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11화 (211/1,007)

[211] 로열로드 (王道) =========================

“히익!”

컴퓨터 앞에 있던 쿠타라니 켄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처음엔 마음을 졸이며 읽기 시작했고, 중간부터는 됐다 싶었는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기겁하게 된 것이다.

바로 ID 그룹으로부터 온 답변서 때문이다.

답변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만큼이나 딱딱했다. 쿠타라니 켄이 직접 작성한 제안서에는 그의 열정을 듬뿍 담겨 있었지만, ID 그룹의 답변서는 감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재원의 방침을 앨런이 법률적인 용어로 형식에 맞춰 담았기에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문서 작성에 사용된 언어는 영어였다.

그렇지만 느낌과는 다르게 ID 그룹은 게임기 제작에 함께 참여하자는 쿠타라니 켄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쿠타라니 켄이 바라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던 쿠타라니 켄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헛바람을 낼 수밖에 없었다.

“49%라고?”

ID 그룹은 소니가 게임과 엔터테인먼트를 전담하기 위해 만들고자 하는 자회사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SCE)의 지분 49%를 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한다는 전제를 깔아두긴 했지만, SCE는 무려 1억 엔짜리 회사였다. 지분 49%면 4천9백만 엔이다.

그 돈이면 차라리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의 라이센스를 그냥 돈을 주고 사는 게 훨씬 낫겠다 싶다. 하지만 문서는 아직 읽지 못한 분량이 남아 있었기에, 쿠타라니 켄은 끝까지 정독을 시작했다.

“흐음.”

역시, 끝까지 끈기를 가지고 읽은 것이 다행이었다.

49%를 달라고 했던 문장 뒤로, 어째서 49%를 요구하게 되었는지 기술되어 있었다. 덕분에 본인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되었고, ID 그룹이 3D 가속 칩과 글라이드 X2 말고도 여러 가지 기술을 플레이스테이션에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도 인지했다.

쿠타라니 켄은 혹시나 본인이 놓친 게 있나 싶어 ID 그룹의 답변서를 2번, 3번 읽었다. 그러자 딱딱한 문장 뒤에 감쳐줘 있던 ID 그룹 회장 유재원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은 분명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호감이었다. 게다가 이유 없이 무조건 SCE의 지분 49%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가봐야겠군,”

제공하겠다는 기술도 직접 확인해 봐야 하고, 유재원 회장과도 직접 만나서 그의 의지도 확인해봐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건 어려웠다. 소니라는 회사에 메인 몸이었기에, 일단 윗선에 보고도 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비행기 표도 받고, 숙소도 받을 거 아니겠는가.

쿠타라니 켄은 다시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ID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 이치타로라는 일본산 워드프로세서였다. 소니도 아직은 국제화가 덜 된 회사였기에, 문서 작성에는 자국산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에휴. 이 낡은 프로그램부터 바꿔야 하는데.”

쿠타라니 켄이 한숨을 내쉬었다.

ID 워드프로세서를 비롯한 ID 오피스를 사용하다가 이차타로를 실행해 보니까 그 옛날 도스용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 같은 답답함이 몰려왔다.

틀린 것도 아니다.

운영체제의 판도에서 MS가 급속도로 몰락했고,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안드로이드가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그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 실행한 이치타로만 봐도 PC98용 프로그램을 그대로 안드로이드용으로 포팅만 해놓은 것이라 인터페이스도 어색하고 성능도 나빴다.

그러면 회사 차원에서 ID 오피스를 도입해야 하는데 변화가 느린 경영진은 그럴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직원들이 올린 종이 보고서를 받아 보는 분들이라 이치타로가 얼마나 구식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장이 되면 확 바꿔버려야지.”

야망이 철철 넘치는 쿠타라니 켄이었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지금 맡은 플레이스테이션을 성공하는 게 먼저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기에 딴생각은 딱 여기까지만 하고, 출장 요청서 작성에 집중하는 쿠타라니 켄이다.

“헤이, 릭! 이걸 보면 우리 제품만 이상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

동료의 물음에 릭 스페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둘은 며칠 전 회사의 최고경영자 앤디 그로브로부터 특명을 받은 두 명의 프로그래머였다.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에서의 성능 하락 이슈를 점검해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한 대조군으로 인텔의 경쟁사 CPU들까지 모두 가져다가 대조군으로 넣은 다음 열심히 벤치마크를 돌렸다.

두 사람이 컴퓨터 마니아가 아니었다면 너무도 지루했을 작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86부터 펜티엄까지 인텔에서 발매한 대다수 프로세서는 물론이고 경쟁사들의 프로세서까지 다 가져와서 벤치마크를 돌린 후 결과를 취합해야 했다.

여기에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의 버전도 달리해야 했다. 엔터프라이즈 버전도 있고, 애드웨어 판본도 있고, 무광고 유료 버전도 있다. 심지어 패치까지 있으니 반복 작업을 수도 없이 해야 했다.

그나마 나중엔 요령이 붙어서 좀 수월하게 했는데, 일을 시작했던 첫날이나 둘째 날까지는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까딱 잘못했으면 그렇게도 좋아했던 컴퓨터에 정이 떨어질 뻔했을 정도다.

이력이 좀 든 지금도 다시 하리면 못할 작업이었다. 다행히 결과는 순조롭게 수집되었고 이를 통해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라고 일반 판과는 뭔가 다른 기능을 넣었던 모양이다.”

성능의 하락은 엔터프라이즈 버전에서 발생했다.

애드웨어 버전의 경우엔 약간의 하락을 보였지만, 그 차이는 벤치마크 오차 범위 안에 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범인은 엔터프라이즈 버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다.

“다만 유독 우리 신제품이 그 영향을 많이 받는 거 같다.”

아쉽다는 말을 쓰기엔 좀 그렇지만 성능 하락이 펜티엄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었다.

AMD, 사이릭스 등등에서 5x86이니 5k86이란 이름으로 출시한 신제품들에서도 엔터프라이즈 버전을 사용하면 약간의 성능 하락이 있었다. 대신 486 이하 CPU에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문제는 경쟁사의 신형 CPU들의 성능 하락은 인텔 펜티엄보다는 작았다는 점이다.

펜티엄이 엔터프라이즈 버전 위에서 최대 8%까지 하락한다고 하면, AMD나 사이릭스의 CPU는 많아 봐야 4%의 하락이었다.

물론 절대적 성능에서는 그런 패널티를 받는 펜티엄이 여전히 경쟁사의 CPU를 가뿐하게 추월하고 있긴 한데, 그만큼 경쟁자와의 성능 차이가 줄어들었다.

비싸지만 성능은 확실히 뛰어나다는 걸 어필하고 있던 인텔에는 분명한 타격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났는지 알아봐야겠지?”

이제 남은 건 두 가지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인텔의 CPU가 안드로이드와 궁합이 좋지 않다거나.

어느 쪽이든 파장이 큰일이었기에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쉬울까? 안드로이드의 보안성은 알아주잖아. 까딱 잘못하면 우리 컴퓨터가 폭탄 맞을 수도 있다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시도하다가 컴퓨터의 데이터가 죄다 쓰레기로 변하는 일은 빈번했다. 어떻게 우회를 했다고 해도 해석하는 것도 힘들었다. 요즘 난다긴다하는 해커들이 다 달라붙어서 안드로이드의 보안을 뚫어 보려고 했지만, 아직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해보는 데까진 해봐야지. 이것만 가지고 앤디에게 낼 수는 없잖아.”

인텔의 CEO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릭 스페이스다.

“동의. 앤디 책상에 바로 올라갈 보고서니 대충 할 수는 없지.”

동료도 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볼까?”

릭은 피곤으로 가득한 두 눈덩이를 문지르며 호기롭게 자리에 앉았다.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요?”

-네, 이런 반응은 저도 처음이라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레밍턴의 말에 약간의 당혹감이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누는 대화는 인텔에 관한 것이었다. 1만 개라는 대량 주문을 넣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변이 없는 게 참 이상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레밍턴이 직접 인텔에 연락을 넣어 봤는데, 돌아온 대답이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한다.

뭐가 곤란하다는 것일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으니 유재원의 머릿속에 다양한 가설들이 떠올랐다.

설마 FDIV뿐만이 아니라 멜트다운 버그까지 발견해서 열심히 수정 중이라 그런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최근 배포된 패치에서 멜트다운 버그를 소프트웨어적으로 막아주는 패치를 하긴 했다. 엔터프라이즈 버전에선 깐깐하게 잡았고, 일반 버전에선 보통의 수준으로 설정했다. 그렇기에 성능하락의 폭이 버전별로 차이가 있다.

다만 인텔의 CPU만 노골적으로 성능 하락이 발생하면, 누가 보더라도 인텔을 겨냥한 게 딱 보였기에, 유재원은 파이프라인 구조를 채택한 CPU들 모두에서 고르게 적용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펜티엄에서 제일 큰 하락이 생겼고, AMD와 사이릭스의 펜티엄 호환 CPU에서도 약간의 하락이 발생했다.

인텔이라면 분명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사들도 성능이 조금 줄어들었으니 펜티엄에 멜트다운 버그가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상한 점은 인텔의 반응이다.

성능이 하락한 걸 감지했으면, 공식적으로 물어보면 될 무슨 이상한 짓을 하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설마 엔터프라이즈 버전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는 건 아니겠지?

“흠, 더 늦어지면 곤란하니 AMD로 물량을 돌리죠. 아! 그리고 AMD CPU는 성능이 인텔보다는 부족하니까 2천 개를 더 주문해요.”

-그러면 1만2천 개로군요.

“네! 5k86중에서도 제일 좋은 거로 보내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대만에 연락해서 메인보드도 AMD 호환 소켓으로 달아달라고 하고요.”

성능은 인텔이지만, 크게 모아놓고 보면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클러스터 시스템의 장점이 부족한 성능을 물량으로 메꿀 수 있다는 점이다. AMD가 인텔과 비교하면 20% 정도 성능이 떨어지면 그만큼 숫자를 늘리면 된다. 게다가 가격은 인텔보다 400달러나 저렴해서 전체 금액을 따지면 숫자가 늘어나도 도입 가격은 낮아진다.

단지 숫자가 늘어난 만큼 서버를 관리해야 할 사람을 늘려야 하고, 전력도 많이 먹는 게 흠이지만 유재원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레밍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ID 그룹의 첫 번째 클러스터 시스템은 AMD의 CPU로 결정이 났다. 나중에 인텔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 중에 첫 번째로 꼽는 게 이번 일이었다. 첫 번째 클러스터 시스템을 AMD가 선점하면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도 AMD에 최적화되었고 이로 인해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을 도입하는 기업들도 AMD의 CPU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 흐름은 ID 그룹이 일으킨 후폭풍 중엔 소규모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소니의 쿠타라니 켄으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오? 벌써요? 뭐라고 해요?”

-회장님의 제안을 고맙게 생각한다는군요. 다만 지분율에 대해 의문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접 방문해서 설명도 드리고, 조언도 청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한국으로 보낼까요?

쿠타라니 켄의 반응은 예상했던 수준이었다.

아니, 예상보다 온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분 49%를 대뜸 달라고 하면 대부분 화부터 먼저 낼 테니 말이다.

“음, 미국에서 만나죠. 저도 곧 미국으로 출발할 거라서요.”

-아, 그렇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동시에 미안하기도 하고요.

레밍턴이 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출산 휴가가 곧 시작되기 때문이다. 유급으로 한 달, 기본급의 2/3만 지급되는 두 달. 총 100일에 달하는 장기 휴가였다.

기본급 지급에 대해서 임원들 사이에 말이 좀 있었다.

당연히 임원들은 좀 과하다는 쪽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미국 사람들은 저축 같은 걸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100만 원의 예금도 없는 사람들이 미국 직장인의 반 이상이다. 그러니 월급이 없으면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아기까지 생겨서 돈 들어갈 곳이 많을 텐데, 무급으로 휴가를 주면 사표 쓰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유재원은 기본급의 2/3 정도 수준으로 급여를 주기로 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다. 유급 휴가를 받은 이들은 회사에 더욱 충성해야 한다.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안정적인 가정이야말로 튼튼한 기업을 만드는 기본 요소이니 편히 다녀오세요.”

충성의 예는 바로 레밍턴이다.

유재원의 출산 지원책이 너무도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신다. 물론 다른 평범한 직원들이 레밍턴 수준의 열성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회사의 비밀을 빼돌린다거나 다른 데 한눈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음, 약속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저택으로 하죠? 공항 픽업도 하고요.”

-VIP 대우로군요.

“네, 우리가 신생 업체라고 얕보는 사람들이 좀 많거든요. 특히 일본 기업들이 심해요.”

-예, 그린힐 부사장에게 들었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이 이끄는 M&A 팀은 아직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ID 그룹의 인지도는 너무도 떨어졌고, 일본의 부를 약탈해갔다는 악명만 높은 상태였던 탓이다.

산요의 경우 매각 의사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배터리 기술이 독보적이라는 걸 내세워서 값을 더 높이 받기를 원했다. 다른 강소기업들의 경우 보통 여러 대에 걸쳐 가업처럼 사업체를 운영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외국 기업에 자신들의 가업을 넘기는 것에 대해 지극히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내수는 꽁꽁 얼어붙어서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은 환율 덕에 슬슬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만, 내수 기업들은 답이 없다. 환율 변동으로 수입해야 할 원자재 가격은 폭등하고, 매출을 줄어드는 이중고였으니 말이다. ID 그룹 말고는 인수하겠다는 회사가 없는데도 이렇게 배짱이다.

오히려 컴캐스트의 인수가 더 빨라질 수도 있다.

앨런의 검토 결과 연방정부가 제동을 건 법 조항이 상당히 애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방 정부의 제동에 컴캐스트의 주가는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탓에, 주주들의 반발도 상당했다.

ID 그룹의 본진이나 다름이 없는 미국에서 유재원과 ID라는 로고는 상당히 좋은 평이었다. 쇼맨십도 좋았고, 사회적인 나눔도 훌륭했다. 그러니 컴캐스트의 답이 없는 기존 경영진 대신 ID 그룹에 편입되면 기업 가치가 폭등할 거라는 시장의 예상이었다. 그런데 연방 정부의 제동에 주가가 폭락하면서 물린 투자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아주 맹렬하게 행정부를 비난했고, 유재원의 편이 되어 주었다.

덕분에 유재원도 더욱 적극적인 마인드로 바꾸었다.

법적 다툼이 생긴다면, 그 근원 자체를 없애면 되는 것이다. 케이블망으로 정보통신 서비스도 할 수 있는 법을 만들면 그만 아닌가.

교장 선생님이 보시기에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니냐 하시겠지만, 냉정히 따져 봐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클린턴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표 정책은 인터넷 하이웨이, 정보고속도로였다. 인터넷 발전을 위해서 케이블망의 정보통신 서비스 전용은 충분히 조기에 달성할 수 있다.

하여튼, 미국에선 입김이 강력한 ID 그룹인데 일본에선 악한 이미지뿐이다. 그래서 일본에 간 M&A 팀도 새로운 전략을 마련하고 있고, 유재원도 미국에 오는 쿠타라니 켄을 더 특별히 대우하기로 했다.

일주일 후.

쿠타라니 켄은 이번 출장을 도와줄 직속 부하 직원 한 명을 대동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장기간 비행은 처음인지라 몸은 피곤했지만, 설렘으로 그다지 피로감은 크지 않았다. 더구나 입국심사대를 거쳐 공항 출구로 나와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우와! 롤스로이스!”

“켄스케 군, 너무 티 내지 말게.”

“그래도 벤츠도 아니고 롤스로이스잖아요!”

조그만 ID 그룹 깃발이 자동차의 그릴 끝에 걸린 롤스로이스 자동차와 정복을 입은 기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열어주는 자동차에 타자 곧 둘을 ID 그룹의 샌프란시스코 저택으로 인도했다. 유재원의 예상대로 언덕 위에 거대한 저택의 모습에 둘의 입은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은인인 레밍턴의 결혼식 선물로 쓰려고 돈을 아끼지 않고 개조한 덕에 고급스러움과 세련됨은 이 시대의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서 ID 그룹의 주인이자 증명된 천재인 유재원과 만났다.

무척이나 떨리는 자리였지만, 유재원이 먼저 나서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기에 쿠타라니 켄과 그의 부하 직원은 곧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촉박한 시일 때문에 마음이 급한 쿠타라니 켄과는 달리 유재원은 느긋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덕분에 호화로운 식사에 티타임까지 했으면서도 비즈니스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둠 좋아하세요?”

그러다가 유재원이 먼저 둠을 아느냐고 물었다.

유재원의 질문에 쿠타라니 켄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소니에서 게임을 제일 좋아하고, 잘 다루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다. 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본인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부했고, 회사에서도 그걸 알았기에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의 총괄 매니저를 시켜준 것이다.

둠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다!

“둠 후속작이 있는데 같이 하실래요?”

둠 2!!

ID 소프트웨어에서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말만 들었지, 아직 구체적인 정보는 하나도 없었던 최신작이다.

“예! 영광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비즈니스는 뒤로 살짝 미뤄둔 쿠타라니 켄과 그의 부하 직원은 유재원을 따라 이동했다.

그곳은 작은 극장 같은 방이었다.

의자는 딱 4개만 있었지만, 앞에 걸린 스크린은 120인치가 넘었다. 부자들의 세계란 이런 거구나 하며 입이 떡 벌어지는 둘이었다.

곧 전원이 켜졌고 스크린에 익숙한 화면이 나타났다. 작업표시줄, 시작 버튼 그리고 바탕화면의 큼직한 아이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바탕화면이다.

쿠타라니 켄의 눈에 둠 2 아이콘이 크게 들어왔다. 유재원은 마우스를 움직여 둠 2를 실행했다. 그리곤 자리로 돌아와서 쿠타라니 켄에게 뭔가를 전해줬다.

“우리 회사 연구소에서 만든 조이패드 프로토타입이에요.”

유재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게임기를 만드는 쿠타라니 켄에겐 너무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패드였다.

두 손으로 잡고도 살짝 남는 크기였고, 일반 패드와 달리 제법 묵직했다. 십자 방향키뿐만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으로 조종할 수 있는 아날로그 스틱이 2개나 달려 있었고, 버튼은 4개였다. 그런데 패드의 앞쪽엔 양손의 검지로 누를 수 있는 키가 더 있었다. 심지어 총의 방아쇠 같은 모양이다.

곧 둠 2가 실행되었고, 멋지고도 웅장한 타이틀 화면이 나타났다. 사운드도 끝내줬다. 두둥하고 울리는 중저음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타이틀 음악을 더 듣고 싶었지만, 여기서 왕은 유재원이었다.

유재원은 친절하게도 패드의 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도움말 화면까지 띄워 보였다.

“이제 됐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쿠타라니 켄은 키의 의미를 바로 외워버렸다. 사실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만드는 패드와 상당 부분 일치했기에 금방 외울 수 있었다. 곧이어 타이틀 화면이 돌아왔고 뉴 게임이 선택되었다.

패드를 쥔 손에 살짝 땀이 뱄다. 그만큼 얼마나 놀라운 화면을 보여줄지 기대가 너무도 컸다.

쿵!

우퍼의 폭발적 울림과 인트로 화면이 나타난 순간.

“헉!”

잔뜩 긴장하던 쿠타라니 켄이 비명을 터트렸다. 심지어 손에 쥐고 있던 패드까지 떨어뜨렸다.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고음질의 압도적 사운드도 일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 무방비 상태의 쿠타라니 켄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탁해졌네요.

다들 미세먼지 조심하시길!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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