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로열로드 (王道) =========================
“합작의 대가로 꼭 49%이어야만 합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불안한 눈빛으로 물어보는 쿠타라니 켄이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아 하는 탄식이 나오는 쿠타라니 켄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안도감도 있다는 걸 유재원은 놓치지 않았다.
쿠타라니 켄의 안도감이란 ID 그룹이 직접 게임기 사업을 시작할 마음이 지분 획득보다는 뒷순위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고, 유재원은 이미 그것까지 다 읽은 것이다.
사실 어제 집에 온 후부터 쿠타라니 켄은 유재원의 손바닥 위에 있다. 어마어마한 신기술을 숨기지 않고 다 보여줬고 셸 북을 밤새 사용해보라고 던져주기까지 했다. 유재원은 쿠타라니 켄이 셸 북을 분해해도 감수할 작정이었는데, 쿠타라니 켄이 그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쿠타라니 켄의 호감을 사려는 조치였다.
“네! 49%가 정당한 대가라고 봅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모자라서 유재원은 단호히 말했다. 49%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마, 만약 SCE가 지분을 맞춰드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좀 부담이 되긴 해도 직접 진출할 수밖에요.”
쿠타라니 켄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부담이 된다고? 이렇게 기술도 있고 돈도 넘쳐나는 ID 그룹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나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게임기가 아니라 다른 신규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부담된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후면 레밍턴의 출산·육아 휴가가 시작된다. ID 테크놀로지에서 유재원을 대신해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해주었던 레밍턴의 빈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앨런이 사장 대행을 맡기로 했지만, 앨런 역시나 할 일은 산더미였다.
부사장을 뽑으면 간단하지만, 믿고 맡길 임원을 뽑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후보군을 놓고 검증 중이다. 유재원 앞에서는 싹싹하게 잘하는데, 부하들에겐 꼰대처럼 막하는 사람이라면 조직력이 와해하는 건 금방이다.
21세기라면 유연해진 조직문화를 통해 내부 고발도 잘 돼서 감지가 쉬운데, 지금 1992년은 미국이라도 그런 걸 기대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꼽을 때 잘 꽂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모두 다 성공한 것 같은데, 앞으로가 문제다.
사실 후보는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검증 단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심지어 검증 단계에서 조직력을 해치는 임원을 발견해서 해고하기도 했다.
성추행으로 한 건, 쓸데없는 갑질로 한 건이다.
능력 좋고 인성도 좋은 사람 찾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ID 그룹은 지금 조직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바로 컴캐스트 인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컴캐스트의 종업원 수는 1만 명이 넘는 초거대 기업으로 북미 전역에 영업점을 가지고 있다. 케이블을 유지 보수하는 인력도 상당하다.
지분을 인수하고 경영은 이제껏 했던 대로 놔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컴캐스트의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경영과 영업은 이미 미국에서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다. 그걸 그대로 두는 건 유재원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컴캐스트를 인수하고 이곳의 기업문화를 ID 그룹에 맞게 고쳐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ID 그룹 전체가 똘똘 뭉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기라는 신규 시장 진출은 뒷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로드맵은 SCE의 지분 49%를 보유한 상태에서, 소니의 경영 상황에 뭔가 나쁜 변화가 생기면 그 틈에 1% 조금 넘는 지분을 추가 확보해서 SCE의 경영권을 가져온다는 계획이다.
“음, 잠깐 전화를 쓸 수 있을까요? 회사에 다시 한 번 연락해보겠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쿠타라니 켄은 다시 한 번 일본의 임원들을 설득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이요? 일본은 이른 아침일 텐데요?
유재원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쿠타라니 켄이 아차 싶었다.
지금은 오후 1시 50분이 막 지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였으니 한국과의 시차는 -16시간이다. 한국 시각이나 일본이나 같은 표준시라서 시차 계산은 똑같다. -16시간을 뒤로 돌리면 도쿄는 오전 5시 50분이다.
“급할 건 없습니다. 제가 오리엔테이션에 가기까지는 며칠간 여유는 있으니 차근차근히 하세요.”
유재원은 여유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급한 21세기가 아니다. 1992년도 사람들은 생활방식 속에 여유가 넘쳐 흘렀다. 스마트폰도 없고, 이동전화를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뉴스는 텔레비전과 신문으로 접하는 게 전부다.
유재원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스케줄은 하나도 없다.
기껏해야 3일 후에 있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는 게 전부다. 게다가 미국의 오리엔테이션은 한국과 달리 술판은 아니었다. 학교의 학사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돕고 수강신청에 도움도 주고, 교수들과 안면도 익히는 대단히 실용적인 시간으로 짜여 있다.
술판이 넘쳐나는 한국의 오리엔테이션이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스탠퍼드의 오리엔테이션은 빠지면 섭섭한 게 많았다.
유재원도 지도 교수님과 전공필수 과목 교수님들과 만나서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니 꼭 참석할 계획이다.
“아, 그렇군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찾아보던 쿠타라니 켄이 힘없이 다시 앉았다.
“저쪽에서 출근할 때까지, 그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봐요. 켄 상의 비전을 듣고 싶군요.”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 신화는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개발자인 쿠타라니 켄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ID 그룹의 기술력에 기가 죽은 쿠타라니 켄이다. 게다가 본사의 임원들과 사장님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유재원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엔 더듬더듬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에 힘도 실리고 분위기도 살아났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고, 마음에 품고 있던 비전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라 말을 할수록 점점 살아났다. 게다가 유재원도 좋은 청자였다.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의견을 말하기도 하면서 말하는 사람이 더욱 신이 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었던 메뉴가 차에서 음료로, 음료에서 식사로 바뀌었다. 급기야 술도 나왔다.
물론 유재원은 맥주 맛 음료수였고, 쿠타라니 켄과 켄스케에겐 진짜 맥주가 놓였다. 사실 유재원이 술을 먹겠다고 하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지킬 건 지키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유재원은 성인이 되기 전에는 입에 술을 델 생각은 없었다.
금주도 이젠 이력이 붙어서, 바로 앞에서 생맥주를 먹는 걸 봐도 덤덤했다. 막 회귀를 해서 청와대에 갔고, 거기서 남들은 좋은 샴페인 주고, 자신에겐 사이다만 준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역시 술이 깔리자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탐이 나네요.”
덕분에 유재원도 속마음을 바로 말할 수 있었다.
“네?”
“쿠타라니 켄 상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었는데, 지금 비전을 말씀하시는 걸 보니 게임기 사업을 이끌어갈 인재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래서 탐이 납니다.”
유재원은 말을 돌리지 않고 돌직구를 꽂았다.
쿠타라니 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어리벙벙했다. 나름 본인의 능력에 자부심이 있긴 했지만, 여기 ID 그룹의 저택에 와서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의기소침도 했고, 회사에는 큰소리치고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도 컸다.
그런데 유재원으로부터 실력을 인정한다는 말을 들으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쿠타라니 켄에게 유재원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ID 그룹이 소니에 제공하려는 기술의 가치가 SCE의 지분 49%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소니와 합작을 하려는 건 우리 회사에 신규 사업을 시작할 여력이 없어서예요. 이제 겨우 자리를 잡는 중이라서 조직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거든요. 돈과 기술은 있는데 사람이 없어요.”
쿠타라니 켄에겐 부러운 소리였다. 소니는 반대였다. 돈도 없고 기술도 부족하다. 대신 사람은 좀 있다.
“그래서 합작을 결심했는데, 소니의 경영진이 이를 알아주지 못하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할 수밖에 없죠.”
유재원의 말에 쿠타라니 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소속이 소니였으니, 소니의 입장에 맞춰 최대한의 항변과 설득을 해야 하건만, 기술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완전히 설득된 상태였기에 다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통역을 맡은 켄스케라는 직원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독자적인 움직임을 할 수밖에 없다면, 게임기 사업부의 책임자로 쿠타라니 켄 상을 쓰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음, 저는…….”
생각도 못 한 제안이라 쿠타라니 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재원은 채근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덕분에 충격에서 조금은 헤어나온 쿠타라니 켄은 본인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저는 미국을 동경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못 해봤습니다. 게다가 제가 훌쩍 떠나버리면 함께 일했던 동료들 보기에 면목도 없고요.”
거절 의사가 확실하다.
하긴, 쿠타라니 켄은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소니에서만 10년이 넘게 일 한 사람이다. 지금은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를 맡아서 모든 걸 총괄하고 있는데, 겨우 이틀 얼굴을 본 유재원이 같이 일하자고 해서 훌쩍 떠나버리면 인간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슬쩍 미소만 보일 뿐이다. 지금 거절을 말하고 있지만, 파고들 여지는 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네. 그러시겠죠. 하지만 거주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게임기 사업부는 도쿄에 세워도 문제없으니까요.”
온라인으로 업무를 보는 ID 그룹이었다. 임원들과는 ID 톡을 통해서 해결했고, 직원들 사이에는 온라인 업무처리 시스템을 만들어서 거의 모든 작업을 전산화한 기업이다. 덕분에 지리적인 요건은 크게 문제가 아니었다.
ID 테크놀로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밸리, 시애틀의 레드먼드, 서울의 강남으로 나뉜 상태였다. 심지어 여주에도 ID 테크놀로지의 패키지 공장이 있다. ID 하이테크 역시나 레드먼드 그리고 모스크바에 조직이 있다. ID 인베스트먼트 역시나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도쿄에 새로운 사업체를 낸다는 건 큰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조직 구성에 있어 책임자에게 전권을 주는 게 우리 ID 그룹의 특징이기도 하죠.”
남아 있을 팀원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유재원도 손해 볼 게 없다. 경쟁 회사의 유능한 인재들을 뺏어오면 두 배의 타격이지 않은가. 물론 전권을 주는 만큼 책임도 뒤따른다는 걸 잊으면 큰일 날 것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건 진리 아니겠는가.
“뭐, SCE와의 협상이 성공적일 수도 있고, 설사 실패한다더라도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 라이브러리, VCD는 염가에 라이센스를 내드릴게요. 게다가 우리 ID 그룹이 당장 게임기 사업을 시작할 것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쿠타라니 켄은 태산과 같은 중압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특히 지분 협상이 실패하더라도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 라이브러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화색이 돌았다.
두 가지 기술만 있어도 플레이스테이션은 일단 완성할 수 있다. 라이브 포스 피드백 기술이나 아날로그 스틱이 참 탐이 났지만, 그건 어떻게 우회할 방법을 찾아보는 게 최선일 것 같다.
그러다가 문뜩 이게 잘하는 협상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쿠타라니 켄이었다.
지분 투자가 아니더라도,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를 사용한다는 건 ID 그룹에 기술적으로 종속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나중에 ID 그룹이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면 큰 힘을 발휘할 요소였다. 개발사 처지에서 보자면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를 사용한 게임을 ID 그룹이 만드는 게임기로 포팅하기는 너무도 쉬울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ID 그룹이 낼 게임기는 라이브 포스 피드백과 같은 신기술에 VCD 재생과 같은 다양한 기술이 탑재될 것이다. 거대한 자본력으로 가격도 저렴할 테니, 소니가 제대로 경쟁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최선의 답은 역시나 49%의 지분을 주고 합작을 하는 것인데, 경영진이 그걸 받을 리가 없다. 실패가 뻔히 예상되는 길이 너무도 보인다. 그렇다고 이걸 모두 설명해 줘도 경영진은 믿지 못할 게 뻔해서 본인들의 방안을 고수할 것이다.
쿠타라니 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다음 날, 쿠타라니 켄과 켄스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ID 그룹의 저택을 떠나는 중이다.
지분 협상은 유재원과 쿠타라니 켄의 예상 그대로 파투났다. 대신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 라이브러리에 대한 라이센스만 내주었다. 가격은 2천만 엔. 한국 원화로 1억3천만 원 정도의 헐값이다. VCD의 경우엔 아예 무료로 내줬다.
이미지 포맷이나 동영상 코덱은 해당 포맷이 널리 퍼져 업계의 표준화가 된 다음에 이익을 챙겨도 늦지 않는다. 컴퓨터 기술은 이긴 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구조다. 그러니 대세가 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보면 헐값의 계약이 되었다. 하지만 기술지원도 없고, 글라이드 X2 라이브러리를 띄워 놓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도 소니가 알아서 튜닝을 해야 한다.
“잘 가세요.”
공항까지 데려다줄 롤스로이스 앞까지 나온 유재원이 손은 내밀었다.
“그동안 큰 신세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쿠타라니 켄은 아쉬움 가득한 악수를 했다. 그동안 통역을 열심히 해준 켄스케와도 악수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쿠타라니 켄이 떠났지만, 유재원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기술을 본 쿠타라니 켄은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게임기에 더 많은 기능을 넣기 위해 욕심을 부릴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경영진과 충돌이 날 수밖에 없다.
충돌이 심해질수록 유재원과 ID 그룹이 생각날 것이다. 다 잡은 물고기나 마찬가지이니, 이제 때만 무르익기를 기다리면 된다.
며칠 후.
유재원의 집에 레밍턴이 찾아 왔다. 내일부터 출산 휴가 겸 육아 휴직 시작이었기에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출산휴가를 한다고 멀리 떠나는 건 아니고, 집에 있을 것이기에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가볼 수 있다.
덕분에 이번 자리에서는 레밍턴이나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유재원이 주로 다뤄졌다. 바로 내일이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이기 때문이다.
오리엔테이션을 한다는 건 곧 입학과 대학교 생활 시작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보스가 대학교에 간다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군요.”
유재원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회사 생활만 벌써 4년 가까이했다. 보통 대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인데, 유재원인 번듯한 회사를 차려놓고 이제 대학교에 가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로 따지면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것이다.
덕분에 레밍턴은 매우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어리기만 했던 막냇동생이 벌써 대학교에 간다고?!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도 유재원은 특이하긴 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차근차근 밟아 가던 루트도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예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거대한 기업을 일군 창업자 중에 학구열이 있어 나중에 대학에 오는 사람이 있고, 뛰어난 두뇌를 가진 영재는 월반을 거듭해서 대학에 일찍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단지 유재원은 이 두 개의 루트를 동시에 타고 있어서 조금 특이하게 보일 뿐이다.
“뭐든 잘하시는 보스라서 대학 생활에 대한 팁을 드릴 건 없네요. 다만 우려하는 건 딱 하나 있습니다.”
유재원은 경청할 준비를 했다. 레밍턴이 대학을 졸업한 지는 꽤 시간이 흘렀지만, UCLA를 나온 재원이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기대하는 유재원이다. 그런데 정작 레밍턴에게서 나온 조언은 유재원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보스는 딱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네! 그게 뭔데요?”
“이성입니다.”
이성?
여자란 말인가?
“보스는 스스로 자각이 좀 부족하신 거 같은데, 걸어 다니는 복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보스는 스스로 자제를 한다면 괜찮을 거로 생각하시죠?”
“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유재원이 바로 되물었다.
“천만에요. 아무리 방어 운전을 하더라도 깜빡이도 안 켜고 돌진해 들어오는 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찬가지로 약간의 빌미만 생기면 바로 걸고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 친구 한 녀석도 미식축구 특기생이었지요. 무려 쿼터백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실력도 출중해서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은 떼놓은 당상이었죠. 그런데 스캔들에 휘말려버렸습니다. 당연히 무고였죠. 하지만 그걸 밝혀내는 데 6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유재원의 뇌리에 비슷한 케이스가 많이 떠올랐다. 합의금을 노리고 무고를 당한 스포츠 유망주들이 제법 된다. 기억의 궁전 속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져 본다면 레밍턴이 말하는 친구의 기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스가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걱정이 좀 들었습니다.”
“알겠어요.”
레밍턴의 당부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염려는 충분히 이해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한 번의 전생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된 상태다. 어린(?) 대학생들이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목적이 있는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히려 유재원은 레밍턴 덕분에 전생과는 다른 컴퍼스 라이프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커졌다. 전생에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너무 늦은 나이에 대학에 가서 제대로 된 대학 생활을 즐기진 못했으니 말이다.
조심할 건 조심하고, 즐길 수 있는 건 즐긴다! 그것이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망했네.”
유재원의 생각이 박살이 나기까지는 불과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부푼 마음으로 스탠퍼드 대학교의 전자공학과 오리엔테이션 장에 도착했을 때.
기대감은 산산이 깨졌다. 유재원은 주변에서 단 한 명의 이성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학교 교실에 한 명 정도는 꼭 있을법한 범생이, 괴짜, 샌님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유재원을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제야 현실을 인식한 유재원이다.
본인이 지망한 학부는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와 함께 언제나 최고의 남초 비율을 자랑하는 학과였다. 유재원도 그 사실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스탠퍼드니 한국과는 조금 다를 줄 알았다. 게다가 레밍턴이 어제 기대감을 잔뜩 불어넣어 주지 않았던가.
현실은 단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냉혹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공대, 그중에서도 전자공학과. 수많은 남초 학과 중에서도 최고라 자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