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아메리칸 드림 =========================
#99-1
-보스, 엄청난 거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폰 너머로 잔뜩 상기된 레밍턴 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무게 잡는 걸 좋아하던 레밍턴이 갑자기 호들갑이다. 평소는 볼 수 없는 반응이라서 호기심이 절로 일어났다. 예전 새해맞이 행사를 할 때, 전직원 MT를 할 때, 마돈나나 머라이어 캐리를 불렀을 때도 표정관리를 했던 레밍턴 사장을 이렇게 만들 사람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민주당 상원의원인 앨 고어에게 보스를 내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앨 고어 의원이요? 진짜요?”
-예!
이번엔 유재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뜬금없이 앨 고어라니. 레밍턴이 거물이라고 하니 기껏해야 샌프란시스코 시장인 줄 알았다. 혹시나 하고 살짝 허들을 높인 건 캘리포니아 주지사 정도다.
그들만 해도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방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당 상원의원 중에서도 유명세가 큰 앨 고어라니.
“왜? 왜요?”
당황하니 말이 짧아지는 유재원이다.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에서 회장님의 보여준 비전에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또한, 인터넷 기술과 미래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합니다.
레밍턴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앨 고어는 LA에서 열린 민주당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안드로이드 1.0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다른 정치인들이 이렇게 말했다면, 누가 써준 걸 읽어줬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앨 고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음, 내키지 않으면 거절하겠습니다. 며칠 후 SAT 시험이니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유재원의 목소리만으로 심기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레밍턴이다. 유재원이 앨 고어를 약간이긴 해도 꺼리는 기색이 느껴지자 바로 알아챘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유재원이다.
올해 늦봄쯤 93 대전 엑스포 기공식에 초청을 받았었는데, 검정고시 핑계로 뒤로 미뤘었다. 그러자 청와대는 행사 자체를 검정고시 보는 날 다음으로 미뤄버리는 어마어마한 배려(?)를 선보여주었다.
앨 고어는 그렇게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아닙니다. 만나죠.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안면이라도 터놓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앨 고어는 유재원이 인맥을 맺어야 할 주요 인사 중 하나였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 빌 클린턴의 러닝메이트였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의 당선과 함께 부통령으로 임명되어 백악관에 입성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마스터플랜에도 만나서 인맥을 쌓아야 할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타이밍이 지금은 아니었다.
원래 유재원이 생각한 타임테이블에서는 내년 봄에 맞춰놓았다. 빌 클린턴이 차기 대권에 욕심을 내면서 지원을 필요로 할 때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찾아온 것이다.
그때 만나든, 지금 만나든 앞으로의 흐름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기에 당장 보기로 했다.
다음날.
앨 고어는 혼자서 유재원이 있는 실리콘밸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뉴스와 신문으로 항상 보았던 훤칠한 키에 호남형 얼굴을 가진 바로 그 앨 고어였다.
“역시 일부러 만남을 청하길 잘한 일이군요. 천재 소년 제이에 대한 소문은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소문이 과소평가되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역시 고단수 정치인이라 그런가 오글거리는 인사말도 천연덕스럽게 잘도 하는 앨 고어였다. 게다가 요즘은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는 유재원의 미국식 이름인 제이라고 하니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여튼 거물이 방문하긴 했는데, 유재원이 해줄 수 있는 대접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실리콘밸리 사무실은 오로지 실무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지라 접견실 같은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레밍턴의 집무실을 빌려서 마주 보며 앉았고, 품종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도 대접할 수 있었다.
앨 고어 본인도 유재원에게서 의전 같은 걸 받을 생각은 없었는지 편한 자세로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정보고속도로를 발표했을 때,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한국의 대통령이 그런 걸 생각할 위인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알아봤더니 제이 회장이 나오더군요. 그날 이후로 제이 회장의 행보는 계속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에게 준 정보고속도로 사업의 원작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앨 고어였기 때문이다.
앨 고어는 원래 IT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되자 부통령에 임명된 후 IT 지원 정책을 열심히 펼쳤다. 앨 고어의 아버지 역시 테네시주 연방상원의원으로 30년이나 재직했던 사람이었고, 이 사람의 가장 큰 업적은 고속도로 건설지원법이었다.
아들인 앨 고어가 아버지의 고속도로지원법을 본떠 만든 게 정보고속도로였다.
‘앞으론 자제해야겠다.’
원작자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니 기분이 이상한 유재원이다. 그나마 앨 고어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서 다행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앨 고어는 딱히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방문한 건 아니었다.
혹시 앨 고어가 은근히 말했는데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게 있나 검토해봤지만 아니었다. 동석한 레밍턴도 같은 판단이었다.
단지 앨 고어는 유재원에게 대한 궁금증이 많았을 뿐이었다.
원래 정보고속도로 사업을 시작할 만큼 통신과 인터넷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유재원이 정보고속도로를 발표했고, 심지어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혁신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직접 보여주고 있으니, 관심이 폭발한 모양이다.
“역시 제이 회장의 사업들은 대부분 인터넷으로 연결되는군요.”
이러한 관심 덕에 앨 고어는 ID 톡을 시작으로 ID 웹 브라우저와 넥스트컴 그리고 안드로이드 1.0의 다국어 지원까지, 유재원의 사업적 포석이 인터넷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는 걸 감지한 첫 번째 외부인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인터넷이 조만간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IT 정책에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유재원도 부인하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는 예정보다 길어졌다. 원래는 30분만 보기로 했는데, 2시간을 넘긴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바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환경 오염 이슈까지도 이야기의 주제로 올랐다.
말이 너무도 잘 통한 덕에 헤어질 때 앨 고어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다음에 또 만나자는 기약을 할 정도였다.
이후 유재원은 추가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앨 고어의 후원계좌를 풍성하게 채워주라고 말이다.
앨 고어가 먼저 찾아와 주기도 했고, 비록 제목뿐이긴 해도 중요한 업적 하나를 빌려다 쓰기도 했으니 후원금으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 싶었다.
앨 고어도 확실히 정치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놓고 계좌를 까는 건 아니었지만, 유재원을 비롯한 실리콘밸리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내고 다녔다.
유력한 정치인이니 그의 말은 곧 기사화되었고, 회사에도 언론사로부터 확인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온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확인해줄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앨 고어의 깜짝 방문 이후 ID 그룹은 잠깐의 소강상태가 되었다.
유재원은 앨 고어가 왔으니 공화당 쪽에서도 누군가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ID 테크놀로지의 직원들에게 순차적인 휴식을 내줄 수 있었다.
ID 테크놀로지 소속 개발 부서들은 모든 역량을 8월 15일에 맞춰서 격렬하게 달렸다.
서울 로데오 팀, 실리콘밸리 팀, 레드먼드 팀 따로 나눌 필요도 없이 밤낮없이 움직였다.
단순히 열심히 일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날밤을 지새우며 작업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유재원은 버그를 더 잡아내라고, 일하라고 임원들을 들들 볶지 않았다. 임원들도 개발팀의 자율에 맡겼다. 그런데 팀원들 사이에 라이벌 의식이 생기면서 스스로 불타올랐다. 거기에 버그를 잡을 때마다 개인에게 보너스도 지급되니 그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돈이 좀 들긴 했지만, 그것으로 수천만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안정적으로 컴퓨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했다.
또한, 안드로이드 1.0과 ID 오피스 2.0 발표와 함께 전 세계에 동시 발매를 할 수 있었던 것에 ID 그룹의 역량이 크게 상승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단적으로 순차적인 휴식을 시작했음에도 회사의 업무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요인을 따져 보니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적 인수 덕에 생겨난 시너지 효과였다.
할리우드의 거대한 블록버스터가 전 세계 동시 개봉을 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ID 플래그쉽 스토어를 이용해서 두 가지 신제품을 런칭도 성공했고, 이후 수없이 쏟아지는 사용자들의 문의에도 큰 문제 없이 대응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승계한 전문 인력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준 덕이다.
덕분에 안드로이드 1.0의 보급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ID 테크놀로지의 서버에 등록되는 사용자 등록 카드 숫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속도는 이전에는 못 보았던 수치였다.
하루에 30만 개, 많을 때는 50만 개씩 등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철저한 최적화를 통해 안드로이드 1.0 구동을 위한 최소 요구 스펙을 크게 낮춘 덕에 사용자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286 AT 컴퓨터에 1메가 이상의 메모리, VGA 카드, 10메가바이트의 하드디스크가 있으면 안드로이드 1.0을 설치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최소 사양으로 설치하면 안드로이드 1.0의 강력한 기능 중 대부분 사용할 수 없다.
특히 메모리를 많이 먹는 유니코드 문자 지원은 불가능하다. 폰트 하나가 5MB였으니 인스톨 단계에서 제외된다. 응용 프로그램 실행하는 것에도 많은 제약이 있을 거다. 심지어 32비트 컴퓨터 전용인 ID 오피스 2.0은 설치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안드로이드 1.0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버추얼 복싱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자신의 컴퓨터로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에서만 돌아가던 폴리곤 덩어리를 돌려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네트워크 게임 매칭 통계를 보면 온라인 매칭 횟수가 벌써 20만 회를 넘었다. 이런 기세라면 며칠 8월이 다 지나기 전에 100만 회를 넘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드로이드 1.0의 대성공에 유재원 말고도 활짝 웃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애드웨어 프로그램에 광고를 넣어준 광고주들이었다.
안드로이드 알파를 통해 광고 효과를 확실하게 체험한 광고주들은 한 차원 높아진 광고료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계약을 갱신했다.
광고 슬롯은 24개로 이전보다 4개가 늘어났지만, 광고 비용은 거의 2, 3배가 올라서 한 슬롯당 50만 달러에 이르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광고 기간은 100일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 1.0 프리뷰 버전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말이 좀 나왔다. 그것은 바로 안드로이드 1.0의 안정성 때문이었다.
광고는 부트를 완료했을 때, 오른쪽 아래에서 스르륵 올라오는 방식이었다. 알파의 경우 도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리부트를 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광고가 새롭게 표시되었는데, 유닉스 커널로 바꾼 안드로이드 1.0의 안정성은 도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안정성은 물론이고 리소스 관리 기능이 너무도 좋아서, 장시간 켜 놓고 있어서 컴퓨터가 느려지는 일이 없었다.
한 번 켜놓으면 임의로 끄기 전까지 리부트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광고주들은 본인들의 광고가 알파 때처럼 사용자에게 많이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생겼다.
유재원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왔다.
알파 때는 리부팅할 때마다 광고가 나왔다면, 안드로이드 1.0의 경우엔 1시간마다 한 번씩 광고가 빼꼼하고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대신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광고의 크기도 줄였고 전체화면으로 게임이나 작업용 프로그램을 돌릴 때는 광고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
1시간에 한 번이라면 알파 때보다 광고 노출횟수가 훨씬 많아지는 것이니 광고주들은 모두 만족했다. 크기가 작아진다는 건 좀 그랬지만, 크기보다는 노출 횟수가 중요하다는 걸 다들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고 매출만으로 안드로이드 1.0은 출시를 하기도 전에 1,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게다가 100일마다 갱신이 되니 안정적인 캐시카우 한국말로는 돈이 열리는 나무를 또 하나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광고 효과에 따라 광고 슬롯 가격도 올라갈 여지는 충분했다. 사용자 등록 카드를 통해 현미경식 타겟 광고를 하게 된다면 광고 수익은 몇 배로 더 올라갈 거다.
무엇보다 유재원을 기분 좋게 하는 건 IT 업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 1.0이 대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확인한 컴퓨터 업계는 관망에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전문 프로그램 제작사들이 자사의 프로그램을 안드로이드 1.0 전용으로 만들겠다고 속속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 안드로이드 1.0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주로 게임업체들이었다. 게이밍 운영체제를 표방했던 안드로이드였고, 일반 사용자들도 이에 호응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이런 게임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크리에티브 툴을 개발하던 회사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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