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아메리칸 드림 =========================
#100-2
현재 PC에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능가하는 인터넷 환경은 없다.
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리와 함께 완성한 ID 웹 브라우저는 출시된 지 몇 개월이나 지났음에도 압도적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HTML 언어를 보고 화면을 렌더링해주는 중요 기능을 공개했음에도 나머지 편의성에서 후발주자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탓이다.
게다가 이번에 안드로이드 1.0의 출시와 함께 다국어도 지원하게 되면서 각국의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라온 문자를 어떤 컴퓨터에서 접속하든 다 깨지지 않고 보게 되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로 나아가는 항구가 안드로이드였다.
ID 테크놀로지의 사업은 이뿐만이 아니다.
넥스트컴도 있다. 최근 대대적인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적자로 전환되긴 했지만,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ID 소프트웨어라는 최고의 게임 개발사도 거느리고 있다. ID 테크놀로지의 커다란 돈줄로서 게임 시장을 선도하는 중이었다.
“IT 컨설팅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유재원은 한국의 유경 식품과 유경 치킨에 POS 시스템을 납품했다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루이스 프레스턴은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다. 온전히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잘 들었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대신 POS 시스템 대목에 이르자 확연히 드러나는 흥미를 보였다.
자체적으로 IT 개발 능력이 없는 기업에 그들이 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넣어준다는 게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유재원이 제시한 가격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그가 보기엔 인터넷 같은 건 싹이 트이지도 않은 미성숙한 시장이었던 탓이다. 고속 통신망 설치 등 어마어마한 사회간접자본을 퍼부어야 하지만, 수익은 미지인 그런 시장이다
“제이 회장의 귀중한 고견 잘 들었습니다. 흠, 역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셨군요. 이견의 폭이 너무도 커서 당장 기업공개를 추진하시라고 권하기는 무리겠습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한 루이스 프레스턴보다 유재원은 그저 덤덤했다.
“음, 마지막으로 조언을 드리자면 기업 공개에 대한 이점은 단지 거대한 자본조달뿐만이 아닙니다.”
“그럼요? 뭔가 더 있나요?”
“시대의 아이콘이죠. 애플, 델, HP, 마이크로소프트 등등. IT 기업들은 상장을 통해 성공을 확인받았습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존재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요. 하지만 ID 그룹이라는 복병을 만나고 깨져버렸죠. 그런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수한 ID 그룹의 기업 공개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90년대는 ID 그룹의 시대임을 확실히 선언하는 자리가 될 겁니다.”
이 할아버지는 뒤가 강한 모양이다.
대화의 막판에 이르러 유재원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이 나왔다. 물론 100% 동의를 하진 않는다.
시대의 아이콘이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무조건 상장을 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이대로만 쭉 가더라도 ID 그룹은 시대의 아이콘 정도가 아니라, IT의 미래 그 자체가 될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IT산업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거예요. 그러면 자연히 계산법도 달라질 거고, 우리가 보인 숫자의 차이도 줄어들겠지요. 그때가 오면 JP모건을 제일 먼저 고려하겠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날아온 루이스 프레스턴에 립서비스도 아끼지 않는 유재원이다.
실제로 기업 공개를 추진한다면 주관사 선정을 할 때, 사소한 숫자 하나까지 다 따져볼 거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상장이었으니 말이다.
“JP모건 CEO와의 티타임은 즐거우셨습니까?”
회사로 돌아오자 레밍턴과 앨런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강욱 비서실장만 없었다. 안드로이드 런칭 행사를 마친 후에 한국 업무 총괄을 위해 복귀했던 탓이다. 만약 이후로도 미국에 남아 있었다면 이 자리에 같이 있었을 것이다.
대기하고 있으라던 유재원의 지시가 있긴 했지만,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마치 통닭 사 들고 온다던 퇴근길 아버지를 기다리던 분위기였다.
하긴 무엇에 대한 대기라는 구체적인 사안은 없었던 반면, 유재원의 미팅 상대는 보통의 기업도 아니고 JP모건의 CEO였으니 당연했다.
유재원과 루이스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결과는 어땠는지 너무도 궁금했을 거다.
“네, 괜찮았네요. JP모건 CEO라는 직책에서 오는 압박감과는 다르게 루이스 씨가 예상 밖으로 친근하고 친절하셨거든요.”
루이스 프레스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느낌은 좋았다.
직책만 놓고 보면 대단히 딱딱하고,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카페에서 만났던 루이스 프레스턴은 인지한 할아버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딱히 뭔가 결정된 건 없었어요. 루이스 씨가 가져온 안건이 기업공개와 상장이었거든요. 그런데 루이스 씨가 제시한 총액과 제가 생각하는 주가총액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동부에서 서부까지 날아올 정성을 보였으면서 정작 선물꾸러미는 조그마했군요. 뭐, 투자은행들이 다 그런 식이죠.”
앨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레밍턴도 동의하는 듯 별말 없었다. 아무래도 투자은행들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진 않은 모양이다.
“아마 루이스 CEO도 첫 만남에 딜이 될 거로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레밍턴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애초에 유재원의 수락을 바라고 찾아온 게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JP모건이 자체적인 투자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아마도 ID 그룹의 지분을 사고 싶다는 큰손들이 좀 있었나 봅니다. 요즘 ID 그룹이 보통 뜨거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큰손들의 의뢰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한 번 크게 움직이는 모습을 취했다는 해석이다.
비약이 좀 심하긴 한데,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도 루이스 프레스턴이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온 정성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니 친절하게 얼굴을 마주보며 대회를 해준 것이지, 전화나 팩스 따위였다면 국물도 없었을 거다.
“혹시 현금 보너스 대신 스톡옵션 받고 싶으신 분 계세요?”
상장이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스톡옵션이 떠오르는 유재원이다.
IT기업의 상장이기도 했던 스톡옵션은 실리콘밸리에서는 일종의 보편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금력이 부족한데, 고급 노동력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은 게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다. 이런 인재들을 붙잡아 두면서 동기부여까지 완벽히 이뤄주는 정책 중에 스톡옵션만 한 게 없다.
대다수 실리콘밸리의 기업처럼 별다른 성과 없이 망하더라도 빚을 진 건 아니었으니 청산도 깔끔하다. 만에 하나 운 좋게 성공하면 그 성과를 사이좋게 나눠 가질 수 있으니 분배로 문제가 생길 일도 없다.
반면 ID 그룹은 풍부한 자금력을 통해 보너스는 기본이 현금 지급이었다. 일부 ID 소프트웨어의 경우 자동차가 보너스로 내려가긴 했지만, 대다수는 현금으로 입금되었다.
이유는 루이스 프레스턴에게 설명했던 것과 같았다.
성공을 알 수 없는 회사였다면, 주식은 복권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첨확률은 지극히 낮으니 주식을 나눠주고 비싼 몸값의 인재를 쓰는 게 이익이다. 하지만 ID 그룹은 당첨된 복권이나 다름이 없다.
“전혀요. 우리 회사가 벤처기업 상태였다면 모르지만, 이미 본궤도에 올랐는데 무슨 염치로 스톡옵션을 챙겨달라고 하겠습니까? 게다가 스톡옵션을 받으면 골치 아플 겁니다. 언제 상장할지 전전긍긍하고, 주가가 오르고 내릴 때마다 마음도 졸이겠죠.”
역시 레밍턴이다.
동시에 웃음도 나오려고 했다. 주식에 대해 이렇게 잘 아는 분이 전생에선 투자실패로 쫄딱 망했지 않았던가. 하긴, 이론은 잘 알아도 실전은 약한 사람들도 있으니 레밍턴 사장도 이쪽 성향일지 모르겠다.
앨런은 생각이 살짝 다른 모양이다. 스톡옵션이란 단어에 구미가 당기긴 하는 표정이다. 보기와 다르게 투자할 때 안정성보단 위험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만에 하나 유재원이 스톡옵션 정책을 시작한다면 그 실무와 법적 조치는 죄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일이 치이는 상황에서 일 하나를 더 늘리면 본인은 물론 법무실 직원들이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무슨 일로 소집하신 겁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레밍턴이 질문을 던졌다.
“아, 다름이 아니라 두 가지 일이 있어서요. 하나는 ID 하이테크라는 신규 사업체 설립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에 대한 대응이에요. 러시아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를 찾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ID 하이테크.
유재원이 세울 3번째 회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현재의 기술이 아닌 몇 년 앞선 최첨단 기술을 전문으로 다룰 회사였다. ID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열심히 수집한 기술들을 한데 모아 조직을 꾸리고, 시너지 효과도 크게 낼 수 있게 만들 작정이다. 또한, 유재원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시제품들을 만들어 보는 역할도 할 것이다.
레밍턴이나 엘런도 유재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회장인 유재원이 실리콘밸리 쇼핑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쇼핑만 하고 내버려두는 것 대신 조직을 꾸려서 직접 경영을 한다면 ID 테크놀로지와 같이 놀라운 성과가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러시아? 소련 말씀입니까? 설마, 거길 진출하시겠다는 건 아니시죠?”
레밍턴이 펄쩍 뛰었다. 엘런도 마찬가지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편이었던 소련은 냉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가장 큰 적국이 되었다. 레밍턴이나 엘런의 인식도 이와 같았다. 소련이 해체되고, 쿠데타까지 일어나는 모습에 대놓고 환호하진 않았지만, 깨소금 맛이긴 했다.
그런 소련, 아니 러시아에 유재원이 발을 뻗으려고 하는 건 무모함 그 자체로 느껴지는 두 사람이다.
“아, 당장 진출한다는 건 아니에요.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면 국가적인 인재도 사정이 어려워질 거잖아요. 소련도 해체되고 쿠데타까지 일어났다가 실패했잖아요. 무척이나 혼란스러울텐데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귀한 인재를 먼저 포섭하자는 거죠.”
이어진 유재원의 설명에 둘의 표정이 풀렸다.
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표정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러시아 사람들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얼굴 가득 보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설날 연휴가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었네요. 연휴가 짧아서 그런지 월요일이 되어도 그다지 힘들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올림픽이 계속되고 있어서 위안이 되네요. 독자 님도 일상에 잘 복귀하셨지요?
잘 쉬었으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