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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171화 (171/1,007)
  • [171] 아메리칸 드림 =========================

    #99-2

    IT 업종이면서 무척이나 보수적인 곳이었는데, 안드로이드 1.0이 일으킨 쓰나미에 버티지 못했다. 전문 워크스테이션에서 구동되던 자사의 프로그램을 안드로이드 1.0 용으로 내겠다고 발표하는 회사들이 속속 늘어났다.

    워크스테이션 운영체제도 대부분 유닉스와 비슷한 형태였기에, 도스로 포팅하는 것보다 훨씬 간결했다.

    이들 제작사도 시장이 작은 워크스테이션에 집중하기보다는 수백, 수천만 사용자가 있는 안드로이드로 오는 게 훨씬 큰 이익이라는 계산 결과가 나왔던 모양이다.

    “확실히 ID 그룹의 급이 달라졌네.”

    좋은 징조였다. 이렇게 전문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올수록 안드로이드의 생태계는 더욱 건강해질 테니 말이다.

    게다가 저렴한 PC를 이용해 독창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으로도 좋다.

    집에다가 작은 작업실을 차려놓고 음악을 하는 사람도 나올 테고, 인디 게임 개발자들도 나올 것이다. 일러스트나 컴퓨터 그래픽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분명 대중문화의 발전에 보탬이 될 거다.

    띠!

    안드로이드 1.0이 만들 새로운 세상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이어가던 유재원을 인간미 하나 없는 버저 소리가 깨웠다.

    앨 고어를 레밍턴의 사무실에서 만난 것에서 볼 수 있듯, 유재원은 실리콘밸리에 개인 사무실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레밍턴의 집무실을 빌리는 건 유재원이 싫었고, 일반 프로그래머들 사이에 있는 건 그들이 불편해했기에 임시로 칸막이를 올려서 개인 사무실을 만들었다. 급히 만들어진 공간인지라 집기도 근처 마트에서 아무거나 집어 와서 설치했는데 겉모습은 번드르르했던 인터폰의 벨 소리가 이처럼 구식이었다.

    유재원은 상관없다.

    앞으로 여기에 나오는 일도 이제 며칠 안 남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드디어 스탠퍼드 대학교 코앞에 있는 올드 팔로알토에 앞으로 지낼 저택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형성된 부촌이라고 집값이 좀 비싸긴 해도, 앞으로는 더 비싸질 지역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구매했다.

    집안의 단장이 끝나면 숙소를 바로 그곳으로 옮길 예정이다. 이후엔 회사 일도 거기서 보고 스탠퍼드 대학교도 편하게 다닐 수 있다.

    “허허, 그러고 보니 아직 합격도 안 했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거 아닌가 몰라.”

    지금 유재원에게 남은 건 SAT였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님께도 이미 합격한 것처럼 말했던 유재원이지만, 아직 SAT 시험도 못 본 상태다.

    설레발은 필패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엄청난 설레발을 떨었던 것 같다. 그래도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SAT의 경우 전생에서도 10차례가 넘는 시험을 치르면서 경험을 다졌다. 심지어 90년대 시험지를 찾아서 풀어보기도 할 만큼 꼼꼼하게 준비했다. 그만큼 유재원의 마스터플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시험이었다.

    덕분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기에 지금과 같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띠!

    쓸데없는 상념 때문에 수화기 드는 걸 깜빡했다. 또다시 버저 소리가 또 이어지자 현실로 돌아온 유재원이 얼른 인터폰을 받았다.

    “흠흠, 네? 무슨 일이죠?”

    -회장님,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꼭 보고를 드려야 할 사안이 생겨서요.

    김대석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네, 얼른 말씀해 보세요. 혹시 또 누가 절 보자고 하는 거예요?”

    요즘 유재원을 귀찮게 하는 건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앨 고어는 아주 양반이었다.

    종류도 다양한 사람들이 무턱대고 찾아와서 유재원을 찾았다. 대부분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보여주려는 이들이었다. 어떨 때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 그다지 가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김대석의 선에서 걸러졌고, 극소수의 아이템 몇 개가 레밍턴이나 빈센트에게 올라가서 검토 중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방문자들이 면박을 받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과는 정식으로 미팅 약속이 잡혀서, 실제 만남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번에도 엄청난 거물입니다.

    거물?

    또 정치인이 찾아왔다는 말일까? 그러면 사전에 약속을 잡는 게 보통이었다. 이미지가 중요한 정치인에겐 그럴듯한 그림을 만드는 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호감이 있다고 무턱대고 문을 두드린 앨 고어가 특이한 사람이었다.

    -음, JP모건입니다.

    “네? JP모건이요?”

    인터폰에 귀를 기울이던 유재원은 뜬금없다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느꼈다.

    웬 JP 모건이란 말인가.

    ID 그룹은 돈이 넘쳐나는 회사였다. 석유 선물로 대박을 터트린 자금은 아직도 상당 부분 남아 있었고, 소프트웨어 판매로 매일 현금이 쌓이는 중이다. 거대 컴퓨터 제조 업체와 기업들로부터 출시하기도 전에 상당한 사전 주문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출시될 PC 중 반은 안드로이드 1.0이 먼저 설치된 상태로 출하될 것이고, ID 오피스까지 번들로 포함된 모델도 상당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중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ID 그룹의 수익도 대폭 늘어날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마이크로소프트가 달렸던 그 길을 따라가지 않을까 예상한다.

    즉, 비싼 금리를 지고 돈을 빌릴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대출 좀 받아 가라는 은행의 연락도 무시 중이었다.

    혹시 JP모건은 소문이 느려서 ID 그룹이 은행에 퇴짜를 놓고 있다는 정보를 아직 받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 JP모건의 최고경영자인 루이스 프레스턴이란 사람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사업적으로 중요한 제안을 하고 싶다고 시간이 되냐고 문의를 해왔습니다. 아직 전화는 연결 중입니다.

    김대석의 말을 들어보니 일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유재원은 다른 은행들처럼 지점장 정도가 만나고 싶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CEO라니.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되지 않지만, 만나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이런 사람들과 만남으로서 미국을 움직이는 이들과도 접점을 키워갈 수 있으니 말이다.

    스케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장 급한 스케줄은 SAT를 보는 것이지만, 중요한 개발 일정은 모두 마무리된 상태였기에 급한 일은 없었다.

    “좋아요. 제가 SAT를 본다는 걸 알려주고, 이후로 약속을 잡아 봐요.”

    -예, 알겠습니다.

    김대석의 대답을 들은 유재원은 인터폰을 내려놨다.

    “와~! 유재원, 이 녀석 많이 컸네. 많이 컸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글로벌 런칭 행사로 ID 그룹의 영향력이 세계로 미칠 수 있다는 건 확인했다. 그런데 민주당 상원의원인 앨 고어도 먼저 방문했고, 세계적 투자은행인 JP모건의 CEO도 먼저 미팅을 청할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유재원은 아무래도 본인의 영향력을 현실보다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미팅은 성사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8월 25일로 확정되었다. SAT를 치룬 다음날이고, 요일로 따지면 일요일이기도 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SAT 시험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유재원보다 부모님이나 회사의 임원들이 초조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의 부모님은 수험생 부모 역할이 처음이었다. 스스로 잘 큰 유재원이지만, 대입이라는 건 뭔가 다른 부담감이 있으신 모양이다.

    회사 사람들의 경우 부모님보다는 덜 걱정하긴 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유재원의 능력을 가감 없이 봤던 사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었기에, 시험공부를 하는 유재원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 조심했다.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터질 때에도 보고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재원이 먼저 임원들에게 연락해서 쿠데타는 신경쓰지 말라고 한 덕에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끝났다.

    시험 당일에도 유재원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준비물을 모두 챙긴 유재원은 시험 장소로 등록한 팔로알토의 고등학교로 덤덤히 들어갔고, 덤덤한 모습으로 들어가서, 덤덤한 표정으로 나왔다.

    대신 유재원을 알아본 학생이나 학부모, 감독관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있긴 했다.

    신제품 출시와 함께 큰돈을 들여 전국 방송으로 본인의 모습을 틀어댔으니 유재원을 알아보는 미국인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명세가 커지면 생기는 불편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즐기기로 마음을 먹은 유재원이었기에 사인을 해달라고 달려오는 아이들, 아니 형이나 누나들을 피하진 않았다. 게다가 사인하면 유재원이다.

    회사 일을 시작하면서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해봤던 횟수는 세볼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사인에는 이력이 붙어 있던 유재원은 당황하지 않고 팬 사인회를 시작했다. 속도도 빨랐다. 휙휙 휘갈겨도 그럴듯한 사인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시험도 놓치지 않았다.

    시험의 난이도는 예상했던 것보단 조금 높긴 했지만, 유재원이 정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는 없었다.

    “음, 임시채점이긴 한데, 틀린 건 없었네요.”

    “휘유~. 만점이란 말이군요. 역시 대단합니다.”

    유재원의 말에 맞은 편에 앉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며칠 전 유재원에게 미팅을 청했던 JP모건의 CEO인 루이스 프레스턴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64세였으니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좀 이른 나이였다. 그런데 실제 루이스 프레스턴의 모습은 본인의 나이보다 20살은 더 많아 보였기에,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잘 어울렸다.

    둘이 만난 미팅 장소 팔로 알토 근처의 호텔 카페였다.

    초면인 둘 사이에 밥을 먹으면서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앨 고어처럼 사무실로 안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일단 격식을 차를 수 있는 호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에세이죠.”

    SAT의 에세이 과목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대학교 역시 지원서를 낼 때 자기소개서 같은 에세이를 첨부해야 한다. 천생 이과인 유재원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허허, 무슨 걱정입니까. SAT도 잘 나왔겠다. 추천장도 두둑하겠다. 이 정도라면 아이비리그 어느 학교든 골라 갈 수 있을 겁니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인 루이스가 장담에 유재원도 끄덕였다.

    전생부터 철두철미한 준비를 했던 유재원은 아예 대입전문 상담사에게 자기소개서를 여러 장 받아서 기억의 궁전에 저장해둔 상태였다. 일단 자신의 능력으로 써보는 데까지 써보고 그래도 막막하면 가져다 쓸 작정이었다.

    대신 추천장은 확실히 빵빵하게 받았다. 인텔과 AMD, ATI와 같은 주요 협력사 사장님들이 써준 것들이다. 당연히 ID 그룹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받은 것들이지만,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갑이 을을 겁박해서 추천장을 토해내게 한 것도 아니었고, 협력사라고 해도 아무나 써주는 추천장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서부까지 날아오신 건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충분히 나눴다 싶은 유재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재원의 돌직구 질문에 루이스 프레스턴은 표정 변화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우아한 모습이었다.

    “한 가지 의문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꼭 당사자에게 직접 답을 듣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이란 게 뭐냐고요?

    “어흠, ID 그룹의 상장을 추진하지 않는지 저는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이 정도 성공한 기업들은 모두 기업 공개를 추진했고, 대부분 성공했습니다. ID 그룹은 수천 개가 넘는 실리콘밸리의 기업 중에 가장 앞서있으니 기업 공개는 따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떤 풍문에도 기업 공개를 추진한다는 소문은 없더군요. 심지어 인수한 마이크로소프트를 이용해 우회 상장도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마이크로소프트의 상장을 폐지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지요. 심지어 우리 JP모건이 자랑하는 유능한 두뇌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길고 긴 루이스 프레스턴의 질문이다.

    짧게 압축해보면 어째서 다른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처럼 상장을 추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거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당신과 같은 희대의 천재라면 다른 계산법으로 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러한지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루이스 프레스턴의 질문을 모두 들은 유재원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했다.

    첨언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이렇게 사소한 걸 물어보려고 동부의 끝인 맨해튼에서 서부의 끝인 실리콘밸리까지 날아왔다는 건 유재원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 탓이다. 게다가 대답을 못 할 질문도 아니었다.

    그러니 전화 한 통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전용기를 타고 여기까지 날아온 거다.

    역시 최상급 부자들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구나 생각하며 유재원은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우리우리 설날 연휴가 시작되었네요.

    다들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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