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86화 (186/1,007)
  • [186] 열혈 추종자들(Esquires) =========================

    그런데 왜 리스트 2면이지?

    최현희라면 전명헌과 나란히 있어야 할 이름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2면 최상단에 올려놓았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건, 최 회장이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행사 시작 전 10분 정도의 면담만 하겠다고 연락해왔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유재원의 촉은 정확했다.

    면담? 최현희라도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오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예전에 최현희에게 불려서 가다가 차를 돌렸을 때는 제법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후로 일성에서 뭔가 해코지를 한다거나, ID 그룹을 노골적으로 배척한다는 건 없었다. 미래처럼 그룹 차원에서 가까워지는 일도 없었지만, 일성도 ID 테크놀로지의 운영체제와 오피스를 사서 자사의 컴퓨터에 탑재했다.

    팔려간 숫자로만 따지면 일성 전자가 구매한 패키지가, 미래 전자가 구매했던 수량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 완제품 컴퓨터 시장에서의 비중을 따지면 일성이 최고였으니 말이다. 참고로 2위는 대호 정보통신이었는데, 최근에는 삼보 컴퓨터에 따라잡혀서 순위가 바뀌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는 4등도 아니고 5등 수준이었다.

    하여튼, 일성과는 필요에 의해서만 거래가 이뤄지는 비즈니스 파트너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최현희 회장이 찾아오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아마도, 부산 그룹 일 때문이겠죠?”

    “그럴 겁니다. 박 사장님께 듣기로 당사자인 부산 그룹 오너 일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일성도 판결을 뒤집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로비 중이라더군요.”

    이번 일로 제일 바쁜 분은 부산 양조를 인수하신 박상권 사장님이다.

    부산 그룹 오너의 몰락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실 분이었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부산 양조의 회계나 경영 자료들을 뒤져서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이나 불법적인 지시 사항을 찾기도 했고, 증인들과 만나서 다독이기도 하고 오너 일가의 압력을 상쇄하는 등의 일을 수행했다.

    일상적인 경영 활동 밖의 활동인데, 이로 인해서 부산 양조의 맥주 공장을 확장해 독일에서 직접 공수한 생산설비를 놓는 일은 챙기지 못하고 계시단다.

    특히 최근에 일성 그룹이 로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박상권 사장님의 개인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거부할까요?”

    최강욱의 물음에 유재원은 살짝 고민에 빠졌다.

    만나 봐야 할 말도 딱히 없고, 전생의 악연만 생각난다는 부정적인 마음과 그래도 한국 경제계의 전설이니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충돌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건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ID 파운데이션 기부자 순위. 그러니까 첫 번째 장이 이번 행사에 참석하는 VIP 목록이었다면, 두 번째는 김&정 법무법인 출범과 함께 ID 파운데이션에 큰돈을 기부를 약속한 사람들의 목록이라는 거다.

    가장 상단에 오른 최현희의 이름만 보고 리스트 읽기를 딱 멈춰서 그렇지, VIP 목록과 겹치는 게 제법 있었다.

    미래 그룹 전명헌 총회장도 상단에 있었고, 삼보 컴퓨터의 이용권 사장도 있었다.

    특이점이라면 최현희와 함께 나란히 오른 숫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0’ 하나는 더 많다는 점이다. 전명헌 회장님이나 이용권 사장이 1천만 원이었고, 최현희는 1억 원이었다. 91년도에 1억이면 21세기 초에 6, 7억 원 정도는 하는 금액이었다.

    “만나 봅시다.”

    유재원이 돈 때문에 긍정적으로 바뀐 건 아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1억이나 써냈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유재원 일행의 자동차는 서울의 서초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와, 많이 커졌네요.”

    이젠 사무실 정도가 아니라 그룹 빌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ID 그룹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장했고, 최강욱이 이끄는 서초동 사무실이 회사 전체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직원들의 숫자가 이에 맞춰 빠르게 늘어났다.

    매월 다루는 돈의 크기만 해도 조 단위였으니, 예전처럼 경리직원 서넛으로는 운영할 수 없었다.

    유재원은 미국의 조직을 정비하느라 서울은 신경 쓰지 못했다. 대신 최강욱에게 확실히 위임했는데, 그는 사심으로 조직을 짜지 않고 오로지 효율과 능력만으로 인선해서 본사의 조직 구성을 거의 마무리했다.

    서초동 본사에 상주해서 근무하는 사람들만 이제 거의 80명에 이르는데, 예전엔 건물 1개 층만 사용했다면, 지금은 5층짜리 건물 전체를 점유 중이었다.

    건물 전체를 사용하니, 아예 건물을 사자는 의견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건물주가 팔 마음이 없다고 했다.

    유재원도 본사 건물로 쓰겠다고 겨우 5층 건물을 사는 건 거부했다. ID 그룹의 확장은 지금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현재의 발전 속도라면 90년대 말에는 수십 층짜리 빌딩이 필요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본사 빌딩으로 쓰려고 도곡동의 땅을 전명헌 왕회장님께 받아냈으니, 조만간 올리면 그만이다. 물론 빌딩을 지을 때 의뢰할 곳은 당연히 미래 건설이 될 거다. 하지만 전제 조건은 전명헌 회장님이 살아 계신다는 거다.

    곧이어 최강욱은 두 사람을 유재원 앞으로 데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재무팀장 차동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감사팀장 임은경입니다.

    40대 후반의 호남형 남자와 40대 초반의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유재원을 향해 인사했다. 최강욱이 이번에 가장 공을 들인 인사였다.

    차동구는 미국 시카고 대학교 출신의 회계사로 한국통신에서 재무를 담당하기도 했단다. ID 그룹이 쓰기엔 너무도 거물인데, 최강욱의 인맥 파워를 통해 영입했다고 한다.

    사실 시카고 대학은 신자유주의의 선봉이라는 시카고학파의 성지였기에 살짝 꺼려지는 면도 있었다. 공산주의가 허구였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역시나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인데, 이를 진리로 믿고 추종하거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턱대고 실행하면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차동구는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도 아니라 지출과 수입을 정리하고 단기나 장기 계획을 짜는 일이니 그의 출신을 따지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임은경의 경우엔 검찰 출신 변호사였다. 역시나 최강욱의 인맥이었는데, 기수로는 대략 4기 차이가 난다.

    임은경이 선배였고, 지극히 희귀하다는 존경받는 검사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방검찰청이긴 해도 지검차장에 오르기도 했다. 무척이나 마초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검찰에서 여자가 그곳까지 올랐다는 건 그녀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거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의 인선은 최강욱이 주도했지만, 최종 결재는 유재원이 했다. 그래서 서류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차동구와 마찬가지로 임은경의 채용에 작은 우려가 있기도 했다. 회사의 임원 중에 변호사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ID 그룹이 수십만, 어쩌면 100만이 넘는 종업원을 고용하는 초거대 기업이 되었을 때, 강력한 파벌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감사직에 검사 출신만큼 좋은 경력은 없었다. 게다가 파벌 문제도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충분히 제어할 수 있고, 비장의 무기도 하나 만들어 놓을 작정이라 임은경의 채용에도 가볍게 사인했다.

    “두 분 모두 직접 뵈니 너무도 반갑고 기쁘네요.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두 가지입니다.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지시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것과 열심히 일하신 만큼의 대가를 확실히 받으실 거라는 약속입니다.”

    유재원의 약속에 차동구와 임은경의 표정이 한층 더 좋아졌다.

    이제 ID 그룹에서 비어있는 요직은 전략기획팀장 자리 하나다. 미래를 보는 날카로운 눈, 위기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 본사에서 간단히 일을 본 유재원은 이제 그리운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집에 돌아온 유재원이지만 쉬지는 못했다.

    아늑함을 느끼는 것도 잠깐이고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대부분 기자의 것이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전화기는 아예 코드를 뽑아 놓고, 동네 순방을 한 바퀴 돌았다. 일단 큰집에 들러 인사도 하고,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도 내드렸다.

    다음엔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기념품도 줬다. 큰집이나 다른 친척분들에게 드렸던 명품과는 다른 선물이다. 바로 스탠퍼드 대학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학용품과 배지였다.

    친구 녀석 중에 진짜 몇이나 스탠퍼드에 입학할지 모르겠지만, 이걸 보고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덕진 국민학교의 교장 선생님 그리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사이기도 하고, ID 테크놀로지의 주주이시니 찾아가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드렸다.

    고향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본 유재원은 김&정 법무법인 개업 행사에 맞춰서 10일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행사 시작 2시간 전에 일성 그룹의 최현희 회장과의 미팅이 성사되었다. 장소는 김&정 법무법인 사무소의 2층 회의실이었다.

    11월 10일, 오후 1시.

    “일성 그룹 최현희 회장님입니다.”

    최강욱의 말과 함께,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일성 그룹 최현희와 김혁수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원인지 수행비서인지 모를 건장한 남자, 이렇게 셋이 최강욱의 안내에 따라 유재원이 있는 회의실 안에 들어섰다.

    최현희의 모습은 여전했다.

    청와대에서 봤을 때보다는 조금 늙긴 했지만, 유재원의 기억에 있던 모습보다는 훨씬 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 보았던 최현희는 늙고 병들어 휠체어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때였다. 반면 지금은 40대 초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이였으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덕분에 인상은 좋았다.

    어떻게 보면 프렌치 불도그 느낌도 났다. 커다란 눈에 팔자 주름도 선명하고 눈썹도 둥글넓적하게 두껍고 진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차, 쓸데없는 상상을 하느라 손님을 너무 세워두었다.

    “어서 오세요. ID 그룹 유재원입니다.”

    유재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악감정이 있다고는 해도 일단 최현희가 연장자이기도 했고, 먼 길 찾아온 손님이었으니 일어나 맞는 게 예의였다.

    “여기 앉으시지요.”

    유재원은 자리를 권했다.

    상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재원이 내려다보는 자리도 아니다. 상석이라는 게 없는 원탁으로 구성된 자리였기에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

    “고맙네.”

    최현희도 간단히 사의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재미있는 건 최현희의 오른쪽에 김혁수 비서실장이 앉았는데, 왼쪽 자리에 수행비서가 앉지는 않고 최현희 뒤에 섰다는 거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서 유재원은 처음엔 몰랐다. 그러다가 유재원이 최현희와 맞은 편에 앉고, 최강석도 옆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니지만, 일성 사람들에겐 일성의 조직문화가 있을 테니,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ID 파운데이션에 큰 기부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작은 역시나 돈 이야기였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김&정 법무법인이 일하면서 1억이든, 10억이든 예산이 필요하면 유재원은 자신의 개인재산을 털어서 얼마든지 내줄 생각이었다. 뭔가 의도가 분명한 최현희의 1억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과찬일세. 나도 마음은 있었지만, 실행은 어려웠던 일이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일성의 중요한 고객 중에 일본의 기업들이 참 많거든. 협력사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데 자네가 총대를 메주니 마음이 가벼워졌어.”

    김&정의 법무법인이 출범 전부터 공표한 것이 강제노역 문제와 피해 할머니들의 변호였다. 김창완, 정병우 변호사가 직접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본인들의 능력과 의지, 그리고 김&정 법무법인 뒤에 있는 ID 그룹을 설명하면서 변호사 선임계를 받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발 벗고 나서 주는 이들이 없어서 집회라도 시작했던 것인데, 전관 변호사들과 유재원이 나서주었기에 할머니들도 기꺼이 자신들의 변호를 맡겨 주셨다. 또한, 김&정 법무법인의 활동을 돕겠다고 나서는 변호사들도 많았고, 법무법인의 실무를 이끌 사무장과 사무직원들을 뽑는 것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

    오늘 개업식과 함께 정식으로 업무를 개시하면 몇 개월 이내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를 향해 피해배상 소송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찬이시네요. 그 돈은 김&정 법무법인의 사회공헌 활동에 귀중히 쓰겠습니다. 회장님과 같은 분이 저의 작은 일에 도움을 주시니 천군을 얻은 것 같군요.”

    최현희의 말에 유재원은 가볍게 답했다.

    칭찬을 받았음에도 그다지 고마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의례상 답했다는 투가 역력했고, 최현희도 확실히 인지했다. 덕분에 최현희 옆에 앉은 김혁수의 기색이 살짝 변했다.

    사실 유재원이나 최현희나 이러한 활동 이면에는 ID 그룹과 일성 그룹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걸 다 인지한 상태였다.

    이른바 사람 뺏기 게임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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