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왕좌의 게임 =========================
/*작가의 말에 공지가 있으니 꼭 읽어주세요*/
75억 달러.
헨리 사무엘이 컴캐스트 이사회로부터 항복을 받아온 가격이었다. 유재원이 처음 생각했던 70억 달러에서 5억 달러가 늘어났다. 반면 컴캐스트 이사회는 80억 달러 이상을 불렀다.
돈이 넉넉한 유재원은 부르는 대로 그냥 줘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인수할 회사가 수도 없이 많은데, 계속 이런 식이면 낭비되는 돈이 많아서 헨리 사무엘과 앨런을 믿고 기다렸다.
혹시나 다른 독소 조항이라도 생겼나 물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75억 달러에 이사회에 참여한 대주주들 모두의 지분을 전격 인수하는 것이었다. 지분율을 따진다면 전체 지분에서 65% 수준으로 나머지 35%는 주식 시장에 풀려서 개인이나 기관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었다.
유재원은 그것도 모두 사서 비상장 주식을 만들고 싶었지만, 팔지 않겠다는 기관과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65%의 지분이라면 무엇을 하던 유재원의 뜻대로 할 수 있으니 문제없다. 게다가 컴캐스트는 돈이 나오는 캐시카우가 아니라서 배당도 거의 없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 좀 달라지겠지만, 그전까지는 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설치하는 데 돈만 나가는 사업체이니 말이다.
“좋아요. 최 비서님께 자금집행을 말해 놓을 테니 인수작업을 바로 진행하세요. 질질 끄는 건 정말 질색이니까, 한방에 주식과 대금을 주고받는 식으로요.”
-역시 화끈 하시군요! 알겠습니다.
헨리 사무엘이 유재원의 눈앞에 있었다면 엄지를 척하고 들어 보였을 것 같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케이블 업체를 손에 넣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컴캐스트의 인수가 끝나면 당연히 회사의 명칭도 바뀌게 된다. 회사 이름도 다 정해놨다.
넥스트컴캐스트.
넥스트컴과 컴캐스트를 합쳐놓은 것에서 볼 수 있듯, 넥스트컴의 계열사로 편입되는 형태였다. 이를 통해 넥스트컴은 나스닥에 우회 상장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앞으로 고속 인터넷 인프라 건설에 들어갈 자금도 주식 시장을 통해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ID 그룹의 부담도 확 줄일 수도 있다. 물론 돈 많은 유재원은 인프라 건설에 남의 돈을 빌릴 마음은 그다지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것이니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물론 투자자들은 넥스트컴보다 ID 테크놀로지나 ID 인베스트먼트의 상장을 바라고 있지만, 두 가지 계열사는 유재원의 원대한 마스터플랜을 이뤄나가는 데 핵심적인 조직이기에 상장은 최대한 늦출 생각이었다.
-아참! 컴캐스트 측에서 회장님이 조인식에 참석해주시면 너무도 큰 영광이라고 했습니다만.
조인식?
단어 하나로 컴캐스트 경영진이 무얼 생각하는 건지 바로 감이 오는 유재원이다.
서로의 계약서에 사인 후 돌려받으면서 악수도 하는 그런 자리는 헨리 사무엘도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유재원이 난제를 풀면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다. 유재원이 조인식에 참가한다고 하면 컴캐스트 측 경영진도 다시 한 번 매스컴에 얼굴을 비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쉬울 것이다.
-바쁘시면 거절…….
“아뇨! 뭐, 저도 참석할게요.”
전생이었다면 귀찮다고 거절했을 거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회귀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진 유재원이다.
회귀 전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인터넷을 다 뒤져 봐도 자신의 흔적이 나오지 않은 걸 보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본인을 빛나게 해줄 자리가 있다면, 웬만해선 다 참석하자고 마음을 바꾸었다.
길이 빛나는 자리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어려운 자리다. 이런 자리에 참석해 인지도가 올랐을 때의 득실을 따져보면 손해보다는 이득이 더 컸다. 사진을 한 장이라도 남겨 놓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쓸 수 있다.
컴캐스트 인수 조인식도 마찬가지다.
무려 75억 달러를 질렀기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비즈니스적으로 따지니 무리 없는 인수였지만, 금액만 놓고 보면 어마어마한 지출이었다. 앞으로 회사를 이끌고 나가다 보면 이보다 더 큰 인수전도 할 테지만, 그건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었다.
더구나 남들이 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컴캐스트를 인수해서 미래에 두고두고 사용할 인터넷 인프라를 조성해 놓으면 후대의 평가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성대히 준비하겠습니다.
헨리 사무엘은 유재원과 죽이 잘 맞았다.
유재원의 말에 딱 감을 잡고 바로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ID 그룹 내에서도 얼마 없다.
며칠 후.
-ID 그룹, 북미 2번째 케이블 업체인 컴캐스트 전격 인수!
-인수 대금, 무려 75억 달러!
금융정보전문 통신사인 블룸버그를 통해 ID 그룹의 컴캐스트 인수가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찌라시 상태로 돌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실물 경기보다 3개월 먼저 움직인다는 주가는 덕분에 몇 달 전부터 잔뜩 오른 상태였다.
일반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하는 건 아니었으니, 주가에 프리미엄이 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대책 없는 운영을 보여주었던 컴캐스트 경영진이 물러나고, 젊은 감각과 인터넷이라는 신기술을 선도하는 ID 그룹이라면 다를 결과를 내줄 거라는 기대감에 주가가 폭등하는 중이었다.
92년 초만 해도 1달러 60센트에 머물던 주가는 ID 그룹의 인수 가능성을 타진하는 찌라시 하나만으로 2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다가 블룸버그 통신을 통해 인수가 정식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땐, 2달러 40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만큼 주식투자자들은 ID 그룹의 컴캐스트 인수에 긍정적이었다. 반면 무디스, S&P와 같은 신용평가회사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소프트웨어 회사가 오프라인 회사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케이블 유지비와 중계권 갱신, A/S 처리와 고객센터 등등 등의 유지비가 많이 드는 케이블 사업을 과연 ID 그룹이 잘 운영할 수 있겠느냐며 매우 부적격한 인수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만약 ID 그룹이 주식 시장에 상장 중이었다면, 투자 부적격은 물론이고 신용도 하락도 시켰을 분위기였다.
유재원은 자신의 투자를 놓고 주식시장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도 신경을 쓰지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조인식에 참가했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반갑소. 브라이언 L. 로버츠요.”
유재원의 인사를 받은 컴캐스트의 CEO 브라이언은 척 보기에도 깐깐해 보였다.
일부러 그런 건지 몰라도 검은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브라이언이었다. 심지어 구두도 검은색이다. 그나마 넥타이는 컴캐스트의 상징색인 붉은색이 들어가 있다. 덕분에 그나마 문상객 느낌은 나지 않았다.
유재원은 공대생이 최대한 예의를 차렸을 때의 모습이다. 베이지색 바지에, 셔츠 그리고 세로줄 무늬가 옅게 들어간 남색 블레이저를 걸치고 있다. 당연히 셔츠는 체크무늬였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이처럼 가벼운 유재원의 모습 덕분에 브라이언은 더욱 딱딱해 보였다.
“그럼 계약의 최종 확인을 시작할까요?”
장시간 협상을 한 것치고는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인수 계약서의 핵심은 컴캐스트 이사회 지분 65%를 75억 달러에 일괄 매입한다. 사인하는 즉시 거래는 이루어진다는 것이 전부였고, 나머지 미사여구나 단서 조항은 이 두 가지 내용을 보조하며 법률적 요건을 갖추기 위한 내용이었다.
참고로 브라이언은 CEO이자 지분 30%를 가진 오너이기도 했다. 유재원이 사는 65%의 지분 중에 20%는 바로 이 브라이언으로부터 블록딜 방식으로 사들이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나머지 지분 10%도 싹 사고 싶었지만, 브라이언이 극구 거부하는 통에 20%만 사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브라이언은 컴캐스트 창업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지도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덕분에 ID 그룹의 컴캐스트 인수에 가장 부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나머지 이사들이 인수에 찬성으로 돌아서지만 않았어도 그가 지분을 내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들 입장에서 ID 그룹이 제시한 금액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이사들이 보기에 브라이언의 컴캐스트의 운영은 미지수였다. 경영을 맡은 지 한참 되었지만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대가 없이 사용했던 지상파 재송신이 비용을 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각종 스포츠 중계권료도 치솟았다. 돈이 나올 곳은 유료 가입자 뿐인데, 수십 개월 동안 500만 명 수준에서 정체된 상태다. 차라리 ID 그룹이 관심을 보일 때 넘기는 게 남는 것임을 이사회 참여자 모두가 동의하게 되었다.
브라이언은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이미 끝났기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말을 주고받진 않았다.
조인식 자리에서 브라이언은 유재원의 최근 업적을 칭찬했고, 유재원도 그동안 컴캐스트를 잘 이끌어온 브라이언을 치사하면서 컴캐스트의 이름이 더욱더 높이 솟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은 후 조인식은 이뤄졌다.
서명할 때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계약서를 주고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기자들이 너무도 많았고, 그만큼 플래시도 많이 터져서 순간적으로 눈이 멀 정도였다. ID 그룹을 설립하고서 많은 자리에 섰지만 이렇게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후 유재원의 따로 발표 시간을 가졌다.
“컴캐스트는 앞으로 넥스트컴캐스트로 사명이 바뀔 것입니다.”
이미 공지된 내용인지라 큰 소란은 없었다.
“넥스트컴캐스트의 사장은 당분간 공석으로 두고, 주요 결제는 넥스트컴의 헨리 사무엘 사장이 임시로 처리할 것입니다.”
정보팀에서 넥스트컴캐스트의 사장으로 적당한 사람을 물색 중이었다.
어차피 비전은 유재원에게서 다 나오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보다는 현장 상황에 능통하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유형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매우 높은 확률로 내부 승진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앞으로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넥스트컴캐스트에 3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서 기존의 아날로그 케이블 장비를 모두 디지털화 하여, 시청자들께 노이즈 없는 선명한 화질의 영상, 더욱 다양한 채널을 공급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정보 고속도로에 맞춰 미국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초고속 인터넷을 서비스도 제공하겠습니다. 이러한 업그레이드 사업을 위해 신규 고용도 늘리겠으니, 기존 컴캐스트 직원들은 이번 합병으로 직장을 잃을 거라는 걱정은 기우임을 말씀드립니다.”
거점마다 연결하는 광케이블을 깔고, 중계기를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은 언젠간 해야 한다. 돈은 많이 들지만, 한다고 수익이 늘어나는 건 아니었기에 기존 컴캐스트 경영진은 매우 완만한 속도로 진행했다.
덕분에 소비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유재원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인프라를 깐다고 손해가 나는 건 똑같다. 하지만 고속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다. 30억 달러라는 소리에 취재진이 적잖게 놀라는 모양새지만, 그게 21세기가 되면 3천억 달러, 어쩌면 그 이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점을 잘 아는 유재원이다.
다음날.
유재원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기 전, 실리콘밸리 사무실에 들러 마지막 업무를 보았다.
평일이라서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지만, 스탠퍼드 대학교 헤네시 총장님으로부터 패스트트랙 패스를 정식으로 받은 유재원에게 출석은 더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보고가 있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차기 버전에 대한 설계였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버전 1.0을 출시한 지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슬슬 2.0에 대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유재원이 차기 2.0 버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파일 시스템의 개혁이다. 지금은 도스 시절의 FAT 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상태인지라 파일 이름으로 8글자. 확장자로 3글자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파일에 대한 접근 권한을 로우레벨 차원에서 차등을 둘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용자의 하드디스크를 뜯어서 다른 컴퓨터에 붙이면 중요한 파일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암호를 따로 걸어 놓았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대부분 사용자는 귀찮다고 암호를 설정하진 않는다.
덕분에 안드로이드 1.0의 보안은 반쪽짜리인데, 2.0에서는 파일 시스템을 개선해서 인터넷 시대를 완벽히 대비하도록 설계했다. 덤으로 8글자에 불과한 파일 이름 제한도 공백이나 각종 특수기호나 상징 문자를 다 사용할 수 있게 푸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안드로이드 파일 시스템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개발하겠습니다.
ID 톡으로 연결된 안드로이드 사업부 사장 케빈 존슨이 다부진 표정과 목소리로 답했다.
표정, 그리고 목소리.
지금 ID 톡 채팅창 한쪽에는 저 멀리 레드먼드에 있는 케빈 존슨과 단순히 텍스트로만 연결된 게 아니었다. 320*200이라는 매우 낮은 해상도이지만, 하이칼라가 적용된 실사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다.
이른바 실시간 화상채팅이다.
위성 전화와 전용 장비를 통해 화상 전화를 할 수 있는 특별 서비스가 있기는 했다. 이제는 ISDN 급 인터넷과 ID 톡 그리고 펜티엄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안드로이드 1.0에 패치를 통해 동영상 코덱이 추가되었고, 이에 맞춰 ID 톡도 버전업이 되었다.
버전업의 가장 큰 이유는 화상 채팅이었다.
통신속도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면 선명한 화질과 깨끗한 음질을 즐길 수 있다. 이를 통해 의사소통의 폭도 확대되었다.
다만 아직은 지금처럼 IT에 익숙한 회사에서 사무용으로 쓰는 수준이고, 평범한 일반인들이 쓰는 경우는 그다지 많진 않았다. 서로 ISDN 급 이상의 인터넷이 연결되어야 하는데, 인프라가 아직 거기까지 확대되진 않았던 탓이다.
“다음은요?”
캐빈 존스와 안드로이드 2.0 준비에 관한 논의를 마친 유재원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하이테크 연구소 소식입니다. 러시아에서 온 것도 있고, 레드먼드에서 온 것도 있습니다.”
유재원의 오른편에 앉은 최강욱이 다음 보고서를 전해줬다.
살펴보니 우려할 건 없었다. 유재원이 알고 있는 흐름과 똑같았다. 레닌그라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뀌었고, 부시장에 푸틴이 임명된 것도 일치했고, 러시아의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것도 같았다.
보고서는 러시아의 ID 하이테크 연구소의 소식이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하이테크 연구소에 문을 두드리는 두뇌들 숫자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특기도 다양해서 핵은 물론이고 인공위성이나 항공까지도 다양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있는 하이테크 연구소는 미하일이 책임지고 있었고, 능력 검증이 끝난 인재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미국행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렇게 계속해도 되는 건지 문의를 하는 것이다.
샤일로프 박사의 문의도 있었다.
미국 레드먼드에 있는 ID 하이테크 연구소는 샤일로프 박사의 관리하에 운영 중이다. 처음엔 핵물리학자를 중심으로 연구소가 구성되었으니, 원자력에 대해 연구를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온갖 분야의 능력자들이 다 들어오고 있다.
이들의 특기를 정리하는 건 일이 아닌데, 연구 과제를 할당하는 게 문제였다. 과제를 내주었으면 그에 맞는 예산을 내줘야 하는데, 얼마나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사람이 대폭 늘었네요? 그럼 예산도 늘려줘야죠.”
“예, 그런데 무슨 연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소련에서 오신 분들이라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해도, 선뜻 나서서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제일 높은 양반이 손가락을 가리키면 그쪽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게 공산주의의 특징이었으니까.
유재원은 하이테크 연구소에 속한 연구원, 석학들의 숫자와 특기를 헤아려 보고 잠깐 고민했다. 그리곤 곧 답을 쏟아냈다.
“소형 원자로는 지금도 하고 있지만, 인원과 장비를 더 보강해서 진행해주세요. 이론이 만들어지고, 설계도 끝나면 직접 제작도 해볼 거니까요. 그리고 통신용 인공위성도 연구하면 좋죠. 음, 무인기! 특히 쿼드로터 방식의 무인기도 집중적으로 연구해볼 아이템이죠. 다양한 디지털 휴대용 장치도 있고요.”
유재원이 아이템을 말할 때마다 최강욱이 수첩을 펴고 메모했다.
그냥 아이템의 이름만 메모해도 되는데, 토시 하나까지 다 적었다.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의지가 그대로 보인다.
“음, 그리고 포토 프린터 개량은 끝났나요?”
ID 그룹이 출범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유망한 스타트업기업을 비롯해 기술은 있지만, 마케팅 실용화 실패로 거하게 말아 먹은 기업들도 인수했다. 시제품까지 나온 회사라면 ID 테크놀로지의 자회사로 편입했고, 기술만 있으면 하이테크로 옮겼다.
포토 프린트 기술은 테크토닉이란 회사로부터 기술 일체를 인수한 것이다. 테크토닉은 수혈된 자금으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고 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후 테크토닉의 핵심 개발자들은 하이테크 연구소로 이적했고, 여기서 유재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포토 프린트 기술의 개량 작업에 돌입했다.
“예! 드디어 회장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개량했습니다.”
유재원이 원하는 수준은 기존의 기술을 차원이 다르게 탈바꿈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적당한 화질에 빠른 속도를 원했다. 특히 속도에 더 주안점을 주어서 출력을 명령하면 10초 안에 출력을 완료하는 게 중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빠른 포토 프린트 기술을 디지털카메라와 결합한 장치로 93 엑스포에 출품할 제품을 만들 생각이기 때문이다.
바로 스티커 사진기였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제품인데, 예전보다 일찍 시장에 선보일 예정이다. 분명 엄청난 반향이 올 거라고 확신하는 유재원이다. 물론 ID 그룹이 스티커 사진기 사업을 할 건 아니고, 여기서 파생된 기술을 바탕으로 디지털카메라, 영상처리, 사무용 프린터 시장 등에 진출할 예정이었다.
“샘플로 출력한 사진이랍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사진 몇 장을 유재원에게 넘겼다.
스탠퍼드 전자공학과 연구실 칠판에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하고 있는 걸 교수님 중 한 분이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 사진이다.
원본과 비교하면 화질의 열화는 조금 보이지만, 10초 만에 출력되는 포토 프린터라고 하면 적당한 품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유재원은 AMD CPU 1만2천 개로 구성할 클러스터 서버의 준비 상황 등등, 잡다한 업무를 오후 늦게까지 처리했다.
저녁 즈음 공항으로 이동했고, 다행히 연착 없이 예정된 시간에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국제공항은 오랜만에 난리가 났다. 그 주인공은 역시나 유재원이었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공항이 마비되는 데, 이번엔 특히나 심했다.
수학계의 7대 난제 중 하나를 해결하기도 했고, 75억 달러짜리 컴캐스트 인수 건도 있고, 전명헌 의원이 준비한 성대한 환영식까지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면서 인터뷰도 하고, 전명헌 의원과 여러 가지의 포즈로 사진도 찍은 후에야 겨우 김포 공항을 벗어 날 수 있었다. 대중 앞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진 유재원이지만 만세를 하면서 사진을 찍는 건 참으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고난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항에서 푸닥거리를 크게 한 덕에 덕진리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는 점이다. 기자들의 행태를 보면 집에 가는 길까지 따라 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예전에 파파라치 때문에 사고가 난 적이 있어서 그런 건 지양하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온 유재원은 하루의 휴식을 취한 뒤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다들 예상했던 건 전명헌 회장의 대선 출마 지지 선언이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이뤄진 스케줄은 TG 이용권 사장과의 미팅이었다.
원래는 다들 예상했던 것처럼 전명헌 의원의 지지 선언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용권이 급히 전화해서 청와대와 TG의 물밑교섭에 갑작스럽고도 커다란 변화가 있음을 알렸기에 급히 변경되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공지가 하나 있습니다.
이 글 '회귀로 압도한다'는 조아라뿐만이 아니라 카카오나 네이버 등등 편당 결제 사이트에도 올라가고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시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조아라가 제일 빨랐고, 나머지 사이트에는 뒤늦게 올라가는 식이었습니다.
조아라는 제가 바로 올리고, 나머지 사이트는 매니지먼트사에서 교정 작업 후에 올리는데, 이때문에 하루 이상의 차이가 나고 있다네요.
편당 결제 사이트는 이 시차를 없애주길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아라 연재를 한 번 정도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목요일까지 연재하고, 금요일은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금요일에 제가 쉬는 건 아닙니다. 먼저 올라가는 사이트만 바뀌는 거니까요.
독자님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