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98화 (198/1,007)

[198] Command & Conquer =========================

“추문? 비리 제보? 비자금?”

일성이 아파할 온갖 카테고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유재원의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추문이 온 세상을 다 뒤덮어도 부끄러움을 모를 양반이고, 비리나 비자금을 제보하더라도 재판에서 철퇴가 내려질 확률은 미미했던 탓이다.

김&정 법무법인으로 판사나 검사들에게 새로운 루트가 있다는 걸 알리고는 있었지만, 수십 년 공고히 쌓은 그들만의 카르텔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남은 건 역시 돈이지. 돈이 전부인 사람은 돈으로 눌러주는 게 최고지.”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 음해 사건의 본질을 돈 문제로 보았다.

ID 인베스트먼트로 개인들의 투자 자금이 무섭게 몰리는 중이다. 수신액은 벌써 조 단위를 넘었을 정도였다. 반대로 기존 증권사 영업장을 찾는 사람들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금리 몇 % 차이로 대박과 쪽박이 나뉘는 세계에서 수익률 100% 이상의 대박을 터트린 ID 인베스트먼트로 사람들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기존 금융 그룹들의 심기가 불편해졌을 것이고, 결국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일으켰다는 결론이다.

“지금 가용한 자금이 얼마지?”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 관리자용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규모는 즉각 확인할 수 있었다.

“많네?”

수억 다뤄 본 유재원의 입에서 많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닛케이 지수 선물에 30억 달러를 투자했다지만, 그 돈이 계속 투자 상품에 묶여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물 만기일은 3개월이고, 옵션 만기일은 1개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각각 3개월, 1개월마다 새로운 상품으로 바꿔줘야 한다.

이러한 사고파는 과정에서 정확한 포지션 설정으로 큰 이익을 본 ID 인베스트먼트의 잔고는 그 규모를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다.

벌써 100억 달러를 넘었으니, 유재원으로부터 많다는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음? 10억 달러? 20억 달러?”

유재원은 닛케이 지수 투자 규모를 원래 계획대로 유지하면서 한국에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크기를 가늠했다.

“20억 가자. 역시 한 번 쓸 때 크게 써야 인상에 남을 테니까.”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걸 끝낸 유재원은 곧장 빈센트 그린힐에게 연락을 넣었다.

다음 날.

-ID 인베스트먼트, 국내 투자 대폭 늘린다! 무려 20억 달러 규모!

-한국 자본으로 조성된 투자은행임에도 해외 투자에만 집중하던 ID 인베스트먼트가 한국 우량기업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해서 그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빈센트 그린힐 ID 인베스트먼트 부사장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미화 20억 달러, 한국 원화로는 1조4천4백억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신규 투자를 한국에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처럼 지수 선물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저평가 우량주 위주로 투자할 것이라 한다. 빈센트 그린힐 부사장은 세계적으로 저평가된 한국의 주식 시장에 흥미가 생겼다고 했지만, 몇 주 전 돌았던 ID 인베스트먼트 위기설에 대한 대응이라는 이유도 분명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과연 한국에서도 ID 인베스트먼트의 신화가 이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유재원은 넥스트컴 뉴스페이지에 올라온 ID 인베스트먼트 관련 기사 하나를 끝까지 보았다.

오늘은 한국행 비행기에 타기 위해서 10분 후에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건만, 자리에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업무에 집중하는 유재원이다.

“제법 날카로운 기사네.”

그렇지만 헛다리를 짚었다. 20억 달러는 ID 인베스트먼트 음해 사건을 저지른 일성에 대한 응징이다.

기자는 저평가 우량주를 매입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재원은 20억 달러 대부분을 일성의 주요 계열사들 지분을 대거 사들이는 데 쓸 작정이다.

일성 전자, 일성 물산, 일성 건설 그리고 제일 섬유 같은 일성의 주요 계열사 이사회에 이사 하나 정도 꽂아 넣을 정도의 지분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글로벌 스텐다드 기준으로 감사를 받도록 압력을 행사해줄 작정이다.

물론 이런 일을 하기에 20억 달러를 모두 소모할 필요는 없다. 일성 그룹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일성 전자의 1주 가격은 현재 2만 원 수준이었다. 90년도엔 4만 원이나 했던 주가였는데, 미래전자의 공격적인 반도체 공장 신설로 인해 반 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다른 계열사의 상황도 비슷했다. 전생과 달리 미래 그룹 계열사 주가가 크게 올랐지만, 일성 그룹 계열사들은 영 힘을 쓰지 못하는 중이다.

그러니 목표로 삼은 계열사 지분 10%를 획득하는 20억 달러가 다 들어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굳이 20억 달러를 언급한 건, 최현희 회장에게 악몽을 선사해주기 위함이다.

“승계에도 걸림돌이 되어주마.”

일성 최현희 회장의 최대 현안은 아직도 승계였다.

여러 가지 편법을 이용해서 겨우 일성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은 최현희였다. 그렇게 불안하게 쌓아 올린 지배권이라서, 후대에 넘겨주는 것도 어려웠다. 덕분에 일성은 3대 승계를 위한 준비는 최현희의 회장 취임 때부터 시작된 상태인데, 유재원은 막대한 지분을 통해 3대 승계는 물론이고 최현희 본인의 지배권까지도 약하게 만들 작정이다.

이것이 유재원의 첫 번째 반격이다.

이렇게 견제받는 게 싫으면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매입한 주식은 엄연히 투자였으니, 더 높은 가격을 부르면 당연히 팔아줄 생각이니 말이다.

대충 매입 가격의 10배 정도 불러준다면 다시 돌려줄 용의는 충분하다. 물론 유재원은 최현희가 지분을 다시 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상속세가 아까워서 별의별 편법을 다 만들어내던 양반이지 않은가.

“회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벌써요?”

컴퓨터 시계를 보니 벌써 출발할 시간이다. 잠깐 딴생각 좀 했다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유재원은 곧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100% 이자를 쳐준 두 번째 반격은 한국에서 터트릴 작정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한국행이 설렜다.

3월 20일.

유재원 일행이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일등석 표를 끊었으니, 내릴 때도 제일 먼저 내리는 서비스가 있다. 좌석 가격이 일반석과 차원이 다르니,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일찍 내리는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비행기 문제는 아니었다.

“회장님, 10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내렸다가 다시 돌아온 김대석이 땀을 삐질 흘리면서 말했다. 3월 말이라 날이 풀리긴 해도 더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알겠습니다.”

유재원도 김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아아!

그도 그럴 것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입국장 쪽에서 크게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숫자의 인파가 몰려 있다는 신호였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감을 잡은 유재원이다.

전명헌 명예회장님의 짓일까?

설마 그러랴 싶었다. 선거 유세는 유권자들이 많이 있는 거리나 광장에서 하는 것이지, 공항은 아니지 않은가.

“회장님 팬클럽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바글바글합니다. 게다가 통일 국민당 지지자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어진 김대석의 말이다.

유재원의 예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다. 팬클럽? 자신이 아이돌 가수도 아닌데, 무슨 팬클럽이란 말인가. 항상 넥스트컴을 끼고 사는 유재원이지만, 본인의 팬클럽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일이었다.

기자들이야, 늘 취잿거리가 있으면 나타나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설마 했던 통일 국민당 지지자들까지 나와 있을 줄이야.

하여튼, 전명헌 명예회장은 일반의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틀림 없다.

“공항 관계자들이 한창 정리 중에 있는데, 10분 안에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입국 심사 후에, 간단한 기자회견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해야죠.”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한 번쯤은 귀국하는 공항에서 성대한 기자회견을 해보고 싶었다.

유재원은 자리가 준비될 때까지 일단 신문을 보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루 사이에 못 보던 속보들이 상당히 많았다.

신문을 받아 펼치자마자 유재원의 눈에 딱 들어온 1면 기사가 있다.

“역시 회장님! 진짜 질러버리고 말았네.”

-전명헌 후보, 국민에게 필요하다면 재벌 해체 가능!

화끈한 전명헌 명예회장이 결국 재벌 해체까지 언급해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본인의 지원도 있으니 거기까지 가진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전명헌 명예회장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다.

분명 전명헌 명예회장은 본인이 이룰 거 다 이뤘으니 이제 상관없다는 투였을 거다.

전명헌 회장의 출신을 보면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후반 아버지의 소 판 돈을 가지고 서울로 내려와 지금의 미래 그룹을 일군 입지전적인 사람이었다.

일성을 비롯한 다른 재벌들의 출신은 대지주 출신 혹은 목에 힘 좀 주고 다닌 덕에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은 이들이 즐비하다. 오죽하면 현미유 박상권 사장님이 가져온 부산 양조도 일본 강점기 쇼와 맥주를 불하받아서 키운 것이었다.

1세대 재벌 중 오직 전명헌 명예회장만이 진정한 흙수저 출신이다. 지금이야 2등이라면 서러울 만큼 거대한 기업을 일구긴 했어도, 출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대통령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 재벌 해체까지도 들고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전명헌 명예회장의 성향 덕에 어제 유재원이 부탁한 것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했다.

유재원의 부탁은 하루에도 수십 개를 쏟아내는 통일 국민당의 공약에 하나 더 추가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명헌 명예회장의 입장에선 수백 개의 돌이 쌓여 있던 돌무덤에 작은 돌 하나를 더 얹어 달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쉽게 OK가 나왔다.

하지만 유재원의 부탁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전환사채 발행에 대한 규제 강화 법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일성 그룹을 향한 유재원의 두 번째 반격이다.

전환사채(轉換社債, Convertible Bond), 일명 CB라는 건 일반인이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물건은 아니었다.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큰 사업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 자본 조달 방법 중에는 은행에서 빌리는 게 제일 정석이었지만, 은행 문턱이 높은 회사들도 많았다. 그런 회사들은 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써서 돈을 빌리는 데, 그것이 회사 채권이다.

채권이 투자자를 유혹할 때, 높은 금리를 쓰기도 하지만 회사의 주식을 내걸 때도 있다. 빌린 돈을 상환할 때 현금 대신 회사의 주식을 주기로 하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미래에 가치가 올라갈 회사라면 전환사채를 받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회사도 자산에 마이너스인 부채를 자본으로 돌릴 수 있는 주식으로 돌려주는 것이라서 이득이었다.

일성은 이러한 전환사채를 아주 잘 이용하는 회사였다.

어디에 썼느냐 하면, 승계 작업에 요긴하게 사용했다. 전환 사채를 발행해서 최현희 회장의 자식들에게만 물려 주었고, 나중에 채권의 만기가 돌아오면 일성의 지분을 헐값에 주는 식으로 승계 작업을 했다.

일성이 이렇게 승계를 하고서야 관련 법률이 생겨나 규제가 되었지만, 이미 큰 고기는 지나간 뒤였다.

수백조에 달하는 거대한 기업을 물려받은 이가 낸 세금은 몇십억에 불과했다. 상속세율은 50%에 달하는 가장 무거운 세율이니, 그냥 계산해도 100조 원이 넘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단돈 몇십억으로 끝내버린 것이다.

유재원은 아예 길목부터 차단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기업 경영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이사회는 지분투자로 뚜드려 패고, 물 밑 언더그라운드에서 전환사채를 통해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던 승계는 입법으로 막아버린다. 그것이 ID 인베스트먼트 음해 사건의 유재원식 대응이다.

한편으로 아쉽다는 느낌도 있었다. 일성이 했던 추잡스러운 짓에 비하면 너무도 수준이 너무 고급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성 입장에선 두 가지 모두 치명타가 터지는 공격이었으니 꽤 아플 거다.

“회장님,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 그래요?”

김대석의 말에 신문을 접은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추슬렀다.

원래의 나이보다 많아 보이게 정장을 입고, 헤어스타일로 리젠트 컷으로 유지하고 있어서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았다.

김대석의 도움으로 정돈을 끝낸 유재원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미국에서 타고 온 비행기가 보잉 747 점보제트기라서 일등석은 2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가 보니 항공사 유니폼을 말끔히 차려입은 스튜어디스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유재원 일행을 보고 정렬했다. 그러더니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식의 의전은 늘 부담스럽기만 한 유재원은 같이 고개를 숙여 같이 인사를 하곤 얼른 비행기에서 벗어났다.

약간은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지만, 곧장 공항 입국장으로 가서 절차를 끝내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대기하는 동안 다른 입국자들은 모두 다 통과해 지나간 터라 기다릴 것 없이 곧장 끝났다.

20억 달러 투자 건으로 이번 한국행에 동행한 빈센트 그린힐이나, 미국에서 고용한 경호원들의 입국 심사도 간단했다. 입국 편의를 봐주라는 지시가 있었는지 몰라도 소지품 검사나 가방 검사 등도 간단히 끝났다. 물론 깐깐하게 검사를 했더라도 걸릴 건 하나도 없었을 거다.

그렇게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에 들어서자 익숙한 모습이 유재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우와아아!

유재원! 유재원!

한류 스타가 일본이나 아시아 나라들을 방문했을 때, 어마어마한 팬들이 몰려들어서 공항이 마비됐다는 뉴스를 많이 보았던 유재원이었다. 그 일이 지금 본인에게 일어났다. 김대석의 호들갑에 짐작은 했지만, 직접 나와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유재원 이름 석 자를 연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랑스럽다느니 하는 피켓을 들고나와서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도 수십 명은 되어서 유재원에게 플래시 세례를 터트리는 중이다.

그런 사람들이 수백 명이다. 수천 명씩 모이는 한류 스타들보다 숫자는 작아도, 김포 공항 입국장이 좁은 탓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보였다.

꺄악!

유재원이 손을 한 번 들어주면서 환하게 미소를 띠자 격한 반응이 나왔다. 특히나 높은 고음으로 보아하니 젊은 여성들도 상당한 숫자인 모양이다. 반면 맨 앞줄에서 스크럼을 짜고 있는 공항 경찰들이 밀리지 않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수많은 사람이 반겨주는 경험은 색달랐고, 기분도 좋았다. 하지만 공항 관계자가 나와서 얼른 이동해야 한다고 해서 기자회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기자회견장은 입국장보다는 덜 번잡했다.

회견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자들을 한정했기에 공간의 여유도 생겼다.

유재원 혼자서 기자회견장 무대에 앉고 다른 이들은 무대 아래에서 대기했다. 그렇게 시작한 기자회견은 딱 30분만 하기로 약속하고 첫 질문을 받았다.

“문화신문의 백현진 기자입니다. 통일 국민당의 지지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유재원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신문이라는 신문사는 미래 그룹의 출자로 만들어진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전명헌 명예회장과 전 씨 일가의 출자금으로 기업의 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문이다.

“전명헌 명예회장님과의 친분 때문입니다.”

짧게 끊어지는 대답에 백 기자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번 유재원의 입국 그리고 통일 국민당과 전명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내일 신문의 1면을 예약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딸랑 한 줄이면 그 많은 분량을 어떻게 때울 수가 있단 말인가.

“동시에 그분의 진정성도 믿습니다. 한 번 하신 말은 기필코 지키시는 분이 전명헌 명예회장이죠. 특히 누구나 반대했던 일을 추진해 성공한 사례는 미래 조선을 시작으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번에 갑작스러운 신당 창당과 출마로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이 참 많으신데, 제가 나서서 불식시켜 들리겠습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첫 번째 질문자는 문화신문의 백현진으로 고정된 상태이긴 해도 약속 대련은 절대 아니었다. 누구처럼 질문지를 먼저 받은 다음, 적당히 채워낸 답변지를 돌려주는 형식적인 기자회견을 하는 건 유재원의 상식에 전혀 부합지 않는 일이었다. 유재원을 보좌하는 비서진이나 임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여러 개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번 유재원의 입국은 오로지 전명헌 명예 회장의 지원유세였기에 기자들의 질문도 대부분 그곳에 모였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늘 있었다.

“이번 방문에 빈센트 그린힐 부사장을 대동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빈센트 그린힐에게 향했다. 수행단 중에 유독 튀는 풍채 좋은 백인이 있으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제가 답하는 것보다 질문을 받은 분께 직접 듣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유재원은 빈센트 그린힐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언제 한국식 예절을 익혔는지,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자리에 앉은 빈센트 그린힐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며칠 전 ID 인베스트먼트 한국 지사에 대한 음해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조사를 위해 입국했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에 기자들의 반응이 물음표였다.

뭔가 이상하다 느꼈던 유재원은 몇 초가 지나서야 이유를 파악했다. 빈센트 그린힐이 영어로 답했기 때문이다. 김대석이 급하게 무대로 올라가서 통역을 해주고서야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ID 인베스트먼트의 건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확실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자들은 빈센트 그린힐의 발언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지금이라니? 그건 이 순간부터 이제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주요 사무실이 미국에 있으니, 그 거대한 자금도 미국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재원은 주거래 은행을 수출입은행에서 홍콩상하이은행으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그 계좌는 엄연히 한국 국적이고 ID 인베스트먼트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ID 그룹의 회계 업무는 모두 한국 본사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최강욱이 해줬던 조언을 따르는 것으로, 지금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즉, ID 인베스트먼트가 20억 달러의 자금을 지금 당장 동원해 목표 회사들의 주식을 마구잡이로 매집 작업은 기자회견이 시작될 때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는 이야기다.

같은 시각.

전명헌 명예회장은 여의도 유세장에 도착했다. 김영삼, 김대중 두 거인이 100만 유세했던 그 자리였다. 그때처럼 엄청난 인파가 몰린 건 아니었지만, 수천 명 어쩌면 만 단위가 넘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몰린 상태였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통일 국민당 영등포구 후보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전명헌 명예회장이 문서 하나만 들고 연단에 올랐다. 문서는 건 참모들이 밤새 열심히 만든 연설문이었다. 노안인 전명헌을 위해 ID 오피스의 커다란 폰트로 깔끔하게 뽑은 문서였다. 그런데 끄트머리에는 참모들이 올렸을 때는 없던 자필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모두 3개의 단어다.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그리고 커다란 엑스자(X).

유재원의 부탁을 잊지 않게 꼼꼼히 메모한 전명헌 명예회장님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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