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16화 (216/1,007)

[216] 로열로드 (王道) ==============================

탕!

"그걸 말이라고 해요?"

찻잔이 올려진 원목 테이블이어서 그런지 손바닥으로 내려치니 소리가 크게 났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문이 열리면서 검정 양복의 건장한 사람 몇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머쓱해졌다. 소리가 커서 큰 싸움이라도 난 것 같았는데, 딱히 그런 건 없었기 때문이다.

“물러가 있게.”

더욱이 높으신 분이 손짓으로 나가라고 하니 인사를 한 번 하고는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는 바로 노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단독 영수회담 자리였다. 기자들 앞에서 노 대통령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 9월 1일에 전격적으로 성사 되었다.

대화 분위기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김영삼 총재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고, 노 대통령은 특유의 느긋한 표정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급할 게 없는 건 노 대통령이었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김영삼 총재였으니 이런 모습이 연출되는 건 당연했다.

더욱이 느긋한 노 대통령은 본인의 노후 대책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즉, 선경의 이동통신 사업 진출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밀어주기는 실패했으니, 플랜 B로 한국 이동통신의 민영화 계획이 만들어졌고, 이미 실무선에선 시작된 상태였다.

“지금 여론이 어떤 상태인지 정녕 모릅니까!”

급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영삼이 테이블을 탕탕 치는 것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노 대통령의 플랜 B는 본인의 대권과 무관하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무관함을 넘어서 함께 발을 담가야 하는 수준이었다.

“압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요? 대세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김영삼 총재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지만, 노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중에겐 보통사람이니 물태우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노 대통령이었고, 차기 대선이 멀지 않아 레임덕이 찾아와서 이젠 정치인들 사이에도 존재감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있다면? 여론 조사에서 전명헌 의원이 치솟는 건 안 보입니까?”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99%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김영삼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김 총재가 무얼 우려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니 준비를 잘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김영삼 총재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정치 9단인 김영삼이 노 대통령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탄탄한 지지 기반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 의원의 지지도가 치솟아도 그게 투표에서 득표로 연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김 총재는 안심하시고 약속만 잘 지켜주면 되는 겁니다.”

선경의 제2 이동통신 포기로 다급히 만들어진 플랜 B는 차기 대통령이 약간의 힘을 써줘야 하는 방식이다. 한국 이동통신의 민영화에서 최종 승인은 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안색이 순간 여러 번 바뀌었다.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기도 했고,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건 보상심리였다. 그의 정치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군부 출신보다 훨씬 더, 아니 차원이 다르게 나라를 잘 다스릴 자신이 있다.

이를 위해 밀실야합이라는 3당 합당까지 과감하게 했던 김영삼 총재였다. 이제 와서 뒤로 미루기에는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

“약속을 꼭 지키시길 바랍니다.”

결국, 김영삼의 입에서 타협의 말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그 말을 기다렸던 노 대통령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명헌!”

청와대에서 단독 영수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김영삼은 이를 빠드득 갈며 전명헌의 이름을 내뱉었다.

현재 김영삼에게는 노 대통령보다 더 증오스러운 이름이었다. 선경을 걸고넘어지는 건 좋다. 그런데 그걸 꼭 자신과 결부시킬 건 뭐란 말인가.

“유재원!”

전명헌이 가는 길에 빠지지 않는 존재가 유재원이다.

통일 국민당이 파란을 일으킨 뒤에 유재원의 지원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영삼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유재원이 얼마나 큰일을 해낸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유재원의 설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이제 거의 확신 단계였다.

전명헌 같은 사람이 ‘올바른 성공의 기억’이나 ‘긍정적인 공유’ 같은 단어를 말할 위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재원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더욱 싫어지는 김영삼 총재였다.

9월 1일.

유재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조던 신발에 헐렁한 청바지, 체크무늬 셔츠에 스탠퍼드 'S'자 마크가 선명한 니트티를 걸쳐 입은 그야말로 무난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이다. 머리 모양도 따로 바르는 건 없이 헤어드라이어로 이마가 훤히 드러나 보이게 뒤로 넘기는 모양만 잡았다. 여기에 셸 북 하나 달랑 들어있는 백팩을 걸치니 완벽해졌다.

자세히 보면 걸친 옷의 브랜드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겠지만, 그냥 보면 그야말로 무난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다시 한 번 스타일을 확인하는 유재원이다. 그리고 한숨이 푹 나왔다.

대학생이라는 테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냥 보면 아직도 중학생으로 보였다. 더욱이 미국인은 동양인을 훨씬 더 어리게 본다고 하니 걱정이 더 컸다. 수염이라도 좀 나면 좋겠는데, 아직도 코밑엔 솜털뿐이다.

미국에선 어리게 보이는 게 그다지 좋은 건 아니지만, 한국이라면 플러스가 되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기에 더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거울에서 벗어난 유재원은 곧장 현관으로 갔다. 신발장 바로 옆에 거치 된 전기 자전거를 집은 유재원은 문 열기 버튼을 눌렀다.

“좋은 아침입니다.”

현관 앞에는 경호원 둘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유재원을 근접에서 경호해 주는 켄과 그렉이다.

유재원은 캠퍼스 안에서까지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레밍턴이나 앨런 등의 임원들은 절대 반대였다. 불의의 사고는 방심했을 때 터진다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게다가 최근 유재원은 전명헌에게 전화를 걸어서 몸조심하시고 경호에도 신경을 쓰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경호를 안 받으면 그렉과 켄의 일자리도 사라지는 거라서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대신 그렉과 켄은 평소 차고 다니던 총은 내려놓고 3단 곤봉 정도로 무장을 간소화하는 것으로 절충안을 찾았다.

학교에 총을 차고 들어가는 건 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총기 사고가 터졌을 때 미국 전역이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다행이라면 유재원이 전생에 죽을 때까지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났다는 뉴스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 갑시다!”

경호에 대한 지침이나 숙지 사항들은 어제 다 주고받았기에, 따로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인사를 마친 유재원은 전기 자전거에 올라타고 출발했고 경호원은 자동차를 타고 뒤를 따랐다.

원래는 둘 다 자전거를 타기로 했는데, 전기 자전거가 트러블이 날 수도 있고 날씨가 갑자기 나빠질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자동차도 그냥 세단이 아니라 대형 SUV 차량으로 자전거를 넣을 공간은 물론이고 여분의 바퀴나 배터리도 준비되어 있다.

개강 첫날이라 그런지 수업에는 여유가 넘쳤다.

개강한 날 바로 과도한 수업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거의’라는 단어다. 특이한 학생이 많은 만큼, 특이한 교수도 많은 게 스탠퍼드였다. 전자공학과의 전공 필수 과목 중엔 수학 과목도 있었는데 첫날부터 진도를 쭉 나가기 시작했다.

선행학습은 전생에서 다 끝낸 유재원은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대신 첫날이라고 방심한 길버트 오웬 같은 학생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더욱이 교수님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기까지 해서 당황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첫날부터 진도를 빼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다음 강의실로 옮기면서 한탄을 하는 길버트였다. 유재원이라면 교수에게 바로 따졌을 텐데 소심한 성격인 오웬은 그나마 친해진 유재원에게 한탄을 늘어놓는 중이다.

“괜찮아. 뭐 답도 틀린 건 아니었잖아.”

유재원은 어른스럽게 답했다.

교수님의 질문은 고등학교 수학 수준이라서 웬만해선 다 풀 수 있었다. 오웬도 공부를 매우 잘하는 축에 속했기에, 답이 틀리진 않았다. 단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좀 더듬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았던 유재원은 몸을 틀었다.

“난 가볼 데가 있어서.”

점심때가 다 되었기에 오웬은 당연히 식당으로 가던 중이었지만, 유재원은 아직 볼 일이 남았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한국이라면 혼자 밥 먹는 것을 꺼리겠지만,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에선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웬도 마찬가지인지 오웬도 쿨하게 말하곤 제 갈 길을 갔다. 혹시 마음이 상한 건 아닌지 마음이 쓰여 조금 지켜보던 유재원도 움직였다.

“어서 오게.”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전자공학과 교수님들이었다. 특히 유재원이 수강신청을 한 과목의 교수진이 다 있었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학과장을 비롯해 다른 교수님도 제법 있었다. 전자과와 매우 친한 응용 수학과는 물론 생명공학과도 있었다.

교수들 숫자가 20명은 훌쩍 넘어서 작지 않은 랩이 가득 차 보였다. 그럼에도 더욱 놀랄 일은 불참한 교수들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다들 안녕하세요?”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모여 있었기에, 유재원도 한 번에 인사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시점에서 교수들이 이렇게 모여있는 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재원이 하려는 것 역시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오, 자네가 그 유명한 젊은 회장님? 역시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실물을 보니 확실히 충격적이구먼. 어려도 너무 어려!”

“그러게. 나는 저 나이 때 라디오나 분해하고 놀았었는데. 벌써 대학 입학이라니. 세상이 달라지긴 했어.”

“어디 출신이라고 했지? 노스 코리아라고 했던가?”

"사우스 코리아라고!"

유재원의 인사에 교수님들이 중구난방 떠들기 시작했다.

“이봐! 테스트 진행 안 할 거야? 점심은 빨리 먹어야지!”

다행히 먼저 나서서 교수들을 진정시키는 분이 있었다. 전자공학과 학과장인 다이엘 캐먼 교수였다.

“유재원, 자네가 이해하게.”

유재원은 슈쳉 장 교수를 통해 특별 과제 수행으로 출석일에 인센티브를 받을 방법을 알아봤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유재원만 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괴짜가 참으로 많이 들어오는 스탠퍼드였다. 그리고 그런 괴짜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도 스탠퍼드 대학교의 자랑스러운 문화였다. 수많은 괴짜 중에 유재원처럼 학교는 대충 다니면서도 졸업장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 괴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패스트트랙이란 이름의 테스트였다.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니다. 그렇다고 불법도 아니었다.

“아주 악명이 높아서 패스트트랙 테스트에 도전하는 이가 거의 4년 동안 없었거든.”

미국 대학교의 특징은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려운 것이다.

스탠퍼드 역시 다르지 않다. 오히려 명문대라는 특징 때문에 입학도 어려운데, 졸업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대학교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탠퍼드였기에,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학습 분량과 리포트, 시험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학습을 건너뛰려면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증명을 해야 한다.

“테스트는 간단하네. 칠판에 적혀 있는 문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풀면 통과일세.”

다이엘 캐먼 교수가 거대한 랩 한쪽 벽을 가리켰다.

갈겨 쓴 낙서가 잔뜩 되어서 타이포그래피 같은 낙서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딱 봐도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제한 시간은 얼마인가요?”

왼쪽 끝에서부터 차근차근 보는 유재원이 다이엘 캐먼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캐먼 교수는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비단 캐먼 교수뿐만이 아니라 함께 있던 다른 교수들 역시나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제한 시간? 그러면 너무 짧아 보이지 않나? 기간이라고 해야겠지.”

기간이라니?“

“최대로 봐준다면 학기 말이려나? 시험 성적이 나오기 전에 통과해야 패스를 줄 수 있으니 말일세. 그러니 풀지 못하겠거든 패스트트랙은 포기하고 학과 학습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이야. 패스트트랙에 집중했다가 정규 시험도 망치고 통과도 못 하면 본인의 손해이니 말이야. 그리고 문제를 푼다고 해서 좋은 점수는 나오지 않을 걸세. 패스하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건 별개니까.”

아하!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문제가 엄청나게 어려워서 쉽게 풀지 못할 거라고 교수님들이 자신하는 모양이다.

자, 그러면 진짜 얼마나 어려운 문제들인지 한 번 제대로 볼까.

“호오!”

교수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

칠판에 적혀 있는 문제를 보니 과연 먼저 경고를 할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도전자들이 풀 거라고 기대하고 적은 것인지 의심이 가는 문제도 많았다.

리만 가설, P-NP 문제, 호지 추측, 푸앵카레 추측 등등. 수학계의 최종 보스, 7대 난제들이 여기 왜 적혀 있을까?

아무래도 스탠퍼드식 농담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시 뒤로 가니 좀 나은 문제가 보였다. 전자공학과용 문제로는 집적회로 설계나 최적화 문제, 통신 신호 처리 알고리즘 최적화, 임베디드 시스템 설계 등등.

전자공학과의 수업을 충실히 들었다면 그나마 도전해볼 문제들도 좀 있었다. 물론 ‘그나마’라는 건 응용 수학과의 7대 난제와 비교해서이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이가 풀기엔 상당한 난이도였다.

“자, 무얼 풀겠나?”

다이엘 캐먼 교수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다른 교수들도 모두 유재원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유재원이 선택할 문제를 두고 내기라도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유재원은 짧게 고민했다.

“음, 전 이게 재미있어 보이네요.”

딱 10초를 고민한 유재원인 바로 문제를 선택했다. 그러자 교수들 사이에 강렬한 파문이 퍼졌다.

“응? 이봐 그건 푸앵카레 추측이라고.”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다이엘 캐먼 교수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수학계 7대 난제는 괜히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찾아온 응용 수학과 교수들이 재미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이 선택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네! 괜찮아요. 그러면 이쪽은 지워도 되죠? 풀이가 약간 길 것 같거든요.”

더 나아가 유재원은 칠판지우개를 들더니, 푸앵카레 추측 아래에 있던 문제들을 싹 지워 공간을 만들었다.

교수들의 반응은 개성적이었다.

허세를 부린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하룻강아지가 7대 난제를 몰라보고 만용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래도 부정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를 써넣은 응용 수학과 교수는 풀이를 보기 위해 유재원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유재원은 교수들의 반응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짧은 묵념을 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이후 분필이 들린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앵카레 추측의 증명이 시작되었다.

“으음!”

교수들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 딱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유재원의 옆에 딱 붙어 있던 응용 수학과의 코너 교수는 위트가 있을지언정 허풍을 받아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유재원이 판서 중인 증명법이 엉망이었다면 바로 그만하라는 말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 코너 교수는 지금 유재원이 한 줄 써 내려갈 때마다 헉하는 소리를 내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팔짱을 끼며 상황을 지켜보던 교수들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감지했고, 앞다퉈 칠판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푸앵카레 추측이란 ‘3차원 공간에서 모든 닫힌 곡선(폐곡선)이 하나의 점으로 모일 수 있다면 그 공간은 구로 변형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7대 난제 중 하나였지만, 21세기가 되면서 이후 수많은 학자가 7대 난제에 집중해 하나씩 격파해나갔다. 마지막 난제는 당연하게도 소수의 비밀을 담고 있는 리만 가설이었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았고, 결국 특이점을 돌파한 인공지능까지 참전했을 정도였다.

하여튼 7대 난제 중에 제일 먼저 풀린 것이 푸앵카레 추측이었다.

처음엔 그리고리 페렐만이 증명했고,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단순하고도 간략한 증명 방법이 나왔다. 지금 유재원이 칠판에 쓰고 있는 증명법은 기술의 특이점을 돌파한 S급 인공지능 GS-X가 도출한 증명법을 기계심리학 모듈을 통해 사람이 알아볼 수 있게 포팅한 해법이다.

그리고리 페렐만의 증명법 분량이 A4용지 57장 분량이었다면, GS-X의 방법은 A4용지 3장에 불과했다.

기계심리학 모듈은 당연히 유재원의 업적이었고, 그것이 실제 동작한다는 증명을 바로 푸앵카레 추측으로 해냈었다. 그러니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지 않고도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다.

현대 수학계가 수십 년을 도전해도 풀지 못한 난제를 증명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수식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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