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아메리칸 드림 =========================
#94-2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회사는 건강해진다.
21세기의 일부 IT 기업의 경우엔 이러한 활동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도록 회사의 업무시간 일부를 본인이 원하는 걸 하는 시간으로 할당해줄 정도였다.
“좋아요! 그러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승계한 개발자들을 붙여줄 테니 제대로 만들어 봐요. 아! 그래픽카드 회사들과도 미팅 자리도 주선해 줄게요.”
3D 세계의 개척은 인터넷 세계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규모의 작업이었다.
절대 개인 혼자서, 아니면 회사 하나가 일궈낼 수 없는 업적이었다. 그렇기에 이와 관련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합심을 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동기 부여는 돈이다.
3D 분야는 확실히 큰돈이 되는 사업이었으니, 참가자 모두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기술 경쟁이 일어나면 유저들은 훨씬 저렴한 가격에 화려한 그래픽을 담은 콘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5월 16일이 되자 고졸 검정고시의 결과 발표가 있었다.
-유재원, 고졸 검정 만점으로 수석(首席)!
역시나 유재원의 이름이 제일 위에 올라왔다. 대통령에게 장담했던 것처럼 한 문제도 놓치지 않고 모두 맞추면서 수석을 차지했다.
이 대목에서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의문을 품는 분들도 좀 있었다. 최연소 항목이 빠졌기 때문이다. 유재원이라면 최연소 타이틀도 같이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없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좀 있었다.
-최연소 합격자는 만 14살, 왕별님 양!
이유는 간단했다. 놀랍게도 이번 고졸 검정고시 합격자 중에는 유재원보다 더 나이가 어린 아이도 있었다.
덕분에 신문에 유재원의 얼굴과 나란히 왕별님이라는 아이의 얼굴도 실렸다.
그렇다고 유재원과 왕별님이란 아이가 나란히 서서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힌 건 아니고, 유재원은 회사에서 제공한 사진을, 왕별님이란 아이는 응시원서에 넣은 사진이 올랐다.
기사를 보시던 부모님이나 큰아버지로부터 잘 어울린다는 말이 무심코 나올 만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사진은 믿을 수가 없으니 실제와 얼마나 닮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니 한 번만 듣고도 뇌리에 박혀버렸다. 다만 유재원은 큰 관심은 없었다.
기억의 궁전에는 왕별님이라는 사람의 기록은 없었던 탓이다. 동시에 나이가 들면 부담스러워서 어쩔까 싶었다.
유재원의 고졸 검정고시 수석 합격에 대해선 딱 이 정도 반응이었다.
“이제 대학에 가는 거냐?”
오랜만에 사무실로 찾아온 주민이 녀석이 신문을 흔들면서 물었다. 막 답변을 하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친구 녀석들이 더 찾아왔다.
영식이와 수경이었다.
하교 시간이 다 비슷해서 유재원을 찾아오는 시간은 비슷했다.
김대석이 따라 들어와서 간식을 꺼내줬다. 제철 과일과 토마토 주스 등등 맛보다는 건강을 생각하는 간식이었다.
“응! 슬슬 8월에 SAT를 보고 지원을 해야지.”
유재원은 물론 부모님까지도 슬슬 유학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황재홍 부장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팔로 알토 근방의 집을 알아보고 계신다.
스탠퍼드 대학교에 다니면서 지낼 집을 보시는 것이다. 기숙사에서 평범하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ID 그룹의 회장이란 타이틀이 있는데,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지낸다는 건 최강욱이나 레밍턴도 추천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에 걸맞은 집을 보고 있는데, 손이 큰 부모님이니 아무래도 커다란 집을 골라놓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와, 대박!”
“진짜 짱이다.”
대박이란 소리에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유재원이지만 수경이의 ‘짱’이라는 소리에는 또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런 걸 보면 아이들 앞에선 말조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실감한다.
명언 같은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버리는 친구들은 ‘대박’이니 ‘짱’이니 하는 쓸모없는 것들은 날름 주워 먹었다.
“SAT가 작년에 새로 나온 대입 시험이지?”
이번엔 수경이가 아는 척을 했다.
“응? 새로 나온 건 아니고 이름이 바뀐 거야. 1926년부터 있었던 시험이었어.”
칼리지 보드라는 비영리 기구에서 주관하는 시험이고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말이 비영리 기구이지, 돈을 밝히는 건 사기업이랑 똑같다. 응시료도 매년 올라가고 있고, 대학에 성적표를 보낼 때도 돈을 내야 한다.
“하여튼! 시험도 그럼 영어로 보겠네?”
당연한 소리.
시험 과목은 독해, 작문 및 언어, 그리고 수학이 있다. 여기에 논술 비슷한 에세이도 봐야 한다. 논술과의 차이점이라면 지문을 주는데, 역대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유명 인사의 칼럼이 나온다. 그걸 읽고 지문의 저자가 자기 의견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는지 본인의 감상을 써야 한다.
친구들이 하는 질문에 답을 해주다 보니 녀석들이 SAT나 스탠퍼드와 같은 미국 대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게 딱 보인다.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 보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유재원에게 컴퓨터에 대해 배운 덕에 웬만한 건 전문가보다 잘하는 실력이었다. 수경이는 워드프로세서 기사 자격증이 있다면 바로 1급을 딸 수 있을 정도였고, 영식이는 정보처리 기사였다.
주민이는 워드나 프로그래밍에 별 관심도 없었고, 소질도 부족했다. 대신 둠 프로리그가 열린다면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해도 될 것 같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ID 그룹에서 특채해도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고, 다들 회사에 들어와서 유재원을 도와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왜긴! 우리도 너 따라서 스탠퍼드 갈 거니까 알고 있어야지!”
“그래! 당장은 무리지만, 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워서 유학 갈 거다!”
음?
지금 감동을 받아야 하는 타이밍인가?
하지만 주민이나 영식이 성적을 뻔히 알고 있는 유재원으로서는 마냥 감동하기가 힘들었다. 놀기 좋아하는 주민이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프로그래밍이나 데이터베이스를 잘 다루는 영식이도 학교 성적은 좀 아니었다.
그나마 수경이는 공부를 잘하긴 하는데, 영어를 무서워했다. 이래서 과연 이 녀석들이 스탠퍼드까지 잘 따라올지 모르겠다.
“그러냐? 대학교도 같이 다니면 훨씬 재미있겠다.”
진짜 따라만 온다면 환영이다.
국민학교 때의 친구가 사회까지도 이어진다면, 회귀한 보람이 있는 것이니 말이다.
유재원의 호응 덕분에 중학교 졸업하려면 1년은 반은 더 학교에 다녀야 할 친구들은 벌써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희망으로 잔뜩 부풀었다.
“대학 이야기는 그만하고, 치킨이나 먹자.”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끝까지 이어질 것 같아서, 유재원이 말을 돌렸다. 치킨이라고 하니 친구들의 반응은 딱 둘로 갈렸다. 주민이와 영식이는 환호했고, 수경이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주민이와 영식이에게 치킨은 없어서 못 먹는 별식이었다. 반면 수경이는 질리도록 먹는 음식이었던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경이네는 닭과 돼지를 키우다가 유재원의 도움으로 유경 식품, 유경 치킨이라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수경이는 집 근처에 축사와 양계장이 싹 사라진 것이 좋았다. 집에서 닭을 키울 여유도 없을 만큼 회사 일로 바빠졌다. 키우는 닭이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닭 먹을 일은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수경이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릴 맞대고 신메뉴를 개발한다고 온갖 치킨이 다 나왔다. 시식은 당연히 수경이가 먼저였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것 중에 무엇 하나 기존의 메뉴를 뛰어넘는 맛을 가진 건 없었다.
당연했다.
유재원이 전수한 프라이드, 양념, 간장은 치킨계의 마스터피스와도 같았다. 이걸 뛰어넘는 맛을 만드는 건 치킨 산업이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수많은 치킨 업체가 죽자사자 경쟁 모드로 들어가 연구·개발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나서야 성공할 것이다.
“수경이는 치킨이 싫어?”
“으아. 싫어!”
치킨을 싫어하는 수경이를 위해서 피자를 섞어 주문을 넣었다.
“너, 근데 이거 들어봤어? 유경 치킨 짝퉁이 있대.”
주문을 넣고 나니 영식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짝퉁이라니? 뭐, 우경 치킨이라도 나왔다는 말일까?
“야! 그거 내가 말해준 거잖아. 내가 서울 가서 직접 먹어 보기도 했다고. 유경 치킨 박스가 분명한데, 여기서 먹던 거랑 다르게 닭도 조그맣고 살도 엄청 작더라고. 맛도 없었어! 그나마 껍질은 먹을 만했는데, 정작 속살은 맹한 맛이야!”
영식이의 말을 주민이가 바로 받았다.
주민이네 가족이 저번 주말에 자연농원에 다녀왔는데, 입구 근처에 유경 치킨집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시켰다고 했다. 그러다 저따위 치킨이 나와서 주민이는 물론이고 주민이 부모님까지도 크게 실망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충 감이 잡힌다.
받아온 닭이 다 떨어졌거나, 아니면 돈 몇 푼 아낀다고 시장 닭을 써서 튀긴 모양이다. 손질은 물론 염지도 되지 않은 닭이었으니 맛이 있을 턱이 없다.
“응, 이거 때문에 아빠가 요즘 고민이 많으셔.”
수경이에게 물어보니 유경 식품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심각한 가맹 계약 위반인데 제때 잡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으신 모양이다. 하지만 유재원이 보기엔 간단한 문제였다.
가맹 본부에서 가맹점의 재고를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거다. 당연히 전산 시스템을 이용해서 말이다. 모든 가맹점의 재고 상태를 확실히 파악한 이후, 판매할 때마다 바코드를 찍어서 재고가 차감되도록 하면 된다.
물론 얌체 같은 가맹점주는 바코드를 찍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바코드를 찍지 않으면 소진된 재료는 전산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재고 주문을 할 수 없다. 염지된 닭은 물론이고 치킨 상자까지 이렇게 관리하면 짝퉁 닭을 팔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ID 테크놀로지로 무슨 사업을 구상할 때, POS 시스템도 있었다.
판매 시점 정보 관리(販賣時點情報管理, point of sale system, POS 시스템)의 준말인데 판매와 관련한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고객정보를 수집하여 부가가치를 향상하는 시스템이다.
생각해보니 단순히 POS 단말기와 서버만 팔고 말 것이 아니었다.
크게 보자면 유경 식품처럼 IT 개발 능력이 없는 회사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컨설팅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한번 시스템이 도입되면 유지 보수와 업그레이드로 수익이 끊임없이 나온다.
“수경아, 너희 아버지 지금 어디 계시니?”
“응? 왜?”
“왜긴 내게 기똥찬 해결책이 있으니 그렇지. 오랜만에 너희 아버지랑 사업 이야기 좀 해봐야겠다.”
분명 ID 그룹에 크나큰 기둥으로 자라날 사업이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니 의욕이 넘친다고 대규모의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유경 식품의 POS 시스템 납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규모에 난이도도 적절했다.
SAT 시험을 보러 미국에 가기 전에 끝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올림픽 시작까지 이제 딱 하루 남았네요~!!
두근두근합니다~!!