 하는 노력의 크기도 압도적이고, 승리할 때 얻는 전리품의 양도 차원이 다르다. 승리를 위해서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유재원에겐 전권은 필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특히 가장 큰 불안요소인 전명헌의 가족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직위가 있어야 한다.
“으음.”
전명헌은 유재원에게 얼마든지 전권을 내줄 수 있다.
큰소리만 뻥뻥 치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여의도의 정치꾼들과 비교하면 섭섭할 만큼 유재원은 이미 증명된 존재였다. 다만 공식적인 자리라는 게 문제였다.
통일 국민당의 당헌과 당규로 유재원에게 대선 선거운동의 전권을 줄 수 있는지 따져 봐야 하고, 당내의 이해관계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달라는 건 아니에요.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주세요.”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전명헌이다.
다만 전명헌 역시 이 문제 하나로 오래 고민할 사안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유재원은 전명헌의 보좌관 한 명과 계산대로 갔다.
밥값 계산을 위해서다. 전명헌 의원 일행이 먹은 건 보좌관이 계산하고, 유재원 본인이 먹은 건 본인이 계산했다.
아직 통일 국민당에서 당직 하나 맡지 않은 상태이니, 밥을 얻어먹으면 선거법 위반이고, 유재원이 밥을 사면 뇌물이다. 이렇게 깐깐하게 따지는 걸 두고 극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방심했다가 큰 사고 터지는 게 선거판이었다. 경쟁자에게 자그마한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선 사소한 것부터 지키는 게 중요하다.
“입에 좀 맞으셨어요?”
유재원에게서 2만 원을 받고 4천 원을 거슬러 주며 주인아주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잘 먹고 갑니다. 진하게 우러난 복국 국물이 시원한 게 일품이었습니다.”
복국은 맛있었다.
반주랑 함께하면 더더욱 맛있을 시원한 맛이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엄지 손은 철하고 들어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저기, 그러면 사인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번에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종이도, 펜도 없이 요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인요청만 아니라면 언제든 OK인 유재원이다. 주인아주머니도 매직펜과 함께 스케치북을 내줬다. 덕분에 유재원은 큼직한 사인과 함께 맛있게 잘 먹고 간다는 멘트까지 남겼다.
“저기, 저도.”
그렇게 사인을 남겼는데, 줄이 생겼다. 복국집에서 일하던 직원 중 한가한 이들 몇이 종이를 들고 나왔다. 그 모습에 함께 계산대로 왔던 보좌관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유재원이 먼저 찾아가서 이름을 물어보며 일일이 사인도 해줬다.
보좌관에겐 사인요청이란 귀찮고 일상적인 거절이겠지만, 저분들과의 만남은 일생에 한 번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소한 인연이라도 소중한 법이란 생각에 유재원은 복국집 직원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유재원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초원 복국집에서 전명헌 의원은 유재원의 제안에 바로 다음 날, 늦더라도 이틀이면 답을 줄 기세였다.
그런데 4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책상 앞에 놓은 전화기를 보며, 먼저 전화를 해봐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는 유재원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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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들 데리고 하드캐리하려면 전권이 필수겠죠~~!!
아, 그리고 전편에서 짧게 나왔던 사인 내용은 이번 편으로 옮겨 오는 것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