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Command & Conquer =========================
한 달 후.
영국의 유명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 표지에 쓰러지고 있는 후지 산이 실렸다. 제목은 더 자극적이었다.
-후지 산은 침몰하는가?
일본을 물에 잠기는 후지 산에 비유하면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대국이었던 위상이 어떻게 삽시간에 붕괴했는지 냉정한 시선으로 설명하는 특집 기사가 담겨 있었다. 최근 주간지까지 뉴스 서비스를 확대한 넥스트컴 덕분에 서점에 가지 않고도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그 기사를 보는 유재원이었다.
“역시 149년 전통의 주간지 답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은 부동산 거품 붕괴를 제1의 원인으로 꼽았다.
일본의 실물 경제는 건실한데, 그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던 건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았던 일본의 땅값이었다는 이야기다. 회사들이 돈을 벌어 땅에 투기에 앞장섰고, 손바닥만 한 땅 한 평으로 수십억 대출을 받아서 저렴한 땅을 사기도 하는 갭 투자가 수도 없이 양산되었다.
부동산 가격은 늘 상승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잔치의 끝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서가 날아오는 법이고, 1989년 주가가 최고점을 찍은 후 꺾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이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라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부동산 가격까지 폭락하기 시작했고, 연쇄 붕괴로 이어졌다.
이코노미스트는 92년 5월 닛케이 지수의 폭락은 재작년부터 이어진 거품 붕괴의 연장선이었고, 이보다 더한 일본발 경제 쓰나미가 올 수 있으니 세계는 대비해야 한다며 글을 맺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유재원은 모니터를 보며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그냥 본인의 손가락만 드는 게 아니라, 기사 맨 아래에 있는 엄지손가락 아이콘을 클릭해서 숫자 하나를 더 높여주었다.
최근 넥스트컴 게시판에 업데이트된 기능으로 지금은 단순한 추천 기능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를 통해 사용자 추천순 정렬 기능이 생겼다. 이를 통해 다른 사용자들도 현재 인기 기사가 무엇인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하여튼, 일본의 현재 경제 상황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나는 그냥 지렛대 역할만 해준 거라니까.”
유재원은 기사를 보며 툴툴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일본에서는 ID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분노가 장난이 아니었다.
일본의 텔레비전을 보면 마치 유재원이 건실한 일본 경제를 망가뜨린 희대의 악당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부정은 하지 않는 유재원이다.
다만 일본 경제가 무너지는 실마리만 제공했을 뿐, 근본 원인은 경제를 엉망으로 다룬 본인들 책임이라는 것이다.
유재원이 그로기 상태의 닛케이 지수를 다시 한 번 골로 보낸 방법은 간단하다. 심리적 저지선 붕괴였다.
아무리 주가가 내려가도 이 가격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당연히 근거는 없는 미신이다. 주가는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이라서 언제든 하한가를 찍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가 차트가 생겨나고, 이동평균선이라는 기술적 분석이 생겨나면서 심리적 저지선 같은 개념도 생겨났다.
15일, 30일, 120일 등등 다양한 이동평균선에 주가가 접근할 때마다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해석했다.
120일 장기 이동평균선에 다다르면 주가가 더는 내려가지 않을 것 같았고, 5일 10일 단기 이동평균선에 근접하면 더는 상승하지 못할 저항을 받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유재원이 하락 포지션을 강화한다고 방침을 세웠을 때, 닛케이 지수는 120일 이동 평균선과 거의 근접한 수준이었다.
심리적 지지선 발동으로 이젠 바닥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매도 성향일 줄어들고, 상승에 배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재원의 ID 인베스트먼트도 기존의 포지션을 청산하면서 시장의 판단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ID 인베스트먼트는 시장의 근거 없는 판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장 마감 30분 전 다시 한 번 30억 달러에 달하는 하락 배팅을 대대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좀 빨간 불로 마감하나 싶었던 일본 거래소에는 다시금 파란색 불이 들어왔다. 차트로 보면 더욱 크게 파란색의 긴 막대기 하나가 생겨났다.
120일 이동평균선이 만들어준 심리적 저지선도 완벽히 붕괴했다. 그렇게 하루가 마감되었다. 그래도 내일은 분명 좋은 날이 될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장 막판에 흐트러지긴 했지만, 분명 바닥을 다지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월 스트리트의 탐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어떻게 1만 선을 붕괴시킬 수 있지?”
다음 날부터는 ID 인베스트먼트의 따라쟁이들 차례였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대대적인 하락 포지션을 재설정하자 그들도 동참했다. 다시금 막대한 외화가 일본 금융 시장으로 돌아와 하락 압력을 폭발시켰다. 어마어마한 큰 손들의 압력에 심리적 저지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닛케이 지수 14,000선이 바로 붕괴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한 달의 흐름을 보면 상승 마감한 건 4일에 불과했고, 나머지 18일 동안은 줄기차게 하락했다.
“하긴, 일본 정부가 워낙 바보짓을 했어야지.”
여기에 불을 지핀 게 일본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었다.
일본의 금융 시장에 외국돈이 들어오게 되면, 보유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인다. 일본 거래소의 기준 화폐는 당연히 엔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에서는 달러의 가치는 떨어지고 엔화의 가치는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수출로 먹고사는 일본엔 최악의 사태였다.
엔화 가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수출품의 가격 상승이 일어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수출에 막대한 타격이 갈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국의 부동산과 금융 시장 혼란으로 인해 흑자 도산하는 회사가 생길 정도였는데, 이제 수출 경쟁력까지 떨어지게 되면 일본에 있어 최악의 일이었다.
결국, 일본 대장성은 환율 안정화를 위해서 시장에 인위적인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환차익을 노린 투기꾼들까지 몰려들었다.
국제 환율 시장은 일본의 금융 시장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시장이었다. 파급력도 그만큼 더 강력하다.
그렇기에 인위적인 개입은 환투기꾼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본의 경우 워낙 상황이 다급해서 긴급 발표와 함께 개입을 시작했다. 일본 재무성과 세계 환투기꾼의 정면 대결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이 끝에는 뭐가 있으려나?”
실마리를 제공하긴 했지만, 그 끝은 예상할 수 없는 유재원이다.
“설마 IMF?”
IMF를 말하긴 했지만, 아직은 부정적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밀려왔을 때가 기억난다. 허약한 한국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체급부터가 다른 나라였다.
일본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건, 너무도 과한 상상인 것 같다.
“어쨌든 지금보다 더 추락할 가능성은 충분하지. 이젠 우리랑 상관없지만.”
ID 인베스트먼트는 추가로 설정한 30억 달러의 포지션도 진작 청산하고 손을 털었다. 단기 투자였지만 100%가 훌쩍 넘는 수익을 남겼다. 여기에 엔고의 영향으로 이익의 크기가 훨씬 커졌다.
추가로 투입한 자금은 30억 달러였는데, 모든 거래를 마무리하고 홍콩상하이은행으로 가져온 금액은 70억 달러에 이른다. 미리 빼놓은 130억 달러에 70억 달러가 더해지니 20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만들어졌다.
개인이 현금으로 20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한 손에 꼽을 거라고 자부하는 유재원이다.
그렇지만, 통장 잔고를 보는 유재원의 감상은 ‘음, 많네?’하는 수준이었다.
현금으로 돈을 쌓아놓고 구경을 했다면 현실감이 확 살아날 텐데, 지금은 단지 모니터 위에 떠오른 숫자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재원은 현금은 급할 때 가져다 쓸 정도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현물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부르주아라는 말이 있다. 이념대결이 한창일 때 프롤레타리아와 짝을 이뤄 수도 없이 등장했던 단어다. 부르주아는 돈을 가진 자본가를 뜻하는데, 유재원은 이보다 더 엄격하게 생산시설을 지닌 소수의 사람으로 본다.
중세였다면 땅을 가진 영주들이고, 현대에는 거대한 공장이나 서비스를 위한 점포, 유통망 등을 가진 사람들이다.
소수가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러한 수단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젠 본격적인 쇼핑 좀 해야지.”
유재원은 부르주아를 꿈꾸진 않는다.
어차피 미래가 되면 생산 혁명이 일어나면 노동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게 되니 말이다. 전생에는 생산 혁명에 몰이해와 국가나 계층의 이해관계 충돌로 최악으로 가버렸지만, 이제는 다를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고, 생산 수단과 기술을 보유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뭐가 좋을까?”
유재원의 모니터 위해 새로운 보고서가 떠올랐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이 만든 일본 기업 동향 보고서였다.
도요타, 소니, 산요 등의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부터 야스카와 전기, 화낙, 이노마타 화학처럼 소수에게만 알려진 강소기업까지도 분석한 종합 보고서였다.
본래 이건 ID 인베스트먼트의 매니저들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목표를 초과 달성한 기념으로 빈센트 그린힐 부사장부터 일반 사무직원들까지 모두 휴가를 보내준 터라 외부에 의뢰해서 받았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단체 휴가는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ID 그룹의 다른 직원들뿐만이 아니라, 월 스트리트나 한국에서도 큰 화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기를 타고 몰디브로 5일짜리 단체 휴가를 갔고, 이후 일주일의 개인 휴가까지 거의 2주 가까운 휴식이었다.
보너스도 두둑했다.
많이 받은 사람은 수천만 달러를 가볍게 넘었다. 서류만 만지던 사무직 직원도 10만 달러는 받았다.
이걸 두고 말이 많았다.
너무도 과한 보너스라는 것이다. ID 인베스트먼트 주식 1주도 없는 사람이 보너스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참 웃긴 유재원이었다.
유재원이 이렇게 큰 보너스를 책정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확고한 충성심을 얻기 위함이다. 그도 그럴 것이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매니저 한 명이 다루는 돈의 크기는 최소 억 단위였다. 이번 닛케이 지수 선물 투자의 경우엔 수억 달러는 기본이다.
당연히 빼돌릴 수 없게 안전장치가 설치되긴 했지만, 업무를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복잡한 금융 상품의 경우 비정상적인 거래를 해도 곧장 상부가 인지하기는 힘들기도 했다. 게다가 업무상 비밀을 다루는 경우도 많았다.
닛케이 지수 선물 투자는 완전히 대놓고 거래를 했지만, 앞으로는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할 때가 많았다. 투자매니저를 통해 비밀이 새는 일도 많고, 심지어 비싸게 팔아먹는 일도 많았다.
그걸 방지하는 것이 그들의 노력에 확실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판단은 유재원이 모두 결정했고, 자금도 유재원이 동원했다. 한국에서 모금한 투자금도 있지만, 그건 큰 비중은 아니었다. 그러니 200억 달러 중 거의 모든 것은 유재원의 몫이지만 0.3% 정도를 이 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에게 나눠 줘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유재원이 봤을 때 0.3%도 부족한 것 같았는데, 사람들은 많다고 난리였으니 문제였다. 그래도 본인들도 만족했고, 다른 투자회사의 유능한 사람들도 동요하는 것 같아서 만족이었다.
“흐음? 도요타? 사면 좋겠지만, 주인들이 팔진 않겠지. 설사 판다고 해도 일본 정부가 막을 거고.”
도요타에 대한 유재원의 욕심은 진심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의 승승장구는 현재 진행형이었고, 앞으로도 몇십 년간은 계속되는 현상이었다. 연비와 잔고장이 심한 미국산 자동차는 미국사람부터 거부했기 때문이다. 도요타를 손에 넣기만 하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지만, 애초에 매물로 나올 회사는 아니었다.
소니나 NTT 같은 기업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산요?”
맨 윗줄부터 서서히 내려오던 유재원의 눈길이 멈춘 건 산요였다.
업종 분류는 전자회사였지만, 정확하게 보자면 주력은 건전지와 이차전지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자제품도 많이 만들었고, 반도체 분야까지도 진출한 문어발을 자랑했다. 물론 문어발 확장을 열심히 한 기업들이 그렇듯, 히트작은 없었다. 그나마 쓸만한 건 캠코더 기술인데, 작은 크기에 좋은 화질로 제법 큰 히트했다.
“캠코더? 어차피 스마트폰이 나오면 사장될 제품인데.”
역시 유재원에겐 그다지 어필할 수 없는 제품이었다.
늘 스마트폰이 머릿속에 있는 유재원에게는 고성능 카메라, 휴대용 녹음기, 캠코더, 워크맨 등등의 제품은 조만간 사라질 제품이라고 확고히 잡혀 있었다.
“배터리 부분만 사 오면 좋을 텐데.”
산요의 핵심 사업부는 배터리였다. 원천 특허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선도적인 기술도 여럿 가지고 있다. 태양광 사업도 진행 중이어서 미래 먹거리로 쓰기에 딱 좋은 기업이다. 하지만 주렁주렁 달린 불필요한 게 너무도 많아서 매물로 나온다더라도 바로 구매하기가 꺼려진다.
“진짜 배터리 부문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유재원은 비록 투덜거리긴 하면서도 산요 옆에 별표를 찍었다. 인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표시였다.
이후 유재원의 체크 리스트는 계속 늘어났다.
니치콘이라는 고성능 콘덴서를 만드는 기업도 있었고, CNC 가공에 선두주자인 고바야시 제작소도 있었다. 특수 알루미늄합금을 만드는 오넥스라는 기업도 있었다.
별표는 계속 늘어나서 10개를 넘었다.
유재원에게 특별히 별을 받은 기업들의 공통점이라면 주력 분야에서 특출난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기업이라는 점이다.
“어디 보자.”
리스트에서 특정 기업들을 뽑아낸 유재원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선정한 회사들을 인수하는 데 얼마가 들지 한 번 대충이나마 계산해 보기 위함이다. 상장된 회사라면 어제자 종가를 기준으로 잡았고, 비상장 기업이라면 알려진 매출액을 기준으로 했다.
“응? 제대로 계산한 건가?”
공교로운 숫자가 나온 탓에 유재원은 다시 한 번 계산했다.
“30억 달러?”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기업을 인수하는데 드는 총비용이 작년 닛케이 지수에 처음 투자했을 때의 금액이 나왔다. 그때는 주가가 높을 때라서 산요 하나를 인수하기에도 벅찬 금액이었지만, 일본의 주가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 지금은 산요는 물론 10여 개의 강소기업을 추가로 사들이고도 남을 돈이 된 것이다.
유재원은 본인의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고정관념에 한 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말이다.
쇼핑리스트 작성이 끝난 유재원은 바로 빈센트 그린힐에게 보내려다가 말았다. 한창 휴가 중인 사람에게 일감을 던져주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몰디브에서 재미있게 보내고 있겠지?”
몰디브 단체 여행 후에, 일주일의 휴가가 더 있으니 대략 10일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한다.
일본의 경제가 당장 회복할 건 아니었기에,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닛케이 지수 폭락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1989년 최고점인 38,857선을 찍었다가 불과 3년 만에 10,000선이 붕괴했다. 지수를 기준으로 보면 1983년으로 되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생에는 이번 거품 붕괴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지칭했는데, 이번엔 잃어버린 20년, 어쩌면 30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참! 다른 나라는 진행할 수 있잖아.”
생각해보니 ID 인베스트먼트 임직원들이 복귀할 때까지 꼭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일본 기업의 인수는 몇 개월 동안 일본 거래소와 일을 했던 ID 인베스트먼트가 적임자이긴 했지만, 다른 나라는 아니었다.
미국, 그리고 한국은 얼마든지 적임자가 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네? 때라니요?
“케이블 사업자 인수 작업을 시작할 때입니다.”
넉넉한 잔고만큼이나 마음이 한층 너그러워진 유재원은 헨리 사무엘 넥스트컴 사장의 물음에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예에? 벌써요?
갑자기 유재원의 1:1 채팅 요청을 받고 급히 수락했던 헨리 사무엘은 깜짝 놀랐다.
ADSL 모뎀과 중계기를 완성하고서 케이블 TV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헨리 사무엘이었다. 유재원도 동의하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디데이는 올해 여름이라고 해서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었다.
“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어서 자금 마련이 두 달이나 빨라졌네요.”
-아! 그렇군요!
헨리 사무엘은 그저 잘 됐다고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바로 일본의 일을 연상했을 텐데, 천생 개발자인지라 본인이 관심 있는 기술 관련 뉴스가 아니면 잘 찾아보지 않는다.
-그럼 캘리포니아 케이블 TV와 바로 협상하겠습니다.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래요? 좋은 징조라도 있나 봐요?”
-예! 이제까지 케이블은 지상파 방송을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재전송하고 있었는데, 이제 사용료를 지급해야 하는 법이 통과됐거든요. 영세한 업체면 재전송비 내기에도 빠듯할 테니 인수하기 수월할 겁니다.
영세한 업체라.
이제 그런 말은 ID 그룹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상파 재전송비 이슈는 분명 인수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좋아요. 그러면 바로 컴캐스트에 가서 매각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세요.”
-예! 바로 수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라고요?
“컴캐스트 말입니다.”
-전국에 케이블 네트워크를 가진 그 컴캐스트 말입니까?
“바로 거깁니다. 자금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아보세요.”
헨리 사무엘은 놀라서 몇십 초간 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캘리포니아 정도를 커버하는 작은 케이블 회사를 인수하는 것도 좀 무리 아닌가 싶었던 헨리 사무엘이었다. 그런데 미국 전역에 케이블 네트워크를 가진 컴캐스트를 인수한다니.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넥스트컴의 헨리 사무엘을 깜짝 놀라게 한 유재원은 최강욱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일성 그룹의 주요 계열사 지분 확보에 집중하고 있던 최강욱에게 더욱 공격적인 매수를 지시했다. 그러면서 단지 일성 그룹뿐만이 아니라 우량한 회사가 있다면 그 주식도 매입하라고 했다.
이제는 유재원의 지시라면 진심으로 따르는 최강욱이었지만, 이번 지시만큼은 난감함을 느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일성 그룹 지분을 노린다는 게 다들 알려지면서 거래소에 나오는 매물도 적어졌고, 가격도 무척이나 높아졌기 때문이다.
목표였던 지분 10% 획득엔 큰 문제는 없지만, 다른 우량한 회사 주식을 사는 건 빠듯했기 때문이다.
최강욱이 곤란하다고 하자, 유재원은 기다렸다는 듯 20억 달러를 추가로 송금했다. 깜짝 놀란 최강욱에게 유재원은 일본에서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엎드려 절 받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최강욱의 진심이 담긴 감탄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으로 2주짜리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ID 인베스트먼트에 고심해 선정한 체크리스트를 전송하고 어떻게 해서든 매입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팔지 않겠다는 회사가 있으면 기술협약을 맺거나 지분이라도 가져오라고 했다.
재충전을 끝낸 ID 인베스트먼트는 다시 한 번 성난 사냥개처럼 일본을 향해 달려갔다.
앉은 자리에서 일련의 지시를 내린 유재원은 감회가 새로웠다.
본인의 말 한마디에 천문학적인 자본과 엘리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을 꿈꾸었고, 드디어 이뤄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실판 명령과 정복이지.”
그렇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또 우쭐대지도 않았다.
마스터플랜 전체를 보았을 때, 이제 겨우 챕터 하나를 완수한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챕터를 마무리했네요.
즐거운 주말입니다~!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 주에는 새로운 챕터로 다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